제갈량의 북벌,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

 

 

"제가 듣건대 조조의 사위 하후무는 젊었으되 겁이 많고 지략도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 5,000명과 군량 5,000석을 주신다면,곧장 포중으로 나가 진령산맥의 동쪽을 돌고 자오곡으로 직행하여 북쪽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면 열흘도 안 되어 장안에 이를 테니, 하후무가 이를 알게 되면 반드시 배를 타고 도망칠 것입니다. 장안성에는 어사와 경조태수만 있을 테니 횡문에 있는 군량 비축 창고와 도망치는 백성들이 버린 곡물로도 군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위가 병력을 모으려면 족히 20일은 걸릴 테니, 공께서 사곡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그 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함양의 서쪽지역을 단숨에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제갈량이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첫 번째 북벌을 단행할 때, 위연은 이런 전략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모든 상황을 빈틈없이 고려해 준비한 계책이 아니다.” 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제갈량이 일출기산(一出 祈山)의 정벌에서 벌인 용병술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즉 지모가 넘치고 경륜과 도략에 통달했지만 너무 신중해서 매우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진수도 제갈량을 평가하길, "군대를 지휘하는 데는 능숙했지만 기묘 한 전략은 부족했고,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이 전장에서 계략을 구사하는 것보다 나았다.” 고 했다.

 

제갈량의 신격화에 앞장서던 나관중도 사마의의 입을 빌려 “제갈량은 항상 신중한 사람이니 억지로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구나. 만약 내가 계략을 짰다면 자오곡을 통해 북진하여 속히 장안을 점령했을 것이다. 그가 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지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겠지만." 이라고 하며 위연의 계략에 손을 들어 주었다.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모두 5번 단행했다. 그중에 두 번이 지금의 보계시인 진천으로 진격했고 나머지는 감숙성 동남부 방면이었다. 그는 경제력을 해결하기 위해 남정을 완료했다. 이제 강대한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방력 증강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 제갈량은 진한 이래 가장 중요한 병사공급지인 감숙성 동남부의 양주를 공략했다. 촉한 건국 시 높은 자리를 차지한 마초와 마대도 양주지역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제갈량이 발탁한 천수 출신 강유도 양주인사 들과 교분이 있었다.

 

제갈량이 이처럼 양주를 중시한 것은 국가 백년대계를 책임진 자로서의 고뇌가 반영된 것이다. 즉 양주를 점령하여 이곳의 인력을 병사로 확보하고, 아울러 뛰어난 군마(軍馬)를 공급받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양주 동남부의 곡창지대를 통해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전쟁은 정치의 계속이다.” 라고 했다. 제갈량의 북벌은 단순히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이러한 촉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방비를 튼튼히 한 후, 때를 보아 중원을 탈환하는 장기적인 국가전략이었다. 제갈량이 말 한 ‘모든 걸 두루 살펴 갖춘 계책’ 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제갈량은 탁월한 정치가이자 지략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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