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년들이 이태원으로 간 까닭은?
< 조선일보 2022.11.11 , 유현준 교수·건축가 >
정치시위 ‘메카’ 광화문광장 넓이는 4만4200㎡
다양성·자유 상징 이태원 거리의 24배 달해
군중을 한 방향으로 조종하는 공간은 넓고
나만의 개성 표출하는 공간은 좁은 게 문제
개성과 자유 맘껏 펼칠 곳
더 많고 넓어져야
이태원에서 꽃다운 삶이 끝난 청년 156명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우리는 병이 난 후에야 자기 건강 상태를 살필 수 있듯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사회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게 된다.
많은 분이 다양하게 사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반복되지 않게 시스템을 보완해야한다. 여기에 건축가로서 시각 하나를 덧붙여서 왜 청년들이 핼러윈 때 이태원에 가고 싶어 했는지 이해해보고 싶다.
이태원은 1980년대까지는 가까운 부대에서 나온 미군들이 여흥을 즐기는 거리였다. 가수들은 영어로 노래를 불렀고, 여기저기서 외국어가 들리며, 인종을 넘어서 남녀가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미지는 좋지 못했다.
80년대 중반이 되자 ‘문나이트’가 생기면서 한국 댄스음악과 블랙 뮤직의 메카가 되었다. 군복이 금지되자 이태원은 다국적 문화 해방구가 되었다. 외국인이 많다 보니 국적이 다양한 음식점이 들어섰고 해외 문화가 처음 정착하는 곳이 되었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견이 없는 공간에 성 소수자가 모이기도 했다. 당시 압구정동 로데오가 부의 상징이었다면 이태원은 세대 간 벽도 없고, 성 소수자도 차별받지 않으며, 다양한 언어로 서로 다른 민족이 소통하는 자유 공간이었다.
그중 해밀톤 호텔 이면에 있는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는 이태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말에 열리는 핼러윈 파티는 자유와 개성 표출의 상징적인 날로 자리 잡았다. 남녀노소를 떠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각종 분장을 하고 모이는 이 파티는 개성을 표출하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10월 서울 거리에는 집단적 모임이 크게 두 종류 있었다. 하나는 정치 집회이고 하나는 이태원 핼러윈 파티다. 둘은 여러 명이 군집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성격은 반대다.
하나는 여럿이 같은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모이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럿이 그 모인 숫자만큼 다양한 개성을 표출하는 공간이다.
하나는 같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다수가 통일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전체주의 성격 자리라면,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표현하는 자리다.
하나는 흑백의 사고를 가지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공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즐기는 공간이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 가는 젊은이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고 상대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즐기기 위해서 모였다. 어려서부터 입시에 시달리고,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급식을 배급받아 먹으면서 자라고, 검정 패딩만 입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배워온 젊은이들에게 이태원 핼러윈 밤은 다양성과 자유의 해방구였다.
정치적 시위의 메카 공간은 광화문광장이다. 광화문광장의 크기는 가로 520m, 세로 85m로 넓이가 4만4200㎡다. 다양성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의 크기는 가로 310m, 세로 6m로 넓이가 1860㎡다. 광화문 광장은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보다 24배나 넓다.
우리나라에 정치적 신념을 표출할 수 있는 시위 공간은 넘쳐난다. 하지만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 공간은 지극히 작고 제한적이다. 이 도시의 거리에서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는 시간은 거의 매주 있지만 각자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은 1년 중 하루 허락되었다. 그날이 핼러윈 밤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정의, 국가, 민족 같은 거대한 개념을 이용하여 다수를 내가 원하는 한 방향으로 조종하려는 사람과 집단이 너무 많다. 그들의 중심을 보면 대의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제 한두 가지 생각에 전체 국민을 욱여넣는 일에 동의할 수 없는 국민이 너무 많다. 그런데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에 집착하는 편협한 사람들은 변하는 세상을 알지 못하고 변화하게 두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람을 흑백 두 색깔로 만들고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대치하게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자들은 도시 공간을 마음대로 점유하고 그 공간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겁박하고 세를 과시하는 데 익숙하다. 반대로 다양성을 표출하려는 사람들은 갈 곳도 시간도 부족하다.
이 사회의 많은 젊은이에게 핼러윈 밤에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나만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제한적 시공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구경하기를 즐겼다. 1860㎡밖에 안 되는 그 좁은 거리에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만약에 이 도시에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할 공간이 더 많았다면, 만약에 이 도시에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할 시간이 핼러윈 밤뿐 아니라 더 많았다면 이러한 참사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데, 꼰대들만이 자신들이 살던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강요하고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희생된 것이 아닐까?
그 와중에 이런 죽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자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파렴치한 자들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왜 이토록 핼러윈 퍼레이드에 열광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사회가 한 가지 모양으로 찍어내는 모습이 아닌 온전한 개성을 가진 내가 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그곳에 간 것이다. 핼러윈 밤 이태원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자기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이런 참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여러 참사 겪고도 안전을 망각하고
젊은 세대 이해 못했던 기성세대인 ‘나’
속죄양 색출·감성팔이 대신
소임 되새겨야 책임있는 자세
< 조선일보 2022.11.22,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평소 일찍 잠자리에 드는 필자 내외가 10월 29일 밤의 참사 소식을 접한 건 다음 날 새벽, 미국에 있는 딸한테 다급한 안부 연락을 받고서였다. 그곳 언론이 이 일로 난리라는 소식도 전했다. 대뜸 든 생각은 거짓 뉴스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급히 켠 TV에서 참사 속보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었다. 이태원 거리에서 대형 압사 사고라니. 유튜브에서 참사 현장 동영상들을 찾아본 이유다.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갑작스레 치명적 질병을 통보받은 심정이 이러할까. 절대 사실일 리 없다는 부정 심리,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하는 분노, 아무리 애써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급기야 동료 교수와 심한 언쟁을 벌였다. “참사의 뿌리는 각종 탈법을 일삼고 핼러윈이라는 외래문화를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한 상인들의 탐욕이다. 차제에 그 소돔을 갈아엎고 추모 공원을 조성해야 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강남역 일원도 홍대 앞도 갈아엎어야 하나. 아예 온 서울을 추모 공원으로 만들지.” 서로 얼굴을 붉히며 노려볼 뿐 이성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제 제법 시일이 흘렀지만 아픔은 좀체 가시질 않는다. 민주당은 책임자 즉각 파면, 국정조사·특검 동시 추진을 요구했다. 새 정부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지 않고, 마약과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경찰 기동 인력이 적시 투입되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퇴근길에 튼 공영방송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공공연히 훌쩍거렸고, “추모가 작위적이다” “희생자가 누군지 몰라 슬픔이 구체화되지 못한다”며 정부를 성토했다. 며칠 후 극렬 반정부 성향 온라인 매체들이 유족 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미사에서 그 이름들을 호명했다.
마치 종말을 맞은 듯 비이성이 판치는 이런 상황은 중단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참사가 남긴 혼란, 분노,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 첫걸음은 관계 부처, 지자체, 경찰의 수장들이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건축가 유현준(11월 11일)의 글이다. “10월 서울 거리에는 두 종류의 집단 모임이 있었다. 하나는 정치 집회, 다른 하나는 이태원 핼러윈 파티다. 전자는 흑백의 사고와 증오, 후자는 개성을 표출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공간이었다. 전자에 해당하는 광화문광장의 크기는 4만4200㎡, 후자에 해당하는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의 크기는 1860㎡였다. 정치적 신념은 상시로 표출되지만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은 1년 중 하루만 허락되었다.”(발췌 정리)
글을 읽으며 몸을 떨었다. 문제는 ‘나’였다. 젊은 세대의 자유분방한 문화를 마땅치 않게 여겨 그들을 안전 사각지대인 이태원의 좁은 공간에 가둔 게 나였다. 참사 소식을 접하고도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은 게 나였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존재가 나였다. “경찰이나 소방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한 장관, “핼러윈 축제는 행사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말한 지자체의 장, 위급한 상황에서 뒷짐 지고 걸은 경찰서장, 자리를 비운 112 책임자가 모두 이 사회의 기성세대인 나였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심정으로 희생자들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우리 세대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태원 참사가 남긴 상처는 너무도 깊고 아프다. 그 사실과 원인은 샅샅이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너절한 감성팔이며 화풀이는 중단되어야 한다. 더 이상 아픈 죽음을 정치로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재난의 정치적 속죄양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는 대신, 고정관념과 안일함에 빠져 사회적 소임의 최소치에 머물렀던 ‘나’를 반성하며, 그 소임의 최대치를 되새겨야 한다. 그게 진정한 추모다. 그게 기성세대가 청년 세대에게 보여야 할 책임 있는 자세다.
지난 주말 광화문 광장은 ‘퇴진이 추모다’를 외치는 정치 진영과 그 맞불 진영으로 갈라졌다. 그 정치적 대립의 공간 너머 이태원에서는 참사 현장을 찾는 이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나누는 자발적인 추모 연주와 애도 모임이 열렸다. 시민들은 그렇게 성숙한 모습으로 이태원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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