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정 목표도 공감 능력도 없는 윤 대통령, 여당이 책임져야
< 한겨레, 성한용 기자, 2022-11-13 >
인사·정치·위기관리 실패…부실한 대통령 리더십
‘대통령실 이전’-‘지방선거 승리’ 긍정 평가할 만
윤석열 대통령 세운 보수 논객-정치인들 책임
윤석열 대통령의 5월10일 취임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는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납니다.
“저는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고 존경받는 나라를 위대한 국민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고 존경받는 나라’가 될 조짐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사법시험 출신 엘리트들이 주인인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그리고 대통령실과 행정부 요직에 포진한 법조 출신 공무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고 존경받는 나라’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는 나라’가 된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가벼운 입과 10·29 이태원 참사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시작은 좋았습니다. 두 가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통령 집무실 이전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겼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특유의 결단과 고집이 아니면 관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국민 여론은 반대가 많았고 지금도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는 제왕적 대통령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대통령실 이전은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6·1 지방선거 승리입니다.
국민의힘은 17곳 광역단체장 선거 중 12곳에서 이겼습니다. 서울시장, 부산시장을 지켰고, 인천시장, 강원지사, 대전시장, 세종시장, 충북지사, 충남지사, 울산시장을 가져왔습니다. 226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146개를 이겼습니다. 국회의원 재보선 7개 가운데 5개를 이겼습니다. 국민의힘의 선거 승리는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입니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정치를 잘했다는 증거입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6개월 동안 잘못한 것이 더 많았습니다.
첫째, 인사의 실패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과 가까운 검찰과 법조 출신 인사들을 대통령실과 행정부에 대거 기용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이명박 대통령의 참모들, 그리고 김건희 여사와 아는 사람들을 발탁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인사를 못 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사의 실패는 국정의 실패로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정치의 실패입니다.
대통령은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도 대화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서 대화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준석 대표를 쫓아냈습니다. 이재명 대표도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초당적 협력”(5월16일 국회 시정연설)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셋째, 위기관리의 실패입니다.
윤석열 행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예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화를 내며 경찰과 소방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레고랜드 사태, 흥국생명 사태를 보면 금융위기나 경제위기를 막을 실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반도 위기관리 능력은 있을까요? 최근 상황을 보면 이러다가 혹시 전쟁이 터지는 것 아닌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 모든 국정 실패의 원인은 윤석열 대통령의 부실한 리더십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합니다. 검사 시절부터 배인 습관입니다. 평소에도 아슬아슬했는데 결국 국외 순방 중 비속어 논란이 터졌습니다.
잘못을 인정할 줄 모릅니다. 비속어 논란을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도 진정성이 별로 없는 “죄송한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넘어갔습니다. 뒤끝이 길고 협량합니다. 비속어 논란 보도 등을 이유로 국외순방 전용기에 <문화방송> 취재진을 태우지 않았습니다.
정치인을 싫어합니다. 특히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과 국회를 우습게 아는 것 같습니다. 김은혜 홍보수석의 “웃기고 있네” 메모 사건을 “종합적으로 다 좀 이해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감싼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6개월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어떨까요? 최근 조간신문의 윤석열 대통령 6개월 평가 기사 또는 사설 제목입니다.
“국정 방향은 흐릿, 주저앉은 안전…리더십의 복합 위기”(경향)
“공정-참신 내세운 6개월…‘윤석열표 국정목표-성과가 안 보인다”(동아)
“돌발 악재에 ‘윤노믹스’ 브랜드 깜깜…국민 체감할 정책 중점둬야”(서울)
“윤 대통령 이제라도 통합 협치 나서야”(세계)
“윤석열 정부 6개월…국정 쇄신 필요한 시점”(중앙)
“윤 대통령 6개월 ‘국민 신뢰 잃었다’”(한겨레)
“국정 ‘부정평가’ 60%대…‘애매한 침묵’에 돌아오지 않는 민심”(한국)
어떻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각 신문의 진단과 처방을 매우 잘 담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돌아선 민심은 여론조사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5월13일 발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52%였습니다. 광주·전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긍정 평가가 높았습니다. 40대와 50대는 부정 평가가 높았지만 다른 연령층에서는 모두 긍정 평가가 많았습니다.
6개월 뒤인 11월11일 발표한 긍정 평가는 30%였습니다. 대구·경북만 긍정 50% 대 부정 41%로 긍정 평가가 많았지만, 다른 모든 지역은 부정 평가가 더 많았습니다. 연령별로는 60대와 70대 이상만 긍정 평가가 우세했습니다. 6개월 사이의 변화를 지역별로 보면 수도권, 충청권, 부산·울산·경남의 민심이 뒤집혔습니다. 취임 직후에는 긍정 평가가 더 높았지만 6개월 뒤 부정 평가가 더 많은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연령별로는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18~29살은 취임 직후 45% 대 41%로 긍정 평가가 많았지만, 6개월 만에 16% 대 71%로 부정 평가가 훨씬 높아졌습니다. 30대도 취임 직후 54% 대 38%로 긍정 평가가 더 높았는데, 6개월 뒤에는 18% 대 76%로 부정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아졌습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누리집 참고)
정리하자면 윤석열 대통령 6개월 동안 젊은층의 민심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 하락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요? 윤석열 대통령은 왜 취임 6개월 만에 이렇게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했을까요?
저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목표가 없습니다.
최근 <경향신문> 김민아 논설실장이 ‘윤석열,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윤 대통령의 목표는 ‘대통령이 되는 일’ 자체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권한·권력에 책임이 따른다는 점도 생각지 못한 듯하다.”
<한겨레> 신영전 칼럼 ‘꿀잠과 단꿈, 그리고 꿈 없는 대통령’도 있습니다.
“꿈 없는 대통령도 문제다. 대통령이 되는 것 이외에는 꿈이 없었던 이는 그것을 이루고 나니 더는 꿀 꿈이 없다.”
두 칼럼이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둘째, 공감 능력 결여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지하 침수 현장에서 “왜 미리 대피가 안 됐나?”라고 물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골목길에서는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라고 물었습니다. 엘리트 출신이라서 그런지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 결함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으로 대한민국을 바로 세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문재인 대통령의 민주당이 정권을 계속 잡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찍었습니다.
유권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가 4년 6개월 남았습니다. 탄핵하지 않는 한 그를 대통령직에서 몰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사태를 누가 바로 잡아야 할까요?
저는 검찰총장 윤석열을 대통령 윤석열로 불러낸 이른바 보수 논객들, 그리고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당 정부의 재집권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며 정치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윤석열 검사를 대선후보로 세워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바랍니다. 윤석열 대통령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하루빨리 제대로 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바로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2. [강준만 칼럼]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
< 한겨레,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2022-11-13 >
장대익(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은 “우리의 편 가르기는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온다”며 이렇게 말한다. “공감은 일종의 인지 및 감정을 소비하는 자원이므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부족해진다. 자기 집단에만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나는 공감에 반대한다.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며 우리는 공감이 없을 때 더 공평하고 공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이 <공감의 배신>(2016)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그가 칼럼을 통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한 사회학자는 블룸을 “지적 망신이자 도덕적 괴물”이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왜 이런 비난이 나왔는지는 포털에서 “공감 능력이 없다”는 문장을 검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게 얼마나 심한 비난, 아니 욕인지 실감하실 게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말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정치적 비방 용도로 자주 쓰이곤 하는데, ‘소시오패스’라는 딱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말은 보수보다는 진보 쪽에서 더 많이 쓰는 욕이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공감은 진보적인 도덕적 세계관의 핵심이다”라고 주장했듯이, 주로 진보가 보수를 향해 자주 퍼붓는 비난 중의 하나가 바로 공감 능력의 결여다. 그러나 블룸의 경우처럼 최근 들어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 같다.
독일의 인지과학자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공감의 두 얼굴>(2017)이란 책에서 “공감은 자아 상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흑백 사고 또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인다”며 “공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최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에서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진화학자 장대익이 지난달 말 출간한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라는 책은 블룸이나 브라이트하우프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고민의 결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을 “‘타인이라는 지옥’에서 ‘타인이라는 복지’로의 변환을 상상하는 모든 세계시민에게” 바치겠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의 목표는 야심만만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증오와 혐오의 집단적 갈등이 바람직하거나 생산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보자면 이 책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편 가르기와 그에 따른 국민적 차원의 집단 패싸움에 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대익은 “우리의 편 가르기는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온다”며 이렇게 말한다. “공감은 일종의 인지 및 감정을 소비하는 자원이므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부족해진다. 자기 집단에만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최근 상황이 딱 이렇다. 특정 정치인을 둘러싸고 광화문과 서초동 법원으로 갈라진 무리를 보지 않았는가? 이 두 광장의 갈등은 내집단에 대한 공감이 너무 강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다. 공감 그 자체가 문제 될 건 없지만,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늘 선택적 과잉 공감을 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 편에 대해선 무한대의 공감을 하지만 반대편에 대해선 공감은커녕 최소한의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건 악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미 자기편에 쏟은 무한대의 공감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고 한다. 심지어 반대편에는 비인간적으로 잔인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선택적 과잉 공감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을까? 장대익은 감정이입과 같은 정서적 공감을 넘어서 역지사지와 같은 인지적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내집단 편향을 만드는 깊고 감정적인 공감을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공감의 ‘구심력’으로, 외집단을 고려하는 넓고 이성적인 공감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는 공감의 ‘원심력’으로 부른다.
그러면서 이런 해법을 제시한다. “공감의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기존의 맹목적 공감 예찬론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 공감 상태가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 인정해도 많은 게 달라질 수 있다. 선택적 과잉 공감은 아예 그 어떤 공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면 좋겠다.
3. 성한용·강준만 칼럼에 부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한겨레신문, 유정민 | 50대 서울시민, 2022-11-23 >
이 글을 쓰기 전에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었다. 오래전부터 책꽂이에만 있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지난주 성한용 선임기자의 ‘국정 목표도 공감 능력도 없는 윤 대통령, 여당이 책임져야’와 강준만 교수의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 칼럼 때문이었다. 하워드 진의 삶이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92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하워드 진은 교수로서 많은 저술과 강연만 아니라 인종차별, 베트남전쟁 등 시대의 문제에서도 정치적 견해를 숨기지 않고 발언하고 행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제목의 책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가 ‘소통 불가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텔레비전(TV) 토론 등에서 윤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가기엔 모르는 것이 많고, 생각하는 바와 판단력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약점은 취임 뒤 업무를 수행하면서 보완되기는커녕 더 확대됐고 불통을 향해 가고 있다. 온 국민의 귀를 시험하고, 사실을 부정하고, 일방통행식 발언으로 반대편의 말은 애써 무시한다.
하워드 진이 말했듯이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성한용 기자와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아쉽고 부적절했다.
12일치 신문에 실린 성한용 기자의 글은 윤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균형을 맞추고자 그랬는지 글 앞부분에 윤 대통령의 두가지 긍정적인 점을 언급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지방선거 승리다. 지방선거 승리야 사실이므로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사안일 수 있으나 졸속으로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윤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얘기한 예산은 496억원이었지만, 야당에서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용 문제 말고도 추진 과정에서 불법의혹 등과 관련해 참여연대에서는 감사원에 감사청구서를 제출한 상태다.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이 이전 이유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했지만 대통령의 의식이 바뀌었나? 성한용 기자는 대통령실 이전이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했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가? 공간은 옮겨졌지만, 의식은 바뀌지 않았고 대통령 특유의 고집과 불통은 심화됐다.
14일치 신문에 실린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10월29일 이태원 참사 이후 그가 처음으로 쓴 칼럼이었다. 다른 매체에 기고한 칼럼이 있는지 검색했지만 10월26일치 <경향신문>에 쓴 게 가장 최근이었다. 일간지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시의성이다. 그런데 강 교수는 어떤 사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선택적 과잉 공감”이라고 한 것인지 생뚱맞다. 이태원 참사 이후 20여일이 지났건만 대통령은 물론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사과나 책임지고 사퇴한 사람은 없다. 이런 정부를 향해 ‘윤석열 퇴진’, ‘김건희 수사’, ‘국정조사’를 외치는 촛불시위대를 향해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이라고 한 것인지 묻고 싶다. 오피니언 리더이자 언론학자인 강준만 교수가 최근 시국에는 침묵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칼럼은 차라리 장대익 교수의 책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를 소개하는 서평기사로 적절했다.
언론에서 다양한 의견수렴을 위해 양적 객관성은 어느 정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질적 측면, 즉 내용에서는 <한겨레>다운 관점과 명철한 비판 정신을 기대한다.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입니다.!”(하워드 진)
4. [강준만 칼럼]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한다
< 한겨레,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2022-12-11 >
지난 11월24일 <한겨레> ‘왜냐면’에 실린 독자 유정민씨의 ‘성한용·강준만 칼럼에 부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글을 잘 읽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잖아도 나의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행여 ‘자기 과대평가’로 여겨지는 게 아닌가 싶어 망설이던 중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를 주셨으니 이만저만 고마운 게 아니다. 제게 주신 고언에 답을 드리고자 한다.
나는 유씨가 인용한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시각이나 사고의 틀을 현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진의 책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직접 겪은 일들과 생각을 담은 ‘자전적 역사 에세이’이며, 그가 중립에 반대한 주제는 인종차별과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었다. 나 역시 그런 문제라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생각하며, 선악 이분법은 불가피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 한국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에 그런 이분법을 쓰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런 이분법이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하다. 예컨대, 특정 지역민을 모독하고 비하하는 짓을 평가하는 데에 중립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사적 영역에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핏대를 올리면서 거친 욕설을 퍼붓곤 한다. 하지만 정치는 다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민주화 투쟁을 했거나 지지했던 분들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 때문에 반대편 정치세력이나 그 지지자들을 존중하기 어렵겠지만, 그런 반감은 직접 표출하기보다는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 해소하는 게 바람직하다.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우리 편이 잘하도록 애써야 한다. 물론 반대편에 대한 공격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편이 잘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반대편 공격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 정치에선 우리 편이 잘하도록 애쓰는 게 실종되고 말았다. 우리 편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우리 편은 무조건 옹호하고 반대편은 무조건 공격하는 게 정치, 정치참여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자기 성찰과 반성은 씨가 말랐다.
적어도 ‘조국 사태’ 이후 진보진영 일각엔 “이런 식으로 가면 문재인 정권은 망한다”며 펄펄 뛴 소수가 있었다. 그들이 옳았다. 그러나 망하는 길을 택한 다수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들을 ‘배신자’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자신들의 과오에 면죄부를 얻으려는 이기적 탐욕 때문인가?
문 정권을 망하는 길로 몰아간 주동자들은 고개를 떨구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윤석열 정권을 공격하는 증오·혐오의 선동에 몰두하고 있다. 윤 정권 비판은 백번 옳지만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게 국익은 물론 당파적 이익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건 아닐까?
진보언론도 성찰과 반성을 모른다. 칼럼들은 매일같이 윤석열과 윤 정권 비판 일색이다. 윤석열이 비판할 만한 언행들을 풍성하게 제공해주고 있으니, 그런 ‘비판 일색’이 옳다고 믿는 걸까? 우리 편이 잘하는지도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닐까? 민주당에선 윤 정권 못지않게 한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에 관해선 별말이 없다. 권력은 정부·여당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게 옳다는 건가? 문 정권 때도 그랬던가?
나는 문제의 내 칼럼이 서평기사로 적절했다는 유씨의 비판엔 일리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시의성’을 무시한 ‘최근 시국에 대한 침묵’으로 보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윤석열·국민의힘과 이재명·민주당은 서로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하며, 글을 통해서나마 그런 일에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간 내가 쓴 글의 대부분은 ‘증오·혐오정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다만 나는 <한겨레>에선 직설법을 피하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서평 형식의 글을 선호했다. 독자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다수 독자는 내심 “우리의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지 마라. 그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들을 더 많이 보여달라. 우리를 결집시킬 내용을 달라”(비키 쿤켈)고 외치고 있다.
그런 만족감을 원하는 독자들께 나는 결코 좋은 필자는 아니다. 그래서 기고를 중단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차례 했지만, 소수도 존중하는 다양성의 가치를 포기할 순 없었다. 다수 독자께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우리 모두 기존 ‘전쟁으로서의 정치’ 모델을 의심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을 실천하면 좋겠다. (G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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