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거래를 멈추면…빵집도 주유소도 공장도 가동이 중단된다
[Books&Biz] 상품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원자재 트레이더의 세계
The World for Sale / 재비어 블라스·잭 파치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2008년 세계 경제를 대공황으로 몰고 갔던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금융 관련 출판업계에도 큰 분수령이 됐다. 투자은행(IB) 업계가 호황을 누리던 2008년 이전까지만 해도 IB 성공 신화를 다룬 책이 큰 인기였다. 하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성공담은 실패담으로 대반전됐다. IB업계가 어쩌다 이지경에 이르렀는지 산업 전반을 분석한 책이나 내부 고발자들의 폭로성 논픽션물들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수영장에 물이 빠지니 누가 수영복을 안 입고 있었는지 드러난 것이다. 뱅커, 애널리스트, 트레이더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수록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여전히 은둔의 세계에서 몸을 드러내지 않은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원자재 트레이더(commodity trader)였다. 뱅킹 섹터 전체가 어렵던 시절에 원자재만은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원자재의 수요처와 공급처를 연결해주는 게 다다. 사려는 자가 있으면 팔려는 자가 있고, 그들이 원하는 가격은 서로 다를 테니 이걸 매치해주는 일을 한다. 이렇게 단순한 일이 왜 그렇게 수십 년간 베일에 싸여왔는지, 내막을 살펴본 책 'The World for Sale'이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의 공저자 재비어 블라스와 잭 파치는 20년간 원자재 시장만 취재해온 저널리스트다. 둘 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있다가 지금은 블룸버그 뉴스로 옮겨서 에너지·원자재 시장을 담당하고 있다.
유수의 언론사에서 원자재 시장만 20년 취재했다고 하면 내부 정보가 많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이들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7~8년이나 걸린 것은 워낙 취재가 안 되서였다고 고백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전 세계 곡물 트레이딩 시장의 메이저인 '루이 드레퓌스(Louis Dreyfus)'는 원자재 시장 취재기자의 취재 요청이 들어오면 담당 임원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쪽으로 연락해보라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하지만 막상 이 번호로 연락을 해보면 한 번도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 이메일을 아무리 보내도 답변이 오는 적이 없다. 어쩌다 전화 연결이 됐는데, 저자들이 '왜 질문에 답을 안 주느냐'고 항의하자 수화기 너머에선 "무응답도 응답"이라는 싸늘한 답변이 돌아온다.
이런 비밀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이 시장이 소수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런던·뉴욕·시카고 상품거래소에선 원유와 곡물, 광물 등 전 세계 모든 원자재가 거래된다. 이 시장을 곡물상 카길(Cargill), 원유상 비톨(Vitol), 자원 종합상사 글렌코어(Glencore) 등 3개 메이저가 주름잡고 있다. 이들이 거래를 멈추면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고,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빵집엔 밀가루가 없어 빵을 못 판다. 이들 3대 메이저사가 2019년 거래한 규모는 총 7250억달러로 일본의 한 해 총 수출규모보다 크다. 중국 경제성장에 기댄 원자재 시장의 호황은 2011년 이 3대 메이저의 이익을 끌어올렸다. 당시 이들 3개 메이저의 순이익을 합치면 미국 주식시장 시가총액 상위를 겨뤘던 애플, 코카콜라보다도 많았다.
막대한 이익의 배경에는 검은 커넥션도 있다. 1979년 오일파동을 겪으면서 전 세계 경제에 악소리가 났지만 이들 메이저 트레이딩 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챙겼고, 중동 경제 붐의 밑돈을 댔다. 콩고민주공화국,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독재정권과 무능한 정부, 부정부패가 있는 모든 곳에 메이저 트레이딩 회사가 있었다. 냉전시대에도 러시아에 미국 밀가루를 팔고, 미국의 제재 대상국이 된 리비아와도 원유를 거래한 곳이 바로 이 메이저 트레이딩 회사라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이런 막대한 이익과 검은 거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회사가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세계 최대 원자재 트레이딩 회사 글렌코어의 본사는 스위스에 있고, 트레이더들은 싱가포르에 있다.
원자재 트레이더라고 해서 이런 메이저 트레이딩 회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쉘 등 메이저 오일 회사들은 생산자이자 트레이더다. 생산보다 트레이딩 수익이 더 날 때도 있지만 트레이딩 수치를 한 번도 공개해본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원자재 트레이더의 종가(宗家)다. 1990년대 월가가 급성장하면서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외에 다른 투자은행들도 원자재 트레이딩 부서를 만들었지만 종가를 따라올 수가 없었다. 원자재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상품 설계에 있어서 이들이 가장 앞서갔다.
은둔의 트레이더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한 사건은 2011년 세계 최대 트레이딩 회사 글렌코어의 상장이었다. 기업공개(IPO) 과정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회사의 이익규모, 사업구조는 물론이고 경쟁사에 대한 정보, 시장구조, 업계 지형 등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소송도 뒤따랐지만 투명성이 결여됐던 원자재 시장에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저자들도 그 덕분에 글렌코어의 아이반 그라센버그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5시간 동안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트이더들의 인터뷰는 비톨의 이안 테일러 CEO, 현존하는 최고의 오일 트레이더 앤디 홀 등 20여 명으로 이어졌다. 이 20여 명밖에 안 되는 메이저 트레이더가 전 세계 원자재 가격을 좌지우지한다. 스위스 산속의 스키리조트 샬레, 독일 하노버 숲속의 1000년 고성에 살면서 가격을 움직인다. 출판하지 말라는 압박부터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변호사들의 협박 편지까지 다양한 장애물이 있었지만 400페이지짜리 책은 나왔다. 아무 페이지나 잡히는 대로 읽어도 충분히 재밌는 금융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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