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설 - 한국사란 무엇인가

1.국토와 자연환경

1) 명당이 많은 국토


   인간의 삶은 터 잡고 있는 땅과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산이 많은가 평야가 많은가, 날씨가 더운가 추운가, 비가 많은가 적은가, 자연재난이 많은가 적은가,이런 요소들이 삶 의 모습과 생각에 영향을 주고, 역사와 문화의 특성이 달라지게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에 앞서 한국인이 살아온 국토와 자연환경의 특성을 알 필요가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이 국가를 형성해온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의 산동지역,요서지역,요동지역,그 리고 길림성 지역 등을 포괄하는 중국 동북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한반도로 터전이 좁아진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의 일이다. 이 지역은 황해와 발해를 중심에 두고 말발굽 형태로 에워싸 고 있는데,연안지역이 평야로 되어 있어서 중국과 한반도의 강물이 대부분 황해로 흘러 들어가 서로 만난다. 교통이 편리하여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일찍부터 농업 위 주의 동방문명이 꽃피었다. 이 문명을 중국인들은 ‘동이문명권’이라 부르지만,한국인의 시각에서는 ‘아사달문명권’으로 부르기로 한다.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황해가 갖는 의미는 마치 로마문명이 지중해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형성된 것과 비슷하다 황해는 동양의 지중해 라고 할 수 있으며,한국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동아시아문명의 중심권으로 떠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지역이 동아시아문명의 발상지가 된 것은 수로교통이 편하고, 농토가 비옥하며,적당한 비가 내려 농업생산력이 높을 뿐 아니라,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의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높지 않은 산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공기가 맑고 쾌적한 생 활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는 아사달문명권 가운데서도 지리적 환경이 뛰어나다. 국토의 70%가 산이지만, 거의 대부분 1,000m 미만의 구릉지에 가까울 뿐 아니라 곳곳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공기가 깨끗하며, 산맥의 끝자락이 역Y자형으로 끝나는 지점이 많아 주거환경이 매우 좋다.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지형을 배산임수라 하여 풍수가들이 명당으로 부르는데, 금닭이 두 날개를 펴고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한반도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서울을 놓고 명당조건을 알아보기로 한다. 명당의 혈(穴)에 해당하는 곳이 경복궁(景福宮)이고, 그 북쪽 백악산은 서울의 주인 노릇하는 주산이다. 여기서 서쪽에 날개를 편 인왕산이 우백호,동쪽으로 날개를 편 낙산이 좌청룡, 주산앞에 책상처럼 생긴 남산이 안산, 주산 뒤에 할아버지처럼 밀어주고 있는 북한산이 조산, 남쪽 멀리 엎드려 절하고 있는 관악산이 조산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주산과 안산 사이에 청계천이 있고, 안산 남쪽에 한강이 S자형으로 동서로 흐른다. 서울이 예부터 명당으로 지목된 것은 이런 명당조건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명당에는 땅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기가 많이 모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한반도에는 이런 명당이 많고, 이런 곳에 마을과 도시 또는 무덤을 만들고 살아왔다. 동양에서는 장수를 기원하는 종교로 도교했가 발생했는데, 중국인은 단약을 만들어 먹는 것을 추구하고 한국인은 산속에 들어가 맑은 공기를 마시는 단전호흡을 선호했다.


   풍수가들은 한반도의 모습을 중국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비유하기도 했다. 백두산은 사람의 머리요,거기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내린 마천령산맥,낭림 산맥,태백산맥을 척추로 보아 백두대간(약 1500km)이라 불렀으며,백두대간 끝에서 전라도 쪽으로 갈라진 소백산맥과 부산 쪽으로 내려온 산맥을 두 개의 다리로 이해했다. 제주도와 대마도는 두 다리에 붙은 두 개의 발로 보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제작한 고지도를 보면 백두산을 장엄하게 그리고, 제주도와 대마도를 반드시 그려 넣었다. ‘쓰시마’라는 지명은 원래 '두 섬'이라는 우리말이다.


   한편,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13 개의 작은 산맥들이 뻗어 있는데, 이를 정맥으로 부르고, 갈비뼈에 비유했다. 함경도에서 동서로 뻗은 산맥을 장백정간이라 부르고 어깨에 비유했다 정맥과 정맥 사이에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 강들은 혈관에 비유했으며,평안도와 황해도가 서쪽을 향해 돌출한 모양을 두 팔을 벌리고 중국을 얼싸안은 모습으로 상상했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길게 뻗은 일본열도도 한반도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열도의 지형은 서쪽에 큰 산맥이 있고 동쪽에 태평양을 향해 평야가 펼쳐져 있어 강물이 동해에서 서로 만나지 않았다. 다만,대마도를 징검다리로 하여 규슈지방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어 이 지역과의 교류가 가장 빈번했으며,한반도문화는 대마도와 규슈를 거쳐 다시 오사카,교토,나라 지방으로 북상하면서 흘러들어갔다 지금 이 지역에 한반도에서 전파된 문화유적이 즐비하게 발견되고, 일본 고대국가가 규슈에서 먼저 일어나 교토와 나라에서 번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기후와 재난


   한반도의 기후는 4계절이 비교적 뚜렷한 온대에 속하지만, 겨울에는 한대, 여름에는 열대 기후의 일교차를 경험하면서 살기 때문에 인간과 동식물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주 문화는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바뀐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따뜻한 북방 식 온돌방을 만들고, 더위를 이기기 위해 시원한 남방식 마루를 만들어 두 공간을 주기적으로 바꾸면서 생활한다. 황토와 나무를 사용한 한옥은 숨을 쉬는 집이 되었으며,우리나라의 갓은 매우 가벼우면서도 햇빛을 효율적으로 막아주는 매력이 있다.


   음식도 계절에 따라 바뀌어 종류가 다양하고 계절의 진미가 생겨났다. 김치,된장,고추장 등 발효식품을 즐겨 먹었다. 채소요리도 매우 다양하다. 서양은 과일주가 포도주밖에 없지만 한국인은 다양한 과일주를 개발했다. 건강에 좋은 온돌과 발효식품은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우리의 김장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한반도의 강수량은 많은 편은 아니지만, 특히 7~8월에 집중적으로 내려 이를 장마라고 부른다. 장마는 때로는 홍수를 일으켜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고,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곳곳에 보를 만들어 저장했는데 물을 쉽게 흡수해버리는 석회암이 적어 저수하기에 편리했다. 가을에는 비가 적고 일조량이 많아 벼농사에 적합하다. 석회암이 많고 일조량이 적어 벼농사가 어려운 유럽과 대비된다.


   한국의 벼농사는 1년에 2모작 또는 3모작이 가능한 동남아지역에 비해서는 힘들다. 물을 저수하고, 수로를 만들고, 모내기, 풀 뽑기, 수확 등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여 일찍부터 공동체적인 협동작업을 중시해 왔다 . 농업이 어려웠던 서양인과 북방의 유목민은 일찍부터 상업을 일차적인 생업수단으로 삼아 개인주의와 기동력을 발달시켜 왔다. 유럽인은 배를 잘 이용하고, 유목민들은 낙타와 말을 이용하여 기동력을 키워왔으나,동아시아세계는 정착된 농경생활에 의존하면서 공동체적 협동정신을 키워왔다. 이것이 서양인의 눈에는 전체주의로 비쳐지기 도 했지만, 근본정신은 협동에 있었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이 하늘을 특별히 공경하고,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통합된 생명체로 보는 우주관을 가지고 살아온 이유도 자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농경문화의 특성이다.


   그러면 한반도와 동아시아세계의 자연재난은 어떠했는가? 자연재난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지진이다. 지진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일본 열도가 가장 심하고, 중국 내륙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한다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물론 16세기 중엽의 중종 대와 명종 대에는 한 달 이상 지진이 계속되어 서울시민들이 집에 들어가지 못한 일도 있고, 이 때문에 그 책임을 둘러싸고 훈신과 사림이 크게 갈등을 일으켰으며,불안한 국민정서를 틈탄 임꺽정 일당 같은 도적이 나타나기도 했다.


   두 번째 큰 재난은 태풍으로 보통 필리핀 부근에서 발생하여 북상하다가 대체로 제주도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진로를 바꿔 일본열도를 강타하였다 원나라가 고려와 연합하여 규슈를 치다가 실패한 이유도 태풍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홍수이다. 동양 삼국이 7~8월에는 장마철을 맞이하는데,홍수로 인한 피해를 가장 크게 받는 나라는 중국이다. 특히 황하의 범람이 심각하다. 이 지역은 내몽고 사막지역에서 흘러온 붉은 황토물이 하류에 쌓이면서 비옥한 충적토를 만들어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생했지만, 황하의 하상이 육지보다도 높아 심각한 홍수피해를 입혔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발생한 나라들은 황하에 높은 둑을 쌓아 홍수피해를 줄이는 일이 가장 중요했으며,치수를 잘 하는 정치지도자를 성인으로 받들었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성인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중국에 비하면 한반도는 홍수피해가 적은 편이다.


   한반도의 쾌적한 자연환경은 예부터 중국인의 피난지로 떠올랐다. 중국 북방의 넓은 초원에서 살던 유목민들이 주기적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뛰어난 기마술을 이용하여 중국을 압박하면, 중국 동북지역에서 아사달문명, 농경문화를 공유하던 지배층은 난리를 피하여 한반도로 이주해왔다. 이런 일이 수천 년간 반복되면서 한반도의 아사달문명도 급속하게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북방 유목민도 농경문화를 동경하면서 아사달사회로 이주하여 한반도에는 유목민 문화와 농경문화가 뒤섞이게 된 것이다. 특히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부여와 고구려는 유목민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고구려인이 말을 잘 타고 전쟁에 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륙의 지배층 이주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고, 문화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이주민 사이의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전쟁을 피해 일본열도로 들어가 그곳에 새로운 고대국가를 건설한 것이 일본 역사의 시작이다. 특히 백제와 가야의 지배층이 고대국가 건설의 주역을 맡았는데,한반도가 신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계 일본인들 가운데 산악이 많은 대마도와 규슈지역,그리고 동해안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식량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에 들어와 식량을 약탈하는 일이 많았는데,이들을 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왜구의 연장선상에서 대규모 군대를 이용한 침략전쟁이 임진왜란이고, 더 나아가 한반도를 무력으로 강탈한 것이 일제강점시대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고구려와 수隨 당唐과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역사적으로 우호친선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는데, 이는 중국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대국으로 발전하여 한반도에 대한 집착이 적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관계가 불편한 것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 상 확장할 공간이 없었기에 원래의 터전이었던 한반도와 대륙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침략의 형태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중국, 일본이 평화관계를 유지하려면 누구보다도 일본이 오랜 침략의 관습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2. 한국문화의 특성 - 선비문화

 


1) 언어와 문자


   한국문화의 뿌리는 황해와 발해를 끼고 동,서, 북으로 연결된 말발굽 형태의 지역에서 형성된 아사달문명이다. 중국의 산동지방,요서지방,요동지방, 길림성 일대, 그리고 한반도가 공통된 아사달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아사달문명권에 속해 있던 종족은 한국인만이 아니라 선비족, 오환족, 말갈족, 여진족, 거란족, 일본족 등이 모두 포함되는데,중국은 아사달족을 자신의 화하족과 구별하여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夷)’라는 글자는 대와 궁류을 합친 것으로  ‘큰 활을 가진 사람’ 또는 ‘활 잘 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북방족을 짐승에 비유하여 북적, 남방족은 벌레에 비유하여 남만,서방족은 무기에 비유하여 서융으로 불러 멸시감을 표했는데,동방족인 동이에 대한 호칭은 좋은 뜻을 지니고 있다.


   중국이 동이족으로 부른 아사달족은 지나-티베트어를 쓰는 중국과 달리 알타이어를 썼다. 알타이어의 가장 큰 특징은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이는 ‘주어-동사 -목적어’의 순서로 되어 있는 중국어와 다르다. 예를 들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알타이어라면 '나는 사랑한다,너를’이라고 말하는 것이 중국어다.


   아사달족은 언어만 중국과 다른 것이 아니라 문자도 독자적인 것을 만들었다. 은나라 때 만든 갑골문자는 그 지역의 아사달족이 만든 최초의 상형문자이다. 중국인은 뒤에 이를 발전시켜 한자를 만들었는데, 아사달족이 다시 한자를 받아들여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는 아사달족과 중국인이 함께 만들고 발전시킨 문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한자로 글을 지을 때에는 중국어와 우리말의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우리 어순에 맞게 쓰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 이두(吏讀)이다. 이밖에 아사달족은 천지인을 상징하는 원○,방 □,각화 △   도형을 즐겨 사용했는데,이 도형을 발전시켜 새로운 문자를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 한편,일본인은 한자의 획행을 응용하여 ‘가나’라는 문자를 만들었다.

 


2) 종교 - 단군신화


   아사달족의 종교는 한 마디로 하늘과 태양을 조상으로 생각하는 무교(巫敎)이다. 그 무교의 우주판을 보여주는 글이《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와 관련된 유적은 한반도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등이 있지만,중국의 요서지방과 산동지방에도 보인다. 산동지방의 곡부는 공자가 탄생한 곳인데,바로 이곳 무씨사당에 단군신화의 이야기를 그린 벽화가 있다. 요서지방의 우하량에서는 곰 발바닥을 조각한 토기와 웅녀를 연상시키는 여신상 조각 등이 출토되어 이 지역에도 단군신화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에 담긴 우주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군이 도읍을 정한 곳이 아사달이다. 아사달은 순수한 우리말로 ‘해가 떠오르는 동방의 땅’을 의미한다. 아사달은 한 곳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모두 아사달이라고 불렀다. 단군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했는데,‘조선’도 ‘아침이 빛나는 땅’으로 ‘아사달을 한자로 훈역(訓譯)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사달은 ‘박달'로도 불렀다. ‘박달'은 ‘해가 뜨는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 요서 지방에는 조양, 적봉이라는 도시가 있는데,그 이름도 아사달과 다름이 없다.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도 ‘아사달'을 한자로 훈역한 이름이다. ‘서라벌’도 비슷하다 한국인은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샛바람’이라고 하는데,‘새’는 ‘동방’을 가리키므로 ‘서라벌’은 바로 ‘동방의 땅’이라는 뜻이다. ‘서울’은 ‘서라벌’을 줄인 말이다.  한국인이 즐겨 쓰는 ‘동국’,‘단국’,‘서라벌’,‘서울’은 물론이요, '일본'도 ‘아사달과 뜻이 같다.


   아사달족은 이렇게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여 선사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해가 뜨는 동쪽에 머리를 두고 매장했으며, 동쪽에 있는 큰 동굴에 하느님의 위패와 조각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의 동맹이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부른 것도 ‘동방의 태양왕’이라는 뜻이다.


   아사달족의 초기 무덤은 고인돌이다. 네모난 돌방 위에 둥근 덮개를 얹은 것으로 둥근 덮개는 태양을 상징하고, 네모난 돌방은 땅을 상징한다. 그 속에 사람을 묻으면 죽은 사람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삼국시대 이후로는 고인돌이 변하여 네모난 돌방 위에 둥근 봉분을 덮었는데,둥근 하늘을 상징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무덤으로 만든 석굴암의 모습도 네모난 방을 앞에 두고, 둥근 방을 뒤에 두어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는데,이것도 부처님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알려진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도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의 모습으로 제단을 만들었다. 하늘은 둥근 원○으로,땅은 네모진 방□으로, 사람은 세모난 각△으로 생각하여 이 도형을 무덤에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사달족의 원방각 문화이다.


   둘째,‘단군신화’에 담긴 우주관에는 하늘, 땅, 사람이 셋이면서 하나라는 통일적 우주관이 담겨 있다. 단군신화의 이야기 속에는 ‘삼’이라는 숫자가 반복해서 보인다. 환인은 천신, 환인의 아들 환웅(桓雄)은 지신地神,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단군은 인신(人神)으로 이를 ‘삼신’으로 부른다. 그런데 삼신은 합치면 일신으로 보고, 삼신을 여성으로 생각하여 ‘삼신할머니’라는 말이 생겼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은 인간을 널리 도와주는 일을 하기 위해,다시 말해 ‘홍익인간'을 위해서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왔다. ‘홍익인간’ 정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는 생명을 창조하고, 곡식을 제공하고, 질병을 고쳐주고, 선악(善惡)을 판별하고, 악한 자를 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의 전래 풍속 가운데에는 삼신과 관련된 것이 많다. 아기를 낳을 때 삼신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리고, 엉덩이 푸른 반점을 삼신반점으로 부른다. 가을에 햇곡식을 거두면 삼신께 감사의 표시로 삼신주머니 또는 업주가리, 신주단지(神主壇地)를 만들어 마루나 안방의 선반에 정성스레 모신다. 우리 속담에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겼다. 삼신이 선악을 판별하고 악한 자를 징벌할 때에는 무서운 도깨비로 변신한다. 그리고 도깨비 모습을 문고리나 막새기와에 새겨 넣으면 악귀가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 도깨비 모습이 바로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와 치열하게 전쟁을 하여 군신으로 추앙받은 아사달 장군 치우씨 얼굴과 같다고 믿어 군기로도 사용했다.


   ‘단군신화’에는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 올 때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왔으며,바람, 비,구름을 부리는 세 사람의 신하(풍백, 우사, 운사)와 3천 명의 무리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여기서 셋과 삼천을 강조한 것은 몇 개와 몇 천이라는 뜻인데,셋이 천지인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일부러 셋,삼천이라고 쓴 것이다.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가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삼칠일 간 햇빛을 보지 않은 결과 곰이 여자로 변신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삼칠일은 21 일을 말한다. 일부러 셋을 넣어 ‘21 일’을 ‘삼칠일’이라고 한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이렇게 셋을 가지고 신화를 만든 것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로 합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천지인이 하나가 되면 인간에게 행복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한가? 그것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는 음양과 오행(수화목금토)이 하늘,땅,사람에게 두루 있어서 생명의 기가 우주 만물에 가득 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인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면 생명의 기가 커지고, 에너지가 증폭한다. 이를 ‘신바람이 난다’,‘신명 난다’ 또는 ‘흥’이라고 표현한다. 신바람은 무당의 굿을 통해서도 생기고,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살면서 저절로 생기기도 한다. 신바람이 생기면 춤,노래,해학, 미소가 터져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낙천성이다. 예부터 중국인은 아사달족이 춤과 노래를 즐기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바로 아사달족의 신바람 문화의 특성을 지적한 것이다.


   ‘단군신화’에 곰이 여자로 변한 뒤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여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곰과 호랑이 이야기는 곰을 조상으로 섬기는 족속과 호랑이를 조상으로 섬기는 두 족속이 하늘을 조상으로 섬기는 족속과 혼인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조상은 태양 토템족과 곰 토템족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다. '단군신화’에 담긴 우주관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선교’라고 불렀고, 조선시대에 는 ‘신교’라고 불렀으며,근대에 와서는 ‘무교’(샤머니즘)로 불렀다. 그런데 ‘선仙’은 순수한 소리 말로 ‘선비’라고 한다. 그러므로 ‘단군신화’는 곧 선비정신의 뿌리가 된다.


   삼국시대 이후 불교(佛敎)가 들어오고 유교(儒敎)가 들어왔지만 그 바탕에는 선비정신이 깔려 있어 유불선이 서로 융합하면서 발전했으며, 근대 이후에 들어온 서양의 기독교문명도 선비정신과 융합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한국의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은 한국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결코 외국사상을 교조적으로 모방하는 문화가 아니다. 개화기 어느 서양인이 한국인의 종교행위를 설명하면서 조정에 나가면 유학자가 돠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를 따라 사찰에 가고,죽을 병이 들면 무당을 찾아간다고 말한 것이 홍미롭다.

 


3) 윤리 - 홍익인간


   ‘단군신화’에는 한국인의 원초적 윤리관이 보이는데,그것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은 삼위태백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홍익인간’이란 이념으로 인간을 다스렸는데, 이곳을 선택한 것은 농사에 적합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이 등장하고, 바람,비,구름을 부리는 신하를 데리고 왔다고 한 것도 농사를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환경이 좋은 땅에서 모든 인간을 골고루 잘 살게 하려는 정신이 '홍익인간’ 이다. 이 정신을 가지고 신시를 세우고, 그 아들 단군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므로 ‘홍익인간’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었다.


   그런데 환웅이 만약 하느님의 독생자였다면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성을 띠었을 것이다. 다른 종교는 하느님의 사생아가 만든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이 하느님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다른 아들이 만든 종교도 포용할 수 있다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홍익인간’에는 인류평등사상과 공동체정신이 담겨 있다. 이런 정신이 바로 아사달족의 철학이요 윤리다. 한국인은 ‘나’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중요 시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어려운 사람을 서로 도와주는 미풍양속을 지니고 살아왔다. 중국인들은 아사달족의 이런 풍속을 보고 '군자국’이라고 불렀다.


   조선을 ‘군자국’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유교를 창시한 공자였다. 춘추시대인 기원전 6세기에 노 나라 사람이었던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을 제후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뗏목을 타고 ‘구이’의 나라로 가서 살고 싶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구이’의 나라가 누추하지 않겠느냐고 제자들이 걱정하자 공자는 그곳은 누추한 곳이 아니고, 군자가 사는 나라라고 말했다 이런 말이 《논어 論語》에 실려 있는데,후세 중국인들은 공자가 가고 싶어했던 ‘구이’는 바로 ‘조선’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공자가 만든 유교도 산동지방에 살던 아사달족과 고조선 사람의 도덕성에 감동을 받아 이론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인이 중국인보다도 더 열심히 유교를 실천한 것은 유교 자체가 본래 한국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오던 생활 철학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군자국으로 칭송한 기록은 공자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난다. 중국 고대의 지리책인《산해경》이나 동방삭이 지은《신이경》,그리고《후한서》등에 그런 기록이 보인다. 이 책들에서 아사달족은 성품이 착하고, 서로 존중하고 싸우지 않으며,생명을 아끼고, 근심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제 목숨을 던져 구하며,또 죽지 않는 나라라고 한다. 여기서 아사달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 살 뿐 아니라, 죽음을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이는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단군신화’에는 단군이 하느님의 후손으로 태어나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1,908년간 살았다고도 한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단군은 백두산 연못가에서 하늘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연못을 '조천지’ 또는 ‘천지’로 부르게 된 것이다.


   단군뿐 아니라 고구려 시조 고주몽도 하느님의 후손으로 태어나 대동강가의 바위에서 기린을 타고 하늘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이 바위를 ‘조천석'이라 불렀다. 신라 시조 박혁거서도 하느님의 후손으로, 죽어서 육신은 땅에 떨어지고 혼(魂)은 승천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인은 하늘의 후손으로 태어나 부모이자 고향인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어 하늘에 대한 제사를 ‘효(孝)’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의 가슴에 새겨진 천손의식은 우리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주체성을 심어주어 민족의식의 바탕이 되었으며,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군신앙이 드높아지면서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몽고간섭기와 왜란, 호란 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단군신앙이 고조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익인간의 전통은 삼국,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당唐나라, 송宋나라, 명明나라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 또는 ‘소중화’로 불렀다. 예의가 바를 뿐 아니라 문화수준이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사신을 보낼 때 는 특별히 우수한 인재를 뽑아 보냈으며,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가면 다른 나라 사신보다 특별히 우대했다. 송나라는 고려에서 온 사신을 ‘조공사’로 부르지 않고 ‘국신사’로 높여 불렀다. 고려를 송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바라본 것이다.

 


4) 음악과 춤


   한국의 음악,그림,조각,건축,춤 등 모든 예술에는 한국적 특성이 담겨 있다. 그 특성은 바로 ‘신바람’이다. 하늘,땅, 인간은 모두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그 생명체가 발산하는 기(氣)가 조화롭게 융합되어 생기는 에너지가 ‘신바람’이다. ‘단군신화’에 그런 정서가 담겨 있음을 이미 설명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악기는 사찰의 범종이다. 그런데 범종에는 중국과 일본 종에 보이지 않는 독특한 장치가 있다. 걸개 옆에 음관이 달려 있어 하늘의 소리를 담고, 종 아래에는 움 푹 파인 음통이 있어서 땅의 소리를 담는다. 종을 치는 것은 사람이 한다. 한국 범종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악기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음관과 음통이 있는 종소리와 그렇지 않은 종소리는 음색이 다르다. 쇠로 만든 추가 종벽을 때리는 서양 종의 소리는 하나의 음가를 내고 있지만 한국 종은 한 번 때려도 여러 음가를 동시에 내면서 신비스런 음색을 자아 낸다. 그 소리는 중국이나 일본의 종소리와도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심리치료에 한국 종소리를 활용하기도 한다.


   현악기인 거문고와 가야금,가죽악기인 장고와 북,금속악기인 꽹과리와 징도 독특하다. 우리의 악기는 음양과 천지의 조화를 통해 신바람을 일으킨다. 높은 음과 낮은 음은 음양과 천지를 상징한다. 한 개의 악기에도 음양을 동시에 갖추고 있지만,다른 악기와 어울려 음양을 연출하기도 한다. 꾕과리가 여성적이라면 징은 남성적이다. 징,평과리,북,장고가 어울리는 사물놀이는 신바람 음악의 극치를 보여준다.


   판소리와 민요는 대자연의 바람소리,물소리,새소리 등과 어울리면서 신바람을 연출하는 노래이다. 음폭이 넓어서 국악을 한 사람은 서양노래도 잘 하지만, 서양노래를 배운 사람이 국악을 하기는 어렵다. 〈아리랑〉, 〈노들강변〉, 〈천안삼거리〉 등 우리 민요는 대부분 3박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천지인을 상징한다.


   판소리와 민요에는 슬픔과 즐거움과 해학이 동시에 들어 있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게 만든다. 한국 문학과 예술의 특징을 ‘한(恨)’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한(恨)’ 속에 ‘낙(樂)’이 있는 것을 간과한 해석이다.


   한국의 춤은 새가 날개를 펴고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깨춤이 절로 난다는 말이 있다 어깨에 달린 팔을 날개처럼 휘저으면서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는데, 이를 오금질이라고 한다. 새가 날 때의 동작 그대로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어깨에 날개를 달고 춤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그림이 많다.  범종에도 신선이 옥피리를 불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또한 하늘과 하나가 되려는 신바람의 동작이다. 봉덕사 신종이 그렇고, 상원사 동종에도 비천상이 있다. 고려시대 종도 마찬 가지다.


   한국의 춤에는 춤꾼들이 둥근 원을 그리면서 맴도는 원무가 많고, 때로는 태극모양의 동선을 따르기도 한다. 등근 원은 바로 하늘을 상징한다.


   한국에서 춤은 즐거울 때도 추고, 슬플 때도 춘다.  죽음은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므로 하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슬픔인 동시에 즐거움이다. 장례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추는 제례악춤이 있다. 한국인에게 슬픔과 즐거움은 하나이다.

 


5) 그림과 조각


   한국의 그림은 크게 인물화,산수화,풍속화,화조도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의 고분 벽화는 무덤의 주인공이 전생에 살아온 모습과 내세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기도 하다. 고분에 이렇게 다양한 풍속화를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벽화에 보이는 우주판은 바로 땅에서의 전생과 하늘나라에서의 내세를 함께 묶어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종교적 심성을 표현하고 있다.

 

   세 발 달린 삼족오(三足鳥)가 자주 보이는 것도 천지인 합일 사상을 보여준다. 까마귀는 태양 속에서도 살고 땅에서도 살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새이다. 그래서 다리를 세 개로 그린 것이다. 우리 민속에 까마귀가 울면 누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까마귀는 흉조라기 보다는 길조이다.


  고분 벽화에는 무교와 불교가 혼합되어 있고, 음양오행사상도 들어 있다 특히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그린 사신도(四神圖) 또는 사수도(四獸圖)는 오행사상을 표출한 것이다. 무덤에 이렇게 사수도(사신도)를 그리는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왕실의 장례식 때 시신을 모신 찬궁의 네 벽에도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내세보다는 현세를 주로 그리고 있는데, 자연과 사람이 서로 만나 즐기는 모습이 주를 이뤘다. 이 역시 신바람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다.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의 풍속화가 그러하다. 한국 그림에는 해학이 풍부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인데 그것이 바로 낙천성이다.

 

   산수화도 자연만을 그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사람이 하나가 되어 신바람을 느끼는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진경산수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이 그렇다. 그가 그린 산수화는 금강산, 박연폭포, 삼부연폭포, 인왕산 등 우리나라 자연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그 풍경에 담긴 음양의 생명력을 강조하고, 그 속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받고 있는 감동과 신바람의 흥을 함께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만을 그리는 서양의 풍경화와 다르다. 


   한국의 인물화는 사람의 육체적 비율이 갖는 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그리지 않고, 얼굴과 눈에서 보이는 생명의 기를 강조하여 그린다. 외형적 균형과 비례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양화와는 다르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데서 발생하는 생명의 기를 의미한다. 송강 정철이 선조를 ‘미인(美人)’으로 간주하여 쓴〈사미인곡〉에서 임금을 미인으로 본 것은 팔등신의 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지인의 이치를 하나로 합하여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의 미인이다.
   한국인은 몸매나 얼굴이 아름다울 경우 미인이라 부르기보다는 곱다, 예쁘다,늘씬하다, 요염하다는 표현을 주로 쓴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의 ‘미인도’는 신윤복이 쓴 표현이 아니고 후대의 소장자가 붙인 이름이다. 신윤복 자신이 쓴 화제를 보면 이 여인이 풍기는 색정에 감동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생으로 보이는 이 여인을 팔등신 미인으 로 본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발산하는 생명의 에너지를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신윤복이 포착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생명의 기다.


   조선시대 임금이나 대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눈동자의 표현이다. 눈에 생명의 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각은 주로 불교와 관련된 불상이나 보살상, 또는 나한상, 천왕상 그리고 불탑 등이다.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몸매가 아니고, 얼굴과 눈이다. 석굴암의 부처는 너무 비대하고,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너무 가날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상으로 인정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얼굴의 표정 때문이다. 이렇게 편안한 얼굴의 표정은 쉽게 찾기 어렵다. 일본 국보 1호인 교토 고류지의 나무로 만들어진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백제인이 만든 것으로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9~1969)가 보고 세계 최고의 미술품으로 격찬하는 등 세계적인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작품과 한국의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재료만 다르고 형태가 굉장히 유사하다.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감동은 바로 인자함이 풍기는 생명에 대한 사랑 곧 신바람이다.


   조선시대 화조도의 특징도 음양의 조화에서 오는 생명감이다. 꽃을 그리면 나비나 새도 함께 그려 꽃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죽은 꽃을 그리는 서양의 정물화와는 이 점이 다르다. 나비나 새를 그릴 때에도 반드시 암수가 짝을 이루어 음양의 조화를 표현한다. 짐승을 그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6) 도자기와 공예


   한국의 도자기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가장 발달했다. 고려자기는 송나라 도자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색채가 대부분 밝은 비취색을 띠고 있는데 이는 하늘 색을 닮았다. 둘째, 형태가 매우 다양한데 참외,표주박,복숭아와 같은 과일이나 원숭이,해태,오리,새 등과 같은 짐승의 모습을 가진 것이 많다. 연꽃 무늬 받침대 위에 둥근 투각을 얹은 향로는 둥근 하늘을 상징한다. 대자연의 생명체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셋째로 표면에 문양을 칼로 새기고 그 안에 백토나 자토를 넣은 다음 유약을 바르는 상감수법은 매우 독특하다. 넷째,표면에 새겨 넣은 문양도 꽃이나 나무,또는 구름과 학을 넣어 대자연과 가까워지려는 마음을 담고 있다. 특히 구름과 학 무늬가 많은 것은 하늘로 올라가려는 승천의 꿈이 엿보인다.


   고려자기의 매력에 빠진 송나라 서긍은《고려도경》에서 고려자기의 종류와 색채,형태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내렸다.  송나라 도자기는 당나라 도자기의 특색인 당삼채의 영향을 받아 황색,녹색, 갈색을 함께 넣은 것이 많고, 색채가 다양하여 화려한 느낌을 주지만 고려자기처럼 자연물의 형상을 따른 것은 거의 없다. 무늬도 꽃이나 용을 주로 선호한다. 이에 비해 고려자기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우아하고 자연스런 친근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자연친화적인 도자기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 초기의 백자, 16세기의 분청사기,조선 후기의 청화백자와 철화백자, 진사백자 등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지만,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정취는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조선시대 자기는 고려자기에서 보이는 비취색의 관상용 그릇은 거의 사라지고,음식을 담거나, 문방구로 쓰는 등 실용적인 도자기가 주류를 이룬다. 도자기에 넣은 그림은 대나무,난초, 매화,국화 등 사군자(四君子)를 비롯하여 소나무, 포도, 모란,새,물고기 등 살아 있는 자연물을 주로 담고 있다. 아는 선비들의 깨끗한 절개와 자연 사랑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자기에서 가장 한국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것은 18세기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다. 마치 중천에 뜬 보름달이나 태양을 연상시키는 달항아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자기 의 걸작인 동시에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공예는 주로 가구와 문방구류 등 생활용품에서 특색을 발휘했다 나무공예품의 경우는 가능한 한 나이테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하고,오래도록 자주 사용하는 가구는 옻칠을 두껍게 하여 수명이 오래 가도록 배려했다. 옻칠가구 가운데 조개껍질을 잘라 넣어 그림을 만든 나전칠기와 쇠뿔을 잘라 넣어 그림을 만든 화각공예도 일품 이다. 나전칠기는 고려시대 작품이 한층 더 예술적이지만 대부분 국내보다는 일본으로 가 있는 것이 아쉽다.


   조선의 도자기 문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되어 간 이삼평, 심당길 등의 도공에 의해 규슈지역에서 발전하여 일본 도자기의 비조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7) 건축과 정원


   한국의 건축에도 천지인 합일의 신바람이 담겨 있다. 한국의 초가집 지붕은 완만한 원형을 띠고 있는데,이것은 하늘의 곡선을 빌린 것이고, 기와집의 지붕은 둥글지는 않지만,새가 날개를 편 모양을 닮았다. 고대에는 용마루 끝에 얹은 막새기와 모습을 ‘치미'라고 불렀는데,이는 새의 꼬리(혹은 주둥이)를 닮았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궁의 지붕에 보이는 막새기와는 용머리 모습을 하고 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새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짐승이기도 하다.


   기와집이나 초가집이나 내부구조는 온돌방과 마루가 조화를 이루어 막힌 공간과 터진 공간이 공존하는데,온돌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마루는 바람이 밑으로 통하도록 배려하고, 벽도 숨을 쉬도록 황토와 짚이나 수숫대를 섞어서 발랐다. 가난의 상징으로 여겼던 황토집이나 초가집이 오늘날에는 건강에 좋은 미래의 가옥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옥은 숨을 쉬는 집이다.


  한국의 정자도 매우 아름답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올라앉은 정자는 대부분 면적이 매우 작지만,동서남북이 툭 터져 있어 드넓은 대자연을 안아 들이고 있다 평양의 연광정, 부여의 백화정, 경복궁의 향원정, 창덕궁의 부용정, 전라도 담양의 소쇄원과 식영장,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등이 대표적인 정자이다.


   한국의 연못은 천원지방의 모습을 따랐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넣어 땅과 하늘을 상징하고, 그 가운데 조각배를 띄우고 사람이 노닌다 경복궁의 향원지, 창덕궁의 부용지, 경주의 안압지, 부여의 궁남지 등이 그런 모습이다. 연못에서도 천지인 합일의 신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원은 가능한 한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더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연환경은 그 자체가 최고의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나무도 자르거나 비틀지 않고 그대로 자라게 한다. 한국의 정원문화를 대표하는 곳은 창덕궁 후원이다. 응봉에서 뻗어내린 나지막한 산비탈에 폭포가 있고, 계곡이 있고, 바위가 있고, 연못이 있고, 울창한 수림이 있다. 그곳에 날아갈 듯 아담 한 정자를 곳곳에 세워 쉼터를 만들고 자연의 품속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다. 한국의 자연친화적인 정원 문화는 인공을 가미하여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양이나 중국 그리고 일본의 정원과 다르다.

 


8) 자연관 - 음양오행사상


   한국인은 우주자연을 모두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바라보았다. 현대과학에서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우주가 모두 살아 있다는 생각은 음양, 오행사상의 영향이다. 음양과 오행이 서로 만나면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발전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태양과 달이 양과 음이고, 수성, 목성, 화성, 토성, 금성이 오행을 이루고 있어 하늘은 살아 있다. 땅에도 강(江)이 음이고 산(山)이 양이고, 물(水), 불(火), 나무(木), 금속(金),흙(土) 등 오행을 지니고 있으므로 땅도 살아 있다. 하늘을 생명체로 보는 이론이 천문학이고, 땅을 생명체로 보는 이론이 풍수지리학이다. 사람도 음양과 오행이 있다.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며,몸 속에 있는 오장(심장,폐장, 간장, 신장,비장)이 오행이다. 그래서 사람은 생명체이다.


   하늘, 땅,사람은 이렇게 살아 있으므로 우주도 생명체이고, 생명체는 서로 돕고 사는 한 몸이다. 그래서 천지인은 셋이면서 하나요,하나이면서 셋으로 본다. 하늘의 이치,땅의 이치,사람의 이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이치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생각은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친환경 사상이다.


   그런데 음양과 오행이 생명을 낳고 키우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은 상생과 상극이다. 오행은 서로 탄생시키면서 서로 이긴다는 뜻이다. 상생이란 물이 나무를 낳고,나무가 불을 낳고,불이 흙을 낳고,흙이 금을 낳고,금이 물을 낳 는다는 것이다. 상극이란 물이 불을 이기고, 불이 금을 이기고, 금이 나무 를 이기고 나무가 흙을 이기고,흙이 물을 이긴다는 것이다. 상생이 평화적인 관계라면 상극은 갈등관계를 말한다.


   음양오행 사상은 ‘단군신화’에도 있지만, 이를 발전시킨 것은 춘추시대 산동지방의 아사달족 출신 추연이다. 훗날 중국인도 이 사상을 받아들였는데,중국인은 상생보다 상극을 더 존중하였고 한국인은 상극보다 상생을 더 존중하였다. 중국인은 왕조가 바뀔 때 뒤 왕조가 앞 왕조를 이겼다는 상극설을 가지고 설명하지만,우리는 앞 왕조가 뒤 왕조를 낳았다는 상생설로 해석하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신라는 금덕을 가진 왕조로서 수덕을 가진 고려를 낳았고, 고려는 목덕을 가진 조선을 낳았다고 본다. 


   이렇게 중국과 한국이 다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중국의 왕조교체는 북방 민족과 중화족이 서로 정복하여 교대하는 과정이었는데 반해, 한국의 왕조교체는 같은 민족끼리 권력을 교체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오행의 상생과정으로 보고 이름의 항렬을 짓는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물(水) 항렬이면,아버지는 나무(木), 아들은 불(火), 손자는 흙(土), 증손자는 금(金) 항렬을 따른다. 이렇게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짓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오행은 또 고유의 숫자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흙은 5, 물은 6, 불은 7, 나무는 8, 금은 9로 본다. 그래서 금덕을 가진 신라는 9자를 선호하여 전국을 9 주로 나누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고, 수덕을 가진 고려는 6을 선호하여 전국을 5도+양계로 나누고, 서경으로 도음을 옮기면 36국이 조공을 바치게 된다고 묘청(妙淸)이 주장했다. 목덕을 가진 조선은 목자 곧 이(李)씨가 임금이 된다고 선전하고, 8자를 선호하여 전국을 8도로 나누고, 한양에 도읍을 두면 8백 년 왕업이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제는 목덕의 시대가 끝나고 화덕의 시대가 오는데 화덕을 가진 성씨는 정씨라고 보고 정씨 성변을 가진 인물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예언서를 퍼뜨리고, 반란을 자주 일으키기도 했으나 끝내 정씨왕조를 세우지는 못했다.《정감록》이라는 예언서가 널리 유행하고, 선조 때 정여립의 반란,영조 때 정희량의 반란이 일어난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오행은 각각 덕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물은 지, 불은 예, 나무는 인, 금은 의, 흙은 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안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水 智者樂山)고 말했는데,바로 오행의 덕을 알고서 한 말이다.


   오행은 방위와도 관계가 있는데,북쪽은 물,남쪽은 불, 동쪽은 나무,서쪽은 금, 중앙은 흙이다. 오행은 각각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물은 어둠침침하고,불은 붉고,나무는 푸르고, 금은 희고, 흙은 누렇다고 본다 이  5가지 색깔을 오방색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오방색을 매우 사랑하여 음식,의복 등에 오방색을 적용했다. 비빔밥의 색깔이 그렇고, 색동 옷이 그렇다. 심지어 한반도 지도를 그릴 때에도 오방색을 사용하여 경기도는 노란색,강원도는 푸른색,황해도는 흰색,충청,전라, 경상도는 붉은색,평안도와 함경도는 어두운 색으로 칠했다. 이렇게 오방색으로 지도를 그린 나라는 한국뿐이다.


음양도 색깔이 있는데,양은 붉은색, 음은 푸른색으로 본다. 태극기의 색깔이 바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남녀를 상징하는 빛깔도 홍청으로 보아 결혼할 때 붉은빛과 푸른빛의 옷을 입는다. 태극을 국기로 정한 것은 한국인이 예로부터 음양오행 사상을 사랑한 결과로 조선 시대에도 태극기를 국기처럼 사용했다가 개화기에 국기로 확정하였다. 오행은 신령스런 짐승으로도 보았다. 거북은 북방이므로 어둠침침한 색이고, 용은 동방이므로 푸른색, 호랑이는 서방이므로 흰색,공작은 남방이므로 붉은색,중앙에 있는 용은 노란색이다. 그 가운데 중앙의 황룡이 가장 권위가 높다. 


   사람 몸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장기도 오행으로 본다. 심장은 불이고, 간장은 나무이고, 신장은 물이고,폐장은 금이고, 비장은 흙이다. 오장뿐 아니라 다섯 개의 감각기관도 오행으로 설명한다. 피부는 물과 연결되어 있고, 귀는 불,눈은 나무,코는 금, 입은 흙과 연결되어 있다. 이상 오행사상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5 행行 5 방方 5 색色 5 수數 5 덕德 5 방신
方神
계절 5 장腸 5 관管 자모음 6 조醫 왕조 4 대문
수水 흑黑 6 지智 현무 겨울 신장 피부 = 고려 炤智門
화火 적赤 7 예禮 주작 여름 심장 兵=夏 정감록 崇禮門
목木 청靑 8 인仁 청룡 간장 禮=春 조선 興仁之門
금金 백白 9 의義 백호 가을 폐장 刑=秋 신라 敦義門
토土 중앙 황黃 5 신信 황룡 여름~ 가율 비장 黃閣 ? 普信閣
                  () 吏=天    
                  () 戶=地    


   그런데 음양오행 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선시대 한양의 네 도성문인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소지문(숙정문)의 이름과 종로의 보신각도 오행의 인의예지신을 따라 지은 것이다.


   한국인이 얼마나 음양오행 사상을 선호했는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문화재는 훈민정음이다. 다섯 개의 기본 자음 ㄱ, ㄴ, ㅂ, ㅅ, ㅇ은 오행의 모습과 천지인을 상징하는 ○ □ △의 모습 을 참고한 것이다 한편 훈민정음의 모음도 양모음은 땅(ㅡ) 위에 태양(ㅇ)이 있거나 사람(ㅣ)의 동쪽 에 태양(ㅇ)이 있는 모습이고, 음모음은 땅 아래에 태양이 있거나 사람의 서쪽에 태양이 있는 모습이다. 참으로 절묘한 문자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으로 보더라도 음양오행 사상이 동아시아세계의 공통된 사상이라고 하지만,특히 한국이 가장 철저하게 실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공동체문화


   한국인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가지고 고조선을 세웠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는데,홍익 인간은 바로 공동체정신을 말한다. 이미 고대부터 한국인들이 농경생활의 필요에서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착하게 서로 돕고, 서로 존경하고, 생명을 아끼는 풍습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을 중국의 여러 책이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국을 가리켜 ‘군자국’, ‘동방예의지국’,‘소중화'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한국인의 공동체는 시대가 지나면서 여러 형태로 발전해갔다. 첫째, 마을공동체이다. 이를 고대에는 ‘향도’라 부르다가,고려-조선시대에는 ‘두레’로 부르고 한자로 ‘사(社)'라고 썼는데, ‘두레모임’이 바로 사회이다. ‘두레’는 농사에 필요한 일을 서로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함께 치러주고, 자연재난을 당했을 때 힘을 모아 구제해주고, 가을에는 무리를 지어 함께 춤과 음악을 즐기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금 '두레패'로 불리는 농악대가 바로 그런 전통에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침략을 당하면 앞장서서 의병을 만들어 전장에 나가 싸웠다. 우리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는데, 남남이라도 서로 이웃하여 도와주는 힘이 피붙이인 사촌보다도 더 낫다는 뜻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다른 민족의 침략을 많이 당했는데,그때마다 관군(官軍)보다는 항상 민병대, 즉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고려의 전쟁,몽고와의 전쟁,조선시대 임진왜란,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등에서 승리를 거둔 힘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신라의 화랑도 조직도 바로 이런 공동 .체를 말힌다. 고구려와 백제도 이런 조직이 있었다. ‘두레’는 말하자면 평상시에는 생산공동체요, 종교공동체요,오락공동체이지만 국가 유사시에는 군사공동체로 변하여 나라를 지켜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두레’ 말고도 ‘향약으로 불리는 공동체가 새로 생겼다. ‘향약’ 은 남자 중심의 공동체로서 도덕과 예의,경제적 상부상조, 국가에 대한 책무 등을 부과하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도 내리는 공동체로써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두레’가 남녀노소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기도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그 대안으로 만든 것이 ‘향약'이었다. ‘향약’은 송나라 주희가 만든 송나라 향약을 모델로 삼아 시행했지만, 한국의 향약은 계(契)라는 재원(財源)을 만들어 경제적 상부상조를 추구한 것이 중국과 달랐다.


   '공동체의 두 번째 형태는 가족공동체와 친족공동체이다. 가족공동체를 위한 윤리는 ‘삼강오륜’ 속에 들어 있는데,부모에 대한 효(孝)와 부부 사이의 구별을 매우 강조했다. 효는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가 죽은 뒤에는 제사를 잘 지내고, 부모의 뜻을 존중하며 따르는 것이나, 부모가 잘못을 하는 경우에는 비판하면서 만류하는 것도 효로 보았다. 부부 사이의 구별은 남편이 바깥일 곧 사회생활을 하고 아내는 집안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자의 사회활동을 막은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지만 가정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다른나라에 비해 높았다.


   모계제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딸이 부모의 재산을 아들과 똑같이 상속받는 제도가 내려오다가 17세기 이후로 아들 중심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지만, 남녀평등 상속제도의 전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한편 조선시대 첩 제도가 생기면서 서자가 차별을 받기 시작했지만,오히려 본처의 지위는 전보다 높아졌으며,벼슬아치가 본처를 소박하는 경우에는 엄중한 벌로 다스렸다 흔히 조선시대 ‘칠거지악'으로 여성이 이혼당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삼불거’ 가 있어서 ‘칠거지악은 무의미했다.


   한국의 친족제도는 남자 쪽 친족만이 아니라 여성 쪽 친족도 똑같이 존중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제도에서 응시자의 신분을 따질 때에도 외할아버지 이름을 반드시 쓰도록 하여 남자 쪽 친족이 낮더라도 외가 쪽 신분이 높으면 이를 존중했다. 조선 전기의 《족보》는 딸과 사위 이름까지도 기록하여 외가, 처가,사위 집안까지 함께 존중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사례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가족공동체와 친족공동체를 존중하는 전통이 때로는 다른 가문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후손들에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어 정체성과 경쟁심을 잃지 않도록 분발시키는 순기능이 컸다.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은 이러한 한국인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잃게 만들어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이었다.


   한국인의 공동체정신은 지역이나, 가족 또는 친족공동체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국가공동체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애국심이지만,옛날 표현으로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다. 나라에 대한 충(忠)과 부모에 대한 효(孝)는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했다. 이런 충성심으로 국가가 위험에 처하면 일치단결하여 도와주는 전통이 있었다. 군사적 위험이 클 때에는 의병(義兵)으로 나가서 싸우고, 경제적으로 위험할 때에는 사재를 털어 국가에 헌금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때 일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 운동을 벌이고, 1997년에 외환위기가 오자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일도 있다.


   8 • 15 광복 후 서양의 개인주의가 들어오면서 한국인의 공동체정신이 많이 흔들리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찾으려는 풍조가 커졌다. 이는 개인의 발전을 위해 좋은 점도 있지만, 지나친 개인주의는 공동체 정신을 해칠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개인의 인격완성을 통한 공동체의 안정을 추구한 전통시대의 가치를 개인주의와 접목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격완성을 소홀히 하는 개인주의는 사회갈등을 증폭시킬 위험이 있다.

 


10) 교육열


   한국의 전통문화 가운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높은 교육열과 수준높은 기록 문화이다. 공자(孔子)는《논어 論語》의 첫머리에서 “배움을 때에 맞추어 실천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라고 말했다. 공부가 인생의 최고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을 한국인은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은 유교의 가르침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대륙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지배층이 전란을 피해 파상적으로 망명해 온 데다가,과거제도로 "배워야 출세한다”는 통념이 형성되고, 생산노동은 노비가 맡아주는 등 여러 요인이 결합된 결과이다. 한국의 정치를 이끌 어온 주체는 교육수준이 높은 학자 - 지식인층이었으며,이 점은 과거제도 자체가 없고, 무사층이  대대로 정치를 주도해온 일본의 정치 전통과는 매우 다르다.


   한국의 교육열이 얼마나 높은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재가 바로 금속활자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펴낸 책은 고려시대의 제도사를 정리한《상정고금례》(1234-1241)라는 책인데 이 책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4년에 마인츠에서 금속 활자로 찍은《42행 성서》보다 약 220년이 앞선다.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1377년(우왕 3)에 청주의 흥덕사에서 간행한《직지심체요절》이라는 불교서적인데,이것도 서양보다는 77년이 앞선다. 불행히도 이 책은 국내에 남아 있지 않고, 지금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금속활자는 목판인쇄에 비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되어 여러 종류의 책을 신속하게 간행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조선 초기에는 활자와 인쇄술이 계속 개량되었고, 국립출판소인 교서관에서는 150여 명의 인쇄 기술자들이 책을 발간하여 "출판되지 않은 책이 없고, 독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출판활동이 왕성했다.


   책과 관련된 종이 생산도 발달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생산국이 되었고, 중국 과 교류하는 물품 가운데 종이가 인삼, 강화 화문석(꽃무늬 둣자리)와 더불어 3대 품목이 되었다 조선 종이는 중국 황실과 화가들의 애용품으로 인기를 끌었는데,가죽처럼 질겨서 등피지 (等皮紙)라고도 하고, 거울처럼 반질반질하여 경면지라고도 불렸다. 한국 종이는 수명이 길어 천년지라고도 불렸는데, 실제로 약 2천 년간 보존이 가능하다.


   교육기관인 학교는 국립과 사립 모두 발달했다. 고려시대에는 국립대학인 국자감이 개성에 있고, 지방에는 주요 군현에 향학이 있었으며, 벼슬을 그만둔 고관들이 세운 사립 학교가 고려 중기에는 12개나 있어서 개성의 거리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인종 때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의《고려도경》을 보면 골목마다 학교가 있고, 궁중에는 수만 권의 북을 보관한 도서관이 있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당시 송나라에 없는 책도 고려에는 있어서 수천 권을 필사해 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국립대학으로 성균관이 있고, 한양에는 네 곳의 부(部)에 부학이 있으며, 지방의 350여 개 군현마다 향교가 있었다. 사립학교로는 지방 유지가 세운 서원이 수백 개에 이르고, 마을마다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이 수만 개를 헤아렸다. 여성에겐 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양반여성은 가정교육을 통해 교양을 쌓아,대학자 율곡을 가르친 어머니 사 임당 신씨(1504~1551),허균의 누이이자 시인이었던 허난설헌(1563~1589),임성주의 여동생으로《문집》을 낸 윤지당 임씨(1721~1793) 같은 걸출한 여성지식인이 속출했다.


   19세기 후반 개화기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수많은 신식학교를 세워 근대교육과 여성교육을 시작했는데,여기서 배줄된 인재들이 근대 한국을 이끈 지도증이 되었다.


   한국인의 치열한 교육열에 외국인들도 감동하여 정한론을 주장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 조차도 집집마다 글을 읽고 있는 조선을 배우자고 말했으며,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군인도 농촌 가옥마다 책이 있고, 독서열이 높은 조선인에 감동을 받은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 최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교육을 배우자고 말하고 있는데,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발전을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그 힘은 바로 치열한 교육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자연자원은 빈약하지만 인적자원만은 풍부한 나라이다.

 


11) 기록문화


   지금 유네스코에서는 해마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선정하고 있는데,2017년 현재 한국은 13종, 중국이 10종, 일본은 5종을 올려놓고 있다. 독일이 21종으로 가장 많지만,그 내용을 보면 지방 수도원의 일기라든가,베토벤이 쓴 악보 등 개인 또는 지역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기록문화유산은 거의 대부분이 국가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분량도 매우 많다. 13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대장경  
   2) 직지심체요절 
   3) 조선왕조실록 
   4) 승정원일기 
   5) 일성록 

   6) 훈민정음해례 
   7) 허준의 동의보감 
   8) 조선왕조의궤 
   9) 이순신의 난중일기 
 10) 5 • 18 민주화운동 기록물

 11) 새마을운동자료
 12) 한국의 유교책판
 13)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고려대장경》은 가장 우수한 동양불교문화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문화재이고,《직지심체 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불교이론서이며, 이 둘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기록물이다.
   그 다음 8종은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로《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500년간의 통치기록으로써 중국의《명청실록》을 능가하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실록》은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 다음 왕대에 수백 명의 편찬위원이 공동작업으로 편찬하는데, 국무회의 속기록인《사초》, 각 관청의 업무일지를 모은《시정기),《승정원 일기》, 승정원에서 발행한 관보인《조보 朝報》 등에서 자료를 뽑아 날짜 순으로 기록하는 데, 4건을 활자로 발간하여 서울에 1 건, 지방에 3 건을 분산 보관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실록은 한국에 2건 <정족산실록(전주실록)과 태백산실록>, 북한에 1건 <적상산실록> 뿐이다 춘추관실록은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왕궁이 불타면서 소실되었고, 오대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으로 유출되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불타버렸으며, 타다 남은 몇십 부 실록은 몇 년 전에 서울대학으로 돌아왔다.
   <승정원일기》는 국왕비서실인 승정원의 일기인데 조선 전기의《승정원일기》는 왜란 때 없어자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조선 후기 기록뿐이지만. 분량은《실록》보다도 더 방대하다.《일성록》은 18세기 중엽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기록하기
사작한 일기로 왕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 임금의 일기다. 매일매일 정치를 반성한다는 뜻에서 《일성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 세계에서 임금이 방대한 일기를 200년 이상 기록하여 남긴 나라는 한국뿐인데, 그 내용은 임금이 읽은 책의 페이지,외출할 때 입은 옷과 모자,가마,그리고 동선(動線)까지 기록하는 등 분량도《실록》보다 많다
  《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이 정치에 관한 자료라면 《훈민정음해례》와《동의보감》 은 문화에 관한 자료다.  전자는 훈민정음을 제작한 원리를 당시에 설명한 책으로 전 세계에서 문자에 대한 해설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허준(1546~ 1615)이 지은《동의보감》은 뛰어난 의학서로 중국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책이다. 《조선왕조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의 혼례, 장례, 제사,  행차, 잔치, 책봉 등 국가의식에 관한 실행 보고서로 행사의 주요장면과 주요도구를 원색으로 그려넣어 현장감을 생생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행사의 절차,비용,참가자의 이름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책의 장정 또한 아름다우며 크기도 보통 책의 두 배가 넘는 등 예술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어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린다. 전 세계에《의궤》를 남긴 나라는 한국뿐이며,책의 분량도 수천 권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전쟁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한 《난중일기》는 16세기 말 동아시아 국제 전쟁인 임진왜란 연구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의 면모도 잘 보여준다 《5 ■ 18 민주화운동 기록물》과《새마을운동자료》는 대한민국의 현대사 자료이지만, 민주화운동과 새마을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한국의 기록문화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인의 교육수준과 정치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을 ‘정치의 거울’로 보고 정직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겨 정치를 반성했으며, 개인이 남긴 수많은 《문집》도 개인의 일생을 반성하는 뜻에서 편찬한 것이다.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기록을 남기지 않고, 정직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은 과오를 크게 범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록문화는 옛날에 비해 크게 후퇴하여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그 것이 바로 정치의 후진성을 말해주고 있다. 민주정치는 투표와 정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도덕성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이며,  도덕성의 중심에 기록문화가 있다는 것을 명심 할 필요가 있다.

 


12) 귀화인 집단과 문화적 단일성


   한국은 현재 소수민족이 없는 국가로 역사적으로 단일민족문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현재 54개 소수민족을 거느린 중국과도 다르크 민족구성이 복잡한 동남아 국가들과도 다르며,아이누족과 말레이족, 그리고 한반도인이 합쳐진 일본과도 다르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결코 혈통적으로 순수한 단일민족은 아니요,정신적,문화적 일체감이 비교적 강한 단일민족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혈통적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대종교 신도들이 이른바 ‘배달민족주의’를 들고 나와 '배달족’ 즉 ‘아사달족’ 전체를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간주하고, 한국사를 새롭게 쓰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의 아사달족 전체 지역을 고조선으로 해석하고, 요, 금, 원, 청까지도 배달족의 역사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단일혈통 민족주의는 역사의 진실에도 맞지 않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사달족은 동일한 문명권으로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역사의 흐름 속에서 언어도 달라지고, 국가도 달라지면서 한국사와 다른 길을 걸어갔고,수차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다만 한국인의 주류는 단군을 조상으로 받들고,하늘과 태양을 숭상하는 아사달 농경민이지만,중국대륙에서는 북방족과 중화족 사이의 왕조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전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집단적인 이주자가 들어와서 한국인으로 동화되었다. 귀화인의 주류는 옛 아사달족이지만, 북방유목민이나 중앙아시아족, 심지어 인도나 베트남,일본 등지에서도 귀화인이 들어 왔다.


   지금 한국인의 성씨 가운데 귀화인 성씨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이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예를 들면 최초의 대규모 이주집단인 은(般)나라 귀족출신의 기자족(箕子族)은 기자조선을 세우고, 마한을 이끌어갔으며,뒤에는 한씨, 기씨, 선우씨로 나뉘어 신라,백제, 고구려 땅으로 흩어져 살았다. 그 뒤 연 나라의 위만(衡滿) 집단이 들어와 위만조선을 세우고, 신라 땅으로 들어가 진한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기자족과 위만족은 산동 지역과 요서지역에 살던 아사달 농경족이었다.


   부여,고구려, 백제,신라, 가야를 세운 왕족은 말을 잘 타는 북방의 반농 -반유목의 기마족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하여 농경민을 삽시간에 정복하고 새로운 고대국가를 세운 것이다. 이들은 아사달족 가운데서도 초원지가 많은 북방에 살던 족속으로 보인다. 신라가 골품제도로 주민을 편제한 것은 정복자의 지배체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신분제도이다. 이들 기마족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국을 세우기도 했다.


   삼국이 세계적인 대국을 건설한 당(唐) 나라와 교류하면서 귀화인의 범위는 실크로드로 확장되었으며, 당이 망하고 5대 10국의 혼란기가 오자 대륙인의 이주가 대규모로 진행되어 고려로 들어왔고 여기에 발해유민까지 유입되면서 새로운 지도층이 부상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광종(光宗) 때 과거제도를 건의한 후주 사람 쌍기다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이 무렵 귀화한
성씨가 적지 않다.


   거란과의 오랜 전쟁을 거치고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망명객이 또 폭주했다. 천민으로 알려진 재인, 백정, 양수척, 기생등이 거란족으로 알려지고 있으며,원나라 귀화인 중에는 역관, 의관, 천문관 등 기술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조선왕조 개국공신 대열에 참여하기도 하고, 세종의 지우를 입어 과학기술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개국공신 이민도는 의학에 밝았으며,천문기계와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은 고려 말 귀화한 중국인의 아들이다. 집현전 학자로 이름을 떨친 설순도 위구르에서 귀화한 설손의 손자로 설장수의 아들이다.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에 대한 귀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들어온 이주민은 평안도와 함경도 주민으로 편제되었다. 임진왜란과 호란 중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와 군졸이 귀화하기도 했다. 일본인 장수, 명나라 장수들 가운데에도 귀화인이 나타나고, 호란 후에 소현세자를 호종하고 온 청나라 관인 여러 명이 귀화했다.


   귀화인 집단 가운데 고려 말 이후에 들어온 집단은 대부분 희성의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조선 후기에는 역관, 의관, 천문관, 주학 등 기술직에 대대로 종사하여 중인 계층으로 살았는데 이들 가운데 개화기에 개화파로 활동한 인물도 적지 않다.


   역사적으로 귀화인의 지속적인 증가는 한국문화를 개방적으로 이끌면서 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이들은 크게 보면 아사달문화권에 살던 주민이었기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소수민족으로 남지 않고 단일한 언어와 역사계승의식을 공유하면서 문화적 단일민족으로 동화되어 살아온 것이 한국사의 특성이다.

 


3. 한국인의 생존능력 -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생존전략


   그러면,한국인이 5천 년간 국가를 운영하면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북방족의 군사적 침략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중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정치적 독립과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생존해온 비결은 무엇인가? 국토의 크기와 인구의 규모를 가지고 본다면 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경쟁력을 높이는 최고의 생존전략은 ‘지피지기(知被知己)’,'법고창신(法古創新)’,'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이다. 손자의 병법에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지피지기 백전불패"다. 여기서 "상대를 알고 나를 안다”는 것은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기의 장점을 합친다는 뜻이다. 이는 주체성과 개방성의 조화를 말한다. ‘법고창신’이나 ‘온고지신’도 같은 뜻이다 "옛 것을 본받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으로 자기의 좋은 전통을 사랑하면서 남의 장점을 받아들여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바로 이런 지혜를 가지고 생존능력을 키워왔다.


   한국인이 전통을 계승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역대 왕조의 국호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고구려는 천손(하느님의 아들 해모수 의 후손)이 세운 나라일 뿐 아니라 중국과 자웅을 겨루는 강국이 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세계 최선진국인 송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수준을 한 단계 높여 송과 자웅을 겨루는 문화대국이 되었다. 조선은 옛 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정했는데, 특히 천손(단군)이 세운 단군조선과 조선을 문명국가로 발전시킨 기자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정신이 담겨 있었다. 기자조선은 이상적인 토지제도인 정전제를 실시하고, 시서예악을 가르쳤으며, 팔조교를 베풀어 도덕국가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고려’보다는 더 진화된 뜻을 담고 있다. 고구려는 3국 가운데 하나이므로 지역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고조선은 3국의 공통 뿌리가 될 뿐 아니라,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대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이렇게 고조선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법고적 역사의식을 담고 탄생했지만, 세계 최강국인 명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의 문화까지도 받아들여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국가로 발전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의 ‘법고창신’ 정책이다.


   1897년에 세운 대한제국의 국호는 삼한의 영토를 모두 아우르는 대국을 재건 한다는 웅대한 꿈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삼한은 마한, 진한,변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을 뜻한다. 옛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삼한일통'이라고 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1919년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호를 거쳐 지금 대한민국의 국호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제국은 국호에 법고적 역사계승 의식을 담았지만,현실적으로는 전통문화와 서양 근대문화를 조화시키는 ‘동도서기와 ‘구본신참’의 정책을 통해 주체적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최초의 근대국가를 탄생시켰다. 한국의 전통적 정치체제나 윤리는 굳이 서양에서 배울 필요가 없고, 우리가 서양에 뒤진 것은 과학기술이므로 이를 받아들이면 얼마든지 한국식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합리적인 관료제도나 과거제도, 민본정치의 전통, 그리고 도덕적 가치 등은 한국이 서양보다도 먼저 발전시켜왔다. 


   ‘법고창신’의 정신을 가지고 ‘주체’와 '개방’을 조화시키면서 한국인이 추구해온 생존전략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손이 지켜야 할 국가운영의 10가지 기본철학인 '훈요십조’ 롤 지어 남겼는데,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우리나라는 예부터 당풍(중국문화)을 흠모하여 문물예악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는 방위가 다르고 땅이 다르며,인성(국민성) 또한 다르다. 그래서 반드시 중국과 똑같을 필요가 없다. "


   중국과 우리나라는 국토와 자연환경이 다르고 국민성도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되 반드시 똑같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훈요십조’와 비슷한 말을 성종 때 유학자인 최승로가 임금에게 진언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28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 중국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방의 습속은 각기 자기의 토성(토착성)을 따라야 하는 만큼 모든 것을 다 중국식으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예악과 시서의 가르침이나,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배워서 비루한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밖에 거마나 의복제도 같은 것은 우리의 토풍(土風)을 따라서 사치스럽지도 않고 검소하지도 않게 하여 중용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꼭 중국과 똑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최승로의 가르침도 ‘훈요십조’와 거의 같다. 우리보다 앞선 중국의 인문교양이라든지 군신과 부자 사이의 윤리는 받아들여 우리의 후진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지만,의복이나 탈 거리 등의 풍속은 우리의 토성(土性)과 토풍(土風)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중국처럼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게 하여 중용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문화와 한국문화를 비교할 때 중국은 모든 것이 크고 화려하게 보이는데 왜 한국은 작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알 수 있다. 국력이 약해서 그렇게 되었다기 보다는 우리 정서에 맞는 소박한 문화를 추구한 것이 근본 이유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고려인들이 얼마나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문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송나라가 고려를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송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은 조공사로 불렀는데, 고려에서 온 사신은 국신사로 불러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송나라에 없는 많은 책을 고려에 와서 필사해 간 적도 있었다. 송나라의 유명한 문인 소식은 한때 항주의 지사(知事)를 지냈는데, 고려의 승려들이 대거 몰려와 항주에 사찰을 짓고 포교하고,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의 책들을 구입해가는 것을 보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황제에게 고려와의 사신 왕래를 끊을 것을 건의했다. 고려인들이 중국에서 적극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것에 소동파 같은 대문호도 겁을 먹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세종의 정치도 전통과 개방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문화의 중흥을 가져왔다. 우선 훈민정음을 만든 동기 자체가 자연환경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다. 풍토가 다르면 소리(말)가 다르고, 소리가 다르면 문자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 때 편찬한《동국정운》의 서문에도 비슷한 언급이 보인다. 신숙주가 쓴 이 서문을 보면,서양사람의 말은 잇소리가 많고, 북방사람의 소리는 목구멍소리가 많으며,남방사람의 말은 입술소리가 많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의 풍토에 맞는 말을 하기 때문에 한자음을 우리 말에 맞게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 때 편찬한 농서나 의약서도 마찬가지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과 의약품을 발전시킨 것이고, 역법도 우리나라에서 관측한 시간과 날짜를 바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칠정산내외편》을 만든 것이다. 원나라 때 발전한 선진적 과학과 기술을 전통과 접목시켰기 때문에 세계적 수준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훈민정음도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문자이면서 원나라 때 만들다가 실패한 세계문자의 원리를 참고했기 때문에 동시에 국제어의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은 마치 중국 성리학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흉내 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들도 우리나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고치고 바꾸어 한국적 성리학을 만들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가《성학집요》를 편찬 한 것은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만든《대학연의》가 우리나라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고, 체제가 방대하고 산만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나 북학자도 중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버리자고 생각한 사람은 없으며, 중국 학자들이 해설해 놓은 유교 경전을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고,공자나 맹자가 말한 원시유교를 독자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학문은 성리학이든 실학이든 독창성이 높았다.


   조선 후기 조선왕조를 중흥시킨 정조도 전통과 중국문화를 접목시킨 지혜로운 임금이었다. 1796년에 준공한 신도시 화성의 성곽을 보면 아랫부분은 전통적인 양식을 따라 돌로 쌓고, 윗부분은 중국식을 따라 벽돌로 쌓았다. 화성건설에 투입된 거중기는 서양인이 만든 거중기를 모방한 것이지만,이를 설계한 정약용은 도르래의 원리만 받아들이고, 거중기의 모습은 서양 것과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정조 때 중국에서 가져온《고금도서집성》가운데 서양인 테렌츠가 쓴《기기도설》속에 그려진 거중기를 참고하여  설계를 바꾼 것이다.


   대한제국이 ‘동도서기’와 ‘구본신참’을 표방하여 주체적인 근대화를 추진할 때에도 동일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고종이 전통을 지키려 했다고 해서 수구세력으로 보는 이가 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원시적인 야만국으로 살아왔다면 전통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 우리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전통을 지나치게 고수하려는 위정척사파의 태도와 전통을 버리고 서양이나 일본 것만을 지나치게 배우려고 하는 급진개화파의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는데,고종의 그런 태도가 옳았다. 대한제국이 망한것은 정부의 노선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 평화공존을 버리고 한국을 강점하려는 야만적인 행동에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한제국은 비록 망했지만 그때 추구한 근대화 정책과 민국 정신이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으며,그 토대 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왕조교체의 의미 - 통합국가, 자유, 평등, 민주를 향한 발전과정

 


1) 통합국가 형성과정


   한국사 5천 년 동안에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왕조교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왕조 교체는 한국사의 발전에 큰 획을 긋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는 두 가지 큰 뜻이 있는데 첫째는 국가통합과정이고, 둘째는 자유,평등,민주를 향한 발전과정이다. 종족과 문화가 다른 북방족과 화하족이 서로 정복하면서 왕조가 바뀐 중국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정복 왕조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국가통합과정은 열국에서 단일국가로의 통합을 말한다. 한국 역사의 시작은 (고) 조선에서 출발하고 있지만,(고)조선은 한국인이 세운 여러 나라 가운데 중심국가일 뿐이고, 같은 시대에 부여, 옥저, 예맥, 삼한, 진국 등 여러 나라가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병립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조선시대는 열국시대로 볼 수 있다.


   열국이 기원 전후하여 고구려,백제,신라, 가야 등의 4국 시대로 바뀌어 약 5백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면서 3국 시대가 성립되어 약 150년 간 이어졌다.  7세기 중엽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3국 시대는 2국 시대로 좁혀졌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세워져 대동강 이남의 신라와 양립하는 형세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남북국 시대라고도 부른다.


   10세기 초에 잠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나, 곧 고려가 통일하고, 거란에 패한 발해 유민까지 표섭하면서 처음으로 단일왕조국가가 등장했다. 이로써 한국사는 열국 -  4국 - 3국 - 2국 - 1국 시대로 통일되고, 그 뒤를 이어 14세기 말 조선왕조가 들어서 519년의 역사를 누렸다. 고려왕조 475년과 조선왕조 519년을 합하여 약 1 천 년간 한국인은 하나의 왕조국가에 서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된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차이는 사회통합 정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왕조는 국가통합에는 성공했으나, 주민들은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향수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우자 신라유민의 반발이 일어났다. 고구려유민과 신라유민의 갈등은 정치적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와 관련되어 심화되었고, 역사서술에서도 드러난다. 고려 초기에 편찬된《삼국사》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쓰인 반면,고려 중기에 김부식 일파가 쓴《삼국사기》는 신라 계승 의식으로 쓰였으며,무신집권시 대에 편찬된 이규보의《동명왕편》은 다시 고구려 계승 의식으로 돌아갔다.


   고구려 후예와 신라 후예라는 두 갈래를 청산하게 된 것은 몽골간섭기에 일연생이《삼국유사 三國遺事》를 쓰고, 이승휴가《제왕운기》(1287)를 쓴 것이 계기가 되었다. 두 책에서는 삼국 이전에 (고)조선이 있어서 삼국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상기시키자 삼국 유민 의식이 흐려지게 된 것이다. 그 뒤 새 왕조를 세운 주체세력은 국호도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한 역사를 쓰게 되었는데,그것이 바로 성종 때 편찬된《동국통감 東國通鑑》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고려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사회통합을 이룩하였는데, 그렇다고 한국인 모두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온 기자와 위만의 후손, 그리고 북방민족(거란,여진 등)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단일민족의식은 일제강점기에 나타났다. 이런 생각은 한국인을 단결시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필요에서 만든 종교적 민족주의로 당시에는 실천적 의미가 큰 것이었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다르다. 하늘과 태양을 숭상한 단군족이 한국인의 주류임에는 틀림없지만, 조상이 다른 수많은 아사달 이주민과 위구르인,베트남인,아라비아인 등이 뒤섞여 오늘의 한국인을 형성한 것이 역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모두 피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은 사실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자칫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키울 우려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2) 왕조교체 주체세력의 성격


   역사에는 정치,경제,사회, 문화 등 삶의 모습이 크게 향상되는 전환기가 있다. 이런 전환기를 토대로 시대를 구분하여 큰 틀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사에서 삶의 질이 힝상되는 가장 큰 전환기는 왕조교체기이다.
한국사의 왕조교체는 보통 500년을 전후하여 나타났다.  삼국시대 약 650년,통일신라 약 270년,발해 약 230년,고려 475 년, 조선왕조 519년[대한제국 포함]이 그렇다. 특히 고려와 조선왕조는 세계적으로도 긴 왕조에 속한다 중국사를 보면 300년을 넘긴 왕조가 거의 없고, 화하족 과 북방족이 번갈아 왕조를 세우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도 정권이 바뀌는 주기가 300년 미만이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사의 왕조는 오래 지속된 것이 특징이다.


   국가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관리를 잘하면 장수하고 관리를 잘못하면 빨리 망한다. 마치 사람이 건강을 잘 관리하면 오래 살고, 그렇지 않으면 요절하는 것과 같다.  한국사의 왕조가 장수한 비결은 왕조마다 백성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변화가 컸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란 정치적 민주화,경제성장과 분배구조의 개선,하층신분의 해방을 통한 사회평등화, 합리적 사고의  발전 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유,평등,민주를 향한 진보와 발전이 왕조가 바뀔 때마다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자유,평등,민주라는 것이 개인주의를 바탕에 둔 서구식 형태와는 달리 공동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왕조교체가 삶의 질을 개선하는 변화를 가져온 이유는 왕조교체가 국민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주체세력은 수구세력도 아니고 서민층도 아닌 중간층에 속하는 문인과 무인들이지만,서민층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수구세력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서민층의 아픔을 덜어주는 개혁적 왕조질서를 수립하게 된다.  왕조교체를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으로 정당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심과 천심을 얻은 새로운 지도자가 민심과 천심을 잃은 폭군을 평화적 또는 물리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론이 바로 ‘역성혁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권력이 민심과 천심을 얻는 개혁을 단행할 때 비로소 권력의 안정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는 점이다.


   왕조교체의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왕조멸망의 1차적 원인은 수구세력의 탐욕이 극대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수구세력의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이 극대화되면 그 피해가 중간층과 서민층에게 돌아가고, 서민층의 저항이 반란형식으로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서민층 의 저항은 구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데는 성공하지만,새로운 질서를 세울만한 경륜이 없어 권력을 잡는 데는 실패한다. 이에 반하여 중간층에 속하는 문인과 무인은 새 질서에 대한 경륜도 있고 물리적 힘도 있다. 중간층 가운데에도 혈통의 정통성이 약하고, 지역적으로 변방에 속하 는 중간층이 개혁성이 강하다. 이런 집단을한계인 집단’(marginal group)으로 부른다.


   역사적으로 왕조국가의 시조들은 대부분 한계인 집단에서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에 신시를 세운 환웅도 장자가 아닌 서자이며,고구려 시조 주몽, 신라 시조 박혁거세, 가야 시조 김수로는 모두 알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며,백제 시조 온조는 맏아들이 아니다. 고려태조 왕건도 중국과 왕래하던 국제무역상의 아들로서 혈통에 중국 피가 섞여 있으며,조선태조 이성계도 여진족과 혼인관계를 가진 함흥의 변방 출신이다. 왕건과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한 개국공신 세력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이런 현상은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들도 비슷하다. 이들은 서민층과의 연대의식이 강하여 개혁의 추진력을 얻게 되며,  서민층의 고통을 완화하는 개혁에 열성을 보이게 된다.

 

 

3) 왕조중심의 시대구분


   인류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며,한국사도 예외가 아니다. 그 진보의 가치는 자유, 평등,민주 를 향한 발걸음이며, 그 속에는 생명에 대한 가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앞에서 말했다. 한국사에 있어서 왕조교체는 바로 이런 가치들이 단계적으로 진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왕조를 기준으로 한 시대구분이 가능하다고 본다.


   시대구분은 이상하게도 유물사관의 도식을 따르는 것이 마치 상식처럼 되어 있으나, 이제 그런 시대구분은 한국사에 맞지도 않고, 미래의 세계를 공산주의로 가자는 생각이 아니라면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다. 혹자는 미래의 공산주의는 부정하더라도 근대까지는 노예제-봉건제-자본제 사회의 도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이것도 엄연한 한국사의 왜곡이다.  한국사에 맞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하지 않으면,한국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말 것이다.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추구해온 가치인 자유,평등,민주, 합리적 사고, 그 안에 내포된 생명사상을 기준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이 모든 것의 총체로 나타난 것이 정치형태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시대를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연맹국가시대 : 삼국이전시대
  2) 귀족국가시대 : 삼국시대
  3)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시대 : 통일신라와 발해
  4) 반半귀족-반半관료국가시대 : 고려시대
  5) 관료국가시대 : 조선시대
  6) 근대국가의 태동 : 대한제국시대
  7)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시대
  8) 남북분단과 대한민국 시대


   여기서 연맹국가시대는 삼국 이전에 열국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대로서 (고)조선, 부여, 삼한, 초기 고구려,진국 등이 포함된다.  이 국가들은 모두 천손을 자부하는 아사달족이 제각기 세운 나라로 관료제도나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단위 소국들이 서로 느슨한 연맹을 이뤄 부족장연합체의 국가를 운영했다. 지배층은 권력자의 모습보다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주민들을 종교적으로 지배했다. 주민들은 지배층을 하늘의 권위를 입은 무당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명령을 따랐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정치는 신정이었다.


   귀족국가시대는 삼국(가야를 포함하면 4국시대) 시대로서 정복자가 왕족이 되고, 왕족과 토착 부족장이 연합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 귀족으로 올라섰다. 여기서 고구려,백제, 신라,가야를 세운 정복자들은 세련된 철기문화와 뛰어난 기마술을 가진 북방 아사달족[부여족]으로 기원 전후 시기에 거의 동시에 남하하여 남방의 농경 아사달족을 정복하여 나라를 세웠다. 정복자들은 귀족이 되어 왕경에 모여 살면서 귀족특권을 세습적으로 보장하고, 대규모의 토지와 무장집단, 그리고 경작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는 바로 정복 왕족과 토착 부족장 세력을 차등을 두어 귀족으로 편제하고 세습적 특권을 보장하는 신분제도였는데,고구려나 백제도 비슷한 성격의 신분제도가 있었다.  지방의 백성들은 자기 토지를 가진 평민층도 있었지만,농업, 수공업,어업 등의 주요 경제지역은 식읍, 향, 소, 부곡 등으로 편제되어 집단적으로 귀족국가에 예속되었으며,그밖에 죄인이나 포로 등은 모두 노비로 편제되었다. 삼국시대 지배층의 권위는 천손의 권위와 아울러 부처의 권위를 동시에 지니고 주민을 지배했다. 말하자면 무당의 권위와 부처의 권위가 합쳐진 것이다. 다만 부처의 권위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진리를 깨친 선각자의 권위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윤회설(輪回說)로 주민의 신분구조를 정당화했다. 노비의 경우는 전생에 죄를 지어 노비로 태어났다는 믿음을 갖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무당이 지닌 홍익인간의 사랑이 있고, 부처의 자비사상이 함께 작용하여 주민을 혹독하게 지배하지는 않았다.


   흔히 삼국시대를 노예제로 보기도 하지만,이는 서양의 노예제도와는 다르다. 서양의 경우는 노예 자체가 인종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으나, 삼국시대의 노예는 같은 아사달족 사이의 정복 과정에서 생긴 피정복민이기 때문에 문화적,인종적 친화감이 높아 보인다. 예를 들어 서양의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노예,16세기 이후 아프리카에서 데려 온 흑인노예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노예는 대부분 백인과 다른 피부와 문화를 가진 이종족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백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인종적 동 질감이 높은 한국사의 노비를 서양의 노예와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귀족정치를 완전히 청산한 것은 아니지만 삼국시대와는 다른 정치형태를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임금의 권위가 달라진 것이고, 골품제도가 무너지는 단계에 들어가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도입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유교문화의 도입과 관련이 있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불교 및 무교의 종교와 아울러 합리적 관료제도와 민본사상을 강조하는 유교 정치사상이 동시에 병존하여, 유교가 점차 귀족정치체제를 중앙 집권적 관료국가로 변화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유교가 보여주는 임금의 권위는 천손의 후예인 무당도 아니고 진리를 모두 깨친 부처도 아니며, 도덕수양을 많이 쌓고 백성을 사랑하는 성인의 권위일 뿐이다. 따라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임금은 백성이 내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임금의 신성한 이미지는 축소되었지만, 그렇다고 천손과 부처의 권위가 모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통일신라와 발해가 어떻게 유교정치를 수용했는가를 알아보자. 우선 신라와 발해는 유교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새로운 관료층을 길러내고, 7세기 말 신문왕 때에는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8세기 초 성덕왕 때에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했다. 이것은 귀족들이 식읍의 형태로 독점하고 있던 토지를 국가가 개입하여 관료와 백성에게 재분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의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 그리고 8 • 15 광복 후 토지개혁으로 이어지는 토지개혁의 단초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왕조국가의 수명을 연장시킨 조치는 여러 가지 있으나, 그 가운데 백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토지제도의 개혁은 백성의 지지를 얻는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으며,이런 개혁은 한국사에만 나타난다.


   남북국시대에는 지방 군현제를 더욱 확충하고, 이곳에 파견된 지방관은 군사적인 통치에서 행정적인 통치로 통치방식을 바꾸어갔다. 이와 아울러 8세기 말에는 과거제와 유사한 독서 삼품과를 실시하여 종전에 무재만 가지고 관료를 뽑던 관행을 벗어나 무치(武治)에서 문치(文治)로 통치방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특히 수많은 신라와 발해인들이 당나라 에 가서 직접 과거에 급제하기도 하여 문치의 바람이 외부에서도 들어왔다. 고려 초부터 시행 된 과거제도(科學制度)의 단초가 이미 이때부터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교정치가 도입되면서 귀족이 가지고 있던 권력과 토지, 노비도 크게 줄어들었고,국왕의 지배를 받는 관료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10세기 초에 출범한 고려는 남북국시대보다 진일보한 사회를 만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권리와 의무에 제약을 받던 골품제도가 없어지고, 10세기 중엽의 광종 때부터는 중국식 과거제도가 시행되어 지방 호족 세력이 시험에 의해 관료로 등용되는 길이 열리고 문치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혈통적 신분제인 골품제도의 잔재라고 볼 수 있는 음서제도로 5 품 이상 고관자제들의 벼슬길을 쉽게 열어 준 것은 아직도 귀족제의 잔재가 모두 청산되지 못 했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신라보다는 합리적인 관료제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반 귀족 - 반 관료제 사회를 만든 것이다. 지방 호족들이 광범위하게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자유민이 확산된 것을 의미하며, 노비의 해방으로 노비인구도 축소되고,고려 말에는 향, 소, 부곡 등 천민집단이 대규모로 해방되어 자유민으로 신분이 상승됐다.


   10세기 말에서 시작하여 11세기 말까지 지속된 전시과는 국가에 대한 공로와 관료의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농지와 산지를 분배한 것으로 관료를 지나치게 우대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만,빈부격차를 완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삼국시대 정치를 좌우했던 불교와 승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민본정치를 강조하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자리함으로써 종교는 승려가 맡고, 정치는 유학자가 맡는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것은 정치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문관과 무관의 기능이 분화되어 이른바 ‘양반체제'가 이루어진 것도 군사통치의 낙후성이 그만큼 극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고려사회가 지닌 귀족제의 잔재를 더 크게 털어버린 시대였다. 음서제도는 더욱 축소되어 2품 이상의 자손서제질(아들,손자, 사위, 동생,조카)과 실직(實職)을 가진 3 품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이조, 병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을 지낸 자의 아들에게만 음서를 허용하되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아전급의 낮은 벼슬을 주도록 했다. 이는 5품 이상 관료의 아들,손자,사위, 동생, 조카 중 한 사람에게 광범위하게 무시험으로 벼슬을 주던 고려시대의 음서에 비해 대폭 범위가 좁아지고 까다로워진 것을 의미한다.


   음서제도가 축소된 대신 과거제도는 더욱 확대되어 노비와 범죄자, 반역자(탐관오리와 재가녀의 자식)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응시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첩의 자식인 서얼은 처음에는 고급문관 시험인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게 했지만 명종 대 이후로 단계적으로 길을 넓혀 고종 즉위년(1863)에 차별대우를 완전히 폐지해 버렸다. 조선시대에는 서얼 가운데서도 수많은 문과급제자가 배출되었으며,평민 가운데서도 무수한 고관대작이 배출되어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신분제도는 자유민 양인과 자유가 없는 노비로 나뉘어졌지만,노비가 양인으로 올라가는 길을 수시로 열어주어 노비인구가 축소되고,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등 노비의 지위도 전보다 개선되었다. 생활이 어려운 양인은 스스로 가족부양이 보장되는 노비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양반을 세습적인 특권층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부 고관 후손에게 음서의 혜택이 있었지만, 높은 벼슬아치가 되려면 반드시 문과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음서로 나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누구나 벼슬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교육기회도 고려시대보다 한층 넓어졌다. 지방의 군현마다 관립학교인 향교(鄕校)가 있어서 무료로 교육을 받았고, 사립학교인 서원은 향교보다도 많았고,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서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출판문화가 발달하여 책을 쉼게 구할 수 있고, 여성은 가정교육을 통해 유교지식을 습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말기 전제 개혁으로 과전법이 16세기 중엽까지 시행되면서 자작농이 크게 늘어나고, 남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수확의 반을 받는 병작(어우리)은 노동력이 없는 홀아비, 호부,독거노인,외아들에게만 허용되었으며,땅이 없는 농민과 노동력이 없는 지주가 대등하게 협력한다는 뜻에서 병작이라고 부른 것이다. 소작이라는 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생 긴 것으로 병작보다 나쁜 제도였다.


   조선시대의 정치는 전반적으로 공익을 높이는 제도로 바뀌었다. 정책결정은 공론을 존중하여 언로가 넓게 열렸으며,인사제도는 공선을 존중하여 시험제도를 대폭 강화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면 출세하는 길이 전보다 크게 열렸다. 특히 과거시험에서 7배수를 뽑는 초시 급제자의 정원을 8도의 인구비율로 강제로 배분한 것은 지방민의 정치참여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토지는 사유(私有)를 인정하여 매매와 상속,자율적 경영이 가능했으나, 다만 토지집중을 막기 위해 정신적으로는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을 존중했다. 정치의 주체인 선비는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공익(公益)을 추구하는 것을 올바른 몸가짐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는 자립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복지정책도 확대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빈민과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 등 결손가정에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고, 30세가 되도록 시집 못 간 처녀에게는 결혼비용을 도와주기도 했으며,7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명예직을 주어 격려했다.


   권력의 부정과 부패를 막기 위한 제도장치는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게 짜여졌다.  우선, 최고 호력자인 임금의 학문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경연제도를 실시하여 교육시키고, 세자의 교육을 위한 서연제도도 있었다. 정치의 거울로 삼기 위해 통치행위를 낱낱이 기록하여 기록문화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부정을 저지른 탐관오리의 자손은 벼슬길을 막아버렸고,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강력한 기능이 관료의 비행을 파헤쳤다. 관료들의 부정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상피제도를 실시하여 가까운 친척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지 못하고, 친척이 과거에 응시하면 고시관을 맡지 못하고, 수령이 자기 고향에 부임하지 못하게 했다.


   조선 후기 당쟁을 흔히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파는  학문과 이념을 바탕으로 여러 정파가 경쟁하고 견제하는 정치형태로써 정당정치의 효시로 볼 수 있으며,치열한 경쟁을 통해 정치가 깨끗해지고 정치 민주화를 촉진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컸다.  다만, 정당이 의회정치와 연결되지 못하고 관료정치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정파 간의 경쟁이  정치보복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부정적인 측면이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는 권력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막는 제도장치가 현대 민주국가보다도 더 치밀하게 짜여져서 정치의 도덕성과 백성의 공익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조선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인 성리학(性理學)은 우주자연의 원리와 인간사회의 원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철학으로 우주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기본원리를 ‘이(理)’로 보는데, ‘이’는 생명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선善’[착함]이다. 그러니까 우주자연의 헌법을 ‘사랑’으로 본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우주자연과 인간사회에는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병존하고 있어 모든 만물이 평등하지는 않다. 그 불평등의 이유를 형이하(形而下)의 '기(氣)’로써 설명한다. 그러나 ‘이’와 기’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아 나쁜 '기’를 얼마든지 착한 ‘이’ 로 바꿀 수가있다.


   성리학은 우주자연과 인간사회를 성선설에 바탕에 두고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평등한 생명체로 보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불평등은 자기수양을 통해 평등하고 착한 세계로 이끌 수 있다는 낙관론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세상을 선善과 악惡의 대결로 보는 서양인의 인생관과는 다르다.


   성리학에 토대를 두고 생겨난 삼강오륜의 윤리도 인간관계의 평등성과 불평등을 동시에 인정하는 윤리다. 삼강오륜은 수직적인 윤리도 아니고, 수평적인 윤리도 아니며,대각선의 윤리라고 볼 수 있다. 인간관계를 상하의 질서로 보면서 동시에 상하 간의 상호책임과 의무를 부여하여 하급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질서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사회의 성격은 봉건사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근대 서양사회의 모습을 오히려 더 많이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자유, 평등,민주를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양은 개인과 투쟁을 중심에 놓고 있는데,우리는 공동체와 도덕성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1897년 탄생한 대한제국(大轉帝國)은 1895년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반일민족주의가 바탕이 되어 국민 각계각층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어 탄생한 최초의 근대국가이다. 근대국가는 ‘영토’,‘주권’,‘국민’, ‘산업화’ 등 네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하는데,대한제국은 이 네 조건 가운데 산업화만이 미진했다. 독도를 확고하게 행정적인 영토로 만든 것이 이때이고, 옛 삼국시대의 땅을 모두 회복시킨다는 뜻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해서 명실상부한 삼국통일 국가를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했다.


   대한제국은 국가의 주권을 확고하게 인정하는 국제법인《만국공법》에 기초하여 완전독립국임을 국제사회에 선포하여 인정을 받았다. 고종이 왕조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중국의 제후의 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동안 청나라와 가졌던 조공관계를 청산하고,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국민’은 신분제도의 청산으로 가능한 것인데, 대한제국 성립 이전에 이미 신분제도가 완전히 무너졌다. 신분차별을 가장 많이 받던 계층은 서얼과 노비인데,서얼에 대한 차별 은 고종이 즉위한 직후 완전히 폐지되었으며,노비세습제 역시 1886년에 폐지되었고, 1895년 의 갑오경장으로 노비도 모두 평민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국민’을 위한 나라임을 실천하기 위해 ‘민국’ 이념을 내세웠다 ‘민국’이라는 용어는 이미 영 •정조 시대부터 신분제 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말인데,대한제국 시대에 확고한 정치용어로 보편화되었다. 대한제국의 정치는 법적으로는 황제가 전권을 가진 전제국가의 형태를 지녔지만, 그 목표는 민국 건설에 있었다.


   1919년 3 • 1 운동 직후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은 바로 대한제국의 ‘대한’ 과 대한제국의 ‘민국’을 합친 국호라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황제국가이고, 후자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것 뿐이고,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부활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이 들어간 것도 양자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은 식산흥업에도 힘을 기울여 상공업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철도 건설, 전화 가설,전차 도입,현대적 도시 개조, 각종 기술학교 설립, 각종 공장 건설,회사와 은행 설립,토지조사를 통한 소유권 확립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황실수입과 국가수입이 늘어나고,신식군대도 양성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이제 눈을 돌려 8 • 15 광복 후,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련성을 보자. 대한민국은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고, 국기도 태극기를 그대로 계승 했으며,‘민국’이라는 용어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유일한 현대국가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실천하지 못한 두 가지 과제를 극복했다. 하나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 는 국제적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와는 달리 유엔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일제강점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근 일부 학자들이 ‘식민지 근대화 시기’로 보는데,‘식민지’와 ‘근대화’가 어떻게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근대화의 핵심 중 하나가 주권확립이라고 할 때 주권이 없던 시대를 ‘근대화’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철도, 병원,학교, 산업시설 등이 생겨났다고 하지만 이것이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착취 를 위한 시설과 제도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창씨개명, 언어 말살, 역사 박탈 등으로 민족 혼을 뺏기고,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잃고, 강제노동과 위안부 동원 등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광복 후에 연합군이 들어와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하고, 관존민비의 반민주적 유산을 물려준 점 등을 생각하면,이런 시대에 ‘근대화라는 아름다운 호칭을 붙일 수는 없다.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영화도 만들고, 연극도 하고, 문학도 하고, 양복도 입고 다니고, 일본 과 서양을 흉내 내는 삶의 모습을 보이면서 이 땅에서 살았으므로 겉모습을 보면 ‘근대’로 보일 지 모르나,천황과 총독부의 신민으로 산 것은 한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한국인의 품속에서 역사를 꾸려온 정신적 후진국 일본에게 당했다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이 안겨준 수치를 씻기 위한 한국인의 치열한 저항정신이 8 • 15 광복 후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져온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일제에 면죄부를 주는 평가는 한국인의 자존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약,한국이 대만처럼 역사적으로 일본보다 후진국으로 살아왔다면, 일부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할지 모르나,한국은 대 
만과는 전혀 다르다.


   8 • 15 광복 후의 현대사는 일제가 원인을 제공한 남북분단에서 시작됨으로써 남북이 모두 정상적인 국가발전을 하지 못하고, 파행적이고 굴절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오늘날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여 세계 선진국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대한제국과 임시정부로 이어져 온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출범하여 5천 년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고,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서양문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6 • 25 전쟁, 독재와의 투쟁 등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좌우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북한과 총부리를 겨누지 않으면 안 되고, 수만 명의 탈북민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북한이 그동안 걸어온 길은 결과적으로 세계 최빈국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실패한 역사라는 증거다. 한 국가의 성패는 주민의 생활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인데,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떤 이유로도 정권의 정당성을 변명하기 어렵다. 북한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보다 주민의 생활 힝상보다 권력 안보에만 총력을 기울여온 지도층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인의 미래는 남북통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대치상황이 오래 계속된다면 대한민국의 앞날도 순탄치 않을 것이다. 또 어떤 굴절과 파행이 재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에 온 힘을 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먼저 하나로 뭉치고, 북한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5. 사관의 여러 유형과 문제점

 


1) 사관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이미 지나간 시대를 공부한다. 얼핏 생각하면 현재를 알기도 어려운데 과거를 알 아서 무엇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재라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 1초가 지난 일도 이미 과거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있었던 일도 저녁에 생각하면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다.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미래는 아무리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면 미래가 보인다. 어제 보았던 사람을 기억해야 내일 그 사람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과거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현재라는 것은 1초도 되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 보는 역사가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거는 너무 복잡하여 기억만을 통해서 알 수는 없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기억은 사라진다. 오랜 과거를 되살려주는 것이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도 너무 많고 과거의 사건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서 이 모든 사건과 기록을 보아도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화가가 아름다운 경치를 그릴 때 사진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경치에서 받은 강한 인상을 강조해서 그릴 수밖에 없다. 똑같은 경치를 그려도 화가에 따라 표현이 다른 것이다 주관적인 감동이 화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도 이와 비슷하다. 역사가는 과거의 모래알 같은 사건과 기록에서 자기가 찾고 싶은 것을 강조해서 역사를 쓴다. 이것이 바로 사관이다. 사람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상 사관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관이 중요하지만,그럴수록 사관이 너무 편벽되면 곤란하다. 만약 무지개를 그리는 사람이 붉은색만을 좋아하여 빨갛게 그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푸른색을 좋아하여 무지개를 파랗게 칠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이 모두 진실을 외면한 것이다. 무지개는 분명이 붉은색이 있고, 푸른색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진실을 그리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색을 억제하고 일곱 가지 색을 골고루 그려야 옳다.


   사관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진실에 가까이 가려면 자기의 사관을 가능한 한 억제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민족을 사랑하여 역사에서 민족만을 찾으려 하든지, 계급을 사랑하여 역사에서 계급만을 찾으려 하면,민족만 보이고, 계급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진실을 찾은 것 은 아니다. 마치 무지개에서 한 가지 색을 뽑아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무지개에서 그 색을 찾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무지개의 진실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면 사관은 완전히 없어져야 하는가? 아니다 없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먼저 사관을 가지고 과거에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관이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사관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왕 사관을 가질 바에는 되도록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도움이 되는 사관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특수한 계층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관은 인류공영과 평화증진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의 말은 명언이다.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보고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보라는 뜻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역사의 진실에 한층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현재를 위해 공헌하는 길도 넓어질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수구파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급진파의 시각으로 현재를 바라볼 수도 있다. 국가이기주의로 현재를 바라볼 수도 있고, 세계평화를 추구하면서 현재를 바라볼 수도 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현재를 바라볼 수도 있고, 문화적,도덕적 가치를 존중하면서 현재를 바라볼 수도 있다. 바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결정되고 나서 과거와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약 과거와의 대화를 해본 결과 내가 선택한 가치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면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다시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사관은 힘들고 어려운 영역이다. 사관은 너무 가까이해도 좋지 않고 너무 멀리해 도 좋지 않기에 ‘불가근 불가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2) 일본의 황국사관과 식민주의 사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의 진실을 찾아 미래의 교훈을 찾는 데 있지만, 연구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사관이 작용한다. 만약 나쁜 사관을 가지면 역사의 진실이 크게 왜곡될 뿐 아니라,인류평화에 큰 해를 미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


   나쁜 사관의 피해를 가장 크게 받은 역사가 한국사이다. 일본의 황국사관과 식민주의 사관이 한국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그 사관은 지금까지도 일본 극우정치인들에게 이어지고 있어 한국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류평화를 희구하는 전 세계인에게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한국사 연구는 왕조시대부터 수천 년간 이어져 왔다. 처음에는 통치자를 하늘의 후손으로 숭앙하는 시각에서 역사를 썼고 유교가 들어오면서 백성을 존중하는 시각에서 역사를 고쳐 썼으며,통치자가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엄격하게 평가하여 교훈을 찾으려고 했다. 역사를 정직하게 써서 진실을 알아야 교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되었는데,이러한 역사 서술 태도 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불렀다. 공자孔구가 노 나라 역사책인《춘추 春秋》를 편찬할 때 이런 사관을 가졌다는 뜻이다.


   유교는 역사의 진실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사료의 수집과 더불어 사료의 진실성을 검증하는 고증적 방법도 중요하게 여겼다.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도덕성을 지닌 사관도 중요하고, 실증적 방법도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고증적인 역사책이 많이 나왔다. 안정복(1712-1791)의《동사강목 東史網目》이나 한치윤(1765~1814)의《해동역사 海東譯史》같은 책이 그렇다


   이렇게 한국사를 과학적으로 발전시키던 전통을 무너뜨린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8세기 초에《일본서기 日本書紀》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는데, 이 책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 하늘의 후손 천황이 지배하는 고대국가를 세우고, 기원 4세기부터는 나라의 세력이 커져서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로 불리는 식민지를 건설하고, 삼국의 조공을 받은 것처럼 썼다. 또 한반도에서 많은 귀화인이 건너와서 유학,불교의학, 음악, 그림,불상 만드는 기술,배 만드는 기술,집 짓는 기술 등 수많은 기술을 가르쳐주었다고 서술했다.


   《일본서기》는 일본 고대국가를 건설한 백제인과 가야인이 쓴 것으로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것에 큰 불만을 품고, 신라에 패망한 자신들이 세운 일본이 더 강하고 앞선 나라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역사의 진실을 과장해서 쓴 책이었다.


   우선 기원전 7세기에 고대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거짓이다 기원 4세기경에 국가가 세워진 것이 고고학상으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 4세기에 이르는 천황의 역사는 조작된 것으로 기원 4세기경에 한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이 무렵 백제계와 가야계 일본인들은 ‘왜’라고 불렀는데,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모국인 백제, 가야와 긴밀하게 교역을 하고 있어서 이들을 관리하는 '일본부’라는 기구가 있었다 일본부의 위치는 경상도 고령지방,대마도, 또는 일본 열도 안에 있다는 등 여러 학설이 있지만,중요한 것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통치한 사실은 없다는 점이다.


   일본 천황은 한반도인이고,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문화재가 한반도인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천황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이라 불리는 하느님의 후손으로 주장하는 것도 거짓이고, 한반도의 기술자들이 고대문화 건설에 마치 보조적인 일을 한 것처럼 쓴 것도 거짓이다. 이렇게 《일본서기》는 거짓이 많은 역사책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많이 떨어지지만, 과장과 거짓을 걷어내고 잘 살펴보면 진실된 이야기도 적지 않다. 한반도인이 일본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이 부분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크게 관심을 끌고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에도시대이다 이때 조선에서 간 통신사의 한류 붐이 크게 일어나는 것에 반발하여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한운동이 일어나면서《일본서기》를 재평가하여 자존심을 찾으려는 이른바 국학 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쇼군이 지배하던 정치를 청산하고 천황국가를 재건하면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일어나고, 제국대학을 건설하여 한국사를 대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이들은《일본서기》의 내용을 더욱 과장하여 고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것과 한국과 일본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이른바 ‘일선동조론 '을 강력하게 퍼뜨리고 천황을 신(神)처럼 떠받들고 나섰다. 이들의 사관이 바로 황국사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유물사관이나 사회과학, 또는 랑케 Leopold_von Ranke (1795~l886)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하는 학자들이 한국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조선총독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국사를 처절할 만큼 창피하고 비참한 역사로 만들었다. 우선, 한국은 주체성 없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거나 일본의 지배를 받고 살아왔으며, 한국 문화는 독창성이 없고, 조선시대 정치는 당파싸움으로 얼룩지고, 한국인은 세 사람만 모이면 파당을 만들어 분열하고 싸우는 민족이며, 왕조가 바뀌어도 사회발전이 없어 조선 말기의 모습이 일본의 고대국가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후진사회로 해석했다. 그래서 일본의 힘을 빌어 비로소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식민지시대를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주입시켰다.


   더 큰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왜곡된 한국사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8 • 15 광복 후에도 이런 사관을 되풀이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것이다. 그래도 8 .15 광복 후에 한국 역사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제는 한국이 일본을 앞서 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수준 높은 문명국가임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나이 많은 분들이나 새로운 한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지식인 가운데는 한국사를 비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식민주의 사관이나 황국사관이 이렇듯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역사를 왜곡하고 전 세계 인의 지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의 일부 극우정치인들이 시대착오적인 망언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그들의 정신수준이 얼마나 낮은가를 온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민족주의와 신민족주의 사관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일본과 서양으로부터 크게 네 가지 역사방법론을 받아들였다. 하나는 19세기 전반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가 제시한 실증주의 방법론, 다른 하나는 일본의 황국사관에 자극을 받아 나타난 민족주의 사관, 세 번째는 독일의 칼 마르크스 Karl Marx(1818~1883)가 주장한 유물사관(또는 계급사관), 그리고 문화주의 사관이다.


   랑케의 방법론은 특정한 사관을 배제하고 ‘있는 사실 그대로의 과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면서 엄밀한 문헌고증을 통한 연구방법론을 강조했는데, 일제강점기 진단학회를 이끌던 이병도를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이런 방법론을 받아들여 한국사 연구를 전문적인 학문분야로 발전시켰다. 지금 대한민국 역사학의 주류는 이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


   민족주의 사관은 일제강점기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따르던 사관으로 대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대종교는 한국침략에 앞장섰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황국사관에 자극을 받아 이에 대항하는 입장에서 만든 것이다. 대종교의 교리서인《삼일신고》,《회삼경》, 《신단실기》, 《단기고사》, 《환단고기》등이 이런 사관을 내포하고 있으며,이에 영향을 받은 신채호, 박은식, 최남선, 이상룡 등이 이를 발전시켰다.


   민족주의자들은 단군조선에 특히 관심이 많으며,그 영역을 중국 동북지방과 만주,한반도에 걸친 대제국으로 보과 이 지역에 살던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을 모두 피가 같은 배달겨레로 간주했다. 단군조선의 문화는 삼신신앙으로 태양과 밝음을 승상하는 종교로 보았으며, 이를 한국인의 민족종교로 해석했다. 민족종교에 대한 호칭은 학자마다 다른데, 신채호는 낭가사상, 최남선은 불함문화, 또 어떤 이는 신교 혹은 도교,또는 살만교(샤머니즘) 라고 부르기도 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이렇게 위대한 역사로 본 것은 일본의 황국사관이 천황을 높이고, 천황이 세운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했으며,일본과 조선은 피가 같은 동족이라고 본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만,내용은 황국사관의 주어를 한국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곧 우리가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를 세우고, 그 범주 안에 일본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민족주의 사관은 영토가 넓었던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높이 평가한 결과,신라통일 이후의 역사는 영토가 줄어들고 민족이 쇠망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했으며 유교가 사대주의를 승상하여 자주성을 잃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민족주의 사관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이를 바탕으로 다시금 만주를 되찾고, 대조선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투쟁하도록 부추겼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이 사관이 미친 항일운동의 실천적 효과는 매우 컸다. 하지만 오늘의 시각에 서 본다면,이 사관은 역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또 지나친 국수주의로 인하여 국제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단군조선이나 고조선의 영토를 크게 설정한 것은 ‘아사달문화권’을 고조선의 영토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아사달문화권’은 문화의 성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지, 그들이 모두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에 이렇게 큰 영토를 가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그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임금이나 구체적인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 고조선의 정치사를 메꾸기 위해 대종교의 경전으로 읽히고 있던《단기고사》,《환단고기》등의 책을 사료로 이용하고 있으나,이 책들은 대종교인들이 만든 위서에 불과하다. 여기에 보이는 역대 임금 이름은 어느 정도 진실성이 있지만,그 임금들이 수행한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지어낸 것이다.
   또 민족 종교만이 주체성이 강하고, 유교가 사대주의를 부추겨 나라가 망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도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그런 해석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가 후퇴를 거듭한 역사로 왜곡되고 말았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과 사회진화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데,이런 사관이야말로 강자만이 살아남고, 강자가 약자를 삼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사관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제국주의를 받아들여 민족주의로 만든 것은 이해가 되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모두 위험하다.

 

   민족주의 사관의 이 같은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8 • 15 광복 전후한 시기에는 ‘신민족주의'가 태동했다. 언론인 안재홍과 서울대 교수 손진태 등이 이런 사관을 주창했다. 신민족주의는 민족을 존중하되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열린 민족주의’,곧 ‘국제적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민족 내부의 계급평등을 존중하는 ‘신민주주의’를 내걸었다.


   특히 안재홍이 주장한 신민주주의는 서양식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아니고, 소련식 무산자 만주주의도 아니며,중국 공산당이 내건 신민주주의,곧 무산자 계급이 일시적으로 양심적인 자주,자본가와 제휴하는 형식의 민주주의도 거부했다. 안재홍이 추구한 신민주주의는 중소자본가와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만민평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를 말한다. 특정 계급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모든 계층이 평등하게 잘 사는 홍익인간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이를 일러 ‘다사리’ (다 함께 잘 사는 나라)로 부르기도 했다.


   안재홍은 ‘신민족주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연구하여 한국사의 특징을 계급협동에서 찾았고, 정신적으로 홍익인간의 건국이념과 불교와 유교의 포용적 조화철학이 그런 정신을 길러주었다고 해석했다.


   한편,손진태가 주장한 신민족주의는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되,민족 내부의 계급이 평등할 때는 민족의 단결이 이루어지고, 계급 간의 불평등이 심할 때는 민족의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했다. 요컨대 신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국제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국수적 민족주의의 약점을 극복했다.


   신민족주의를 주장한 안재홍과 손진태 등은 6 • 25 전쟁 때 모두 북한으로 납북되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말았는데,요즘 학계에 새로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4) 유물사관과 북한의 주체사관


   칼 마르크스가 내세운 유물사관(계급사관)은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경제활동을 둘러싼 계급 간의 투쟁으로 보고, 모든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사회에서 출발하여 노예제 사회,봉건제 사회,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에서 끝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물사관을 최초로 받아들인 학자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백남운이었다. 그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도식을 따라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했는데, 고조선을 원시공산사회,삼국시대를 노예제 사회,통일신라 이후를 봉건사회로 해석했으며, 일제강점기를 이식자본주의 시대로 이해했다. 따라서 8 • 15 광복 후에 우리가 걸어갈 길은 당연히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는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역사학계의 최고원로가 되었다.


   백남운에 이어 유물사관을 이어간 학자는 이청원、전석담,김석형,박시형 등이었는데, 특히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의 김석형과 박시형은 북한으로 가서 역사학계의 원로가 되었다. 김석형은 봉건사회의 시작을 삼국시대로 끌어올린 것이 백남운과 달랐으며,고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하여 한반도 이주민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 고대국가를 세웠다고 주장하여 일본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북한 역사학은 유물론의 도식을 따라 한국사를 해석하여 있지도 않은 봉건사회가 약 2천 년간 지속된 것으로 봄으로써 통일신라,고려,조선을 기본적으로 똑같은 봉건사회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본다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사를 정체된 후진국가로 깎아내린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비록 유물사관의 도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어도 고대 한일관계를 새롭 게 연구하고, 봉건사회에서도 사유토지가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등 학술적 가치를 지닌 연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른바 ‘주체사관’이 등장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크게 바뀌었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일제강점기에 구상한 것을,I960년 대 중반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자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는 수단으로 ‘주체노선’이 표방되었다가 1970년대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시켰다.


   주체사상에 의한 역사해석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한국사를 해석하는 잣대를 김일성의 ‘교시’와 김정일의 ‘지시’를 따르도록 강제하고, 마르크스나 그밖의 이론을 인용하지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해 어떤 중요한 사건의 해석을 내릴 때 반드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말한 해석을 따르도록 하고 학자 개인의 해석을 막은 것이다.


   둘째,고대사는 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해석하도록 하여 고구려만이 주체성이 있는 나라이고,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인 민족반역자로 해석했으며,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처음으로 민족을 통일했다고 주장했다. 한양에 도읍을 둔 조선왕조는 사대주의를 숭상하는 양반유학자들이 이끈 시대로써 양반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당쟁을 일삼은 시대로 어둡게 그리고 다만, 세종대왕이나 조선 후기 일부 실학자만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지금의 대한민국도 조선시대의 나쁜 전통을 이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국가로 보고 있다.


셋째,주체사관에서 가장 역사를 왜곡한 부분은 근대사와 현대사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근대사의 시작은 1866년이다. 이때 대동강을 타고 평양에 들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물리친 주인공이 바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제국주의와 싸워 이긴 최초의 사건이므로 이때부터 근대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응우의 이름은 관찬기록에 보이지 않아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에서 3 • 1 운동을 일으킨 주역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라고 한다 김형직이 조국광복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현대사는 김일성이 15세 되던 1926년에 조직했다고 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시작 된다고 한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운동이 처음으로 인민대중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0년부터 시작된 사회주의운동은 모두가 인민대중과 동떨어진 허구적인 운동이므로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 15세 때 정말 이런 조직을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런 조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어린 소년이 만든 조직이 시대를 갈라놓을 만큼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이 박헌영 등 남로당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소련파,연안파 선배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이들이 모두 인민대중과 연결되지 못한 종파주의자거나 수정주의자라는 것이다.


   주체사관은 이렇게 김일성 일가의 행적을 중심에 놓고 한국사의 시대를 구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김일성이 출생한 평양이야말로 민족의 성지로 이곳에 고조선이 도읍을 두었고, 고구려가 도읍을 삼았으며,그 전통이 김일성 일가로 이어져 내려와 자랑스러운 북한이 탄생했 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은 주체사관에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추가했다. 이는 김일성 일가를 모시고 있는 조선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평양을 더욱 민족의 성지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도읍을 두었던 단 군조선을 크게 내세우고, 민간전설에 단군무덤이라고 알려진 평양 교외의 옛 무덤을 1993년 발굴하여 사람의 뼈를 비롯한 유물을 찾아내고 이를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복원했다. 그 유물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단군조선의 연대는 기원전 3천 년까지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고구려 계통의 무덤일 뿐이고, 단군의 뼈라고 주장하는 유물도 확실한 근거가 없다.


   북한은 원래 초기에는 단군신화를 근거없는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해 왔는데,이제는《삼국유사》에 보이는 단군의 건국연대보다 더 높이 올려 놓고 단군조선을 미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단군조선의 역사를 메꿀 자료가 없어 일제강점기에 대종교도들이 만든《환단고기》등의 허황된 기록들을 사료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북한에 있어 주체사상은 비단 역사서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가장 중요한 통치철학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따르면 사람은 두 가지 생명을 타고나는데,하나는 부모가 주신 육체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님이 주신 정치적 생명인데,정치적 생명이 더 귀하다고 한다. 수령은 절대 오류가 없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수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수령을 비판하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한다.


   북한은 이러한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1972년 12월 종전의〈인민민주주의헌법〉을〈사회주의헌법〉으로 바꾸고 모든 정치적 권력을 수령 직속의 당중앙위원회에 넘겨주어 내각과 최고 인민위원회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또 북한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꾸고, 평양을 ‘민족의 심장부’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평양은 임시수도였다. 이어 북한은 수령이 대를 이어 세습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의 세습’이 아닌 ‘혁명의 세습’을 내세웠다. 즉 혁명은 대를 이어 세습되어야 하기 때문에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의 세습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한 1996년 이후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권력구조에 변화가 나타나 군사위원회의 권력이 커지고, 김정일이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는 군대의 힘을 빌려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통치전략이 담긴 것이다.


   한편,2012년에 권력을 잡은 김정은은 권력의 중심이 과도하게 군대에 집중되어 있고, 김정일이 키운 장군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을 견제하기 위해 원로장군들을 해임하여 권력의 중심을 노동당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과 같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이에 기초한 역사해석은 한 마디로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김일성 일가의 장기집권을 위해 주민의 충성심을 모으기 위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5) 미래를 위한 사관


   앞에서 사관은 ‘불가근 불가원’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이어 우리시대를 풍미한 여러 사관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 문제점도 함께 살펴보았다. 식민주의 사관은 지나치게 한국인을 폄하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민족주의 사관은 지나치게 국수주의에 빠져 있고, 유물사관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주체사관은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모두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다만, 실증주의 사학은 어떤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아 역사 왜곡이 가장 적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다.

 

   그러면 미래의 사관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선 사관이 지나치게 뚜렷해도 좋지 않고, 그렇다고 사관이 너무 없어도 곤란하다는 전제하에 미래를 위한 사관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우선,미래의 사관은 20세기에 풍미했던 사관의 단점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침략주의,국수주의, 계급주의,권력찬양주의는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 그것은 모두가 인류평화를 해치는 위험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세계는 모든 인류가 평화 공존하고, 계층 간의 갈등이 완화되고, 자연환경을 보호하고,자본주의의 도덕성을 높이는 것이 주요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첫 단추는 생명 을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생명은 살아 있는 인간, 동물, 식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본 한국인의 원초적 우주관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태양이 어찌 죽은 것이며, 달이 어찌 죽은 것인가, 별이 어찌 죽은 것이며, 흙과 바위가 어찌 죽은 것이며, 물이 어찌 죽은 것인가, 그것들 없이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는가.


   우주를 생명체로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서로 아끼고 지켜줘야 함을 인정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한국인의 원초적 윤리인 홍익인간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홍익인간은 바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좌익과 우익의 갈등도 홍익인간으로 녹여낼 수 있다 홍익인간이 어찌 부자만 사랑하거나 가난한 자만 사랑하는 사상 이겠는가? 어찌 인종을 차별하고, 남녀를 차별하고, 민족을 차별할 수 있는가? 어찌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지역을 차별할 수가 있는가?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전쟁을 찬양하고, 투쟁 을 부추기고,범죄를 저지르고, 남을 속일 수가 있는가?


   이런 이야기들이 얼핏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보일지 모르나,이런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면,낙후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 앞선 것으로 보일 수 있고, 나쁘게 보였던 것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자유니,평등이니,민주니 하는 가치들도 생명 존중 사상에서 바라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생명을 아끼는 세상이 되면 그것이 곧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가 있는 세상일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역사를 해석하는 가치는 지나치게 서구인이 만든 가치와 언어에 구속되어 있었다. 서구문명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서구인은 사물을 통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개인과 개체로 나누어 분석적으로 바라본다. 개체와 개체 사이의 차이와 갈등과 충돌을 찾고, 선과 악을 구별하고, 갈등과 충돌이 진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서양의 역사는 전쟁과 투쟁과 정복으로 점철된 역사이고 그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의 보가 이뤄졌다. 기독교정신이 생명에 대한 사랑의 지평을 넓혀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생명체 속에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지양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선과 악의 투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긴다. 하지만 생명체 가운데 절대선과 절대악이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주만물 가운데 완전히 착한 생명체가 있고, 완전히 악한 생명체가 있는가? 독초도 잘 쓰면 약이 되고, 산해진미도 잘못 먹으면 생명을 단축시키지 않는가? 우주자연과 인간을 선악으로 나누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도 선이 있으므로 선악을 서로 보완하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일 것이다.


   한국인의 원초적인 우주관은 성선설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고 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위개념에 속한다. 성선설은 바로 생명체의 본질이 착하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체가 악한 짓을 하는 것은 본질이 악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보아 가혹한 징벌은 가능한 한 억제한다. 그래서 형벌이나 법치를 중심에 놓고 인간을 다스리지 않고,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로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형태를 세웠던 것이다.


   서양 문명과 한국 문명의 차이는 상업문화와 농경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이지만, 오늘날 전 세계가 상업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으므로 농경문화로의 복귀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업문화와 농경문화를 접목시키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상업문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어 때로는 생명을 해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원인이기도 하다. 여기에 생명을 존중하는 농경문화의 마음을 심어주지 않는다면 상업문화의 극성은 생명체의 파괴를 가져올 위험성이 크다.


   현재의 상황을 위기로 받아들인다면, 생명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역사를 바라보는 눈도 생명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한국사의 가치는 언류가 공유할 미래의 가치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런 가치를 풍부하게 지켜 온 한국사는 미래문명의 대안으로 새롭게 각광받게 될 것이다.

 


 

출처 : 「다시 찾는 우리역사 」, 한영우, 경세원, 20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