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물러감을 자연스럽게 여기듯이 나의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이 책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먼저 내 스스로에게 양해를 해주고 싶다.

이제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나는 요즘 훈련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런 연습의 하나이기를 바란다.
세상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이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리라.
그럴 세상 모습을 내다보면서 '조용한 걸음으로 운명을 밟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난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언젠가 책으로 이어진 생애를 돌아보는 내 책의 끝에 썼던 말을 다시 옮겨 적고 싶다.
'세상이여, 반갑다. 사람들이여, 고맙다.'"
(김병익, '조용한 걸음으로' 9쪽)


(문학과지성, 2013)

 

 

 

 

 

한 사람의 인생에 담긴 한 나라의 역사 그리고 사람들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고집과 자부, 그 영원의 가치에 대한 탐독!


책에 관한 모든 경험 ― 출판인․저술가․독서가로 책과 함께 살아가기

 

문학평론가이면서 출판인, 저술가이면서 독서가로 출판 기획에서 교정 실무까지 ‘책’과 ‘글’에 있어 명실상부 ‘전인(全人)’이라 일컬을 수 있는 김병익의 산문집 『조용한 걸음으로』(문학과지성사, 2013)가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세상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써온 글들을 묶어낸 이 책은 문학과 세상에 대한 에세이들, 동료 문인들에게 보내는 축사와 추모사, 근래 읽은 책들에서 연유한 소감으로 크게 세 개의 부로 갈무리돼 있다. 젊은이들이 품은 절망이 자산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글로 문을 열고, 이제 벤치에 앉아 쉬며 인생의 허망함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안식을 취하겠다는 글로 책을 닫는 가운데 1부 ‘돌아보며, 바라보며’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반기고 변화된 분위기들의 낯섦을 차분하게 짚어가는 가운데 염려와 희망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4․19 당시 교정에서 품은 생각과 유신 당시의 편집인 시절에 대한 회상, 새 시대의 전망을 제시하기 등 저자가 살아낸 다양한 모습과 역할 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훈훈하다. 2부 ‘도저한 정신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련하고 그리운 박경리․박완서․김수영․오규원․황순원․이청준 선생 등 이 시대 도저한 정신들과의 만남과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들을 알려준다. 더불어 한국의 문단을 지키고 키운 동료 문인들의 축일에 보낸 축사들도 함께 모았다. 3부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는 저자가 읽은 책들과 관련한 글들로 책을 만드는 사람, 쓰는 사람, 엮는 사람 등 책과 함께 살아온 저자의 다양하고 예리한 시각이 책에 대한 편안한 소감 가운데서 묻어난다. 저자는 대단하지 않은 글들로 책을 내는 게 실례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소한 이야기들로 풀어낸 가벼운 글 속에는 우리 시대의 역사와 문화사 그리고 그 시대를 지켜낸 사람과 책 이야기가 한 마음으로는 다 받아안기 어려울 만큼 크고 깊게 자리하고 있다.

나의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이 책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먼저 내 스스로에게 양해를 해주고 싶다. 이제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나는 요즘 훈련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런 연습의 하나이기를 바란다. 세상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이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리라. 그럴 세상 모습을 내다보면서‘조용한 걸음으로’운명을 밟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난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언젠가 책으로 이어진 생애를 돌아보는 내 책의 끝에 썼던 말을 다시 옮겨 적고 싶다: “세상이여, 반갑다. 사람들이여, 고맙다.” _「책머리에」에서

 
책으로 이어진 생애 ― 아름다운 만년의 양식, 다시 책을 들고

 

이 책의 내용 중 특히 3부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는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웹진문지>에 15개월 남짓 3주를 주기로 하여 연재한 칼럼들로 그즈음의 저자의 독서 이력과 함께 가장 최근의 글들을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년의 저자가 보이는 최근의 모습에는 우리 문화사 전체를 꿰는 성찰이 담겨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제목 짓기 같은 소소한 어려움과 문체를 만들어가는 심도한 문제, 책을 구성하고 꾸미는 편집자의 어려움과 고뇌 그리고 지식 사회학과 서간 문화의 중요성과 우리가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글 사이사이에서 쉼 없이 떠올리게 한다. 광복과 6․25, 4․19와 5․18 등의 굵직한 시대사는 물론 현재의 자본 경도, 속도 사회에 이르기까지 크고 무거운 경험의 시간 동안 그 엄포한 시절과 사건을 긍정하고 그러안는 일은 또 얼마나 큰 부침과 가슴 쓰림을 경험해야 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어떤 인생이 잘 살아왔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은 책과의 인연으로 전 생애를 살아온 한 노년의 삶이 그 남은 시간마저도 아름다우리라 믿어지는 건 왜일까. 다시 한 번 ‘책’의 소중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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