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정권의 성립과 신구 세력의 조화

 

 

유비가 촉한을 세운 익주는 중원의 전란으로부터 벗어나 생활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제갈량이 일찍이 익주를 일컬어 ‘천부지토(天府之土)’ 라고 한 것도 비옥한 들판이 펼쳐진 이곳만으로도 촉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경제력이 충분함을 비유한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촉한 건국과 함께 이 지역의 많은 권문호족이 편입되었는데, 이들이 관리하는 부곡민(部曲民)이 함께 유입되었다. 부곡민은 전쟁을 수행하는 사병이나 사노비다. 그러므로 이들의 유입은 노동생산성 향상이 나 국가의 경제력 증대와는 상관이 없었다. 정권에 참여하는 호족이 늘어날수록 비노동 인구도 늘어났고, 경제는 그만큼 위축되었다. 형주를 잃은 뒤로 익주의 풍요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익주군이 있는 남중은 ‘금은보화의 땅’ 으로 불릴 정도로 각종 산물이 넘치는 곳이다. 한나라는 항상 이곳의 풍요로운 물자를 수탈했다. 그러므로 수탈과 착취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것이야말로 이 지역 토착민들의 최대 과제였다.
후주 유선이 즉위하자 정권이 불안정한 틈을 타 시작된 응개와 맹획의 반란도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오나라 또한 이들을 지원하고 선동하여 촉을 견제했다. 국력회복이라는 최우선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제갈량은 이릉대전 이후 냉랭했던 오나라와의 관계를 정상화시켰다. 이는 남중정벌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선결과제였다. 촉오동맹을 재수립한 제갈량은 방비를 철저히 한 채 남중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정벌은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었다.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항복을 받아내고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중정벌에 막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당시 남부 4군을 담당하고 있던 내항도독 이회와 마충, 여개, 왕항 등이다. 한중을 지키고 있던 위연을 포함하여 조운, 장완, 비위, 왕평, 장익 등은 남정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관중은 제일 공이 큰 이회 등을 빼고 조운과 위연 등으로 바꿔치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제갈량의 남중정벌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장건이 개척한 서역과의 통상은 육로보다 바닷길이 발달해 있었다. 오나라도 이에 주목하고 교주태수(현재 베트남 하노이 북부) 사섭으로부터 조공의 형태로 남해교역의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국내 현안을 타개해야 했던 제갈량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나라 밖에 관리를 남기려면 군사들도 주둔해야 한다. 그런데 군사를 주둔시키려면 식량도 남겨야한다. 그 식량이 없으니 그게 바로 첫 번째 단점이다. 이번 전투에서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그러므로 관리를 남기면서 군사를 두지 않으면 변고가 생길 것이니 바로 이것이 두 번째 단점 이다. 또한 남만은 서로를 죽이고 내쫓으며 살았기 때문에 속으로 의심과 미움이 많다. 이런 곳에 관리를 남겨두면 나중에는 서로 믿지 못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이것이 곧 세 번째 단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남기지 않고 떠나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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