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평생을 노력해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 법륜 스님 >>

 


부처님은 2천6백여 년 전 인도 대륙의 북쪽 히말라야 산기슭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비록 아주 먼 옛날이라고 하더라도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어요. 신분도 왕족이었고, 부유했으며, 많은 하인들이 옆에서 보필도 해주었습니다. 남이 볼 때에는 아무 괴로울 일도 없고, 아무 걱정이 없을 조건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각자 다 자기 나름대로 고뇌가 있잖아요. 부처님께서도 남모를 고뇌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린 시절에 궁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궁 안의 사람들과 달리 궁 밖에는 굶어 죽는 사람, 병들어 죽는 사람, 학대받아서 죽는 삶, 늙어 버려진 사람, 버려진 시체들을 보고 의문이 생겼어요.

‘사람은 왜 이렇게 괴롭게 살아야 할까?’
‘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왜 그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고 저렇게 고통 속에 살아가게 두는 걸까?’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사람은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떨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나요? 돈이 없는 것보다는 있을 때, 지위가 낮은 것보다는 높을 때, 인기가 없는 것보다는 인기가 있을 때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취직도 했습니다. 결혼하면 더 나을까 싶어 결혼도 하고, 아기를 낳으면 나을까 싶어 아기도 낳아서 키워요. 그렇게 행복해지기 위해 40년, 50년, 60년을 살아왔는데 행복해지기는커녕 어쩌면 어릴 때보다 더 고뇌가 많아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상하다.’ 하고 멈추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돈이 이 정도 있으면’, ‘지위가 이 정도 되면’,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무언가를 하면 인생이 편안해지지 않겠나 생각하고 노력을 해왔잖아요. 어릴 때 기준으로 보면 내가 원하던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왜 자유롭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못할까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하면서 계속 앞으로만 가지, 인생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서도 괴롭지만, 사실은 기대가 계속 높아지기 때문에 만족할 수가 없어요. 어릴 때 기준에서 보면 이미 성취한 부분도 많습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져도 진정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혹시 삶의 방향이 잘못된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 노력이 부족해서 도달하지 못했다.’라고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자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으니까 왕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합니다. 왕만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부처님은 거기에 도달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길은 아니다’라고 깨닫지 못하는데, 그분은 이미 도달해봤기 때문에 ‘이 길은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왕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를 할 때 아무런 미련이 없었습니다.

당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깨닫기 전 수행하던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자기 나라의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웃으면서 되물었습니다.

‘입 안에 가래가 필요 없다고 탁 뱉었는데, 남이 뱉은 더 큰 가래를 보고 더 굵다고 주워 먹는 사람이 있겠는가.’

즉, 내 나라도 버렸는데 더 큰 나라를 준다고 얻겠냐는 거죠. 이것을 가래에 비유했습니다. 가래에 비유했다는 것은 왕의 길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알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왕위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왕의 길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어떤 길을 가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스승들을 찾아가 배웠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가르쳐준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완전한 자유와 행복은 아니었어요. 부처님은 이제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지도해 주는 사람도 없고,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에야 중도의 길을 찾았습니다.

 


쾌락도 고행도 아닌 제3의 길


세상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를 기분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기분이 좋은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다. 이 만족감이 행복이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자.’

이렇게 욕구를 따라가는 길을 철학적으로 쾌락주의라고 말해요. 이 길은 부처님께서 이미 젊은 시절에 가봤던 길이에요.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출가했기 때문에 그 길은 아닌 줄 알았습니다.

반대로 당시 수행자들은 욕구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봤습니다.

‘욕구를 따라가면 늘 괴로울 수밖에 없고 윤회할 수밖에 없다. 욕구의 씨를 말려야 한다.’

이것이 고행주의예요, 출가한 이후에 부처님은 고행주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아주 극심한 고행을 해봤습니다. 그런데도 해탈에 이르지 못했어요. 쾌락의 극치도 가보고, 고행의 극치도 가본 거예요. 우리는 이쪽도 저쪽도 아직 끝까지 안 가봤으니까 미련이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양쪽 모두 사람이 갈 수 있는 끝까지 가봐서 둘 다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제3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즉,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욕구를 억제하지도 않는 길이에요.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고, 고행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 둘을 다 버린 제3의 길로 나아가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고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화날 일도 없고, 성낼 일도 없고, 짜증날 일도 없고, 슬플 일도 없고, 괴로울 일도 없고,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고, 불안도 없고, 초조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방황도 없는 안온한 상태에 이르렀어요.

깨달은 후 부처님은 흉악한 강도 앞에서도, 성난 코끼리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두려운 건 죽음이잖아요. 그런데 잘 살펴보면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부처님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재물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닌 줄 알아 재물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벗어나려고 많은 아이디어를 만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두렵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고한 행복, 참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부처님은 하인들이 늘 시중을 들어주고, 호위병들이 늘 옆에 지키고 있어도 불안했는데,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남에게 밥을 얻어먹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아무도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아무런 걱정도 없고 불안도 없고 바라는 바가 없었습니다.

 


불법을 공부하면 생기는 이익


불교를 믿으면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극락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불법을 공부하면 화를 많이 내던 사람이 화가 나지 않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짜증을 많이 내던 사람이 짜증을 내지 않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많던 사람이 두려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늘 누구에게 의지하던 사람은 의지하지 않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던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늘 불만이 많았던 사람은 불만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법을 공부하는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즉 참 자유와 지고한 행복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경지가 목표예요.


이 법을 공부하면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는 게 아니라,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든 안 하든 감정이 좌우되지 않는 경지로 나아갑니다. 이 법을 공부하면 내가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부자가 되든 재물을 잃든 거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경지로 나아갑니다. 이 법을 공부하면 늘 봄만 오는 게 아니라, 봄은 봄대로 좋고 겨울은 겨울대로 좋아지는 거예요. 봄은 봄대로 좋지만, 겨울이라 하더라도 크게 구애받지 않는 거예요. 나는 봄이 좋지만 설령 겨울이 오더라도 괴롭거나 두렵거나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아들이 시험에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라 아들이 합격하면 좋지만 떨어져도 실망하고 괴로워하지 않고, 아들이 떨어진 상태에서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대화하고 도와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 법을 공부하는 데는 사람이면 되고 말귀만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 사람이 한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고, 기독교인이든 불교도이든 관계가 없어요. 그 사람이 종교가 있든 없든, 종교를 부정하든 종교를 긍정하든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옷을 입느냐는 개인의 자유인 것처럼 믿음, 사상, 종교, 이념은 개인의 자유에 속합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든 그건 개인의 자유입니다.

 


이 법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럼 이 법을 공부하면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부산 가는 길을 알려줘도, 본인이 가지 않으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 가르침대로 따라가면 누구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문즉설은 사례 하나하나에 따라 눈을 뜨게 하는 거라면 불교대학에서는 눈을 뜨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수많은 즉문즉설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러나 교리를 이해만 해서는 지식밖에 되지 않고,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직접 체험을 해야 합니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불교대학의 핵심이 아니에요. 나의 괴로움이 줄어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불교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내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게 목표라면 직접 경험을 해야 합니다. 만약 건강을 위해 밥을 먹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봅시다. 음식에 대해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배는 부르지 않잖아요?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어야 배가 부르죠. 불법을 내 삶에 직접 적용을 해봐야 합니다. 잘 되든지 안 되든지, 성과가 많든 지 적든지 그것이 진짜 공부예요.

원리를 생각으로 이해하는 공부라면 만 명이든 백만 명이든 스님 혼자 강의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불법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 7명씩 한 조로 묶어서 수행 연습을 하고 나누기를 하는 거예요. 불교대학은 체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불교대학을 개설하는 것을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3년간 행복학교를 운영해보면서 소수로 조를 편성해서, 본인이 체험할 수 있도록 수행 연습을 하고 나누기를 하면 온라인으로 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입학하시면 사전에 법문을 충분히 듣고, 일상에서는 수행과제를 실천하고, 수업에서는 도반들과 나누기를 해서 이 법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훌륭하느냐, 법륜스님이 얼마나 훌륭하느냐는 내 삶에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불교 신자냐 기독교 신자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이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부정적인 마음이 얼마나 사라졌느냐는 것이에요. 화와 짜증이 얼마나 줄었느냐, 근심 걱정이 얼마나 줄었느냐, 두려움이 얼마나 줄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기가 죽어서 살았다면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는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내 것’을 움켜쥐고 살았다면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는 배고픈 사람과 같이 나눠 먹을 줄 알게 돼요. 불교대학에서 공부하고 나서 괴로움이 줄어들고 삶에 여유가 생기고 당당해진다면 수업을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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