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우크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문화도 죽이고 있다”

 

 

< 조선일보 김윤철 한예종 교수 특별 기고, 2022.10.12 >

 


베오그라드 국제연극제에서 개막연설을 한 마리나 다비도바.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개전 이후 대러 제재에 불참했다.  


최근 유럽에서 가장 선망받는 제 56회 베오그라드국제연극제(BITEF)가 지난 9월 23일부터 10월 2일까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렸다. 올해는 노동과 환경을 주제로 유럽을 대표하는 극단과 연극인들이 참여했다.

연극도 연극이지만 무엇보다 나를 뭉클하게 만든 것은 러시아의 대표적 연극 평론가이자 연출·극작가인 마리나 다비도바의 개막 연설이었다. 독일에서 반(半)망명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가 아직도 친(親)러시아 여론이 만만찮은 베오그라드에서 개막 연설을 한 것은 어쩌면 목숨을 건 투쟁이라 하겠다. 세르비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지금까지도 푸틴과 러시아를 응원하는 현수막들이 끝없이 펄럭이고 있다. 러시아를 지지하는 시위도 자주 볼 수 있다.

베오그라드 관객들을 향해 다비도바는 이 전쟁에 동의하지 않는 수많은 러시아인의 목소리도 경청해주기를 요청했다. 러시아와 러시아 문화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이 저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하고 있는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지지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비도바는 개막 연설에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화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음을 고발했다. 

 

그녀에 따르면 러시아 문화는 역사적으로 아시아보다는 서구를 지향해왔고,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유럽 지향성을 구현해왔다. 그런데 스탈린은 문화와 정치의 건강한 긴장 관계를 파괴해버렸다. 그는 문화를 마치 정치 도구처럼 사용하며 문화에서 정치 비판적 성격을 제거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문화 전반의 아방가르드 경향을 무너뜨렸고, 유럽과 문화적으로 단절되게 해 러시아 문화를 초토화했다. 러시아는 급기야 그을린 사막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스탈린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고 그녀는 경고한다. 오히려 스탈린 치하보다도 더 빠르게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연출가, 무대 디자이너, 극작가가 러시아를 탈출했고 현대미술과 현대연극의 모든 중요한 기관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 불행 속에서 무명의 보수파가 러시아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데, 사실상 스탈린의 보수적 혁명도 같은 패턴을 따랐으며, 그때도 역시 ‘저열한 자들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역설한다. “파시즘은 언제나 저열한 자들의 승리다. 지금 우리가 러시아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승리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지금 한 나라가 아닌 두 나라의 파괴를 목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기반 시설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러시아에서는 예술, 과학, 교육, 미디어, 사회 지원 기관 등이 우리 눈앞에서 파괴되고 있다. 

 

문화야말로 이 전쟁에서 가장 참혹하게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내게는 어쩐지 이 말이 팬덤 문화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 사회를 향한 말로 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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