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反日’은 NO… 항일 영화 줄줄이 흥행 부진
과거의 흥행 공식 깨졌다
<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2023.02.14 >
항일 영화 최근 성적

영화 흥행을 돕는 재료로 꼽히던 ‘항일(반일)’이 극장가에서 좀처럼 먹히지 않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한산: 용의 출현’은 726만 관객을 모았지만 전편 ‘명량’(1761만명)에 비하면 반 토막도 안 되는 성적으로 퇴장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영웅’은 개봉한 지 두 달 가까이 됐으나 손익분기점(340만명)을 여태 못 넘겼다. 설경구·이하늬 주연으로 조선 총독 암살 작전을 그린 ‘유령’, 치매 노인이 60년 만에 친일파에게 복수하는 ‘리멤버’는 참패했다. 항일 영화들이 지난해 여름부터 줄줄이 흥행 부진에 빠진 것이다.
코로나 이전인 2010년대에는 ‘명량’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 등 일본을 적(敵)으로 설정한 영화 대부분이 큰 수익을 올렸다. ‘군함도’와 ‘대호’만 예외였다. 최근 항일 영화가 잇따라 초라한 성적표를 받자 “극장가에서 ‘무조건 반일’이나 ‘노 재팬(No Japan·일본 불매 운동)’이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영화 시장 분석가 김형호씨는 “상업 영화들이 애용하던 기존 항일 소재는 앞으로 시장을 이끌 20~30대 관객에겐 호소력이 크지 않다”며 “과거에는 ‘일본을 이기고 싶다’는 심리가 흥행을 도왔지만 요즘 젊은 관객은 그 단계를 넘어 극일(克日)을 이뤘고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00억~200억짜리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나 제작자, 투자자는 대부분 40~50대라 과거의 관성에 갇혀 있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 항일 영화들이 부진한 까닭
‘한산’은 역대 박스오피스 1위 ‘명량’의 속편이라 천만 영화가 되느냐 마느냐가 관심사였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해제된 여름 성수기에 개봉했지만, 성적표는 ‘명량’에 1000만명이 모자랐다. 올해 말 개봉 예정인 이순신 삼부작의 마지막 ‘노량’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영웅’은 뮤지컬 영화라는 이물감, 주인공들이 노래할 때 동기 부여가 부족한 점 등이 문제로 꼽히면서 흥행이 부진하다.
영화 평론가 윤성은씨는 “‘한산’과 ‘영웅’은 실존 인물을 다뤄 그렇다 쳐도 ‘유령’과 ‘리멤버’처럼 비장하게 접근하는 항일 영화는 시대착오적”이라며 “OTT 시대가 되면서 콘텐츠의 국적을 문제 삼지 않고 ‘재밌으면 본다’는 실용주의가 대세다. 무조건 반일이나 국뽕(맹목적 애국심)을 강조하는 영화는 과거와 같은 폭발력을 갖기 어렵다”고 했다.
김형호씨는 “할리우드가 독일, 소련, 일본, 아랍, 외계인 등 적을 계속 바꾸듯이, 우리 상업 영화도 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액션 두 스푼, 반일 한 스푼, 눈물 한 스푼을 넣는 과거 요리법을 우려먹지 말고 젊은 관객들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변화한 풍향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천만 관객을 모은 ‘범죄도시2′는 30대 이하 관객이, 톰 크루즈가 주연한 ‘탑건: 매버릭’은 40대 이상 관객이 만든 흥행이다. 우리는 20~30대가 좋아하는 시장과 40대 이상 관객이 만드는 시장을 다 가지고 있다. 둘 다 잡으려고 영화에 물타기를 하는 게 문제다.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에서는 복고의 대결이 벌어졌다. 특정 세대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25년 만에 고화질 3D로 재개봉한 ‘타이타닉’ 등 1990년대생 콘텐츠들이 1~2위를 다퉜다. 올드하다고 여겨지던 소재가 ‘뉴트로’로 새롭게 해석되며, 그 시절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새로움을 선사한 셈이다.
◇“영감님, 현재를 살자고요”
우리 상업 영화들이 어제처럼 오늘도 홈런(대박)만 노리며 크게 헛스윙하는 사이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영화 업계가 놀랄 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300만 관객을 바라본다. ‘슬램덩크‘는 30년 전 원작 만화에 추억을 가진 팬들을 극장으로 불러냈고, 젊은 관객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장기 흥행 중이다. 더빙 버전과 자막 버전을 오가는 N차 관람객도 적지 않다.
한 메이저 배급사 임원은 “요즘 관객은 특정 국가의 상품과 서비스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효용 가치에 따라 소비한다는 것이 확인된 사례”라며 “과거에는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안정적 소재와 주제, 국뽕과 신파에 대한 관대함이 있었지만 코로나 이후 그 성공 방정식은 깨졌다”고 했다.
윤성은씨는 “국뽕이든 신파든 세련미와 재미가 뒷받침되지 않고 예전처럼 무조건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스타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며 “영화 제작을 결정하고 투자하는 사람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시장의 변화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기성세대가 자기반성과 함께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더 참신하고 매력적인 소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관객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라는 ‘슬램덩크’ 속 강백호의 명대사처럼 현재를 살자는 말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우 양자경, 동양인 최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1) | 2023.03.14 |
---|---|
“싸구려 재방송이 아닙니다” … 스트리밍 시장 (0) | 2023.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