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씨 정권의 탄생, 발전, 그리고 필망(必亡)

 

 

오나라를 세운 손권은 손견의 둘째아들이다. 손견은 17세 때 부친과 같이 지금의 항주에 갔다가 해적을 무찌르며 이름을 날렸다. 특히 동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막고 발목을 잡으면 상대가 누구든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돌적인 용맹이 화근이 되어 37세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그 뒤에 맏아들 손책이 손견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손책의 나이 18세였다. 손책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용맹하고 영민했다. 서초패왕인 항우에 비견되어 소패왕이라 고 불렸으며, 주위에 인재가 넘쳤다. 오나라의 충신인 주유와 장소, 태사자도 손책의 신하였다. 진수가 손책을 평하길, "기상과 절개가 호방하고 실천력이 뛰어났으며, 용맹과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지략은 천하에 으뜸이었다. 걸출한 인물들을 수하로 거두었으며 언제나 천하통일을 꿈꾸었다. (동오가) 강동을 다스리게 된 기반은 모두 손책이 다졌다.”고 했다.


그러나 손책 또한 26세로 요절했다. 용맹이 넘쳐 교만했기 때문이다. 손책은 후임자로 동생 손권을 지명했다. 이때 손권은 19세였다. 손책이 손권을 지명한 것은 ‘수성(守成)의 목적이었다.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은 손책 자신이 이뤄냈고 이제 는 국익을 위한 정치적 재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손권이 제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장소의 결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소는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손권을 보좌하였다.


손권은 젊은 시절 정치를 잘했다. 인내심이 강하고 충언에 귀를 기울이며 견실하게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말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71세까지 장수하며 장악한 권력은 유아독존적 성격으로 굳어져 교만하고 시기하며 인재를 함부로 해치기까지 했다. 또한 후계자 문제로 국정을 어지럽히는 등 실정으로 일관했다.


손권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맏아들인 손등을 후계자로 삼아 후계 구도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손등이 병으로 일찍 죽었다. 둘째 아들도 없는지라 셋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세웠다. 손권은 넷째 아들인 손패도

총애하였는데, 그 총애함이 손화와 다름이 없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한 시대에 태자와 왕자의 서열이 애매하니 태자는 항상 불안하고 왕자는 총애의 힘을 믿고 욕심을 부리기 마련이다. 신하들도 양분되어 권력쟁탈을 위한 암투가 심해지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결국 손권은 태자인 손화를 유폐하고 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주살했다. 그와 함께 손패와 그를 따르던 간신배들도 주살했다. 그리고 8세의 어린 막내아들인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 8년간의 후계자 문제로 당사자는 물론 유능한 신하들도 낙엽처럼 사라졌으니 이제 국가의 존망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손량도 얼마 못 가 퇴위하고 여섯째 아들인 손휴가 즉위했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264년 손휴가 병사하고 폐세자 손화의 아들인 손호가 즉위했지만 그는 지독한 폭군이 되었다. 후계자 문제가 발단이 된 오나라 필망(必亡)의 과정은 비단 오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봉건사회의 보편적인 역사다. 또한 후계자 책봉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일부 귀족층의 전유물에서 국민 모두에게로 이전되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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