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일교포 위상 높여준 건 정치 아닌 국력과 문화”
‘히로시마 한국인 위령비 이전 주도’ 권양백 하쿠와그룹 회장
< 조선일보, 김은중 기자, 2023.05.19. >
재일 교포 2세이자 원폭 피해자인 권양백(權養伯·79) 하쿠와(伯和·Hakuwa)그룹 회장은 17일 본지 인터뷰에서 “재일 교포들이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도록 위상을 높여준 건 정치가 아니라 우리의 신장된 국력과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한국 문화였다”며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나라가 됐는데 언제까지 일본이 나쁘다고, 미안해하라고 요구할 것인가”라고 했다.
일본에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기보다 우리의 국력과 소프트 파워를 앞세워 자연스레 행동 변화를 이끄는 게 ‘상책(上策)’이라는 것이다.
권 회장은 1970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세워져 2만여 한인 희생자를 기리던 위령비를 1999년 공원 안으로 옮기는 데 앞장섰다. 히로시마 위령비를 떠받치는 거북이 대좌는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히로시마에서 본 한반도 방향으로 ‘고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7국(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19일부터 2박 3일간 히로시마를 찾는데 이 기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함께 위령비를 참배할 예정이다. 권 회장도 여기에 동행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공동 참배는 이달 방한한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먼저 제안해 성사됐다. 일본은 과거 한국인 원폭 피해자 약 7만명의 목소리를 쉬쉬했지만, 이제는 정상이 사상 처음으로 공동 참배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국력이 G7에 준할 정도로 신장됐고, 일본 내 한류 열풍으로 한국이 ‘무시할 수 없는 이웃 국가’로 변모하면서 이렇게 된 측면도 있다.
권 회장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가슴 벅차오르는 일”이라며 “한국도 당당한 나라가 됐는데 과거사에서 교훈을 얻되 21세기에는 잘 교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만 얽매이지 말고 한일이 미래를 보고 나가자는 윤석열 대통령 말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옮길 때 내가 하던 얘기”라며 “역대 한국 대통령들에게 한 번만 참배해달라 요청했는데 처음으로 이렇게 기회가 왔다. 감격스럽다”고 했다.
권 회장은 194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 2세다. 그의 부모는 해방 후 모국으로 돌아가려고 계획했지만, 배에 오르기 직전 원폭 투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권 회장과 가족도 원폭 피해자가 됐다. 권 회장은 이를 ‘운명’이라 표현하며 “말도 못 하는 빈곤 속에서 자랐고 ‘조센징’ 소리를 들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살아왔는지도 몸으로 경험해 다 알고 있다”고 했다. 1976년 오물 처리 사업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오락·식음료·부동산·호텔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90년대 후반에는 히로시마에서 개인소득세 납부 1위를 기록할 만큼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권 회장이 1999년 2월 위령비 이전 설립위원장을 맡았을 때만 하더라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일본 우익 단체들을 중심으로 반대 의견이 상당했다고 한다. 조총련은 “원폭 피해만을 강조해 전쟁 범죄 책임을 희석하려는 일본의 들러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히로시마 지부의 재정 고문이자 조총련계 고교·대학을 졸업한 권 회장이 적임자가 돼 이들을 설득했고, 목표액 1500만엔을 웃도는 2200만엔을 모금해 나머지를 원폭 피해자 치료를 위해 기부했다. 권 회장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고 집에 투서도 밀려들었지만 끝내 놓고 보니 정말로 보람찬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일이 앞을 보면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게 내가 내세운 논리였다. 지금 윤 대통령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권 회장은 사회 공헌 차원에서 히가시히로시마시(市)를 연고로 하는 사회인 야구단 ‘하쿠와 빅토리스’를 창단해 200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한류 열풍으로 현지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배우 김영철씨가 응원단장, 이병헌씨가 부단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히로시마를 찾을 땐 항상 가족을 데리고 위령비를 참배한다”고 한다.
2.
78년만에…히로시마 피해자들 “한일 정상 공동참배, 감개무량”
< 중앙일보, 이영희 기자 / 김현예 기자 , 2023.05.19 >
"뉴스를 보고 너무 기뻤어요.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같이 히로시마(広島)에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감개무량하죠."
재일동포 원폭피해자 박남주(91)씨가 18일 일본 히로시마 자택에서 78년 전 원폭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18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만난 재일동포 원폭 피해자 박남주(91) 씨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방일하는 윤 대통령은 19일 히로시마를 찾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78년 전 원자폭탄 투하에 피해를 입은 동포들과 만난다. 21일에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평화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를 참배할 예정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강제징용 등으로 이곳에 온 5만여 명의 조선인이 피폭을 당했다. 당시 3만여 명이 사망하고 2만여 명이 생존했다. 생존자 중 1만 5000명은 귀국했는데, 박 씨 가족은 행방불명된 외삼촌을 찾기 위해 귀국을 포기하고 히로시마에 남았다.
피폭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 씨는 두 동생과 함께 노면전차를 타고 있다가 원자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전차에서 내려 하염없이 걷다 언덕에 올랐는데 히로시마(広島)라는 도시가 순식간에 사라져있었다. 그때의 공포는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울먹였다. 이어 "히로시마에 남은 원폭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 살기가 힘들어진다"면서 "양국이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 참배, 사죄의 뜻 담겼을 것"
18일 오전 히로시마평화공원에서 만난 권준오(71) 재일민단 히로시마본부 원폭 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도 "양국 정상이 위령비를 찾아주길 오랫동안 기다렸다. 너무 감사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세워진 지도 53년이 지났지만 한국 대통령의 위령비 참배는 처음이고, 일본 총리로서는 1999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 이후 두 번째다.
권 부위원장은 "두 정상의 위령비 참배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한 일보 전진"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직접 사죄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다"면서 "기시다 총리가 위령비에 참배하는 것은 '사의'(사죄의 뜻)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피폭 후 한국으로 귀국했던 원폭 피해자 12명과 피해자의 2세 2명도 윤 대통령의 G7 정상회의 참석을 기념해 히로시마를 찾았다. 정원술(80) 한국원폭 피해자협회 회장은 18일 오후 히로시마 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위령비를 참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쁨과 반가움을 이길 수 없어 회원들과 함께 왔다"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간 피폭자들은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면서 국내 피폭자 문제에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주길 호소했다.
협회의 심진태(80) 합천지부장도 한·일 정상의 참배 소식에 "한없이 기쁘고, 감정이 벅찼다"면서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미국인만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원폭 투하에 대해 사과하고 위령비를 함께 참배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어 "원폭 투하 78년이 지났지만, 한국에는 위령비조차 없다"면서 "대통령이 (협회 주최로 매년 한국에서 열리는) 우리 위령제에도 참석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3.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히로시마) (韓國人原爆犧牲者慰靈碑(廣島))
(1) 정의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 히로시마시[広島市]에 건립된 위령비.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2) 개설
일본 패전 당시 히로시마에는 강제동원 노동자를 포함하여 약 14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72년에 한국의 원폭피해자협회는 이 가운데 히로시마 원폭으로 총 5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 중에 3만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생존자 2만 명 가운데 귀국자가 1만 5천 명, 잔류자가 5천 명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았다. 1967년 한국에서 ‘원폭피해자협회’가 결성된 후 지속적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치료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1970년 4월에 민단 히로시마 본부의 주도 아래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3) 역사적 변천
1967년 원폭 피해자 윤병도(尹炳道)씨를 중심으로 하여 히로시마 거주 재일한인이 뜻을 모아 히로시마 시장에게 위령비 건립계획을 제출했고 호의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히로시마한국인희생자위령비건립위원회’가 결성되어 당시 민단 히로시마 단장 장태희(張泰熙)씨를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위령비 건립사업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안에 건립하기를 희망했으나 평화공원 안에 이미 각종 위령비와 기념비가 많이 때문에 더 이상 허가할 수 없다고 하는 행정 답변을 받고 위원회는 평화공원 바깥에 위령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재일한인의 모금을 통해 250만 엔에 달하는 건립 비용을 마련했고 건립을 추진하여 1970년 4월 10일 제막식을 거행했다.
그 후, 재일한인과 일본인에 의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평화공원 안으로 이관 설치할 것을 요청했고, 1998년 12월 히로시마 시당국으로부터 이전 승인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공사를 위하여 재일한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에 들어갔고, 1999년 5월 21일에 기공식을 거쳐 7월 21일에 평화공원 안으로 이전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내용
검은색 대리석 비석 앞면에는 한국식 한자로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새겨있고 비석 뒷면에는 한글로 ‘위령비의 유래'가 적혀있다. ‘위령비의 유래'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서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투하로 인해 2만 여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후략)”라고 되어 있다.
높이 5미터, 무게 10톤으로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이다. 거북이 모양을 한 받침대 위에 석주를 세웠으며 그 위에는 쌍용 모양을 새긴 석관이 올려 있다. 한국에서 모두 제작되어 히로시마로 운반되어 건립된 것이다.
(5) 의의와 평가
1970년부터 이 비석 앞에서 매년 8월 5일 한국인희생자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재일한인 피폭 희생자를 추도하는 대표적인 행사다.
4.
尹 “너무 늦어 죄송” 원폭 피해자 “꿈꾸는 듯 감격”
尹, G7 참석 위해 히로시마 방문
< 조선일보, 히로시마=김동하 기자, 2023.05.20. >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7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 원폭(原爆) 피해 동포들과 만났다. 한국 대통령이 원폭 피해자들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동포 19명 대부분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당시를 직접 겪은 피폭 1세대였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늦게 찾아뵙게 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날부터 2박 3일간 히로시마에 머물며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도 찾을 예정인 윤 대통령은 “위령비 참배가 너무 늦었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동포가 슬픔과 고통을 겪는 현장에 고국이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깊은 사과를 드린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저녁 히로시마의 한 호텔에서 원폭 피해 동포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10명,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히로시마 지부와 한인회 관계자 9명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동포들이 입은 원폭 피해는 자의든 타의든, 식민지 시절 타향살이를 하면서 입게 된 피해이기 때문에 그 슬픔과 고통이 더 극심할 것”이라며 “소중한 생명과 건강, 삶의 터전을 잃은 이중고였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G7 정상회의 기간인 오는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참배하는 계획을 밝히면서 “한국 대통령의 위령비 참배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국 대통령이 히로시마의 한국인 위령비를 참배하는 것은 처음이고, 한일 정상의 공동 참배도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저와 기시다 총리가 위령비 앞에서,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양국의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열어갈 것을 함께 다짐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모두 발언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동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어 히로시마 민단 고문인 권양백(79)씨와 권준오(74) 한국원폭피해자대책위원장이 인사말을 했다. 두 살 때 원폭 피해를 겪은 권양백 고문은 “오늘 꿈을 꾸는 것같이 감격을 느끼고 있다”며 “선배 영령들을 저세상에서 만나게 되면 대통령님 오셨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권 고문은 히로시마 평화공원 밖에 세워졌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1999년 공원 안으로 옮기는 데 앞장섰다. 원폭 2세대인 권준오 위원장은 “윤 대통령께서 피폭 피해자들을 만나 주신 것이 한일 관계 발전에 이바지하리라고 믿는다”고 했다.
히로시마는 1945년 8월 6일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이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 33만명 중 약 40%인 14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사망자 중에는 한국인도 2만여 명이 포함됐다. 부상자 등을 포함하면 피해자만 5만여 명에 이르고, 피폭 2세대들도 상당했다. 하지만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 등과 비교해 원폭 피해자 문제는 주목을 덜 받았다.
특히 한국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들은 치료비 등 일본의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문제”라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이 1990년대 재한(在韓) 원폭 피해자 지원을 위해 기금 40억엔을 제공하긴 했지만 한국 정부도 일본과 과거사 갈등을 겪으며 피폭 문제에 대해선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윤 대통령은 이 문제를 피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당초 모두 발언 후 이석하고 이후엔 박진 외교부 장관이 간담회를 주재할 계획이었으나, 윤 대통령이 “동포들 말씀을 더 듣겠다”고 하면서 40여 분간 자리를 지켰다.
윤 대통령은 간담회 마무리 발언에서 “동포들이 원폭 피폭을 당할 때 우리는 식민 상태였고,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가 힘이 없었고 공산 침략을 당하고 어렵다 보니 동포 여러분이 타지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 국가가 여러분 곁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가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동포가 슬픔과 고통을 겪는 현장에 고국이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깊은 사과를 드리고 다시 한번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허리를 숙였다. 윤 대통령은 “히로시마에 있는 피폭 동포와 그 가족, 그리고 함께 애를 쓰셨던 민단과 많은 동포 관계자분들께서 조만간에 꼭 한국을 한번 방문해 주시기를 (바라며) 제가 초청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G7 정상회의 참석 국가 정상들과 회담을 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윤 대통령은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글로벌 공급망 안정을 위한 협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고 이도운 대변인이 전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이행하는 데 있어 역내 대표 유사 입장국인 호주와 전략적 소통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고 했다. 앨버니지 총리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한다”고 했다. 앨버니지 총리는 또 “다음 주 호주 국방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양국 방산 협력 확대 방안을 구체화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양국이 함께 참여하는 역내 군사훈련 횟수를 늘려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양 정상은 북한의 전례 없는 도발이 인도·태평양 지역뿐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평화와 번영에 심각한 위협이라는 인식하에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팜 밍 찐 베트남 총리와 회담을 하고 “베트남에 진출한 8000여 개의 우리 기업은 양국 경제협력 관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산”이라며 “양국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만큼 양국이 더욱 긴밀히 소통하며 협력하자”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2030년 교역 1500억달러 달성을 위한 노력과 공적개발원조(ODA)·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사업 등 대(對)베트남 개발협력 확대도 강조했다. 찐 총리는 “한국의 ODA와 개발지원 사업이 확대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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