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를 기다리며
< 조선일보,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 소장, 2022.12.07 >
아름다운 자연은 언제든 찾아도 좋다. 하지만, 특별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서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며칠 전 지리산 쌍계사에 들렀다가 국사암의 노거수 느티나무를 찾았다. 잎을 모두 떨군 느티나무는 잘생긴 수형을 보여주었다. 가을 단풍이 진 뒤 겨울철에나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지리산 노고단에는 눈꽃과 더불어 ‘상고대’가 피었다. 상고대는 겨울철 안개 낀 산이나 물가에 주로 나타난다. 나무에 내린 서리여서 수상(樹霜)이라 불리는 ‘서리꽃’이다. 서리꽃은 새벽에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고 햇볕을 쐬면 스르르 사라진다. 그 아름다운 찰나의 시기를 잡기란 쉽지 않다.
겨울을 상징하는 동백꽃이 제주에 활짝 피었다는 소식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동백꽃을 보러 겨울에 선운사에 갔다가는,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만 흥얼거리고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선운사 동백숲’은 겨울에 피는 동백(冬栢)이 아니라, 봄에 피는 춘백(春栢)이다. 선운사는 벚꽃이 필 즈음 가야 동백숲에 핀 꽃과 땅에 송이채 떨어진 꽃을 함께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절 아름다움이 무색할 정도로 사계절 풍경이 변하고 있다. 급격한 기후변화와 각종 재해로 인해 나무를 포함한 자연유산이 위기이다. 너른 품을 내어주는 나무는 우리와 같이 생멸하는 존재다. 그 지켜야 할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서둘러야 한다. ‘자연유산법’도 마련해야 한다.
드라마에 나와 화제가 된 ‘우영우 팽나무’는 대중문화가 자연유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례다. 오랜 세월 마을을 품어준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드라마 내용 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지역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게 되어, 적절한 시기에 주민과 함께 나무의 시간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나무의 시간처럼 우리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있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고 그리워만 하기엔 아까운 시간이 지금도 흘러간다. 서리꽃이 사그라진 자리에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나무처럼 우리의 시간도 단단하고 아름답길 소망한다.
'살아가는 이야기 > 기후 환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속도면 2월 벚꽃축제"…꿀벌에게 악몽 덮쳤다 (0) | 2023.03.28 |
---|---|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봄꽃 (0) | 2023.03.22 |
상고대 (1) | 2022.12.29 |
50년 만에 역대급 추위 원인 '북극진동'...날씨 언제 풀리나? (0) | 2022.12.29 |
평생 내가 남긴 쓰레기 얼마나 될까 (0) | 2022.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