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생명, 나무밖에 없다

 

 

< 아시아경제 2020.10.07 >
 


<6> 오래 사는 것

 

'오래 사는 것'은 생명 탄생 30억 년 내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소망이다. 현대 과학의 발달로 사람은 임계치에 가까울 만큼 수명을 연장하는 데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수명을 늘려온 현대 과학도 노화만큼은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증가하는 노인 인구만큼 노인 질환도 느는 건 어쩔 수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기저질환자보다 '노인'을 더 큰 위험군으로 분류하는 것도 그래서다.


결국 '오래 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필요한 것은 '늙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지 싶다.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생명체인 나무를 한번 더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년을 살아가는 나무는 늙어가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점점 더 뜸직해진다. 어린 느티나무보다는 긴 세월을 살아온 늙은 느티나무가 더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빠르게 자라느라 불규칙하게 가지가 솟아나면서 균형 잡지 못하는 어린 나무를 흔히 보게 된다. 나무는 세월의 힘으로 아름다움을 이뤄간다. 나무 곁을 스치는 바람은 중뿔나게 솟은 가지를 다듬어내고, 햇살은 덜 자란 가지를 더 빨리 키우며 몸집의 균형을 잡아간다. 세월이 도담도담 키워내는 아름다움이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나이 들면서 더 아름다워지는 생명체는 나무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는 얼마나 살았을까.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최고의 장수 나무는 '정선 두위봉(斗圍峰) 주목'이다. 강원도 정선 사북읍과 영월 중동면에 걸쳐 있는 해발 1466m 두위봉의 노거수(老巨樹·나이가 많고 커다란 나무)다. 두위봉은 태백산·함백산의 기세에 눌려 '산(山)'이 아니라 '봉(峰)'으로 불리지만 백두대간의 명산이다.


두위봉 정상 부근의 북사면 1340m 고지에 서 있는 정선 두위봉 주목은 제가끔 30m 거리를 두고 세 그루가 모여 있다. 근처에 이뤄진 주목 군락지의 비조목(鼻祖木)이라 할 만한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무려 1400년이다. 서기 600년 즈음, 태백산 넘어 강원도 정선 지역에서 절터를 톺아가던 신라 고승 자장율사의 발걸음 소리에 새싹이 나온 나무다. 신라의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로 해양 국방의 기틀을 강고히 하던 때는 이미 200년이 훌쩍 넘게 큰 나무였다. 고려의 멸망에 대해 한탄하며 두위봉 고개를 넘던 선비들이 처음 지었다는 '정선 아리랑'. '정선 아리랑'이 산 위에 울려 퍼지던 조선 건국 즈음 정선 두위봉 주목은 800년을 넘은 조선 최고의 노거수였다.

산을 오르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정선 두위봉 주목 세 그루 가운데 첫 번째 나무.

1400년 된 정선 '두위봉 주목' 세 그루
1340m 고지 30m씩 거리두고 위치…국내 최장수, 2002년 천연기념물 지정
세 그루 중 가장 오래된 두 번째 나무…이무기가 용 되어 승천하는 모양

 


나무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숲에서는 오래 된 나무를 찾기 어렵다. 가지를 넓게 뻗으며 자랄 수 있는 일정한 영역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 영역이 비좁아 나무는 스트레스로 제풀에 꺾여 수명을 다하기 십상이다. 깊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의 평균 수령이 200년쯤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자라는 속도가 더딘 주목은 생육의 스트레스를 겪어내는 데 유리하다. 정선 두위봉 주목 세 그루가 최고령 나무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특별 조건 덕이다.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정선 두위봉 주목은 긴 세월 동안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나는 사람들 눈에 띄었다 해도 이들이 더디게 자라는 주목의 특징을 가늠하지 못한 탓에 그 가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산림청의 보호수로도 지정되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 후반 산림청 동부지방산림관리청에서 이 나무의 가치를 알아봤다. 산림청 임업연구원은 정밀 조사 끝에 주목 세 그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문화재청은 2002년 6월 29일 세 그루의 주목을 한데 묶어 천연기념물 제433호로 지정했다. 주목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나무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쾌거였다.


세 그루 주목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가운데 서 있는 나무로 1400년을 살아왔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다. 가운데 최고령 주목을 아래 위에서 보위하며 서 있는 다른 두 그루 주목도 얼핏 봐서는 수령이나 크기에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엄청 큰 나무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그루 나무는 가운데 나무보다 조금 젊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임업연구원은 아래 쪽 나무가 1100년, 위쪽 나무가 12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밝혔다. 미미한 차이 같지만 무려 300년이라는 긴 시간의 차이다.


1400년 된 주목의 줄기는 살짝 비틀리고 꼬이면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가운데 부분은 오래 전 썩어 커다란 동공이 생겼다. 이를 외과수술로 메운 흔적이 뚜렷하다. 천년 묵은 구렁이라든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형상이다.


세월의 풍진에 찢기고 뚫리면서 생명을 지탱해온 줄기의 둘레는 4.36m다. 주목으로서는 매우 굵은 편이다. 줄기는 7m쯤 높이에서 둘로 갈라졌다. 그 중 하나는 얼마쯤 허공을 더듬어 오르다 다시 둘로 갈라져 전체적으로 세 개의 큰 가지가 뻗어나와 넓게 퍼졌다. 나무는 17m까지 솟아오르며 주목 특유의 아름다움을 다듬어냈다. 산 봉우리에서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다 이겨내며 마침내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주목이 된 것이다.


가까운 일본에도 신성시되는 오래 된 나무가 있다. 일본 사람들이 무려 7200년이나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큰 나무다. 일본의 선사시대를 가리키는 '조몬시대'부터 살아온 나무라 해서 일본인들이 '조몬스기(繩文杉)'라고 부른다. 조몬시대는 기원전 1만30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를 가리킨다.


'조몬삼나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일명 원령공주·1997)'의 배경이기도 한 아름다운 섬 야쿠시마의 미야노우라 산 정상 부근에 신화처럼 서 있는 큰 나무다.


일본 사람들이 7200년을 살아온 나무라고 이야기하는 일본 야쿠시마의 조몬삼나무.

7200년 살았다는 일본 조몬삼나무
측정 가능한 나이테만 2170년…日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지
야쿠시마 미야노우라 산 정상 부근…日 역사·문화 지탱해온 신화 속 상징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신성하게 여겨온 이 나무는 철저한 보호 상태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친 울타리 바깥의 안내판에 수령 7200년, 높이 26m, 줄기둘레 16m로 명시돼 있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해발 3000m에 이르는 고지다. 등반이 쉽지 않음에도 나무를 직접 보기 위한 일본인 등 관광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수고해서라도 한 번은 봐야 할 아름다운 나무이기 때문이다.


조몬삼나무의 규모는 수령에 비해 작은 편이다. 높이에 비해 둘레가 굵긴 하지만 7200개의 나이테를 품은 줄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정도 규모의 나무라면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있다. 7000년이 아니라 약 700년간 30m 넘게 자란 나무도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첨단 기법을 이용해 측정해봤다. 조사 결과 2170년간 살아온 연륜은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되는 나이테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의 정확한 수치는 발표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식물학에서는 살아 있는 세포로 이뤄진 줄기 바깥쪽 '변재(邊材)'에 대응해 줄기 안쪽을 '심재(心材)'라고 부른다. 나이테가 쌓이는 부분이 심재다. 심재는 죽은 조직이어서 썩어 문드러지게 마련이다. 오래 된 나이테는 확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생물학에서는 대략 400년 넘은 나무의 생물학적 나이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이제 과학계에서는 조몬삼나무를 '7200년 된 신화 속 나무'가 아니라 '2170년보다 더 살아온 나무'라고 부른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지탱해온 신화 속의 한 상징으로 남았다. 일본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일 수밖에 없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무가 살아가는 세월은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다. 숫자 이상으로는 체감되지 않는다. 1400년이든 7200년이든 오래 된 나무가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세월이 건네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한 자리에 우뚝 서서 이겨내며 묵묵히 살아가기 때문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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