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자씩 마우스로 논문… 희소병 이겨낸 ‘한국의 호킹들’
숨쉬기도 어려운데 학업에 도전
9명의 특별한 입학·졸업 축하행사
밤마다 산소호흡기… “그래도 남 돕고 살래요”

 

 

 

< 조선일보, 박혜연 기자 / 신지인 기자,  2023.02.17 >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세브란스 병원의 중강당. 휠체어에 탄 민경현(33)씨가 꽃다발을 두 손에 든 채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달 말 9년 만에 연세대 물리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졸업한다. 그는 희소 유전질환인 ‘척수성 근위축증’을 평생 앓으면서도 물리학 박사라는 꿈을 이뤄냈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운동신경 세포가 퇴행하고 근육이 위축되는 병으로, 이른바 ‘루게릭병’과 증상이 비슷하다. 민씨의 친구들은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세계적 석학이 된 스티븐 호킹을 떠올리며 그를 ‘호킹’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날 이 병원에서는 민씨를 비롯해 거의 평생 희소 질환과 맞서 싸워 온 9명의 대학 졸업 및 입학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들의 치료를 맡아온 병원이 이들의 앞날을 응원하는 차원이었다.

졸업장을 받기까지 민씨와 그 가족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민씨의 어머니 정윤주(60)씨는 “아이가 생후 12개월 때 갑자기 움직임이 둔해져서 한 병원에 갔는데, 당시 2년 밖에 못 살 거라고 했다”며 암담했던 때를 떠올렸다. 호흡이 멈추면 사망할 수도 있다는 말에 정씨는 아들이 고1이 될 때까지 밤마다 민씨의 곁에서 잠을 자며 그가 숨을 잘 쉬는지 살폈다.

민씨는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총 80쪽에 이르는 박사 논문을 쓸 때도 15개월 동안 매일 8시간씩 연구실에서 살다시피했다. 동시에 또 다른 학술지에 기고할 또 다른 논문은 3년째 작업 중이다. 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탓에 컴퓨터 화면에 가상 키보드를 띄워놓고 마우스를 움직여 한 글자씩 클릭하기 때문이다. 이날 만난 민씨의 오른쪽 검지에는 굳은살이 깊게 박여 있었다.

민경현씨는 물리학 박사가 되기까지 여러 역경을 헤쳐 나와야 했다. 학창 시절 늘 휠체어에 앉은 채 수업을 들었는데, 몸이 불편해져도 스스로 움직이기가 어려워 거의 30분마다 한 번씩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세를 바꿔야 했다. 잦은 치료 때문에 결석하는 일도 있었다. 충북대 천문우주학과를 지난 2013년 졸업했지만, 학업을 더 잇기로 결심하고 그해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런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 정윤주씨는 이날 병원 행사장에 아들이 쓴 졸업 논문을 가슴에 품고 들어왔다.

어머니 정씨는 “사실 대학은 욕심도 안 냈고, 오랫동안 경현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했어요”라며 “저보다 경현이가 오래 사는 것, 그게 제일 간절한 소원이에요”라고 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민씨가 곧바로 “지금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삽니다”라고 답하자, 주위에 있던 환자들과 부모들이 한바탕 웃었다.

 

 


민씨뿐만 아니라 이날 행사장에는 희소 질환을 앓으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미래의 ‘호킹’ 8명이 더 있었다. 7명은 대학 입학을 앞뒀고, 민씨와 다른 1명은 졸업해 사회로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밝고 있는 오성환(26)씨는 민경현씨와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척수성 근위축증을 앓았다. 병원에서는 “10살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오씨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버텨냈고, 전교생 360명 중 전교 10등을 할 정도로 학업도 놓치지 않았다. 수학 문제를 풀 때는 손으로 식을 써야 했는데, 연필을 쥘 수 없어 암산으로 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2017년 두 번째 본 수능에서 전 과목 1등급을 받고 연세대 심리학과에 진학했다.

거의 평생 휠체어를 탄 채 생활한 오씨는 “학교에 엘리베이터 설치가 안 돼 재택근무를 하도록 교수님이 배려해 줬고, 수업 때는 대필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 오씨는 친구들과 삼겹살 식당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오씨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불판에 고기를 혼자 구울 수 없고 휠체어가 다른 손님에게 방해될까 겁난다”고 했다.

 


5살 때 척수성 근위축증 진단을 받은 채민우(19)씨는 오는 3월 목포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한다. 그는 “어린아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 누구나 사용하기 쉬운 은행앱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고 싶다”고 했다. 대학에 합격해서 기쁘기는 하지만, MT와 같은 학교 행사에서 누군가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줘야 하는 상황이 걱정된다고 한다. 채씨의 어머니는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병의 진행을 늦추려 손가락 힘을 기르는 컴퓨터도 많이 하고, 피아노 치기도 좋아했다”며 “의지가 강한 아들이라 대학에 가서도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했다.


3월 강남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대학생이 되는 신선아(20)씨는 근육 질환인 ‘선천성 근디스트로피’를 앓고 있다. 근육이 위축되고 갈수록 쇠약해지는 병이다. 일상 생활은 가능하지만 숨이 가쁜 운동은 불가능하고 잘 때도 반드시 산소 호흡기를 껴야 한다. 어머니도 같은 병을 앓고 있어 병원 통원을 하거나 학창 시절 등교하기가 힘들었다. 대입 준비를 하면서 밤샘 공부를 한 적도 있었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 위태로웠던 순간도 있었다고 했다.

 


계명문화대 언어치료학과에 입학 예정인 장지원(19)씨는 신경섬유종과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다. 그는 허리가 휘어져 지금까지 15번의 수술을 받았고 평상시에도 허리 보조기를 차야 한다.

 


신선아씨나 장지원씨 모두 본인도 평생 희소병과 싸워왔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라고 입을 모았다. 

 

신선아씨가 사회복지학과에, 장지원씨가 언어치료학과에 진학하기로 한 이유다. 신씨는 “저같이 희소병을 가진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어릴 때부터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장지원씨도 다운증후군으로 언어치료를 받는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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