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룡과 장익덕, 두 쾌남아의 성격과 삶

 

『삼국지연의』를 몇 번 읽은 사람들이라면 관우와 장비보다도 조운을 좋아한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관우와 장비의 활약이 더 뛰어났는데도 사람들이 조운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조운이 진솔하기 때문이다. 조운의 자는 자룡(子龍)이다. 상산(常山) 진정현(眞定嫌) 출신으로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石家庄) 근처의 정정(正定) 사람이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무인으로서 웅장함과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도 올바르고 행동도 단정했다. 주민들이 원소를 따르던 시기에 조운은 용병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공손찬이 “모두 원소를 따르는데 어찌하여 나를 따르느냐?" 고 떠보았다. 조운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천하가 흉흉하여 어느 누가 맞는지 알 수 없기에 백성들은 보이는 것만을 따르는 실정입니다. 우리 고을은 어진 정치를 하는 분을 따르는 것이지,원공(袁公)이 맹목적으로 싫어서 장군을 따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조운의 철학은 어진 정치를 펴는 인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세에 자신의 주인을 찾기 위해 원소를 생각했었고 공손찬에게도 갔지만 조운의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에 유비야말로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주군임을 알고 평생 유비를 위해 헌신한다.


조운은 ‘온몸이 담덩어리’ 인 ‘범 같은 장군’ 이다. 그는『삼국지연의』 전편에 걸쳐 많이 등장하지만, 장판파에서 유선과 감부인을 구해낸 것 외에 커다란 전과(戰果)는 없다. 이는 조운이 유비나 제갈량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하느 라 독자적인 작전을 맡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조운이 유비와 제갈량의 신변경호를 전담한 것은 뛰어난 무예를 갖추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운은 무장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성과는 다르게 대의(大義)를 인식하고 이를 우선시했다. 일을 처리할 때도 겸손하고 신중하며 공정무사(公正無私)했다. 또한 항상 충직하였으며 대의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직간(直諫)할 줄 알았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고 성도 주변의 땅을 장수들에게 주려고 하자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나, 오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도 정세를 설명하며 적극 만류한 것도 조운의 충직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운의 이러한 특성이 호위업무에 적격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유비세력의 근간은 ‘도원결의’ 로 대변되듯 의협심으로 뭉친 일군의 집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휘체계나 군신관계의 질서는 유명무실했다. 삼국정립 을 통해 한나라의 부흥을 꾀하던 유비는 조직의 확장에 따른 국가제도의 정비를 앞두고 관우와 장비에게 본보기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항상 “불효보다 불충이 더 큰 죄”라고 외치며 군신관계로 깍듯이 대하는 조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의(情義)로움은 꿀이 넘친다. 그래서 꿀맛에 빠져 꽃잎이 시드는 것도 모르다 함께 떨어진다. 정의(正義)로움은 가시가 많다. 그래서 일이 다 틀어진 뒤에야 그 뜻의 진정(眞正)함을 안다. 전자는 달지만 오래가지 않고, 후자는 쓰지만 영원하다.

 


장비는 술과 고기를 파는 푸줏간 주인이었다. 신분으로는 하층민인 셈이다. 힘은 천하장사이고 성격은 불같이 사나워서 망나니와 다름 없었다. 하지만 난세인지라 장비의 힘도 써먹을 데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비, 관우와 함께 삼국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비는 자가 익덕(益德)이고 하북성 탁주 사람이다. 탁군이 연(燕)나라 지역이었기에 ‘연인장비’라했다.


팔척 신장에 표범 같은 머리,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을 한 장비는 험상궂은 외모와 함께 목소리 또한 우렁차서 마치 뇌성벽력이 치는 듯했다. 한마디로 무식하고 거칠며 잔인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비의 성격은 교양과 도덕적 품성을 중시 하는 귀족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런 장비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일희일비(一홈一悲)하고 단순쾌활하며 솔직담백한 성격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에 의해 가공된 점이 없지 않다. 『삼국지연 의J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는 각각 최상위계층과 중간계층, 그리고 하위 계층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비도 무식하지만은 않았다. 당양교에서 조조군을 물리친 것이나, 파군태수 엄안을 진심으로 굴복시킨 일 등은 장비의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원나라 때는 『삼국지연의』의 전 단계 작품인『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장비의 무용담과 제갈량의 지략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전기적(傳奇的)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불한당 장비의 모 습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런데도 당시 서민들이 장비를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이 영웅호걸을 바로 장비와 같은 이미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로 오면서 장비의 전기적 색채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장비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한 발짝 옆으로 비켜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장비는 서민층으로부터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지위고하가 아닌 시비와 선악으로 대하고, 정치적인 이합집산이나 가식적인 행동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최고의 권력자를 상대할 때도 변하는 법이 없다. 장비가 항상 서민층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인물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비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술꾼이었다. 술로 인해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술로 인해 장합을 무찌르기도 했다. 또한 장비는 윗사람에게는 유순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했다. 장비의 행동거지를 걱정하던 유비가 "매일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그들을 측근에 임용하는 것은 화를 초래하는 일” 이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장비는 깨우치지 못했고, 급기야는 유비와 함께 오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부하장수들에게 살해됐다. 술과 채찍질이 결국 장비의 죽음을 재촉하였으니, 폭음을 좋아하고 매사에 덕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그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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