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끄러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23-01-04 >

 

 

 

우리가 아는 이 나라의 이름난 작가 중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는 사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부끄러움 때문에 하늘을 쳐다보지 않겠다던 작가도 이 나라에 살다 갔다. 반세기 넘게 작가라는 직함을 달고 지냈어도, 그는 제 이름이 표지에 박힌 책은 살면서 딱 세권만 냈다.


그의 책을 처음 본 건 삼십년도 더 지난 일이다. 어둑한 외삼촌 방 책장에서 어쩌다 꺼내 읽은 그 책에는 세상없이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문장만 보아서는 성경 구절 같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대학생이 돼 알게 된 건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계급과 혁명에 대한 강박이 가슴 뜨거운 이들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곧잘 리얼리즘 계열에 속해 있던 또 다른 저명 작가의 단편과 비교당했다. 둘의 차이가 “노동계급에 대한 근원적 신뢰인가 감상적 연민인가에 있다”는 평은 점잖은 축에 속했다. 민중문학 하는 쪽의 이름난 비평가는 그의 책이 “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고 쏘아붙였다.


평가야 어찌 됐든 멋진 글이 쓰고 싶던 많은 이가 그를 선망했다. 짧고 뼈만 남은 문장으로도 얼마든지 빛나는 글을 빚어낼 수 있다는 걸 그가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밑줄 긋고, 옮겨 적은 문장은 이런 것들이다. “부엌에는 세개의 칼이 있다. 두개는 식칼이다.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길다.” “그는 인간의 숭고함·고통·구원을 말했다. 아버지에게는 숭고함도 없었고, 구원도 있을 리 없었다. 고통만 있었다.”


기자가 되고서도 한동안은 잊을 만하면 그의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그가 부끄러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부끄러움 때문에 더는 글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사정을 제목만 보아서는 공상과학 장르물로 오해받기 쉬운 두번째 단편집에서 담담하게 고백했다.


나도 모르게 작가가 되었으나 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작가라고 꼭 글을 써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는 없는 법에 감사하며 우리가 사는 도시에 낯선 무엇이 기어들어와 사람들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며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잊고 지내던 그의 문장들이 나를 다시 찾아온 건 법무장관 부부의 자녀 입시부정 의혹으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던 3년 전 여름이다. 바르고 단정해 보이던 그 부부가 딸에게 만들어준 인위적 행운의 비윤리성에 관해 내가 이야기하자, 그를 두둔하는 선배 하나는 인지상정이란 값싼 보편율을 앞세워 괴롭기 짝이 없는 추체험을 내게 요구했다. 네가 그 사람 처지였으면 안 그럴 자신이 있겠냐는 게 그의 변론 요지였다. 한때는 선배 역시 유복했던 제 처지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어둡고 낮은 곳으로 제 존재를 옮겨 가려 했었다는 기억이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그날 저녁 펼쳐 든 건 마흔을 갓 넘긴 작가가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다”며 강원도 탄광촌에 머물며 쓴 산문집이었다. 문장 몇개가 송곳이 되어 가슴을 후볐다. “그들은 좋은 말을 수없이 골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음에 한 일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들이 한 많은 말은 간단히 다음 몇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가 죄지을 차례가 되었다!’”


몇번의 선거가 있었고, 정권의 주인 따라 세상도 바뀌었다. 그러나 넘치는 건 팽팽하게 날이 선 칼의 언어뿐, 더듬거리는 부끄러움의 말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공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이 나라 정의파들은 여전히 제 허물은 부끄러워 않고 남 잘못만 미워하는 탓이다.


작가는 마흔한살에 낸 단편집의 글 하나를 이런 문장들로 매듭지었다. ‘부끄러움’이란 단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난장이의 이야기를 읽고 눈물이 나 혼났다고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경쾌하게 들렸다. 말할 수 없이 창피하고,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었다. 나는 스스로 하늘을 보지 않기로 했다.”


성탄절 저녁, 스스로 보지 않겠다던 하늘로 홀연히 떠나버린 그의 안식을, 이 보잘것없는 글로써 대신 빌어본다.

 

 

 

 

 

2. 

 

난쏘공, 조세희, 침묵의 뿌리

 

< 경향신문,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2023.01.06 >

 

 

숲을 ‘후드려’ 팰 기세의 소나기가 그친 뒤 그래도 세상을 마지막으로 어루만지는 건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거의 동그란 물방울 하나이듯, 어쩐지 속은 줄도 모르게 속아서 그 무엇에게 진 기분으로 울적할 적에 오갈 데 없는 마음을 토닥여주는 둥근 문장들이 있었다. 그 책이 풍기는 진한 여운은 어둑한 어둠 넘어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과 함께 시골에 두고 온 내 어린 시절 같아서 아주 가끔 시선을 멀리 열한 시 방향의 공중으로 던지게 하였다. 그럴 때면 목구멍이 조금 간지러워지고, 나 같은 조무래기마저 피해 도망가던 송아지 생각도 났다.

<난쏘공>을 빚어낸 작가의 부음을 듣고 저 그윽한 문장만을 인용하여 짧은 글 한 편을 짓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참 아껴가며 읽었던 그 책을 다시 꺼내고, 선생의 사진에 관한 글도 찾아 읽는다. 아, 혀끝에 번져오는 묵직한 통증.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한다.

“미술가가 꿈속에서 빛깔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작가는 꿈속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많은 말들과 만난다. 그해에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가 써야 할 말들이 끝없이 이어져 나와 정말 때에 어울리는 나의 말들아 너희도 이제 잠을 좀 자고 내가 깨어나 일할 때 차례로 일어나 나와라 부탁할 정도였다. 나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지만 깊이 잠들 수 없었다. 어떤 말들은 끝내 잠자지 않고 다가와 나를 잡아 흔들었다. 나는 빨리 써 달라고 보채는 그 말들을 머리맡 빈 커피잔에 넣어 받침접시로 눌러놓은 다음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침묵의 뿌리, 20쪽, 열화당)

간밤에 눈이 또 왔다. 심학산 아래 냉골의 쪽방에서 혼자 뒹구는 날이 많다. 떡국을 끓이려는데 분홍색 그릇 하나가 새삼 눈으로 툭 들어왔다. 어라, 이건 어머니의 손때 묻은 오래된 김치보시기가 아닌가. 설설 오는 눈은 그 뿌리가 명확하게 하늘이고 그곳의 근황이 얼마간 묻어 있기 마련이다. 무슨 말씀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은 눈을 한가득 분홍그릇에 담아 머리맡에 놓았다. 눈은 물이 되고 물은 또 먼지를 업겠다 흩어지겠지. 밤마다 속삭이며 야위어가는 물그릇. 냉방에서도 머리맡이 후끈해지고 나는 모처럼 색깔 있는 꿈을 꿀 것 같았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3.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 경향신문, 인아영 문학평론가,  2023.01.05 >



 


근래 소설에서 읽은 가장 섬뜩한 장면. “원하는 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집을 팔겠다는 집주인의 통보를 받고는 주변의 이사 소식에 민감해지는 40대 부부. 독서 교습으로 가르치던 학생이 옆동네로 이사 간다는 이야기에 곧장 “자가래?”라고 묻는 남편에게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 아내는 짐짓 시간여행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집주인이 우리한테 조금 더 대출받아 이 집 사라 했을 때. 아니, 비트코인이나 주식이 훨씬 나았으려나?”라는 대답에 아내의 수치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가 살아있던 때가 아니라, 기껏 지금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때라고? 정말 진심일까봐 아내는 더 묻지 못한다. 김애란의 ‘좋은 이웃’(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의 한 대목이다.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고 가끔은 기부도 하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자의식으로 살아왔던 부부는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앞에서 내면의 무언가가 조금씩 무너진다. 자신이 베풀고 있다고 여겼던 장애 학생이 더 좋은 아파트에 자가로 이사 간다는 소식에는 속이 뒤틀리고,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쥔 게 있는 세대라며 자위하다가도 자신보다 돈 많은 신입 앞에서는 무슨 조언을 하기도 멋쩍어지며, 공동체·이웃·연대라는 개념을 가르치다가도 “선생님은 다 믿어요? 이 책에 있는 말들”이라는 학생의 물음에 당황을 숨기지 못한다. 이것은 단지 집값에 목매는 중산층 중년 부부의 세대적·계급적 고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속물이 되어버렸다는 반성과 자조가 아니라, 어디까지가 속물이고 아닌지를 알 수 없어졌다는 시대적 불안. 기본 욕구와 탐욕, 생존과 투기 사이에서 길을 잃은 시대에 선악의 경계는 일상에서 얼마나 쉽게 녹아 없어지는지. 늘 그렇듯 김애란 소설의 윤리적인 딜레마는 시대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건드린다.

그런데 선악이라니, 유난스러운 말로 들린다면 이 감각 역시 시대적 정동일 수 있다. 1970년대 산업화의 첫 세대로서 수도권 정비사업, 무허가 주택단지 철거 명령, 신축 아파트 분양을 처음으로 목도했던 조세희 작가는 <난장이를 쏘아올린 작은 공>의 집필 계기에 대해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을 가장 참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세입자 가족과 식사를 하다가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오던 철거반과 싸우고 돌아오는 길에 샀던 작은 노트가 ‘난장이 연작’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한국현대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은 읽기 어려운 지식인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빈부를 이분적인 선악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그러나 어느 연구자의 말을 빌리면 그 선악의 이분법 안에는 “부에 대한 동경과 경원이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공존”(정주아)하고 있다는 냉정한 통찰이, 그리고 현실이 그토록 삼엄하고 비참할 때조차 “따뜻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긴 것이기도 하다. 김애란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는 우연히 20여년 전 남편이 연필로 밑줄 그은 <난쏘공>의 한 문장을 천천히 읽고는 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부동산 시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이동권 시위, 반지하 주택 철거 등을 둘러싸고 여전히 ‘약자’와 ‘더 약자’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에 귀 기울이면서도 고집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했던, 지난달 영면한 작가의 전언은 반세기가 지난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묵직하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4. 

 

정치판으로 다시 소환된 ‘난쏘공’ 어떻게 읽을 것인가
 
尹대통령에 책 선물한 이정미
1970년대에 갇힌 386 세계관

< 조선일보, 한지원 정치·경제 평론가, 2023.01.07 >

 


‘서울 낙원구 행복동에서 판잣집을 짓고 살아가는 난쟁이 가족. 어느 날 재개발로 집을 철거당한다. 증조부가 노비였던 아버지는 달나라로 이주하는 상상을 하다가 공장 굴뚝 위에서 추락사하고, 공장 다니는 큰아들은 고용주에게 항의하다 해고된 후 우여곡절 끝에 살인자로 전락하며, 딸은 헐값에 팔려나간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을 목적으로 성적 학대를 견디며 건설 투기꾼과 동거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줄거리다. ‘난쏘공’이란 약칭으로 유명한 이 소설이 조세희 작가의 별세를 계기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소설은 1978년 초판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300쇄를 찍었고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난쏘공이 반세기 가까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까닭은 작가가 폭로한 사회 모순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바로 불평등과 주택 문제다. 난쟁이 가족의 이웃에 살던 지섭은 철거 용역 직원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방금 선생은 오백 년이 걸려 지은 집을 헐어 버렸습니다.” 무허가 판잣집이지만, 이것마저 대대손손 노비였던 조상의 유산으로 가까스로 만들 수 있었다는 한탄이다. 그런데 오늘날 비슷한 탄식이 젊은이들에게서 나온다. “흙수저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받아 산 아파트 값이 폭락해 파산 직전이다.” 연일 뉴스에 나오는 ‘부동산 영끌’ 이야기다. 난쏘공의 1970년대와 오늘날이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랬다.

단,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쟁점이 비슷하다고 원인까지 같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중산층이 보유한 구매력은 50년 전 상위 1% 부자보다 크다. 서울의 주택 보급률은 1970년 57%에서 2020년 95%로 상승했다. 오늘날 주로 쟁점이 되는 불평등 문제는 기여에 비해 더 많은 몫을 챙기는 지대 추구와 관련된다. 서울의 주택 문제는 수백 만 가계가 앉은 자리에서 평생 일해서 벌 소득을 얻거나 잃는 재산상 불안정성이 원인이다.

난쏘공에 나오는 절대적 빈곤과 도시 빈민의 주택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적 성장에 따라 그 심각성이 상당히 감소했다. 챙겨야 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다른 쟁점을 지배하는 최상위 문제는 아니다. 난쏘공에 공감한다고 소설 속 상황을 염두에 두고 현실에서 정책을 기획하면 사달이 날 것이다.

 
그런데 ‘386 운동권’이라고 하는 문재인 전 정부와 민주당 주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소득 주도 성장론과 기본 소득론은 난쏘공에 나오는 절대적 빈곤층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오늘날의 불평등 원인인 지대 추구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부동산 정책은 난쏘공의 극악무도한 투기 업자를 상상하며 투기 규제책만 퍼부었을 뿐, 오늘날 대도시 주택 문제의 핵심인 아파트의 재산 성격을 무시했다. 문 전 대통령은 조 작가의 별세를 애도하며 “저를 비롯한 우리 세대는 난쏘공을 읽으며… 실천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고 소셜미디어(SNS)에 적었는데, 나는 그들이 의지만이 아니라 정책 방향까지 배워왔다고 생각한다. 386 운동권의 세계관은 지금까지도 1970년대 난쏘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정파적 오독도 문제다. 지난 2일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신년 인사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난쏘공을 선물하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고 책 내지에 적었다. 윤 대통령의 노동 정책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저 문구는 큰아들 영수가 위정자들에게 냉소를 보내며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읊조린 뒤 한 말이다. 영수는 권력에 하소연하지 않고, 동료들을 모아 사장과 담판을 지으려다 해고된다.

저 인용문은 대통령실이 아니라 노동조합 사무실에 내걸려야 어울린다. 금서(禁書)였던 난쏘공을 숨어서 읽던 사람들이 “고통을 알아주고 나누는 존재”로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1987년 이후의 노동조합이니 말이다. 그 노동조합은 ‘귀족 노조’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고통받는 계층과 괴리돼 있다. 386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있는 이정미 대표는 난쏘공을 가지고 보수 정부를 비판하려다 문 정부 인사들과 비슷한 오류에 빠져버린 셈이다.

우리는 난쏘공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최근 한국 정치는 상대를 공격하는 용도로, 또는 자신의 망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현대사를 소환해 소비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난쏘공도 그렇게 소비하려는 것 같아 우려된다. 1970년대 도시 빈민의 삶을 기록한 역사적 소설인 난쏘공을 후대에 소중히 전달하려면, 386 이데올로기에 주의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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