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송재윤 저자(글)
까치 · 2020년 04월 01일
책 소개
오늘날 중국은 어디로 향하는가?
중국몽에서 깨어 중국의 역사 현실을 바라보라!
중국 역사학자 송재윤 교수, 중국의 민낯을 파헤치다
2019년부터 시작된 홍콩의 자유화 운동과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대하는 중국 정부의 행태는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 규모와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가 아닌 중국 대륙에서 살아가는 인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의 송재윤 교수는 중국 인민에 초점을 맞추어 중국의 역사를 파헤친다. 「슬픈 중국」3부작은 중국의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다시 읽는다. 독자는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중국의 인민들과 만나고 오늘날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슬픈 중국」제1부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1948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정과 사회주의의 건설을 다룸으로써 중국이 부르짖은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어떻게 “인민의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지 살펴본다. 일당독재, 인권유린 등 현대 중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살펴보는것을 시작으로 마오쩌둥의 외교전략과 중국의 핵실험 성공,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경제개혁 때에도 마오쩌둥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핵개발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1948년부터 1964년까지 현대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며 “인민민주독재”가 초래한 “인민의 디스토피아”를 고발한다. 인민과 적인을 구분하는 마오쩌둥과 중공정부의 통치 방식은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건국에서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중국 역사를 살펴보는 “슬픈 중국” 3부작을 통해서 독자는 오늘날 중국 사회와 정치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를 살핌으로써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저자(글) 송재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려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마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테네시 주립대학교를 거쳐서 2009년 이후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중국 근현대사와 정치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11세기 중국의 국가개혁과 유가경학사의 관계를 조명한 학술서 Traces of Grand Peace: Classics and State Activism in Imperial China(Harvard University, 2015)와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한 영문소설 Yoshiko’s Flags(Quattro Books, 2018) 등이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 중화제국사의 정치 담론을 집약한 학술서적 Share and Rule과 “슬픈 중국”의 제2권 『문화대반란 1964-1976』을 집필하고 있다.
https://youtu.be/-uiO2mcz3zg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슬픈 대륙의 역사를 돌아보라!
제2장 변방에 역사서를 주지 말라!
제3장 1948년 창춘 홀로코스트 I :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비사
제4장 1948년 창춘 홀로코스트 II
제5장 해방, 인민을 삼켜버린
제6장 “인민해방군”과 인해전술
제7장 토직개혁 잔혹사
제8장 인민+민주=독재
제9장 마오의 도박, 미국과의 전쟁
제10장 목사가 된 공산당군
제11장 나는 황제로소이다
제12장 반외세 고립주의의 어리석음
제13장 빼앗긴 민국의 꿈
제14장 중국의 인텔리들은 왜 자유를 잃었나?
제15장 “마오쩌둥 신화” 비판
제16장 문자옥 I : 낙인찍고 재갈 물리고
제17장 문자옥 II : 그물 치고 떡밥 뿌리고
제18장 백화제방, 우파 사냥
제19장 빅브라더의 정신 세계
제20장 중앙서기처의 비밀
제21장 자유인의 망명
제22장 당신들의 민족주의
제23장 참새 대학살 촌극
제24장 붉은 투사냐, 전문가냐?
제25장 강물과 인간의 투쟁 I
제26장 강물과 인간의 투쟁 II
제27장 인류사 최대의 기근 I
제28장 인류사 최대의 기근 II : 정치가 인민을 굶겨 죽이다!
제29장 인류사 최대의 기근 III : 언론이 인민을 굶겨 죽이다!
제30장 차르의 유토피아
제31장 체어맨의 외교술
제32장 책임지라, 빅브라더
제33장 영도자의 어쭙잖은 변명
제34장 흑묘와 백묘의 변증법
제35장 인민민주 인격살해 : 국가주석의 최후
에필로그
출판사 서평
무수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인민민주독재”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국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슬픈 중국” 3부작은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정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의 궤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3부작의 첫 책인 제1권에서는 1948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정과 사회주의의 건설을 다룸으로써 중국이 부르짖은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어떻게 “인민의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지 살펴본다.
제1장과 제2장은 일당독재, 인권유린 등 현대 중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한국 독자들에게 “중국몽”에서 깨어날 것을 이야기한다. 중국은 오랫동안 자국의 어두운 역사를 숨겨왔지만, 그 역사를 알아야만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 또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 속에서 건국된 중국의 초기 역사는 수많은 인민들의 희생의 역사이기도 하다. 제3장과 제4장은 국공내전 중인 1948년 창춘에서 일어난 창춘 포위전에 대해서 살펴본다. 국공내전 시기 공산당은 국민당을 이기기 위해서 창춘을 포위했고,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인민이 희생되었다. 일본인 생존자 엔도 호마레의 증언은 창춘 포위전의 참극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제5장은 창춘 포위전과 그에 이어진 공산당군의 베이핑(오늘날의 베이징) 점령을 살펴보면서 당시 인민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묘사한다. 두 도시가 점령되자 매달 10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피난을 떠났고, 피난길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 도적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제6장에서는 국공내전의 화이하이 전투에 대해서 살펴본다. 화이하이 전투에 참여했던 생존자 린징우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에서 강조하는 지전민공(支前民工)은 ‘총알받이’에 불과했다. 한편 제7장 “토지개혁 잔혹사”는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 지구에서 벌어진 토지개혁의 실상을 다룬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했던 중국의 토지개혁은 무고한 인민들을 지주, 부농, 한간(친일파)으로 간주하고 인민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국공내전 끝에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민민주독재”를 통치 원리로 삼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제8장에서는 통치 원리로서의 “인민민주독재”가 가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1950년대 초반 중국에서 일어난 대숙청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시기에 일어난 정치 운동은 수많은 인민을 적인(敵人)으로 낙인찍는 대숙청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한편 제9장은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파병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본다. 익히 알려진 “완충지대로서 북한을 수호한다”는 목적 외에도 마오쩌둥에게는 공산당군의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비대해진 지상군 병력을 ‘정리하며’, 중국 내의 결속을 도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제10장은 한국전쟁 당시 지원군으로 파병되었던 웡 목사와의를 만남을 기초로 전쟁 피해자의 삶과 현재를 돌아본다.
대숙청과 한국전쟁 파병으로 수많은 인민을 ‘정리한’ 마오쩌둥과 중공정부는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제11장에서는 중공정부가 어떻게 강력한 독재 국가가 되었는지 살펴본다. 중공정부는 스탈린 독재의 뒷받침이 된 스탈린 헌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마오쩌둥은 ‘황제’와도 같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제12장에서는 1940년대 후반에 외국인들을 상대로 자행된 인권유린과 정치폭력에 대해서 살펴본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서구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피상적인 사고방식은 중국의 고립을 자초했고, 결국 문화혁명과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제13장에서는 2018년 중국의 헌법 개정 과정에서 시진핑의 일인지배가 정당화되었음을 지적하며 중국의 인격숭배와 독재의 기원이 특정 사상을 강요하는 정치문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제14장에서는 마오쩌둥과 중공정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을 탄압한 과정을 살펴본다. 중국공산당은 정부에 대한 문제제기를 요구하며 비판투쟁을 시행했지만, 실제로 정부의 요청에 따라서 문제를 제기했던 지식인들은 모두 숙청되고 말았다. 제15장에서는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현대인들을 살펴본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에 달걀을 던지거나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살아 있는 신성’ 마오쩌둥 신화에 저항한다. 제16장과 제17장에서는 마오쩌둥의 문예 이론을 비판했던 ‘후펑 반혁명 집단 사건’에 대해서 살펴본다. 후펑과 제자들은 문학이 계급투쟁의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으나, 결국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제18장에서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지식인 탄압 사례를 살펴본다. 중공정부는 지식인들이 다양한 생각을 표출해야 한다는 “백화제방”을 부르짖어 정부를 비판하도록 한 뒤, 실제로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모두 숙청했다.
제19장에서는 이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을 숙청한 이유를 고찰한다.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문제제기가 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적인으로 구분하여 숙청했다. 제20장에서는 중공정부가 인민들을 ‘효과적으로’ 숙청한 방식을 살펴본다. 중공정부는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인민들을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가 적은 집단은 정부 지침을 성실하게 따르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제21장은 중공정부의 탄압을 피해 떠난 지식인 거양을 소개한다. 유망한 언론인이었던 거양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상 개조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중공정부가 지식인들을 탄압한 근거는 중국 국민을 ‘인민’과 ‘적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 제22장은 중국의 ‘국족(國族)’ 개념을 설명하며 중국의 전체주의가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중국의 ‘국족’은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을 중국의 인민으로 포섭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제23장과 제24장은 전문가의 의견을 중시하지 않았던 중공정부의 정책실패를 다룬다. 참새가 먹는 곡식을 아낀다는 미명하에 시작되었던 참새 박멸 운동은 해충을 번식하도록 만들어 대기근을 불러왔고,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한 자급자족은 댐의 붕괴라는 인재를 불러왔다. 제25장과 제26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스만탄 댐과 반차오 댐의 붕괴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제27장과 제28장, 제29장에서는 대약진 운동 중에 이루어진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 대해서 살펴본다. 식량 증산을 목표로 시작되었던 대약진 운동은 기근과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그러나 관료들은 성과를 부풀려 상부에 보고했고, 언론 또한 허위보도를 일삼았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지적한 펑더화이가 우파 세력으로 몰려 숙청당하면서 대약진 운동의 실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제30장은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지적했던 루산 회의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인민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대약진 운동을 고발한다.
제31장은 마오쩌둥의 외교전략과 중국의 핵실험 성공에 대해서 살펴본다. 마오쩌둥은 외교적인 모욕을 감수하면서 소련으로부터 핵기술을 전수받았고, 1964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 흐루쇼프에게 의도적인 결례를 범함으로써 스탈린에게 당한 모욕을 갚아주었다. 제32장과 제33장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의 원인이 마오쩌둥에게 있음에도 이런 실패를 외면하는 중공정부에 대해서 비판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기가 어려우며,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지도부는 “대약진 운동의 의도는 좋았으나 경험이 부족했다”며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제34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경제개혁 때에도 마오쩌둥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핵개발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표면적으로는 국가경영의 실권을 넘긴 듯하지만, 실제로는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5장에서는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류사오치가 정치 권력에 의해서 숙청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류사오치는 경제개방을 통해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했음에도 문화혁명 때에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파)’로 몰려 숙청당했다.
이 책은 1948년부터 1964년까지 현대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며 “인민민주독재”가 초래한 “인민의 디스토피아”를 고발한다. 인민과 적인을 구분하는 마오쩌둥과 중공정부의 통치 방식은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건국에서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중국 역사를 살펴보는 “슬픈 중국” 3부작을 통해서 독자는 오늘날 중국 사회와 정치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를 살핌으로써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2.
슬픈 중국: 문화대반란 1964~1976
목차
프롤로그
제1부 대반란의 기원
제1장 문화혁명의 두 기둥:인간 개조와 권력투쟁
제2장 스탈린, 마오에게 혁명을 가르치다!
제3장 문혁 전야:짧았던 관리자의 꿈
제2부 “천하대란”의 시나리오
제4장 저격수의 등장:대반란 제1막 제1장
제5장 “지옥의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제6장 독재의 시작은 비판여론 탄압
제7장 조반유리:천하대란의 시작
제8장 대반란의 서곡, 말려드는 중공중앙
제9장 “혁명은 폭동이다!”
제10장 권력자의 도그마:독선은 재앙이다
제11장 천하대란, 홍위병 학살극의 배경
제12장 태양신의 숭배자들
제13장 사회주의 신분제도:“혈통이냐, 능력이냐?”
제3부 탈권과 무투
제14장 권력 탈취! 문혁의 전국적 확산
제15장 문혁의 특별기관:혁명위원회의 건설
제16장 계급 학살의 기록
제17장 천하대란의 무장투쟁
제18장 권력자는 군중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다!
제19장 권력자의 역사 유희
제20장 홍위병들, 주중 영국 대사관을 급습하다!
제21장 권력의 부메랑:극좌 맹동 선동가의 최후
제22장 권력에 기생하는 지식분자의 운명
제23장 마오의 긴고주:조반파를 제압하라!
제24장 잃어버린 세대:홍위병의 수난
제25장 성의 자유를 빼앗긴 젊은이들
제26장 경쟁 없는 디스토피아
제4부 “대반란을 진압하라!”
제27장 국가 권력의 대민 테러:청계 운동
제28장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제29장 우붕의 우귀사신들
제30장 군중독재, 정치 학살:일타삼반 운동
제31장 반독재 자유의 순교자들
제32장 광기의 정치공작, 국가주석을 살해하다!
제33장 중, 소 군사충돌:수정주의와 교조주의의 투쟁
제34장 음모와 술수의 통치술
제35장 주군의 배신, 천보다의 몰락
제36장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대결
제37장 린뱌오의 반란계획서?:571 공정 기요
제38장 닉슨의 대중전략:중국 딜레마의 씨앗
제39장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하라!
제40장 “종교의 자유를 달라!”:문혁 말기 무슬림 순교자들
제41장 톈안먼의 군중
제42장 빅브라더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
에필로그
출판사 서평
중국공산당이 인정한 바와 같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자기파괴의 역사이다. 칼과 총을 든 홍위병과 수십만이 운집한 집회로 상징되는 이 거대한 정치 운동은 표면상 인민의 자발적인 ‘혁명’으로 미화되었지만, 기실 마오쩌둥의 사망과 동시에 막을 내린 마오 최후의 권력투쟁이었다.
마오는 중국 전역에 혁명의 문화를 퍼뜨려 군중을 혁명투사와 인민의 적으로 나누었고, 균열의 틈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권위는 시진핑의 인민 감시 및 사상 교육을 통해 오히려 강화되는 듯 보인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중국에서는 보다 철저한 인민 감시와 반대자를 향한 탄압이 행해진다.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탄압은 이제 중국 내의 소수민족과 다수의 자치구를 넘어 해외의 유수 기업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시진핑 사상을 주입받으며 열광적 애국주의로 무장한 청년들과 시진핑의 관계는 마오쩌둥 사상의 보위를 외치던 홍위병과 마오쩌둥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현대중국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하는 “슬픈 중국” 3부작의 제2권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문화혁명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가리고 정적을 제거하고자 했던 마오의 기획이었음을 지적하며, 중공 내부의 권력 다툼, 군중을 분열시키는 정치 공작의 관점에서 문화혁명을 재조명한다. 중공 내부와 홍위병, 군중조직 등 다양한 주체들의 역학관계를 통해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을 되짚는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마오쩌둥에서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거대한 시나리오,
당 내부의 역학관계를 통해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을 되짚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고 중앙 정치의 제2선으로 물러났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지도하에 중국의 경제가 안정을 되찾는 동안, 지도자로서 천명을 상실한 마오는 자신의 실정을 덮고 더 큰 권력을 누릴 기회를 노렸다. 마오가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한 사람은 국가주석 류사오치였다. 1962년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며 정치 운동을 재개한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인민을 격동시켜 본격적으로 류사오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오원위안, 치번위 등의 지식인들을 통한 정치 공작은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된 인민들이 스스로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그 측근을 차례로 제거하게 만들었다. 각 대학에 공작조를 보내 문화혁명의 질서를 잡고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던 류사오치는 결국 혁명을 억압한 반동분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1969년 류사오치가 사망한 뒤에도 정적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혁명 시나리오는 계속되었다. 군부의 실력자였던 린뱌오와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천보다는 물론, 극좌파 지식분자였던 왕리, 관펑, 치번위 역시 인민을 이용한 마오의 공작에 따라서 차례로 제거되었다.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당대 권력자들의 최후와 마오쩌둥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문화혁명의 모든 과정이 마오쩌둥의 권력투쟁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혁명을 실행한 두 개의 축, 홍위병과 군중조직
문화혁명 초기 혁명의 불씨를 댕김으로써 무장투쟁의 주축으로 활동했으나, 마오의 상산하향 운동으로 오지에 버려진 홍위병은 중국 역사의 모순을 드러낸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이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보다 과격하게 혁명에 참여했지만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정부와 기성세대에 의해 오지에서 젊음을 보내며 중국의 대표적인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확산과정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서는 홍위병에게 자극을 받은 군중조직에도 주목해야 한다. 『문화대반란 1964-1976』은 문화혁명의 실행 주체로 홍위병과 군중조직을 동시에 살핌으로써 홍위병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그간의 논의를 넓히고자 시도한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했던 군중조직은 마오쩌둥이 주문한 “권력 탈취”를 실행함으로써 시 정부와 주요 언론을 전복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생산성 저하를 이유로 단체행동권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의 권력 탈취는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처럼 보였으나, 군부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책속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체험에 의존하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를 본다.
- 유럽 속담
마르크스주의의 진리는 수천, 수만 가지로 나뉘지만, 그 뿌리는 단 한마디로 집약된다.
조반유리(造反有理) ! 반란을 일으킴에 그만한 이유가 있다!
-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혁명은 곧 조반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영혼이 곧 조반이다.
— 칭화 대학 부속 중등학교 홍위병의 대자보 “무산계급의 혁명조반 정신 만세!” (1966년 6월 24일)
1966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아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문화혁명 때 인민은 날마다 반란을 일으켰다.
그전에는 혁명을 만들고 있었지만.
-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젠(高行健,1940- ), 『나 혼자만의 성경 (Ze Livre d'un homme seul)』
(1) 프롤로그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1958-1962)은 대기근으로 끝이 났다.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와 덩샤오핑(登小平, 1904-1997)은 과감한 농업우선정책(1961-1965)을 추진했다. 그 결과 연평균 9.6퍼센트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학정을 선정으로 뒤바꾼 스마트한 실용의 리더십이었다. 대기근을 초래하면서 천명을 상실한 마오쩌둥은 두 사람을 중공중앙의 권좌에서 밀어내기 위해서 치밀한 권력투쟁의 시나리오를 짰다.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1966. 5-1976. 10, 이하 문화혁명 또는 문혁)은 마오쩌둥 최후의 혁명이었다. 그는 문혁 10년 대동란(大動亂)을 일으켜 죽는 날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중국 전역에서는 대혼란이 이어졌다. 민심은 더욱 강퍅해지, 민생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문혁이 개시된 이듬해인 1967년 산업 생산랑은 무려 14퍼센트나 감소했다. 식량 배급분이 줄어들고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2년 넘게 집단 광기 속에서 “인민의 적”을 사냥하고, 비판하고, 모독하고, 구타하고, 베고, 찌르고, 쏴 죽이던 조반파 군중조직은 어느 순간 천하 대란(天下大亂)의 주범들로 몰리고 있었다. 전국 각 성에 혁명위원회가 건립된 후 지방에서는 사실상 군부독재가 진행되었다. 지역 군대가 나서 서 천하대치(天下大治)의 명분 아쾌 다수 인민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후
5-6년에 걸쳐서 정부 주도하에 대규모 대민 테러가 자행되었다. 내년의 세월 문혁의 광풍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인민들은 1976년 4월 청명절을 맞아서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나갔다. 그들은 광기의 시대를 규탄하며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외쳤다. “우리는 민주를 원한다! 파시즘은 물러가라!”
5개월 후인 9월 9일,마침내 마오쩌둥이 숨을 거두었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아내 장칭(江靑, 1914-1991)과 후계자 화궈펑(華國鋒,1921-2008)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한평생 장 제스와 전쟁하고 문화혁명을 했다. 전자의 공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는 듯하다.” 마오쩌둥 스스로 문화 혁명의 오류를 인정했음일까?
1981년 6월 27일, 마오쩌둥 사후 5년이 지나서야 중국공산당은 문화혁명에 대한 공식 입장을 정리했다.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1960-1970년대 중국 전역을 폭력과 파괴, 원한과 광기, 보복과 린치, 고문과 학살, 분쟁과 내전의 악순환으로 몰아넣 었던 문혁의 책임이 마오쩌둥에게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미 3년째 개혁개방의 기치 아쾌 실용주의 경제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에게 문혁의 책임을 묻고, 수백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의 명예를 복권시켰다. 굉기와 폭력의 시대가 황급히 정리되었지만, 최종 책임자인 마오쩌둥의 권위는 훼손되지 않았다. 마오쩌둥 사상은 아직도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기둥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적 토대이 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마오쩌둥이 살아 있기 때문에 문혁의 광풍은 언제든 다시 불 수 있다.
우리는 왜 다시 참혹했던 문혁의 검은 역사를 돌아보아야 할까? 적어도 일곱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하다
첫째,바로 지금 중국에서 때아닌 문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習近平,1953- ) 정부는 최첨단 디지털 장비를 총동원해서 인민을 감시하고,문제의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정풍〈整風)을 이어 가고 있다. 기업인,예술가,교수,작가,연예인까지 문혁의 바람에 날려갔다. 실상 모든 인민이 순식간에 정풍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변이 독감처럼 문혁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 10대 청소년들은 특히 문혁 바이러스에 취약하다.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이후 더더욱 중등과정 이념 교육이 강화 되고 있다. 일례로 2018년 중국 교육부는 중,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문혁 관련 내용을 대폭 줄이고,“마오쩌둥의 착오”를 적시한 문장을 삭제했다. 학생들은 날마다 마오쩌둥 신화를 배우고 시진핑 사상을 익힌다.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열광적 애국주의로 무장한 분노청년이 되었다. 시진핑과 분노청년의 관계는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둘째, 문혁은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가장 발달한 민주제 국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혁은 광란 정치, 분쟁 정치, 조작 정치, 선동 정치, 폭민 정치, 집단 폭력, 다수독재의 산물이다. 생각의 다양성, 가치의 다원성을 부정하는 좌, 우 정권은 모두 문혁의 유혹에 빠졌다.
1923년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은 “인민대중 전체의 문화적인 발전”을 위해서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1930년대 스탈린(Iosif Stalin, 1879-1953)은 집산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를 뒤바꾸는 대대적인 문화혁명을 강행했다. 1930년대 집권 초기부터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바이마르 시대의 문화적 볼셰비즘을 탄압하고 반유대주의 게르만 민족주의로 사상, 예술, 문학을 획일화하는 대규모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2020년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선진국에서도 반자유적 좌파(The illiberal left)의 득세로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 이래 250년간 쌓아 올린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좌파 문화 권력의 PC(political correctness :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 반발하는 우파군중은 경제적 보호주의를 내걸고 자국 우선의 문화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요컨대 문혁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
셋째,1970년대 이래 한국 지식계가 마오쩌둥을 칭송하고 문혁을 미화하는 편향된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1937년 런던에서 처음 출판된 에드거 스노(Edgar Snow, 1905-1972)의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은 1960-1970년대 글로벌 마오주의의 고전이 되었다. 1980 년대 이래 한국의 대학가에서 이 책은 교양필독서였다. 문제는 이 책이 40대의 젊은 지도자 마오쩌둥의 불완전한 영웅전이리는 점이다. 이 책에는 그후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고 저지른 수많은 과오가 쏙 빠져 있다. 한국에는 아직도 이 책만을 탐독한 후 마오쩌둥을 존경하고 중국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국 지식계의 시대착오적 친중 사대주의는 1970-1980년대 리영희(李泳禧,1929-2010)의 중국 관련 저서들을 통해서 강화되었다. 당시 글로벌 마오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리영희는 편향된 정보만을 선취하여 중국혁명의 신화를 썼다. 그는 대약진 운동을 칭송하고, 심지어 마오쩌둥 인격숭배까지 긍정했다. 1980년대 후반 리영희는 자신의 오류를 자각했지만, 반성 하고 참회하기보다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었다”는 회피성 발언만을 남겼다. 리영희의 영향 아래 친중 사대주의에 매몰된 586 세대는 현재 한국의 정계,지식계,문화계의 주류이다.
넷째, 문혁의 반면교사가 근대 입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독재정권을 불러들인 선례가 드물지 않다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고 정부 내의 견제와 균형을 허물 때에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중국공산당은 권력의 분립을 부정하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통일된 의행합일을 강조한다. 문혁의 과정을 세밀히 탐구하면, 국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특정 집단에 의해서 장악되는 인민민주주의의 위험이 명확해진다.
다섯째,냉전시대의 체제 경쟁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중국은 여전히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경제규모 세계 2위의 중국은 인류의 보편가치를 거부하고 있다. 마오쩌둥에서 시진핑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교묘한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깊이 문혁 시기를 탐구해야 한다.
여섯째,바야흐로 국제사회가 단순한 반중을 넘어 적극적인 비중(批t中), 억중(抑中)의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 각국의 반중 정서는 사상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 제의 도입이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냉전시대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의 패러다임은 실효성을 상실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새로운 대(對)중국 외교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타이완 해협에서 군사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국제연대가 강화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용인할 수 없다. 세계 시민 모두에게는 중국이 보다 자유롭고,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열린 헌정 질서를 세울 수 있도록 비판하고 견인할 의무가 있다.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과오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혁 시기의 극한 경험은 인간 본성에 관한 귀중한 성찰의 기회를 준다. 2006년 봄 나의 은사인 하버드 대학교의 맥파커(Roderick MacFarquhar, 1930-2019) 교수는 학부 교양 수업 “외국 문화: 중국 무산 계급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강의에서 계단식 강의실을 가득 메운 젊은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악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 법과 질서가 무너져 서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 우리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문혁의 광기가 일깨워주는 인간 본성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다.”
이 한마디 속에 우리가 문혁시대의 어두운 역사를 탐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지 않을까 모름지기 역사란 인간 본성에 관한 경험적 탐구이다.
(2) 제1부 대반란의 기원
혁명은 큰 유혹이다. 일시에 한 사회를 뒤바꿀 수 있다면 마다 할 자 누구인가? 오로지 반혁명 세력밖에는 없다. 반혁명 세력만 제거되면 혁명이 완성될 수 있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자코뱅의 공포 정치(1793-1794)를 몰고 왔다.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의 대숙청 (1936-1938)으로 귀결되었다. 중국공산당 혁명은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다. 혁명이 역사의 반동으로 귀결되면,반혁명이 오히려 새로운 혁명의 출발점이 된다.
특정 세력의 집권 그 자체가 혁명일 수는 없다. 집권이 불가역적 사회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질 때에만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한다. 특히 권력자는 자신의 집권 자체를 혁명으로 미화한다. 집권이 곧 혁명으로 인정되는 순간 통치의 전권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정변이 혁명으로 미화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문화대반란이 문화대혁명으로 미화된 이유도 다르지 않다.
(3) 제2부 "천하대란"의 시나리오
혁명은 목숨을 건 도박이다. 성공 확률은 낮지만, 승자는 모든 권력을 독식한다. 도박꾼은 일확천금을 노린다. 혁명가는 정권의 획득을 꿈꾼다. 모든 도박꾼이 혁명가는 아니지만, 모든 혁명가는 도박 근성이 있다. 집권한 혁명가는 권력을 담보로 더 대담한 도박에 뛰어든다. 20세기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테러 정치로 귀결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유토피아의 환상에 사회의 모든 재원과 인력을 걸었다가 전부 잃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도박으로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거듭되는 정책 실패로 정치 밑천을 탕진한 후에도 혁명가는 영구집권을 꿈꾼다. 권력을 놓치는 순간, 스스로 자코뱅의 단두대 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4) 제3부 탈권과 무투
1966년 연말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은 술잔을 손에 들고 이듬해는 “천하대란"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베이징 홍위병의 열기는 곧 상하이 노동자들에게 전이되었다. 순식간에 들불처럼 일어난 노동자들은 상하이 시청을 점령한 이후 시 정부의 권력을 빼앗아서 노동자들만의 자치정부를 세웠다. 최고영도자는 노동자들의 대반란을 보면서 드디어 중국에서도 파리 코뭔이 재현되었다며 흥분했는데 사분오열된 군중조직들 사이의 탈권 경쟁은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탈권이 무투를 낳고, 무투가 학살을 불렀다. 마오쩌둥은 혁명적 좌파군중 영도하의 ‘대연합’을 새로운 문혁의 청사진으로 제시했지만, 탈권과 무투의 광열은 갈수록 심해졌다. 군대가 한쪽 편을 “혁명적 좌파군중”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다 른 편은 반혁명적 우파의 낙인을 피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1967년 1월부터 각지의 인민들은 갈가리 찢겨서 반대 세력을 반혁명 집단이라고 낙인찍고 공격해댔다. 실제적인 내전 상황이었다. 1967년 7월에 이르면, 후베이, 장시, 쓰촨, 윈난, 후난, 허난, 허베이 등 여러 지역에서 무투가 일어났다. 군대의 개입으로 우한의 무투가 진압된 후에도 학살의 광열은 농촌까지 번져갔다. 1968년 여름 광시 지역에서 지역 군대에 의한 대규모 계급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의 광풍이 산시(山西)와 네이멍구 지역까지 몰아쳤다. 마오의 예언 그대로 천하대란이 실현되고 있었다.
(5) 제4부 "대반란을 진압하라! "
인간의 정치사에서 혁명만큼 오용되고 남용된 단어가 또 있을까? 모든 혁명은 급진적 변화를 수반하지만, 모든 정치 급변이 혁명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혁명이라고 불리는 순간,최악의 정치투쟁도 숭고한 운동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이름에 속아서 실체에 눈을 감는 호모로퀜스의 어리석음이다.
신석기 혁명, 산업 혁명, 과학기술 혁명 등은 단기간에 급진적으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고전적 의미의 혁명이었다.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에서 장기 지속되는 대규모의 변동이 발생했다. 반면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10년 동안 중국의 윤리적 기초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경제성장의 동력은 무너졌다. 문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단기간의 대규모 정치 혼란이었다. 중국인이 흔히 말하듯, 한판의 대반란, 대소동, 대동란, 호겁이었다.
공식 명칭은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지만, 그 실상은 혁명 이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 반혁명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희대의 사건을 편의상 문화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엄밀히 그 의미를 따져보면, 이는 반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언어적 착란이다.
https://youtu.be/gcTbKg5YC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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