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탁 연합과 호뢰관 전투의 진실 

 

 

서기 189년, 동탁의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제후들이 ‘동탁타도!’ 의 기치 아래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연합군 결성 과정에서 조조가 거짓 조서를 보내 18명의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동탁 토벌의 거짓 공문을 돌린 사람은 조조가 아니라 동군 태수 교모(橋環)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제후들도 13명이었다.


그렇다면 공문을 돌린 사람이 조조로 변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나관중은 조조를 악인의 대명사로 만들었는데, 그 시작 시점을 바로 이때로 설정한 것이 다. ‘난세의 간웅'인 조조의 영민한 성격에 거짓 문서 하나쯤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 악인 조조의 이미지를 형성하기에 적절한 시점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13명의 제후 역시 뜻을 같이 했다기보다는 저마다 동상이몽을 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것은 동탁 토벌은 뒷전인 채 “여러 부대의 병사 10여 만 명이 나날이 술판만 벌일 뿐, 동탁의 목을 베는 일은 도모하지도 않았다.”는 역사서의 내용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연합군은 동탁군과의 호뢰관전투에서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호뢰관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것은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었다는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 과 유관장 삼형제가 여포를 물리친 ‘호뢰관삼전 여포(虎牢關三戰呂布)’ 사건부터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화웅의 목을 벤 사람은 오히려 삼국지연의』에서 화웅에게 대패한 것으로 기술된 손견 (孫堅)이다. 나관중이 고향 선조(先祖)인 관우를 드높이기 위해 손견을 희생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변화는 원나라 때 유행한 『삼국연의』의 원본격인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를 보면 알수 있는데, 당시에 이미 지금의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유비, 관우, 장비도 동탁 토벌에 나섰다는 기록만 있을 뿐, 진수의 『삼국지』는 물론이고 관련 주석서 어디에도 이들의 공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동탁 토벌에 참가했다는 기록만으로 나관중은 이들 세 사람을 영웅으로 부각시킴으로씨 당대 최고를 자랑하는 그의 예술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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