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의 일방적 진술이 넘쳐나는 세상
< 경향신문,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3.05.26 >
5월 초 경향신문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기자는 SG증권발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회사 대표가 한 진술의 신빙성을 물었다. 혼란스러웠다. 최근엔 한 국회의원의 코인 거래가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의원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이 또 진술의 신빙성을 물어 왔다. 답답했다.
언제부턴가 언론엔 피의자로 입건된 사람의 진술이 넘치고 있다. 아무런 제한 없이 각종 언론에 인터뷰하고 그 내용은 기사화된다. 피의자로 입건된 사람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실직고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를 하겠는가? 절대 아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황만 말할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피의자 진술의 진위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 SG증권발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회사 대표의 진술도, 국회의원이 한 인터뷰 내용도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관계와 사뭇 다르다. 일정 부분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신뢰 손상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피의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안 된다. 피의자가 언론에 거짓 진술을 했어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 때 처벌하는 죄가 있긴 하다. 위증죄다. 그런데 오직 법률에 따라 선서한 ‘증인’만 위증죄로 처벌받는다. 재판정 안에서 판사 앞에서 거짓말해도 처벌받지 않는데 하물며 언론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받아쓴 언론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역시 안 된다. 기자는 국민의 관심이 있는 사건을 취재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사건을 공정한 시선에서 보아야 한다. 해당 피의자 진술의 진위를 따져보기 위해 수사기관에 취재 요청을 할 것이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사건과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기자에게 말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반론권 없는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후일 기사와 다른 사실이 밝혀져도 이는 기자의 책임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사회적 신뢰가 무참하게 깨지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과거엔 수사기관이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이유로 피의사실을 먼저 언론에 알렸다. 하지만 최근엔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를 전면 금지했다. 검찰의 ‘형사사건의 공보에 관한 규정’과 경찰의 ‘경찰 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이 그것이다.
검찰 훈령에 따르면 공소제기 전의 형사사건에 대하여는 혐의사실 및 수사상황을 비롯하여 그 내용 일체를 공개할 수 없도록 하였다. 경찰 훈령 역시 사건관계인의 명예, 신용, 사생활의 비밀 등 인권을 보호하고 수사 내용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사 사건 등에 관하여 관련 법령과 규칙에 따라 공개가 허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의사실 등을 공개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해당 훈령에 ‘수사업무 종사자의 명예, 사생활 등 인권을 침해하는 등의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가 실제로 존재하거나 취재 요청 내용 등을 고려할 때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가 발생할 것이 명백하여 신속하게 그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한 경우’엔 예외적으로 사건의 내용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피의자의 일방적 진술로 진실과 다른 추측성 보도가 발생할 것이 명백한 경우 수사기관은 신속하게 사실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피의자들이 입을 열어 거짓을 말할 때 수사기관은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무형적 가치가 ‘신뢰’다.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 범죄자의 일방적 진술이 넘쳐나는 현재의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다. 국가는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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