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 2023. 8. 26 (토) 08:20 - 17:20 (9시간)
2. 걷기 거리 : 35.0 km
- 서해랑길 78코스 17.2 km (총남 서산시 대산면 대산버스터미널 ⇒ 지곡면 환성2리 ⇒ 도성리 도성3리마을회관)
- 서해랑길 77코스 12.2 km (지곡면 도성리 도성3리마을회관 ⇒ 팔봉면 양길리 팔봉초등학교 )
- 서해랑길 76코스 12.2 km (팔봉면 양길리 팔봉초등학교 ⇒ 팔봉면 호리 구도항)
3. 일기
- 날씨 : 맑음 (기온 최저 22도, 최고 29도)
- 천문 : 일출 06:00, 일몰 19:12
4. 서해랑길 걷기 (南進中)
- 지난 주 토요일에 '북한산우이령길' 걷는 모임에 다녀오느라 서해랑길을 가지 못하고 이번 주말에야 다시 서산시 일원을 걷는 길에 나섰다. 오늘 걷는 서해랑길 78코스부터 77, 76코스는 농촌과 갯가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코스로 가로림만의 서산쪽 부분을 걸어가는 길인데, 대산읍 출발점에서 조금 떨어진 지곡면 환성2리에서 버스를 내려 팔봉면 구도항까지 걷는다. 이제 서산부터는 대중교통 간격이 커지고 귀경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관계로 6시 이전에 코스 종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 걷어가는 길이 좀 고달프다.
- 오늘 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과 가로림만의 갯벌을 보며 가는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늦여름 갖가지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는 들녘과 엄청난 생명을 품고 있는 가로림만 갯벌의 힘을 느끼는 길이다.
< 오늘 현재 : (第14次) 29개 코스 및 누적거리 423 km ( 24% ) 완료 >

5. 구간별 풍경
- 센트럴시티터미널(06:05) - 서산버스터미널(07:40) - 서산900번 버스(08:00) - 환성2리 하차 (08:20)
[1] 서해랑길 78코스 17.2 km (총남 서산시 지곡면 환성2리 ⇒ 도성리 도성3리마을회관)
< 행정 구역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환성리 ⇒ 대요리 ⇒ 도성리 >
- 오늘 타고 갈 900번 버스인데 특이하게 좌석버스이다.

- 대산읍 환경사업소~대산지구 해안길 구간이 만조 시에 대산읍 마을길 우회노선으로 가야 하는데, 앞으로도 갯길을 원없이 걸어갈 것이고 제대로 걷다보면 40km에 달하여 귀경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어 대산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코스 초입인 환성2리에서 버스를 내려 서해랑길 78코스를 시작한다.
- 버스 하차 : 29번 고속국도변에 내렸는데 갓길이 없이 걸어간다. 제한속도 70km로 차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길이다.

- 지곡면
지곡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접하여 치리국국이었고, 백제시대에는 지육현, 신라시대에는 부성군에 예속된 지육현으로, 진성여왕 갑인 7년(894)에 고운 최치원이 부성태수가 되어 다스린 곳이다. 1284년 고려 충렬왕 10년 부성군을 서산군으로 개칭 지군사로 승격시켜 행정하였으나 1914년 대한제국 시대에 지곡면으로 격하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안견의 출생지로 그의 예술혼을 후세에 기리기 위한 《안견기념관》과 고운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된 부성사, 충무공 정충신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진충사가 있는 유서가 깊은 고장이다.
- 환성리
환성리는 조선시대에 대산면 문곶리와 대산면 탑동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문곶리와 탑동의 일부가 합쳐져 한동리가 되어 지곡면 소속으로 바뀌면서 자연마을인 고라리에서 환자를 취하고 옛날 문곶리와 지곡면 대요리 사이에 동서로 축성되었던 성곽에서 성자를 따서 지곡면 환성리가 되었다.
- 길 건너 마을로 들어서자 환성2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 서해랑길 78코스길을 만났다.

- 배롱나무가 가로수가 되어 길가에 서 있다.

- 이삭이 팬 벼가 여름 햇볕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 고개를 넘어 가니 소나무 사이로 멋진 농가가 자리잡고 있다.

- 대요리
대요리는 조선시대 지곡면 고수철리와 대조곶리의 두동리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조곶리에서 요동이 분할되어 3개리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3개리가 합치면서 대조곶리의 대, 요동의 요자를 따라 대요리가 되었다.
- 진충사 (대요리)
조선 전기 무신인 정충신 장군(1576~1636)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사당이다. 장군은 임진왜란(1592) 때 17세의 나이로 권율 장군을 도와 싸웠으며, 인조 2년(1624)에는 이 괄의 난을 평정하고 정묘호란 때는 팔도부원사(八道副元師)로 참전하였다. 진충사가 이곳에 건립된 사유는 조선인조 2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안주병사겸 방어사로 있던 정충신 장군이 전부대장으로서 토벌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에서 반군을 전멸시킨 공으로 조정에서 진무공신 1등을 내리고 금난군에 봉하였다. 당시 많은 공신들이 반적의 몰수된 전답과 노비를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정충신 장군만 그런 뜻이 없는 청렴결백 한 것을 보고 당시 장군의 상사였던 옥성보원군 장만이 임금에게 공신 가운데 오직 정충신만이 아무것도 얻은바 없다는 상소를 올려 임금이 당시 서산의 마힐산-(지금의 지곡면 대요리의 국사봉) 일대의 몰수된 이 괄의 토지(당시 약45만평)를 하사하여 장군의 사패지지(賜牌之地)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장군이 생존시에 유택(幽宅)으로 국사봉을 택하였고, 사후에 이곳에 안장하게 되었으며 장군의 유택 부근에 진충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정조 24년(1800)에는 당시 곡성 현감으로 있던 그의 5대 손인 정세환과 9대 손인 정재칠이 각각 정미면 신시리와 현 13세손 정종열 가옥 옆으로 옮겼고 1970년대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이곳에는 중요민속자료 36호로 지정된 유품 5점을 비롯한 그의 유품들을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해마다 양력 4월 25일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우의 본당에는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 휘호로 된 현판이 걸려 있다.


- 밭에 그물담을 치고 흑염소를 키우고 있다.

- 보기 드물게 한우를 키우는 농장이 있다. 과거 김종필씨가 서산에 세웠던 목장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는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다고 한다.

- 논 옆에 갑자기 태양광 시설이 나타났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태양광 농사를 짓고 있다.

- 지난 주와는 달리 그늘이 있는 오솔길도 간간히 지나 간다.

- 그래도 콘크리트 바닥 열기는 있다.

- 가로림만의 갯벌 모습이다.

- 길은 방조제 밑으로 향하나, 궁금하여 둑 위로 올라가 본다.

- 가로림만(加露林灣, Garorim Bay)
태안반도의 남쪽 천수만(淺水灣)의 반대쪽으로 만입(灣入)하며, 남쪽으로는 태안읍, 서쪽으로는 원북면·이원면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서산시 팔봉면·지곡면·대산읍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안선 길이는 161.84㎞, 해역면적 112.57㎢, 입구 폭은 3.2㎞, 남북 폭은 22.4㎞로 입구가 좁고 만의 내부가 넓은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가로림만의 갯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일 뿐 아니라,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나라의 갯벌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자연 상태가 보존된 곳으로 충청남도 지역의 양식과 연안 어업의 중심지이다.

- 도성리
도성리는 조선시대에 지곡면 저주리(猪走里)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저주리는 성동과 도원리로 분할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도원리, 성동의 두마을을 합치면서 도원리의 도, 성동의 성자를 따서 도성리가 되었다.
- 도성리 서해랑길은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도로길을 따라 간다. 버스표지판에 씌여 있는 마을 이름을 읽어 보면서 걸어간다.






- 서해랑길 78코스 시점인 도성3리 마을회관에 도착하였다. 마을회관 앞에 세사람이 서해랑길을 아침 일찍 마치고 먼저 와서 쉬고 있었는데 잠시 후 길을 마무리하고 차를 두 대 가지고 돌아 간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다른데, 어떻게 차를 가지고 서해랑길을 걷는지 궁금했다.

- 오늘 걷는 서해랑길 78코스와 77코스, 76코스는 코스 중간에 식당이나 편의점 하나 없이 걸어 다녀야 한다. 줄곧 이정표에 의지해서 길을 걷는다.

[2] 서해랑길 77코스 12.2 km (지곡면 도성리 도성3리마을회관 ~ 팔봉면 양길리 팔봉초등학교 )
< 행정 구역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 증왕리 ⇒ 팔봉면 흑석리 ⇒ 대황리 양길리>
- 출발점 도성3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기념비에 서기 372년경 이곳 지곡면에서 칠지도가 제조되었다는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 다시 마을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 중왕리
중왕리는 조선시대 지곡면 왕산리와 중촌리 등 두마을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촌리가 중리로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리와 왕산리를 한동리로 만들면서 중리의 중, 왕산리의 왕자를 따서 지곡면 중왕리가 되었다.

- 중왕리 방조제를 지나간다.

- 만조 시에도 걸어갈 수 있게 편리한 데크 길이다. 어촌체험마을 조성하면서 같이 만들어진 듯하다.



- 중리어촌체험마을 시설이다.

- 포구 이름은 왕산포라고 한다.

- 사람이 거의 없으나 배 한 대가 포구로 들어 오고 있다.

- 유일한 낙지식당의 울타리에 하얀색 배롱나무가 피어 있다. 지난 공세리 성당 마당에 이어 두 번째로 본다.

- 마을 입구의 모습이다.

- 고갯길을 한참 올라오니 갑자기 길이 산속으로 꺾여진다. 서산창작예술촌 (2023년부터 폐쇄) 으로 가는 길이다.

- 풀협죽도라는 꽃이다.

- 사람이 다니지 않아 풀이 우거져 길을 막는다.



- 아름다운 것들은 지나간 자리도 예쁘다



- 서산창작예술촌 지나 마을길로 내려간다.


- 예쁜 옥잠화의 모습

- 마을 표지판이 예술적이다.

- 다시 벼가 커가는 들판이다.

- 중왕저수지 입구이다. 이곳을 지나면 팔봉면 흑석리가 시작된다.

- 가로림만 방향의 중왕저수지 모습이다.

- 반대 방향 모습이다. 저수지가 길쭉하게 크다.

- 팔봉면
팔봉면 지명은 조선시대에 없었으며 이 지역에는 서산군 문현면과 영풍창면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노지면의 금곡리 마전리 태안군 동일도면고역리등이 영풍창면에 편입되었다. 또 고파도리가 일부는 문현면소속이고 일부는 태안군 북일면 소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두 합쳐서 태안군 북일면 소속으로 단일화되면서 태안군 소속이 된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영풍창면과 문현면 그리고 태안군 불일면소속으로 바뀌었던 고파도와 태안군 동일도면 고굴리, 역리의 일부씩을 분할 합하여 면내에서 가장 높게 우뚝선 팔봉산(364m)의 이름을 따서 서산군 팔봉면이 되었다.
- 흑석리(黑石里)
흑석리(黑石里)는 조선조때까지는 문현면 흑석리와 잉복리로 되어 있던 것이 구한말인 1895년에는 잉복리는 두마을로 분활 잉복리와 월곡리로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흑석리와 구잉복리일부인 월곡리가 합해져서 팔봉면 흑석리(黑石里)가 되었다. 그런데 잉복리였던 지곡면 연화리 중절마을과 흑석리 반월 마을의 사이고개를 고로(古老)들은 "내봉재"라 한다는 것을 보면 잉복리는 내복리의 오기인가도 생각된다. 흑석리(黑石里)는 원래 흑석리 2구만을 지칭하던 마을 이름으로서 흑석리 2구1반의 들(野) 가운데에 볏섬만큼이나 큰 검은돌이 있었기에 생긴 지명이었는데 언젠가 논밭을 정리하고 넓히는 과정에 없어졌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한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은 대황리 2구 작은말 바닷가에 있는 높이4m, 넒이10m는 되어 보이는 검고 큰 바위가 있는데 이에서 유래되어 ''검은돌(黑石)''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서산의 명물인 생강이 밭에 심어져 있다.

- 마을입구에 소나무의 자태가 범상치 않다.

- 흑석2리 마을회관

- 건너편에 서산 필봉산이 보인다.

- 대황리 (大黃里)
대황리(大黃里)는 조선조때까지는 대동리와 지파동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구한말 1895년에는 대동리, 황곡리로 구분되고 1914년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 개편때에 대동리, 황곡리가 합해지고 방길리 일부를 떼어 붙여져서 대황리가 되었다.
대황리는 북쪽에 서산지방에서는 명산으로 꼽는 해발234m의 연화산을 두고 남서로 펼쳐진 마을이다. 자연마을로 대표적인 지명으로는 황골이 제일 유명하다. 그러나 왜 황골이라 했는지 그 의미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은 고산심곡 지대로서 으름, 머루, 다래덩굴과 함께 온갖 관목류의 나무들이 늘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가을이면 붉게 단풍이 들어 가히 절경을 이루었으므로 이에서 연유 황골(黃谷) 이라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 것이다.
- 대황2리마을회관

- 팔봉산 : 팔봉산은 361.5m의 산으로 금학리에서 기봉하여 금강산 6봉이 되고 여기서 두갈래로 갈라져 그 한줄기는 어송리로 뻗어 팔봉산을 형성하였는데, 산의 형세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9개마을을 품에 안은 듯 정기있게 솟아 있으며, 다른 한줄기는 태안의 백화산(白花山)을 이루었다. 이 산의 명칭은 호산록에 따르면 여덟 개의 산봉우리가 줄지어 있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산의 봉우리는 봉이 9개인데 제일 작은 봉을 제외하고 팔봉산이라 하였다 하는데, 매년 12월말이면 그 작은 봉우리가 자기를 넣지 않았다고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 물이 잘 들어 오지 않는 맨 안쪽 갯벌에 칠면초가 자라나고 있다.

- 새우와 장어를 키우는 곳이라 한다.

- 이 다리 건너면 양길리이다.

- 양길리 (陽吉里)
양길리(陽吉里)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부터 생긴 지명이다. 그 전에 뱅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뱅길이에는 장(場)이 섰었기 때문에 팔봉, 성연, 지곡등 인근에서는 이 장(場)을 많이 이용했던 것이다. 뱅길이장은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지만 장날이면 수십명의 보부상들이 이곳을 찾아들어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구한말인 1895(고종32)년의 행정구역 개편전까지 조선시대에는 문현면 방길이라는 이름으로 75호가 넘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던 것을 이 때에 방길리(方吉里) 우길리(牛吉里) 사양리(斜陽里)로 분할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방길리(方吉里) 우길리(牛吉里) 일부를 합쳐서 사양리(斜陽里)에서 양(陽)자를 따고 뱅길리(方吉里)에서 길(吉)자를 따서 양길리(陽吉里)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 팔봉초등학교

- 학교 안에 차가 많으나 공사하는 사람들의 차인 듯하다. 학생들은 없다. 특이하게 학생들을 실어 나르는 통학버스가 있다.

- 팔봉초등학교 앞이 서해랑길 77코스 시점이다. 학교 앞에 인가가 있으나 사람은 살지 않는 듯하다.

[3] 서해랑길 76코스 12.2 km (팔봉면 양길리 팔봉초등학교 ~ 팔봉면 호리 구도항)
< 행정 구역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양길리 ⇒ 덕송리 ⇒ 호리 >
- 학교 운동장 그늘에서 잠시 쉬다가 길을 나선다.

- 서해랑길 76코스는 마지막 시점 부근의 산을 오르는 길을 빼고는 농로까지 대부분 포장된 길을 걸어 간다.

- 덕송리 (德松里)
덕송리(德松里)는 조선조때까지는 덕동리(德洞里)라는 이름으로 되어 왔었다. 구한말인 1895년의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덕동리, 상송리, 하송리 등 3개리로 나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덕동리, 상송리가 합해져서 덕송리(德松里)로 변한것으로 문헌상 기록이 있다. 이에는 의문사항이 몇가지가 된다. 1895년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송리와 하송리가 덕동리에서 분할되어 생긴마을인지, 송치리에서 분할되어 상송리와 하송리가 나온것인지 현재에는 어느것도 속단할 수가 없다. 상송(上松)은 옛 송치리(松峙里)와도 접속되어 있고 솔송(松)자가 붙은 이름이기 때문에 송치리(松峙里)에서 분할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리가 되는 것이다.
- 여기도 태양광 밭이 있다.

- 마을 높은 곳에서는 갯벌이 보인다.

- 방조제 위로 올라가서 갯벌을 본다.

- 호리 (虎里)
호리(虎里)는 조선조때까지는 호두리(虎頭里)였다. 1895년 구한말엔 내호두리(內虎頭里)와 외호두리(外虎頭里)로 바뀌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이 두동리가 합쳐져 호리(虎里)로 되었다. 이러한 지명은 호랑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호리 1구2반의 지형생김이 흡사 입을 크게 벌린 범머리와 같아서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 호리 마을 가는 입구에 흑염소가 방목되어 있다.

- 아직 작물이 심어져 있지 않은 밭이다.

- 호리 마을 앞 쌍도라고 한다.

- 호리 마을은 범머리 모양의 땅 끝으로 가로림만 풍광을 다 즐길 수 있어 팬션이 많이 조성되어 있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은 지 차들이 많이 오간다.

- 이런 곳에 족구장이 있다.

- 호리 마을 길에 여름꽃이 피어 있다.

- 마을 안으로 조용한 오솔길도 있다.

- 구도항까지 해안선따라 걷는 길도 있지만 서해랑길은 산을 오르내리는 길이다. 아마도 만조 시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 들판이 평온하다.

- 다시 배롱나무 가로수길이다.

- 호리 마을 방조제가 시작되는 곳에 정자가 있다. 선점한 객이 의자를 올려 놓고 환담을 하고 있어 앉아 볼 여유가 없다.

- 덕골방조제라고 한다.

- 방조제 끝에서 이제부터 길은 산으로 향한다.

- 산 속 그늘이 편안하다.


- 갑자기 산길이 끊어졌는데, 길은 건너편으로 다시 올라 간다.

- 숲이 울창하여 바다는 보이지 않는데 표지판은 계속 나온다.




- 고부레 해변에 볼 것들이 있다.

- 호랑이와 떡 파는 소녀를 형상화하였다.



- 다시 산을 넘어가면, 도로 옆으로 난 데크 길로 간다.

- 다시 산길로 간다.


- 드디어 산길이 끝나고 구도항이 나왔다. 가로림만 범머리길 출발점이기도 하다.

- 구도항의 모습이다. 뭔가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 늦은 오후의 구도항 모습인데, 바닷물이 많지 않아 윤슬은 보이지 않는다.


- 서해랑길 76코스 시점 표지판은 구도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6. 서산시 (瑞山市)
(1) 개요

서산시(瑞山市)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북부 태안반도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당진시와 예산군, 서쪽으로 태안군, 남쪽으로 홍성군, 북쪽으로는 황해와 접한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대산 임해공업지역 등 서해안이 개발되면서 충청남도 내포문화권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대산석유화학단지, 서산테크노밸리 등이 조성되고, HD현대오일뱅크, 한화토탈에너지스, 현대트랜시스 등 대기업 본사가 들어서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다.
해안선이 길고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이며, 부석면 일대에는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간월호와 부남호가 조성되었고, 서산바이오웰빙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서산의 농특산물로는 간척지 쌀, 6쪽 마늘, 어리굴젓, 생강 등이 있고, 해산물이 풍부하다. 문화유적으로는 마애여래삼존상, 해미읍성 등이 있다. 시청 소재지는 읍내동이고, 행정구역은 1읍 9면 5동이다.
지질은 대개 결정편암계 지질로 되어 있다. 광주산맥이 일단 침강하였다가 다시 융기하여 생긴 가야산·팔봉산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남북으로 배열된 나뭇가지 모양의 반도로서, 동쪽 가야산맥(주봉 678m)이 예산, 홍성과 경계를 이룸으로써 반도는 거의 완전히 내륙부와 차단되어 있다. 해안은 모식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2) 역사
- 서산시는 선사 시대부터 중요한 곳에 위치해 해미 휴암리, 대산읍 대로리 등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후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청동기 시대에는 마한의 속국 중 하나로 속해 치리국국(致利鞠國)이라 불렸다. 삼국시대에 와서는 백제에 속해 중국과 일본, 동남아와의 해상요충지로 백제가 아시아 여러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때의 해상요충지였다. 특히 행정상으로는 기군(基郡)이였으며 새로운 문화가 제일 먼저 형성돼 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 등 불교문화를 이끌었다.
- 신라 때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인종 21년(1143)에는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충렬왕 10년(1284) 서산군으로 승격, 지군사(知郡事)를 두었고 이어 충렬왕 34년(1308) 서주목(瑞州牧)로 승격하였다. 충선왕 2년(1310) 서령부(瑞寧部)로, 후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격하했고, 조선 태종 13년(1413) 서산군으로 되었으며 홍주목에 속해 있었다.
- 주요 행정관할 변천사
. 1914년 4월 1일 서산군, 태안군, 해미군을 서산군으로 통폐합하였다.
. 1942년 10월 1일 서산면을 서산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9면)
. 1989년 1월 1일 서산읍 일원을 관할로 서산시를, 태안읍·안면읍·고남면·남면·근흥면·소원면·원북면·이원면 일원을 관할로 태안군을 각각 분리, 설치하였다. (10면)
. 1991년 12월 1일 대산면을 대산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9면)
. 1995년 1월 1일 서산시 일원과 서산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서산시를 설치하였다.
(3) 산업
- 전통적으로는 잘 발달한 갯벌을 활용한 간척지 논농사와 수산자원 채집이 주요 산업이다. (염전업은 독곶리에 2010년을 마지막으로 모두 철수했다.) 애초에 옛날부터 자연적으로 생성된 농경지보다 간척으로 만들어진 농경지가 많아서 주요 자연 하천에서 먼 관계로 자주 가뭄 피해를 겪고 있다. 그러나 염분이 높아 원래 활용하기 힘들었던 간척을 통해 확보한 담수호의 물의 활용을 넓히는 방안을 고안하고, 가뭄이 심각해지자 부랴부랴 시작하는 지류사업으로 인해 앞으로는 피해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에 보령댐의 수위가 지속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절수 권고 이후 절수가 지켜지지 않자 제한 급수를 실시했다. 현재는 금강에서 보령호까지 지하 파이프가 완공되어 제한급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주 특산물은 육쪽마늘, 논마늘, 밤마늘과 생강, 어리굴젓 등이 있다. 또한 간척지 조성 사업으로 쌀 생산량이 연당 10만 톤에 육박해 전국에서 세 번째, 충남에서는 당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 석유화학공업과 자동차 관련 제조업이 대성해 있는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연결로 인해 옆 동네인 당진시와 함께 관련 산업시설의 집적화가 이루어지며 크게 발전하였다. 대산 쪽은 석유화학산업, 현대오일뱅크, 한화토탈, KCC, 롯데케미칼, LG화학, 코오롱인더스트리 등 굵직한 석유화학 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 성연, 지곡, 부석에는 자동차 관련 산업들이 입지해 있는데,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현대트랜시스, 동희오토, 현대위아, 현대파텍스, 현대모비스 주행시험장과 전기자동차 배터리 생산 공장이 있는 SK온과 같은 굵직한 자동차 관련 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 충청남도 통계 정보관이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1인당 지역내총생산이 9,997만 원, 그러니 거의 1억 원으로 충청남도 내에서 1위였다고 한다. 2위인 아산시는 9,402만 원으로 그렇게 큰 격차는 안 났으나 3위인 당진시부터는 6,744만 원으로 매우 큰 격차를 보여줬다.

(4) 특기 사항
- 서산시의 상징물 :
. 가창오리와 장다리물떼새 : 아름다운 군무를 만들어 내는 가창오리는 ‘서산시민의 화합과 단결’을 상징하며, 장다리물떼새와 함께 ‘청정·친환경 서산’을 상징한다. 또한 겨울철과 여름철에 번갈아 서산을 찾는 대표 적인 철새로 ‘동북아 물류중심도시’를 지향하는 서산시의 미래상을 담고 있다.
. 소나무 : 소나무는 건조하고 지력이 낮은 곳에서 견디는 힘이 강하고 추위에도 강하여 변함없이 씩씩한 시민의 기상을 나타낸다.
. 국화 : 국화는 동양에서 재배하는 관상식물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꽃으로 사군자의 하나로 귀히 여겨왔다. 서산 시민의 인정 어린 순수함을 상징한다.
- 관광명소 = '서산9경'
. 제1경: 해미읍성
. 제2경: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제3경: 천수만 간월암
. 제4경: 개심사
. 제5경: 팔봉산
. 제6경: 가야산
. 제7경: 황금산
. 제8경: 서산 한우목장
. 제9경: 삼길포
- 특산품 = '서산 9품'
. 1품 : 6쪽마늘
. 2품 : 생강
. 3품 : 뜸부기쌀
. 4품 : 서산갯벌낙지
. 5품 : 서산 6년 근 인삼
. 6품 : 달래
. 7품 : 황토알타리 무
. 8품 : 팔봉산 감자
. 9품 : 감태
- 음식 = '서산 9미'
. 1미 : 꽃게장
. 2미 : 서산어리굴젓
. 3미 : 게국지
. 4미 : 밀국낙지탕
. 5미 : 서산우리한우
. 6미 : 우럭젓국
. 7미 : 생강한과
. 8미 : 마늘각시
. 9미 : 영양굴밥
7. 가로림만 (加露林灣, 영어: Garorim Bay)
◇ 개요

태안반도의 남쪽 천수만(淺水灣)의 반대쪽으로 만입(灣入)하며, 남쪽으로는 태안읍, 서쪽으로는 원북면·이원면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서산시 팔봉면·지곡면·대산읍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안선 길이는 161.84㎞, 해역면적 112.57㎢, 입구 폭은 3.2㎞, 남북 폭은 22.4㎞로 입구가 좁고 만의 내부가 넓은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가로림만의 갯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일 뿐 아니라,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나라의 갯벌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자연 상태가 보존된 곳으로 충청남도 지역의 양식과 연안 어업의 중심지이다.
가로림만의 해안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형태로 자연해안선과 인공해안선이 절반씩 섞여 있다. 대부분 간석지와 암석 해안으로 구성돼 있는데, 모래 해안도 조성이 돼 있지만 드문 편이다. 육지부는 완만한 구릉지 형태를 띠고 있다. 해안과 접하는 일부 지역에는 침식 지형이 분포하고 있기도 하다. 만 지역은 대개 간석지로 매립해 농경지나 염전 등으로 사용된다.
드넓은 갯벌은 가로림만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81.9㎢에 달하는 갯벌은 서산 연안에 59.5㎢, 태안 연안에 22.4㎢로 각각 나뉘어 있다. 해안선이 복잡할 뿐 아니라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얕아 갯벌이 잘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가로림만의 갯벌은 특히 만으로 유입되는 하천이 거의 없는 만큼 대부분이 조류에 의해 생성됐다. 때문에 점토를 비롯한 다양한 세립물질이 풍부하다. 가로림만은 사질갯벌, 혼성갯벌, 점토질갯벌, 역질갯벌 등 다양한 종류의 갯벌이 혼재해 있지만, 점토·모래·자갈이 섞인 혼성갯벌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점토질 갯벌도 넓게 분포하고 있어 다양한 생물들이 군락을 이룬다. 덕분에 2005년 정부로부터 `생태계가 잘 보존된 갯벌`, 2007년 환경가치 평가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 가로림만 이름의 유래
가로림만의 지명 유래는 순우리말의 어원인 갈벌(넓은 벌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는데 출처가 명확하지는 않다. 한자말을 거꾸로 풀이하여 이슬이 더해져 숲이되니 경지가 아름다운 바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 자연환경 분석
가로림만의 육지부는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300m 이내의 저산성 지형이 곳곳에 발달하여 완사면과 구릉지가 많고, 큰 하천이나 퇴적평야의 발달은 적다. 유역면적이 좁아 큰 하천은 발달하지 못하였고, 태안군의 반계천, 갈두천, 삭선천, 서산시의 방길천, 황곡천 등 작은 지류를 통해 하천수가 유입되고 있는데 유량이 적고 하천으로부터 유입되는 토사유입의 양도 미비한 실정이다.
갯벌의 면적은 81.9㎢으로 서산 연안이 전체 갯벌의 72.6%인 59.5㎢가 분포하고, 태안 연안에는 나머지 27.4%인 22.4㎢가 분포한다. 이 중 가장 넓은 면적의 갯벌이 분포하는 곳은 서산시 지곡면으로, 전체 갯벌의 27.8%인 22.8㎢가 분포한다.
퇴적환경은 만 입구와 수로 주변에는 굵은 입자와 퇴적물이, 만입된 지역에는 세립질 퇴적물이 많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퇴적상이 조석현상을 통해 외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니질퇴적물은 봄·여름철에는 퇴적되고 가을·겨울철에는 침식된다.
연안 육지 지역의 경사도 분석을 한 결과, 경사도 5% 이하인 면적이 48%, 25% 이상인 면적이 35%를 나타내었다. 즉, 완만한 지형과 급경사 지형이 골고루 분포한다. 연안 육지 지역의 표고분석 결과, 전체 육역면적의 97%가 표고 50m 미만으로 나타나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보인다. 대산읍과 원북면에는 표고 150∼200m 사이의 산지가 분포하고 있고, 지곡면으로는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다.
가로림만 해역의 용존산소량은 1999∼2004년 동안 2000년을 제외하고 해역수질기준Ⅰ등급수준을 나타내었으나, 화학적산소요구량은 5년간 평균수질Ⅱ등급으로 2000년에만 해역수질기준 Ⅰ등급을 보이다가 점차적으로 Ⅱ등급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2004년 기준 총인, 총질소는 모두 Ⅱ등급으로 나타났다. 대규모 하천이 발달하지 못한 가로림만에서는 연안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 유입, 특히 생활하수, 소규모 저수지와 양식장 등의 오염물질이 만의 오염에 많은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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