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 간호장교의 전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 조선일보 함영준 마음건강 길(mindgil.com) 대표,  2022.11.19 >

 

 

 


그녀는 91세 할머니다. 그러나 약 한 알 먹지 않는다. 혈압은 120에 70 정도로 정상. 젊은이들 혈관을 갖고 있다. 건강 비결은 따로 없다. 삼시 세끼 다 먹고, 되도록 차 안 몰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산다. 몇 년 전까지 한 번에 2~3㎞씩 조깅도 했다. 지난 겨울 미국 콜로라도 집 근처 횡단보도에서 행인과 부딪쳐 넘어져 오른쪽 팔 골절상을 당했지만 그 안에 철심을 넣고 거뜬히 회복해 씩씩하게 살고 있다.

지난 10월 국군간호사관학교 초청으로 내한한 6·25 참전 간호장교 출신인 이종선 여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전혀 노인네 인상을 받지 않았다. 말의 어조는 힘찼고 속도는 젊은이처럼 빨랐다. 스토리 전개, 기억력도 젊은이 같았다. 6·25전쟁 당시 겪은 일을 날짜와 요일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몸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만 머리는 아직 30세 같아요. 지금도 생각나면 시 쓰고, 여행도 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그녀의 롤모델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주역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 다시 태어난다면 그처럼 큰 야망을 가지고 세상을 한번 뒤흔들어보고 싶다고 한다. 이것이 90대 할머니의 ‘포부’인가?
 


그녀는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했다. 나이 들면 근심, 걱정, 불안 그리고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 회한 같은 것이 많은데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언제 죽어도 좋아요. 다만 남한테 신세 안 끼치고 깨끗하게 죽었으면 하죠. 저는 참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할 것 다 했고, 고생도 했지만…. 친구도 많고 여러 선후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도 받았고….”

어디서 이런 명료한 정신과 힘이 나올까. 혹시 종교를 갖고 있을까?

“아뇨, 없어요. 주변에 목사님들도 계시고 기독교를 믿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순 있어요. ‘주님 영접은 못 해 죄송하지만 저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열심히 살았어요.’”

지난 9월 7일 미국 LA 코리아타운 내 용수산식당에서는 이색적인 추석잔치가 열렸다. 미국에 사는 6·25 참전용사들을 위한 잔치였다. 산호세, 몬태나에 사는 참전용사들이 호텔에 숙소까지 제공받고 잔치에 참여했다.

이 잔치를 주최한 이가 바로 이종선 할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장례식 비용을 털어 추석잔치를 마련했다. 정신이 또렷할 때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그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데 터전이 된 대한민국과 전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날 잔치에 참석한 이는 130여명. 그들은 90세 동료 전우가 자신의 장례식 비용을 털어 추석잔치를 베풀어준 데 대해 감동했다. 이민생활 반백 년 역사상 이런 잔치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이 할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나갈 가상(假想)의 부고기사(Obituary)를 스스로 작성해 발표하기도 했다.

함께 참석한 이상기 목사는 “47년 전 당시 미국에 홀로 있던 내게 가족이 돼 지금까지 도와주셨다”며 “언제나 자신의 삶보다 이웃을 돕는 삶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셨다”고 회고했다.

 


6·25 참전 간호장교 출신인 이종선 할머니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1931년 2월 충북 청원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들 없는 딸부자 집에서 태어나 사내아이처럼 자랐다. 그때는 형편들이 어려워 초등학교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광복 이듬해(1946년)인 15세 때 서울로 가서 공부해 성공하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마치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초등학교만 마친 이후 고향 강원도 통천을 등지고 서울로 야반도주했듯이 말이다.

그녀는 다행히 서울 한 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지내면서 주경야독해 1949년 서울여의전 병원(지금의 고려대 간호대 전신) 부속 간호학교 학생으로 입학했다. 2학년 때 발발한 6·25전쟁 당시 미처 피란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면서 북한 인민군 부상병을 치료해야 했고, 급기야 평양까지 끌려가서 김일성대학병원에서 부상자를 간호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남하하는 북한군을 따라 경기도, 충청도 지역으로 내려갔는데 이동 중 미 공군의 B-29 폭격으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러다 청주를 지나가면서 고향을 찾아갔다. 쌀자루를 메고 갔는데 이번에는 거기서 국군에게 잡혀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이후 국군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 국군 부상병을 간호하게 됐다. 1951년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란 가서는 간호장교 시험에 합격해 국군 소위로 복무하게 된다.

6·25전쟁 당시 이야기만 나오면 이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6·25 얘기, 파독 광부, 간호사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눈물이 나와. 언제 이 눈물이 그칠지….”

1955년 24살의 간호장교 이종선 대위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다. 전함 위에 씩씩하게 서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마취학을 공부하러 가는 길, 가슴이 벅찼다.

“그때는 미국 가본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죠. 마치 하늘에 별을 따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질긴 목숨이었다. 전쟁통에 간호사로서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돌보다가 위기에 처한 것이 몇 번이었던지. 처형장에서 시체에 가려 목숨을 부지한 적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다 폭격을 맞기도 하고 질질 끌려다니면서 집단구타를 당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녀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전쟁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당당하게 간호장교 시험에 합격했고 외국어대 영어학과를 수료했다.

7개월간 단기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군내 마취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돼 4년 뒤인 1959년 두 번째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언어문제 등 장벽이 허다하게 많았지만 그녀는 억척이었다. 하루에 2~3시간만 자고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한 결과,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 마취과 간호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미국 마취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63년에 귀국해 1965년 말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기 전까지 육군병원 등에서 전문적인 마취술을 보급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후 그녀는 새로운 삶을 미국에서 찾기로 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취업이민을 갔다. 미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있는 미 연방 재향군인병원 등에서 은퇴 전까지 20년 넘게 일하며 미군 출신 환자들과 동고동락했다. 환자들은 언제나 헌신적인 그녀를 ‘작은 천사(Little Angel)’, 또는 이름의 마지막 자 ‘선’을 따 ‘서니(Sunny)’라고 정답게 불렀다.

 



- 미국 생활 어떠셨나요? 그땐 한국 사람도 없었고 물정도 잘 몰랐고 인종차별도 심했을텐데요.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들이 잘해줬죠. 내가 인덕이 많아요. 내가 가는 데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들이 잘해주고. 내가 지남철 같아요. 사람을 끄는 능력이 있어요. 요즘도 상점에 가면 ‘할머니만 오시면 손님들이 많이 온다’는 얘기를 듣죠.”

60세가 넘은 1993년 은퇴 후 그녀는 자신의 인생 3막으로 ‘나눠주는 삶’을 택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뭔가 주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야.”

우선 자신이 살던 미국 와이오밍주의 프리스턴대학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카운슬러로 일하면서 주위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늘그막에 편한 삶을 택할 수도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수입 중 많은 부분을 남을 위해 쓴다. 자신처럼 배우지 못해 마음 아파하던 한 중국 여학생을 우연히 만나 딸처럼 돌보며 미국에서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또 예순 중반을 넘긴 나이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멀고 먼 아마존 오지까지 목숨을 걸고 의료봉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의 몸을 닦고 커다란 화농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남을 위해 바친 삶. 그는 여자라면 당연히 갖출 법도 한 변변한 화장품 하나 없다.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한 목사가 “이제 제발 당신을 위해 사십시오”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나 아직 젊어. 이래 봬도 만년 소녀라고.”

2000년대 들어 나이 일흔을 넘겼다. 그 나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이 회상형이고 여러 마음속 상처 속에서 삶에 무뎌지는 법이지만 그녀만큼은 예외였다. 아직도 그의 삶은 젊은이들처럼 예측불허다. 언뜻 생각난 김에 기고한 시(詩)가 좋은 시로 뽑혀 책에 실리기도 했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따라 로키산맥 밑자락에 근사한 카우보이 동상을 세우고 거기에 시 한 수까지 붙이기도 했단다.

그녀는 2000년 자신의 이야기를 ‘아직도 나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두리출판)라는 책으로 펴냈다. 용감무쌍하게도 무작정 청와대 이메일로 원고를 보냈고 내용을 본 청와대 측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겨주면서 출판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출판 수익금 전액을 결식아동 돕기에 기부했다.

“과거 이야기를 꼬치꼬치 밝힌 것은 내가 과거에 파묻혔기 때문이 아니야. 과거를 돌아보면서 한 막에 마침표를 찍고 이제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기 위함이었지.”

그녀는 은퇴 후에도 세계 43개국을 돌아다니는 등 후회 없는 일생을 살았다고 했다. “한국에도 6·25 참전 용사로 자주 와서 훈장도 받고 대접도 많이 받았고. 경찰 에스코트를 받는 VIP 대접까지 받았지. 중동 두바이에는 2006년 경찰 호위하에 왕궁 행차까지 했고.”

이종선 할머니는 국군간호사관학교가 지난 10월 ‘임관 50·40·30주년을 맞은 동문을 위한 학교초청기념행사’에 6·25전쟁 참전용사 겸 원로 선배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 90 평생 후회되는 일이 있나요. “지금 인생 만족합니다. 내 운명이나 나라에 대해 공헌한 것도 그렇고요. 굳이 말하자면 어렸을 적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공부 제대로 못한 것이 후회될 뿐이죠.”

- 다시 산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남자로 태어나 나라 한번 흔들고 싶어요. 리더가 되고 싶죠. 프랑스 나폴레옹이 제 롤모델입니다. 그 사람 같은 능력과 배짱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할머니의 콜로라도주 집 서재에는6·25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인 맥아더 장군,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그의 동생인 밥 케네디 전 법무장관, 레이건 전 대통령,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사진이 걸려 있다.

- 선생님 주변에 많은 분들이 세상을 뜨셨을 텐데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전혀 두렵지 않아요. 언제든 갈 준비가 돼 있어요. 다만 내 머리가 치매 등으로 바보가 되기 전에 갔으면 해요.”

- 종교가 있나요. “없습니다.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살아오고 남에게 해코지하거나 부정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겠나 하고 생각하죠.”

- 때로 마음이 힘들고 불안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땐 성당 가서 1분간 기도하죠. 신이 계신다면 들어주시지 않겠어요? 제 기도는 항상 3단계입니다. 제일 먼저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 두 번째 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기도입니다. 항상 세상의 안녕과 행복이 먼저고 나는 마지막이죠.”

이 할머니는 이번 한국 여행 때 충북 단양에 집을 한 채 사놓았다. 미국에서 다 정리하고 내년에 한국으로 들어와 살다가 국립묘지에 묻힐 계획이다.

- 행복한 죽음과 불행한 죽음은 어떤 것일까요. “자손들과 식사하시다가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그렇게 가고 싶죠. 불행한 죽음은 오랫동안 아프면서 남 신세 지다 가는 것, 정말 피하고 싶어요.”

- 건강은 어떠신가요. “큰 병 치른 적도 없고 지금도 약은 전혀 먹지 않아요. 아침은 과일 주스 먹고, 점심, 저녁은 밥을 해 먹습니다.”

운동은 은퇴 후 헬스클럽에 다녔고, 지금도 매일 최소한 6000보 이상 걷는다. 매사 부지런히 몸을 쓰려고 노력한다. 차가 두 대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쇼핑갈 때나 이용한다.

보통 밤 10시쯤 자는데 불면증도 없고 수면제도 먹어본 적이 없다.  술도 안 먹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보니 늘 자기관리에 충실하며 고지식하게 살았다고 한다.

- 한국 사회에 와보니 어떠세요. “지금 미국 사회는 굉장히 후집니다.(웃음) 그런데 미국인은 굉장히 순박해요. 단순하죠. 우린 요령을 많이 부리지만. 미국인들은 1주일 일 안 하면 못 사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한국인들은 저축하고 살죠. 미국은 살기 편해요. 모양 안 내도 되고 ‘워킹 레이디’로 사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너무 허영이 많은 것 같아요. 자식들에게도 너무 오냐오냐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얼마전 서울에 갔을 때 지하철에서 한 젊은 여성 때문에 화가 치밀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짐을 들고 지하철 9호선을 탔는데 매우 혼잡했어요. 내 앞에 자리가 나서 앉으려는데 웬 20대 아가씨가 잽싸게 앉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영어로 뭐라고 했죠. 그런데 들은 척도 안하는 거예요. 보다 못해 저쪽 떨어진 곳에 한 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주셨는데 그때 너무 환멸을 느꼈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왜 그런가…. 그런데 강원도 영월에 가보니 너무 아름답고 해서, 결국 한국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했죠.”

- 인생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남에게 나눠주는 일이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남을 돕는 일을 잘하고 제일 기뻐요. 예전 젊은 시절에도 LA 비행장에서 헤매는 한국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쳤어요. 그걸 다 해결해줘야 해요. 한국 현역 소령계급장을 단 분이 밤에 헤맬 때 그분을 이 목사 집에 자게 했어요.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너무나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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