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량  [ 閑良 ]

 

<용비어천가>에는 한량의 뜻을 풀이해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속칭한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학교에도 적(籍)을 두지 못해 아무런 속처(屬處)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무예(武藝)를 잘 하여 무과에 응시하는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한편 돈 잘 쓰고 만판 놀기만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량이 직업이 없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계층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존재했는데, 시대에 따라 그 뜻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부유하면서도 직업과 속처가 없는 유한층(遊閑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관직이나 학생이 될 자격이 있는 양인(良人) 이상의 신분으로서 하층 양반이나 상층 평민 중에서 배출되었다.

교적(校籍)도 없고 군적(軍籍)에도 오르지 않아 아무런 소속이 없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평소 유학이나 무예를 배워 관리나 고급 군인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들을 추쇄(推刷)해 기간병종(基幹兵種)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을 폈다.

국가정책상 한량에 대한 논의가 주로 군역과 관련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군역편제 조처는 조선 건국과정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경성에 거주하면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소속해 숙위(宿衛)하는 한량에게 과전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외방에 거주하는 한량에게는 군전(軍田)을 지급하되 본전(本田)의 다소에 따라 5결 혹은 10결을 주고, 그 대가로 지방군에 충역(充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때 과전이나 군전을 받은 자는 관직을 그만둔 전함관(前銜官)이나 공민왕대 이후 잦은 전란 속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대가로 첨설직(添設職)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흔히 한량품관, 혹은 품관(品官)으로도 불렸다. 또, 비록 중앙의 벼슬아치는 아니라 하더라도 재산과 학력과 품계를 갖추고 있어서 잠재적인 지배층으로서 향촌의 유지(有志)로 행세하고 있었다.

한량품관은 군역에 편제되어 조선 초기 국방력 강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량으로 충원되는 병종(兵種)은 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근장(近仗)·방패(防牌)·섭대부(攝隊副)·기선군(騎船軍)·수성군(守城軍)·영진군(營鎭軍)·방사군(放射軍) 등 다양하였다.

세조 때에는 하삼도(下三道) 지방의 한량 2,187인을 추쇄, 호익위(虎翼衛)라는 특별 부대를 조직하였다. 중종 때에는 정로위(定虜衛)라는 부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군역 복무에만 머문 것은 아니고,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향촌에 유향소(留鄕所)를 설립, 향촌 자치를 주도하기도 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켜 나갔다. 한편, 품관으로서의 한량 문제가 일단락된 15세기 말 이후로는 새로운 형태의 한량이 대두,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다.

흔히 한량자제(閑良子弟)로도 불렸던 새로운 한량은 나이 20세가 넘고 재산도 있으며 유학과 무예도 어느 정도 익힌 사족이나 평민의 자제들로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아니고 군역도 지고 있지 않은 부류들이었다.

이들은 호적(戶籍)에도 올라 있지 않아 과거 시험도 치를 수 없는 등 양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조사해 그 재능을 시험, 고급 군인으로 선발하기도 하고 강제로 군역을 지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량의 존재는 계속 늘어가기만 하였다.

조선 후기 1625년(인조 3)에 작성된 호패사목(戶牌事目)에는 사족으로서 속처가 없는 사람, 유생(儒生)으로서 학교에 입적(入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평민으로서 속처가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전기의 한량 개념이 그때까지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조 때 ≪무과방목 武科榜目≫에는 무과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이 무렵부터 한량이 무과 응시자격을 얻게 되면서 무과 응시자 혹은 무반 출신자로서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의 뜻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  한량 [閑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건달과 한량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북한 사전에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이라는 속담이 나온다. 이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 ‘건달’은 거들먹거려도 쓸 돈이 없어 처량한 신세의 사람이라면, ‘한량’은 속없어 보여도 흥청망청 쓸 돈은 있어 스스로는 신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건달’이건 ‘한량’이건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한심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건달’이라는 단어는 16세기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게으른 사람’을 뜻해 지금의 ‘건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건달’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다.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Gandharva〔樂神〕’를 한자의 음을 이용해 표기한 중국어 ‘乾闥婆(건달바)’에서 출발하여 그 어형과 의미가 달라진 말이다.

‘Gandharva’는 수미산(須彌山) 남쪽 금강굴에 살면서 하늘 나라의 음악을 책임진 신(神)이다. 말하자면 ‘음악의 신’인 셈이다. 이 신은 향내만 맡으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며 노래와 연주를 하며 살아간다. ‘Gandharva’가 노래와 연주를 전문으로 하는 신이었기에 인도에서는 이를 근거로 악사(樂士)나 배우까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Gandharva’를 한자의 음으로 표기한 ‘乾闥婆(건달바)’라는 단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에 전해진 초기에는 그 본래의 불교적 의미인 ‘악신(樂神)’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가 불교 사회에서 일반 사회로 넘어와 쓰이게 되면서 어형이 ‘건달’로 축약되고 그 의미도 크게 달라졌다.

아마 일반 사회로 넘어와 처음으로 획득한 의미① ‘하는 일 없이 놀거나 게으름 피우는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이미 16세기에 확인된다. ①의 의미는 ‘건달바’가 본래 노래나 하며 한가롭게 지내는 악신(樂神)이라는 점이 비유적으로 확대되어 파생된 것이다. 이는 ‘백수건달(白手건달)’과 같다.

‘건달’이 두 번째로 얻은 의미는 ②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이다. 이는 게으름을 피운 결과로서 생겨난 의미이다. 이쯤 되면 ‘건달’은 바가지나 깡통만 차지 않았지 ‘거지’나 다름없다.

세 번째로 얻은 의미는 ③ ‘난봉이나 부리고 다니는 불량한 사람’이다. 이것은 ‘건달’이 그저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족속이 아니라 허랑방탕한 짓까지 하고 다니는 족속이라는 데서 생겨난 의미이다. 이러한 족속은 ‘건달’보다는 ‘건달패’가 더 잘 어울리며 ‘난봉꾼’과 똑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건달’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났다.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빈털터리인 ‘건달’이 먹고살기 위해 주먹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의미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어쩌다가 ‘건달’이 ‘깡패’와 같은 족속이 된 것이다.

 


한편, ‘한량’이라는 말은 옛 문헌에 ‘한량’ 또는 ‘할냥’으로 나온다. 본래 ‘한량’은 한자어 ‘閑良’으로 조선시대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武班)’을 가리켰다. 그런데 실제 옛 문헌에 보이는 ‘한량’이나 ‘할냥’은 그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직사(職事)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놀고먹는 무반’에서 의미가 확대되어 그러한 처지에 있는 무반(武班)과 문반(文班)을 모두 가리키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변화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한량’은 ‘놀고먹는 양반’이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돈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변한다. 돈푼깨나 있는 양반들이 하릴없이 돈을 펑펑 써 가며 잘 노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그와 같은 행위를 일삼는 일반인 모두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변화가 일어난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20세기 초에 출간된 문세영 저 『조선어사전』(1938)이나 한글학회에서 펴낸 『큰사전』(1957)에도 ‘한량’에 그 본래의 의미인 ‘벼슬을 못 한 호반(虎班)’이라는 의미만 달려 있지 변화된 의미는 달려 있지 않다. 물론, 최근에 나온 사전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를 포함하여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두 가지 의미 모두를 싣고 있다.

『큰사전』(1957)을 비롯해 그 이후에 나온 사전에는 ‘한량’과 더불어 그것에서 변형된 ‘활량’이라는 단어까지 싣고 있어 주목된다. ‘한량’이 동화 작용에 의해 ‘할량’으로 발음된 다음 다시 ‘활〔弓〕’과의 연상 작용으로 ‘활량’이 된 것이다. ‘할’을 통해 ‘활’을 연상한 것은, ‘한량’이 무인(武人)이고 이들이 ‘활’을 사용한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건달’이나 ‘한량’은 의미가 상당히 변했으며,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할 일 많은 이 세상에 게으르고 무능한 ‘건달’, 그리고 돈 귀한 줄 모르고 흥청대는 ‘한량’은 모두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  건달과 한량 -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2009. 9. 25., 조항범)

 

 

3.

선량과 한량 

 


< 경남신문, 이상권 서울본부장,  2023-02-26  >



국회의원을 흔히 ‘선량(選良)’이라고 한다. 선택현량(選擇賢良)의 줄임말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뽑는다는 의미다. 이면엔 인재에 대한 존경과 역할의 기대가 깔려있다. 유래는 중국 한(漢)나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관리를 선발한 기준에 효렴(孝廉)과 현량방정(賢良方正)이 있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며, 경학에 밝고 품성이 어질며 행동이 방정한 사람을 칭한다.

이에 비해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武班)은 ‘한량(閑良)’이라고 했다. 무과 응시를 준비하기 위해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무예를 연마하는 것이 마치 노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다. 현대에 이르러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돈 잘 쓰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민의를 대변하지만, 국회의원만큼 지탄받는 자리도 드물다. 국회는 고비용·저효율의 대명사이자 ‘한량 집합소’ 정도로 폄하되지만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이율배반의 현실이다. 걸출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헌법기관’으로 최고의 예우와 특권을 누리는 데다 돈까지 몰린다. 지난해 309개 국회의원 후원회가 585억7900만여원을 모금했다. 한데 의정활동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한량으로 시간을 때워도 선량으로 불리니 이만한 자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한번 ‘금배지’의 위용을 맛본 이들은 재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현재 300명인 국회의원 정수를 내년 총선에서 350명으로 늘리자고 국회의장이 제안했다. 사표(死票)를 줄이고 표의 등가성을 확보하자는 취지다. 늘어난 50석은 비례대표다. 한데 비례대표가 직능계를 대표한다는 애초 명분은 희미해졌다. 정쟁을 일삼아 볼썽사나운 이들을 늘리는 데 공감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불체포·면책 등 특권 내려놓기와 세비 감축 등 파격적 자구책이 전제돼야 한다. 국회의원 수가 적어 나라가 이 모양은 아니라는 중견 정치인 출신의 일갈이 더 현실감 있다.

이상권(서울본부장)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