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굴레 (Japan and the Shackles of the Past)

     -   헤이안시대에서아베정권까지, 타인의눈으로안에서통찰해낸일본의빛과그늘  


태가트 머피R 지음 | 윤영수 , 박경환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02월 15일 출간

 

 

 


 1. 소개

 


일본이라는 복잡한 나라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통찰력
“지난 20년간 외국인 저자가 일본에 대해 쓴 가장 중요한 책!”

 


오늘날 일본만큼 우리 국민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2019년의 “노 재팬” 이후 어느 정도 격앙된 감정은 가라앉았다 해도 그 어느 때보다 일본에 대한 비호감도가 올라가 있는 지금이다. 당분간 이 분위기는 나아지리란 보장이 없다. 최악이었던 아베 내각이 물러났다지만 그 연장선에서 스가 내각이 들어서 있고,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익 분위기, 과거사 부정,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에 대한 공격, 은근한 무시 등이 적대적 감정의 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전혀 전향적이지 않다. 일본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흥미 위주의 문화적 접근 외에 자신 있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양국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진지하게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피상적·적대적으로 상대방을 손가락질하는 상태에 멈춰 있다. 그런 상황에서 출판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 적대감정을 부추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곪아 있는 상태를 외면한 채 문화적·실용적 교류에만 충실할 것인가.  이번에 출간된 『일본의 굴레』에는 이도저도 못 하는 답답한 상황을 풀어보고자 하는 복잡한 심리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여기 태가트 머피라는 미국인이 쓴 『일본의 굴레』라는 두툼한 인문서가 있다. 부제가 독특하다.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이란 말은 이 책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이 책의 저자는 국제정치경제 전문가인 미국인으로 열다섯 살에 처음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이후로 40년 이상 일본에서 생활해온 일본통이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일본의 낯설고 이질적이며 표면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에 흠뻑 빠졌다가 이내 거리두기를 하면서 내부자이자 동시에 외부자로서 이 사회의 모순적인 측면들을 하나둘씩 파악해간다. 

 

그가 보기에 일본 사람들은 이상했다. 굴욕적일 만큼 친절한 서비스에, 뭔가 불평할 만한 일이 생겨도 침묵으로 일관할 때가 많았고, 권력에 도전하는 일은 좀체 하지 않는 체념적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였다. 다른 한편 그들의 섹스 산업은 서양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또 일본인들은 작은 일에서 쾌락을 찾는다. 일본인들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모순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이 일본을 좋아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에는 어떤 비극적 요소가 덧입혀져 있음을 깨닫는다. 일본 근대사의 대부분은 비극인데, 이 비극은 내외부적 요인이 결합해 일어났다기보단 일본인들 내부의 ‘무언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통찰해낸다.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는 태가트 씨가 평생 일본에서 살며 일본에 대해 보고 배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나라와 교토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전국시대의 혼란, 에도 시대 사회의 얼개, 쇄국 정책과 메이지 유신,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 전후의 경제 기적과 샐러리맨 문화, 1980년대 버블의 형성과 붕괴, 최근의 아베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경제와 정치와 문화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일본 사회에 대한 저자의 전방위적인 통찰을 보여줍니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며 오래 생활하고 있는 역자들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이보다 좋은 책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책을 번역했다. 역사의 긴 흐름 위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를 하나로 꿰어서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고 종합적인 교양과 통찰력을 제시한 책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저자소개

 


저자 : 태가트 머피R


쓰쿠바대학 도쿄캠퍼스에서 국제 비즈니스 MBA 프로그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임했고, 퇴직 후에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 일본에 관해 저술한 책들로 여러 상을 받았고 『뉴리퍼블릭』 『내셔널인터레스트』 『뉴레프트리뷰』 등에 기고하고 있다. 교수가 되기 전에는 투자 은행가, 브루킹스 연구소 객원 연구원이었던 경력이 있고, 『아시아태평양 저널: 일본 포커스』의 코디네이터이기도 하다.  
(역자 : 윤영수, 박경환)

 

 


목차
추천 서문
들어가는 말
서문

1부 굴레의 기원

1장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천황 제도 | 후지와라 가문과 헤이안쿄의 설립 | 헤이안 시대의 유산 | 여성에 의해 쓰인 문학 |『 마쿠라노소시』와『 겐지 이야기』| 헤이안 질서의 붕괴와 봉건주의의 등장 | 쇼군 | 몽골의 침략, 가마쿠라의 멸망, 아시카가 막부 | 일본의 ‘봉건주의’ | 봉건시대의 문화와 종교 | 유럽인의 도래 | 일본의 재통일

2장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탄생
도쿠가와 시대의 쇄국 | 질서와 안정에 대한 도쿠가와 막부의 집착 | 경제와 사회의 변화 | 대중문화 | 47명의 로닌 이야기 | 페리 제독의 ‘흑선’과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 1868년의 ‘혁명’? | 막부의 종말

3장 메이지 유신에서 미군정기까지
이와사키 야타로와 근대 일본 산업 조직의 탄생 | 자본의 축적과 입헌 정부라는 겉모습 | 1895년의 청일전쟁 | 1904~1905년의 러일전쟁 | 메이지 시절에 뿌리내린 근대 일본의 비극 |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메이지의 유산 |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정치적 통제를 뛰어넘은 관료주의 | 전쟁의 재앙 | 루거우차오 사건과 노몬한 전투 | 진주만, 항복, 전쟁의 유산

4장 경제 기적
전후 10년간의 이례적인 상황 | 고도성장의 정치적·문화적 기반

5장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
일본의 기업들 | 산업협회들과 경쟁의 통제 | 고용 관행 | 교육 제도 | 금융 시스템 | 관료 제도 | ‘현실의 관리’

6장 성장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성장의 대가 | 야구와 샐러리맨 문화의 등장 | 고도성장기 일본의 여성 | 마쓰다 세이코 | 고도성장의 제도와 글로벌 경제 프레임워크

2부 오늘의 일본을 구속하고 있는 어제의 굴레

7장 경제와 금융
대차대조표 불황 | 일본의 차이 | 공황의 회피: 일본 금융기관의 구제 | 잘못된 전제, 그리고 활짝 열린 재정 적자의 문 | 아시아 금융 위기의 단초 | 일본 정부의 재정 지출

8장 비즈니스
서비스 분야 | 바뀌어가는 고용 관행 | 세계화의 어려움 | 글로벌 브랜드와 해외 직접 투자 | 매몰 비용의 포기 | 한국으로부터의 도전 | 일본 비즈니스의 미래와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

9장 사회문화적 변화
세계로 뻗어나간 일본 문화 | 갸루 | 오바타리안, 소다이고미, 황혼 이혼 | 초식남 | 일본의 남성성 | 변화하는 일본 남성 집단 | 계급의 부활 | 일본 지도층의 쇠퇴

10장 정치
1955년 체제 | 다나카 가쿠에이 | ‘닉슨 쇼크’와 다나카의 총리 시절 | 록히드 스캔들 | 야미쇼군 다나카 | 측근들: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 | 오자와 이치로 | 정치 질서의 수호자들 | 1994년의 선거제도 개혁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야스쿠니 신사와 고이즈미 정권의 외교관계 | 고이즈미 이후의 자민당

11장 일본과 세계
‘신일본통’ | 오키나와와 후텐마 해병 기지 | 하토야마 정권의 붕괴 | ‘영향력의 대리인’ | 3·11과 간 나오토 정권의 운명 | 노다 정권의 자멸 | 센카쿠열도와 일본의 영토 분쟁 | 아베 신조의 귀환 | 경제 회복? | TPP, 특정비밀보호법, 아베 정권의 우선순위 | 중국과의 관계 정립 | 지속 가능할 수 없는 미일 ‘동맹’ | 다시 아시아의 일원으로 | 아베의 과욕과 미래

부록 1: 메이지의 지도자들
부록 2: 전후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관료

 


3. 출판사 서평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생각을 역사 및 문화와 결합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 태가트 머피 교수는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생각을 역사 및 문화와 결합시켜 다른 종류의 글쓰기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작업을 해보리라” 결심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지금의 세계 금융시장의 틀을 형성하는 데 일본의 여신(與信) 창조가 수행해온 중심적인 역할 같은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슈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서는 일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일본 경험의 총합을 다루지 않고서는 일본 현실의 그 어느 측면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달리 말해, 일본 은행의 통화 정책, 일본 기업의 인사 관행, 도쿄의 기묘한 스트리트 패션, 일본 정치의 끊임없는 의자 뺏기 놀이, 수 세기에 걸친 일본의 쇄국, 이런 문제들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저자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낡고 북적이는 하네다 공항에 내려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회색의 약동하는 도시의 풍경을 봤을 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주제들을 정리하고, 내 평생의 사유에 질서를 부여할 기회를 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라고 밝힌다.


『일본의 굴레』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를 모두 다루고 있다. 책 서문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갖고 있는 머피 교수의 생각을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과 결합시킨 것이다. 외부자적인 시각과 내부자적인 이해를 겸비한 저자가 제공하는 다면적인 일본 사회 분석은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통찰을 제공한다.

 


< 책임감으로 가득한 나라,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는 나라 > 


일본인 대부분은 본인들의 책임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서양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해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일본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도(그리고 모두 그렇다는 사실을 안다) 잘해내야 한다. 일본에서 마주치는 예의 바름과 서비스의 수준은 아주 하찮거나 사실은 지저분한 일에서조차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높아서, 가끔 이 세상이 나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져들게 할 정도다. 조금만 무언가를 하면 ‘오쓰카레사마데시타!お疲れ樣でした!’(과장된 감사의 톤으로 당신의 커다란 희생에 대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라는 외침이 되돌아온다. 누군가에게 차 한 잔과 디저트를 대접하면 진수성찬을 대접했다는 감사를 받는다(고치소사마데시타御馳走さまでした). 반대로, 성대한 식사 자리에 초대받아 갔는데 너무 차린 게 없어서 부끄럽다는 인사를 받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형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이고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형식에 자발적인 감정이 가득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모두가 그런 기대에 부응해 행동하고 있고 그게 또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가장 공허하고 형식적인 행위들이 오히려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형식성은 대인관계에도 적용된다. 상대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당신의 노력에 걸맞은 금전적인 보상을 할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는 까다롭고 형편없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지루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절친한 벗이나 열정적인 동료를 대하듯 한다. 하지만 타인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최고의 동료를 가진 것처럼, 누가 됐든 지금 상대하는 고객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양 행동하다보면, 애정이나 존경 그리고 주어진 일을 최대한으로 잘해내려는 의지 같은 감정을 실제로 내면화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주변은 내가 깊이 아끼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또 그들이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한번 약속한 일은 꼭 할 것이라고, 그것도 잘해낼 것이라고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에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한편,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모순을 애써 부정하려는 이러한 태도에는   치명적인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점은 흔히 간과된다. 그런 태도가 일본을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원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일본 근대사의 비극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중을 착취하기 좋은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함이라 여기고, 어쩌면 가치 없는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을 대중이 내면화하는 것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런 유동적 가치관의 영향이 사회 지도층 레벨로 가면, 권력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과 그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중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 일본인들의 피해자 의식과 체념의 사고 습관 >

 


일본은 더 이상 자국과 이웃 나라들을 불바다로 만들 만큼 위협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딱히 원인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식, 그 안에서 개인은 자기 본분을 다하며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식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일본인들이 이런 의식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피해자 의식(히가이샤 이시키被害者意識)이다.


피해자 의식이 현실 세계에서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가령 일본은 무시무시한 재정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한때 전 국민의 경제적 안정을 거의 달성토록 했던 사회적 규약을 내다 버렸다. 또 세금과 물가를 올려서 가계의 구매력을 망가뜨리고, 국민연금이 지켜야 할 약속을 파기하기도 했다. 과거 기업들이 직원들 삶의 질을 보장하던 세계는 안정과 미래라고는 없는 저소득 계약직의 세계로 대체되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자산을 망가뜨리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월가의 은행가들처럼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며 기분 좋아 낄낄거리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들도 선택의 여지 없이 희생의 대열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을 통해 본인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경우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백만의 일본 국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고는 “시카타가 나이 仕方がない (할 수 없군)”라고 한마디 하고는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있다는 사실(강한 노조,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강한 정당, 확실한 사회 안전망, 일본 산업의 부활을 위해 가계의 실질소득을 늘려서 내수를 진작시키는 각종 정책)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려한다고 해도 성숙하지 못한 포퓰리즘으로 비난받는다. 어찌어찌해서 그런 대안에 시동을 건다 해도, ‘일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받고는,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묵살하도록 발전되어온 시스템에 의해 폄하될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를 거쳐 근현대로 올라오며 이런 시스템의 일부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두 장은 최근 수십 년간 일본을 딜레마로부터 구해낼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세력이, 미국의 직접적인 공모와 개입으로 인해 붕괴되었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국민에게 사람답고 안전한 삶을 제공하는 데 존재 목적이 있는 기업, 은행, 정부, 군대, 경찰과 같은 조직이, 그 조직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 가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전 국민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시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오염되고 장악되어왔는지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사람들은 조직을 그런 식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해나가면서도, 실제의 동기는 스스로에게 감추는 묘한 심리 상태를 필요로 하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관념적 곡예에 ‘이중 사고(doublethink)라는 유명한 이름을 붙였다. 일본의 권력자들은 모순에 대한 관용이 비단 허락되었을 뿐 아니라 필수적이었던 정치적·문화적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 일본 정치 구조의 기원: 메이지 이후 100년이라는 굴레 >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도 시대가 막부의 강력한 권위를 기반으로 수백 년간 평화를 유지해서 상상 이상의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뤘다는 부분은 되새겨볼 만하다. 

 

부의 축적은 맨 아래 계층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신분제도가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유지되면서 생겨난 거대한 모순의 에너지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려던 불과 한 세대의 압축적인 노력이 어떻게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바꿔놓았고 어떻게 여전히 일본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굴레로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분석은 뛰어나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천황제도와 의회제도라는 두 가지 ‘허구’를 앞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서 유신의 주역들이 과두정치를 펼쳤다는 지적, 그들이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남긴 커다란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최종 책임이 없는 관료에게 휘둘리는 현재 일본 정치의 구조가 탄생했으며, 일본의 조직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최종 책임의 소재가 없는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통찰력 있다.


저자는 또한 국제정치경제학 연구자답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에도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저자는 분명 기존 미일 관계의 수호를 위해 행동하는 미국의 ‘신일본통’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일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칼을 들이대는 것은 물론, 현재 일본의 문제들에 원죄를 갖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한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그토록 어려운 것에는, 미군정이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스스로 과오를 돌아볼 기회를 원천봉쇄해버린 데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은 미국인이라면 아프게 들어야 할 내용이다. 

 

1990년대부터 미일 관계의 뜨거운 감자가 돼버린 오키나와의 후텐마 해군 기지 문제도 미국 내 관료 조직 간의 경쟁과 이기주의로 인해 불필요하게 장기화되고 복잡해졌다는 지적 또한 그렇다.


환율 정책이나 버블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깊이 들어가 일본 경제가 그려온 극적인 궤적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본이 패전 이후 미국에 국방과 외교를 맡긴 대신 미국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거꾸로 미국이 일본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를 유지한다는 얘기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게 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수많은 면모가 전후 일본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모델이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니 비슷할 수밖에 없다 해도, 주어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문장이 가득하다. 그렇게 일본을 따라가던 한국은 20세기 말을 분기로 점점 궤적을 달리하고 있지만, 일본이 고민하고 있는 만성적 저성장이나 언론의 독립성, 사법 개혁, 저출산 고령화 사회 등이 우리에게도 숙제인 까닭은 그래서이지 않을까 한다.

 

 

 

 

4. 책 내용

 

(1) 이중적 통치체제

 

 - 전 시대의 일본 역사 기간 동안 통치의 실직적인 주체와 표면적인 주체가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존속해왔다.

 

   <전근대 : 막부 - 천황  > 

 

    - 8세기말 ~ 12세기말   후지와라 카마쿠라 막부 (헤이안시대)

    - 1392년                        아시카가막부 (무로마치막부)

 

    - 1603년                        도쿠가와막부

                    * 에도 시대에 막부의 강력한 권위를 기반으로 수백 년간 평화를 유지해서 상상 이상의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 부의 축적은 맨 아래 계층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신분제도가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유지되면서 생겨난 거대한 모순의 에너지는 계속된다.

 

  < 근대 : 천황제 -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추밀원 -  삿초파벌) >

   - 1868년 메이지유신 

   - 제2차세계대전

   . 전쟁까지 일본의 지배체제의 연속성이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 메이지 지도자 사후, 국가의사결정 체제의 미흡으로 위협과 암살의 정치 횡행

   . 결국 국가주의와 인종 혐오를 극적으로 유도 : 이들의 종교적인 열정과 순수함은 세속과 타협하는 집권층과 대비됨

   . 1906년 설립된 관동군은 1920년대에 이르러 어떤 감시도 없이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형식적으로 천황 보고 체제)

 

 <종전 후 : 천황제도 - 의회 - 관료제도 >

  -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종전후 일본은 통치의 정통성이 어디서 오는지의 문제에 대해 명실상부한 민주적 통치제도를

    완비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 미국의 중국 외교 및 반공 정책 요구에 굴복하여 의존적인 국내 정치 실행, 관료의 막강한 권한 행사, 세습 의원 등

 

 * 메이지 유신이 천황제도와 의회제도라는 두 가지 ‘허구’를 앞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서 유신의 주역들이 과두

   정치를 펼쳤다는 지적, 그들이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남긴 커다란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최종 책임이 없는 관료에게

   휘둘리는 현재 일본 정치의 구조가 탄생했으며, 일본의 조직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최종

   책임의 소재가 없는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통찰력 있다.

 

 - 따라서 문제가 생겨 실패할 경우 명시적으로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것이 일본 정치의 특성이었다. 

 

 

(2) 책속에서

 

먼저 일본의 이상한 정치체제에 관한 저자의 의견을 들어보자. 일본은 사실상 자민당 정권이 60년 이상 장기집권하고 있는 나라다. 선거라는 형식은 있지만 자민당 정권은 계속 집권한다. 이 이상한 정치체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전후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군대에 보급하기 위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끝도 없이 일본에 발주하고 달러로 대금을 지급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 특수를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미국 등과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을 맺어 법적인 독립을 얻었다. 이 조약에는 명시되지 않은 두 가지 조건이 있었으니, 하나는 일본이 미국의 정책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을 것, 또 하나는 일본에서 좌익이 권력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확실히 보장할 것이었다.(196~197쪽) 자민당이 1955년 각 세력을 규합해 창당하면서 ‘1955년 체제’라는 전후의 정치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 체제는 좌파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원천봉쇄했다.(205쪽)

더 과거로 가보자. 오늘 일본 정치의 뼈대는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다. 1868년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막부를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일본의 여러 핵심적인 통치 제도를 없애버렸다. 이들은 번 제도를 폐지했고, 번 사이의 경계선을 폐지하고 새로운 경계선을 지정했으며, 번의 수도들이 지역에서 끼치던 막대한 영향력을 박탈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다이묘의 재산을 몰수하고, 신분 구분을 폐지했으며, 사무라이들의 연봉을 일시불로 정산함으로써 사무라이의 국가에 대한 청구권을 없애버렸다. 이들은 또 서양의 제도들을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들여왔다. 의무교육, 징병제, 주식회사, 유한책임 은행, 의회, 법원, 귀금속 담보 통화, 최신 과학기술에다 심지어는 서양식 옷과 사교댄스까지 모든 분야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혁명처럼 보이는 이 조치들은 아쉽게도 불완전한 혁명 또는 개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은 사실상 반혁명에 가깝다. 그것은 지배 계층 내부에서 벌어진, 나라의 운명을 건 절박한 권력 투쟁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향후 한 세기 반에 걸쳐 몇 차례 더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지배층 내부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했다. 즉, 지배층이 국가 운영 능력 자체를 상실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16쪽) 

그래서 지금도 자민당 총리가 정치 스캔들에 휩싸이거나 지지도가 폭락하면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자민당 총리로 교체한다. 총리는 바뀌나 자민당 집권은 계속 이어진다.

메이지 유신을 통한 새 집권 세력은 한 세대 만에 일본을 서구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이기기까지 하는 강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동시에 천황이 직접 통치한다는 환상을 이용해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두 집권층이 통치하는 정부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반세기 후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124쪽) 지금도 일본의 정치는 옛 비극의 연장선을 부드럽고 약하게 정련해서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는 일본을 안정시키는 역할과 동시에 일본의 발목을 꽉 붙잡는 족쇄가 되는 셈이다.

저자는 일본 산업의 특징 중 하나로 산업협회를 들고 있다. 일본에서 기업 간의 모든 경쟁은 통제되었다. 일본 기업은 체면과 고용 안정성에 집착했고 그래서 경쟁에서 지더라도 철수는 물론이고 시장 점유율의 감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럴 때 산업협회가 나서서 경쟁에서 낙오한 회사들도 고용안정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산업협회는 가격과 공급망에 관한 비공식적인 합의를 조율하고 감시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이 이렇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필수 요소인 ‘창조적 파괴’의 가능성을 억제했기 때문에 소비자 가전제품 등에서 1990년 이후 애플이나 삼성과 같은 해외의 발 빠른 경쟁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220쪽)

전후 일본 경제의 도약에서 관료제도도 무척 중요하다. 일본 경제 부처들은 주요 기업들은 물론이고 정부 조직 바깥에 있는 경단련이나 경제 동우회와 같은 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일을 한다. 일본의 관료 엘리트 집단은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 특정 산업을 목표로 삼은 뒤 거기서 가장 뛰어난 기업을 골라내 해외 시장을 공략할 수 있도록 자원을 몰아주었다. 그런 산업은 일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전방산업인 철강이나 기계 공구 산업, 초기 설비 투자가 많이 들어 진입 장벽이 높은 토목용 장비, 복합 소비자 가전이거나 두 조건을 모두 갖춘 반도체와 같은 산업이었다. 섬유, 조선, 철강, 라디오, 컬러 TV, 토목 장비, 영화, 기계 공구, 카메라, 시계, 팩스 기계, 프린터, 복사기 등에서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일본은 1968년 경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문제는 일본이 다른 선진국들과 동등한 위치에 오른 뒤 이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산업에 진출해야 할지가 더 이상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일본식 모델을 따라하게 된다. 일본의 경제 성장 방식을 가장 비슷하게 따라한 나라는 아마도 한국일 것이다.(232~235쪽)

저자는 일본을 이해할 때 ‘현실의 관리’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관리’란 여러 제도와 관행이 합쳐져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고도성장기에는 회사 직원은 근태 보고 서류에는 8시간으로 처리하지만 하루 근무 시간이 12시간쯤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통상 교섭 담당자들은 줄곧 일본의 낮은 관세율을 가리키며 일본 시장이 활짝 열려 있음을 강조하지만, 회사들은 수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만약 그 사실을 ‘잊어버렸으면’ 관련 산업의 협회들이 상기시켜주곤한다.

얼핏 보면 일본의 의회에서는 입법 토론을 거쳐 공적인 정책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론에서 한쪽의 정치인이 하는 질문도, 다른 한쪽이 읽는 대답도 모두 관료들이 미리 작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관이 의회의 심의회에 빠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소니와 교세라 같은 이단아들의 사례는 이들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뿐이었다. 이들은 해외 시장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서야 일본의 경제 기득권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이러한 예외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어갔다. 애플,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구글, 페이스북처럼 IT혁명의 조류를 타고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일본 기업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236~239쪽)

그렇지만 일본의 소재 부품 기업들의 경쟁력은 죽지 않았다. 예컨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정밀화학 분야에서 일본 기업들의 전 세계 점유율을 합하면 70퍼센트가 넘고 탄소섬유는 65퍼센트가 넘는다. 애플의 아이폰을 뜯어보면 일본 기업의 이름이 들어간 부품은 많지 않다. 아이폰은 미국에서 설계하고 디자인해서 중국에서 생산되고 한국과 대만의 부품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이 중의 30퍼센트가 넘는 부가가치는 일본 기업이 창출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부품들을 만드는 핵심 소재를 일본 기업이 만들고, 이런 부품들을 생산하는 공장의 설비를 일본 기업이 공급하기 때문이다.(328~330쪽) 미국이 우주로 발사하는 로켓과 보잉사의 비행기도 비슷한 사정이다. 일본 기업이 없다면 로켓과 보잉 비행기는 만들어지지 못한다고 말들 한다.
 
그렇지만 일본 비즈니스 세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경영자들은 세계화의 어려움, 실패(매몰 비용을 포기하는 것)에 대처하는 적절한 경제적 정치적 메커니즘의 부재가 일본의 비즈니스와 경제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아마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지금 해외에서 수많은 유명 일본 기업이 시장지배력과 명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일본은 꽉 막힌 관료주의와 기업 내의 허례의식으로 인해 의사결정 속도가 여전히 거북이처럼 느리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일본의 경영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이론적으로는 네마와시(가령 회의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하기 위한 회의)나 품의(1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결재를 받아 기록을 남기는 것)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때에는 그들 자신이 자라온 그 시스템 안에 갇히고 만다.(358쪽)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가난한 친척처럼 멸시하던 한국에게 뒤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국의 기업들이 일본의 비즈니스를 크게 위협하는 세력으로 떠오른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한국에는 국제화된 엘리트가 더 많다. 해외에서의 거주 경험과 영어 구사 능력은 한국의 엘리트 계급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에 가깝다. 둘째 한국의 경제 정치 기관들은 훨씬 더 명확한 권력 구조와 뚜렷한 책임 소재를 갖고 있어서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셋째 한국은 북한의 위협 등으로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나라라는 점이다. 한국은 시간을 낭비하거나 추상적인 고민을 하거나 우유부단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360~361쪽)


다시 한번 일본 체제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일본에서 정치권력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누가 대개혁을 추진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일본에서 정치권력의 실질적인 원천이 무엇인지 모호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사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고 일본의 근본적인 제도 개혁은 가로막히고 있다. 집권 계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전복시킬 수 있겠는가.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사쓰마-조슈 동맹은 진정한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들 세력은 죽으면서 권력의 커다란 공백을 남겼고, 사실상 자신들이 이룬 모든 것이 파괴되도록 스스로 허용한 셈이 되었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대부분은 그 입안의 구심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사 정책을 끌고 가는 일관된 동력이 있다고 해도 이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주도해가는 것이 아니다. 해외로부터의 압력과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국내 각종 이익집단의 요구에 좌우된다. 일본이 필요로 했던 정치 시스템은 권력에 도전하는 잠재 세력들을 필요에 따라 흡수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정치였다. 막강한 정부 부처들 사이에서 또는 그 부처들과 다른 세력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였다. 그리고 해외 국가들에게, 일본이 그들에게 친숙한 정당과 선거와 총리와 법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운영되는 나라라고 안심시켜줄 수 있는 정치였다. 이런 정치 시스템이 지금껏 유지되는 ‘1955년 체제’인 것이다.(423~425쪽)

책에 다나카 수상이 1960년대 말 일본의 무역 흑자를 관리하는 방식이 나온다. 다나카는 뛰어난 정치력과 협상력을 지녔다. 다나카가 통상산업성 장관일 때 일본은 대미 수출이 너무 늘어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규제를 하고, 그 대신 미국은 관세를 내려주는 식으로 서로 체면을 세워주며 한 발씩 양보했다. 그리고 엔화의 가치가 급격히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쓸데없는 공공사업에 의도적으로 돈을 낭비했다고 한다.(442~443쪽)

저자는 일본의 ‘관료’를 비판한다.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한국도 비슷한 사정이다. 일본의 정치권은 스스로를 정치 ‘위에 군림한다’고 믿는 관료들을 정치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고도로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전문적이고 풍부한 지식을 갖춘 관료들 없이 나라를 다스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점점 관료들이 오만해지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는’ 모든 유의 시도를 경멸하게 되면서 결국 사회 전체의 발목을 잡는다.(527쪽)

저자는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살피면서 일본은 중국에서 통일된 독립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번은 이쪽 군벌, 또 한 번은 저쪽 군벌을 지원하는 식의 전략을 폈으나 결국은 국민당 군과의 처절한 장기 전쟁으로 빠져들어 갔다고 지적한다. 1944년 일본이 벌였던 이치고 작전으로 국민당 군은 패배하고, 통일 중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장제스의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 인한 권력의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공산당으로, 일본의 무분별함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통일된 레닌주의 강대국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현대에 들어와서 중국과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발적으로 미국의 말에 따르는 형태로 천천히 바뀌어왔다. 일본은 중국과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자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중국과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이루어 공존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것이다.

저자는 길게 내다보면 이것이 더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 저자는 미국은 근본적으로 일본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엘리트 지도층은 일본을 미국의 군사적 자산, 미국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미국의 꿈이란 무엇인가? 미국이 역사적으로 북미 대륙에서 아무런 잠재적 위협도 없고 아무런 잠재적 도전도 받지 않던 상황을 어떻게든 전 세계로 확대하고 싶은 것이다. 망상에 빠진 미국의 군사 전략가들은 이런 상태를 ‘전방위 지배’라고 부른다.(578~579쪽)

미국은 어쩌다 이런 망상에 빠지게 되었을까?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전쟁을 벌이고 중국을 포위한다는 무모한 발상도 이런 망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점에서 외국에서 미국 군사력을 철수한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일면 옳기도 하다. 트럼프는 외국에서 미국 군사력을 유지하는 돈으로 미국의 중하층을 비롯한 국민에게 투자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중하층이 트럼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동력이 생긴 것이다.

저자 역시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유지하는 데 드는 진짜 비용은 미국의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이 과도하게 치러야 하는 희생에 있다고 말한다.(582쪽) 달러 중심의 세계 통화질서와 미 제국의 자금 조달이라는 메커니즘은 달러 가치에 장기적인 상승 압력을 가하게 되고, 미국 내의 제조 시설과 서비스 업종을 아시아의 파트너 국가로 꾸준히 이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 미국의 월가와 실리콘 밸리가 빅테크 기업의 설계와 개발을 결정하지만 그 제품을 실제로 생산하고 조립하는 작업은 대부분 해외에서 하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불평등이 정치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의 직접적 원인이고, 그것이 미 제국 시스템의 원활한 운영을 위협한다.

 

미국 국민은 미 제국주의 엘리트층이 주장하는 전쟁들–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동중국해 어디건 상관없다–에 점점 더 회의적이 되어간다. 중국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미일동맹은 무너지고 일본은 외롭게 홀로 남겨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583쪽)

저자는 긴 논의를 마치고 일본을 위한 충고를 한다. 역사의 추가 다시 동아시아로 기울고 있으며 일본이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할 수도 있는데 걸림돌이 있다. 바로 일본의 과거사 문제다. 일본의 옹호자들은 다른 나라들도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렀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본이 어떤 사과의 말과 행동을 해도 주변국들은 절대 만족하지 않고 과거사를 채찍 삼아 일본을 계속 때리러들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저자는 이 또한 맞는 말이지만 핵심은 일본이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어났던 침략전쟁과 같은 과거사를 직면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국을 위해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을 위해서다.

 

일본의 과거에 대한 답은 일본인들 스스로가 구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본이, 일본의 독립성을 파괴하며 해외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광기의 대명사로 만든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다.(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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