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앙일보 부고 기사

 

[최명재 1927~2022.6.26]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의 설립자 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英이튼보다 좋은 학교 만들어 큰 장사할 것" 민사고 설립 

 

< 중앙일보 최현철, 천인성 기자 ,  2022.12.06 update >



1927년 전북 김제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만경보통학교, 전주북중을 거쳐 경성경제전문학교(서울대 상대의 전신)를 졸업했다.

상업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택시 운전사로 전직했다가 1960년대에 직접 운수업(성진운수)을 창업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란에 진출해 유럽과 중동에서 물류운송업을 운영했다.

고인은 물류운송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낙농업에 뛰어들어 1987년 강원도 횡성에 파스퇴르유업을 창립했다. 국내 최초로 저온살균 우유를 도입했고, 품질을 인정 받아 국내 기업 최초 미군에 우유를 납품했다.

파스퇴르가 우유업계 4위로 성장한 뒤, 고인은 1996년 횡성 공장 옆에 민족주체성 교육을 표방하는 민사고를 개교했다. 그는 생전 영국의 이튼 스쿨을 방문해 넬슨 제독의 전승기념일 행사를 목격하고 이튼보다 좋은 학교를 세우겠다는 결심했다고 한다.

각종 강연에서 최 전 회장은 "나는 장사꾼이다. 기왕 장사를 시작한 바에는 큰 장사를 하려고 한다. 창조적인 천재 한 사람이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학교를 만들고 영재를 교육해 장차 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게 한다면 나로서는 수천, 수만배 이익을 얻는 셈이 아니겠는가"라고 밝혔다.

초기엔 최 이사장이 파스퇴르유업 수익을 매년 30억~50억원 민사고에 투자하면서 우수 학생을 뽑아 기숙사비를 포함, 교육비를 받지 않고 운영했다. 모두 1000억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98년 IMF 외환 위기로 파스퇴르유업이 부도 처리되면서 재정난을 겪은 후로는 등록금으로 운영한다.

민사고는 재학생들이 개량 한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교사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등 남다른 학풍(學風)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졸업생들은 서울대를 비롯, 국내 명문대뿐 아니라 스탠퍼드·코넬·듀크·케임브리지·홍콩과기대 등 전 세계 유명 대학으로 다양하게 진학하고 있다. 


민사고 측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고인은) 삶의 전반전은 기업인으로, 후반전은 교육인으로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 시대의 반항아이자 기인이었다. 국민에게 차별화된 질 좋은 우유를 공급하겠다는 신념으로 기존 유가공업계와 치열하게 싸웠고, 고교평준화 흐름 속에서도 민족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한 영재 교육을 주창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힌 적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학교 설립에 재산 대부분을 바친 부친처럼, 고인의 평생 꿈은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고인의 강한 염원과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오늘날의 민사고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14기 졸업생 이호원 씨는 “민사고에서의 경험으로 세계 어느 곳에 있든 치열한 경쟁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며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도와준 이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하며 조문을 했다.


유족으로 부인과 2남 2녀가 있다. 장남인 최경종 민사고 행정실장이 고인의 유지를 이어 학교 운영을 맡고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8일 오전 6시 20분이다. 영결식은 28일 오전 9시 민사고에서 학교장으로 거행되며 장지는 민사고가 자리한 횡성군 덕고산 자락이다.

천인성 기자

 

 

 

 

2. 새전북신문 부고 기사

 

[온누리] 최명재


< 새전북신문 이종근,  2022년 06월 28일  >



강원도 횡성 민족사관고등학교 설립자인 최명재 이사장이 26일 오전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삶의 전반전은 기업인으로, 후반전은 교육인으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시대의 반항아이자 기인으로 평가받는다. 1927년 김제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난 최 이사장은 아버지 최현묵이 민족의 교육을 위해 고향에 보통학교를 설립하려고 가산을 기부하면서 가세가 기울었으나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에 걸쳐 이루고자 하는 꿈을 얻었다. 만경보통학교와 전주북중, 경성전문대학교에서 수학하고 한국상업은행 근무, 택시운전, 운수회사 설립, 해외 운수 용역업 진출, 성진목장 경영에 이어 1987년 파스퇴르유업을 설립, 비로소 교육사업을 실현할 기반을 마련하고 1996년 3월 1일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설립, 개교했다.

영재교육과 민족주체성교육, 지도자 양성을 내세운 이 학교는 세계 명문 20대 고교에 들어갈 정도로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번 돈은 사회가 잠깐 내게 맡긴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는 2017년 12월 자사고와 일반고의 선발 시기를 일원화하고 이중지원을 금지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에 반발한 최명재 민족사관학원(민족사관고 학교법인) 이사장 등 9명은 정부 개정안이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침해한다”며 헌재에 헌법소원과 함께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헌재는 2018년 6월 지원자의 이중지원을 막는 조항에 대해선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반면 우선선발 금지 조항에 대해선 효력을 인정했다.

파스퇴르유업은 최 전 회장이 환갑이 지난 나이에 창립한 이후 10년간 연간 매출 1,800억원이 넘는 굴지의 유업체로 성장했다.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인지도를 높였으나 업계에서는 '모난 돌'로 여겨졌다. ‘저온 살균’ 논란과 파동 속에 파스퇴르유업에서 번 돈과 사재 등 1, 000억 원가량을 투자해 세운 민사고는 곡절도 많았다. 개교 이듬해 외환위기가 터져 1998년 1월 파스퇴르가 부도났다. 2004년 파스퇴르가 매각되면서 학교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민사고는 학생 수를 늘리고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학비를 받아 자립에 나섰다.

그가 2004년에 펴낸 자서전 '20년 후 너희들이 말하라'는 정착시키기까지 겪었던 실패와 승리의 과정, 해외유학반 학생 전원을 세계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철학을 담았다. '나를 키워 준 것은 적들이었다'라고 말한 그는 자기가 처해있는 환경의 지배를 극복했고, 그 극복의 방법이 창의적인 발상, 끈질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올바른 삶의 가치관 정립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는 오늘도 '너희들은 꿈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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