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지리 태극종주 코스 개척 “남 아닌 나를 이기는 산행돼야”

 

 

< 조선일보 월간<山>, 서현우 기자, 2023.07.04  >

 


장거리 산악회 J3클럽 운영 배병만씨 (대구人) 


힘든 걸 기피하는 세태라지만 집요하게 산을 오르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산행 방식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 편집자 주


태극종주는 산에 다니다보면 한 번쯤 들어보고, 또 꿈꾸게 되는 길이다. 태극종주란 종주코스가 지도상에서 S자 형태로 이어져 마치 태극문양인 것 같은 길들을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지리태극, 설악태극이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 영남알프스 등지에 태극종주가 있다. 대부분 능선을 따르고, 50~100km 정도의 장거리라 산행 난이도는 매우 높다.

이 태극종주를 처음 개척한 사람이 바로 배병만씨다. 장거리종주산악회 J3클럽을 운영하는 배씨는 두 발로 직접 산줄기를 이으며 국내 장거리 산행문화를 선도한 인물로 꼽힌다. 수십 시간 동안 몇 십, 몇 백km를 걸어야만 넘을 수 있는 코스들을 만들면서 처음에는 “미친 짓”이란 얘기도 자주 들었다. 그러나 20년 남짓 흐르는 동안 하나, 둘 장거리 코스가 더 생기고 이를 걷는 이들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완전히 정착됐다. 

“개척한 코스가 꾸준히 사랑받는 걸 보면 많이 뿌듯하시겠어요.”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진짜 속마음을 말하자면 조금 씁쓸합니다.”

“아니 왜요?”

“종주길이 지금은 체력단련장이 돼버렸거든요.”

그는 왜 종주길이 ‘체력단련장이 됐다’고 하는 걸까?

 


배씨는 기본 20kg이 넘는 배낭을 멘다. 또 한 번에 수백km를 걷기 일쑤다.

 


배병만씨는 196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묻자 ‘평범하고 착한’ 학생이었다며 호쾌하게 웃어 넘겼다. 군대를 제대한 뒤 23세에 대구로 진출했고, 이윽고 상경해 서울에서 경호원 생활을 했다. 결혼 후 대구로 내려와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가 지금은 다른 직종으로 옮겨 일하고 있다.

 


해외트레일 대신 한국 산

“등산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25세에 처음 친구로부터 산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서울 근처 암자에 주지스님으로 있는 친구인데 당시에는 등산가이드를 했어요. 그 친구를 따라 처음 오른 산이 지리산이었죠.”

심신이 단단해야 하는 직업을 주로 했었기에 산은 정말 좋은 취미였다. 처음 산에 입문한 이후 친구들과 함께 계속해서 산에 몰입했다. 그러던 와중 인터넷이 차츰 보급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산하’라는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며 등산세계가 확 넓어졌다. 홈페이지에서 많은 산을 접할수록, 오히려 그는 더 넓고, 광활한 산에 대한 목마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만든 것이 J3클럽이다. J3는 지리산 3대 종주(화대, 주능선 왕복, 태극)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루에 가려면 한숨도 자지 않고 꼬박 밤새워 걸어야 하는 길들을 이름으로 삼았으니 사람들은 J3클럽이 어떤 산행을 지향하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눈을 빛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차츰 모여 지금은 회원 수가 1만 명이 넘는다. 

탄탄한 하체 근육을 가졌지만 그는 “평소에 따로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산행주기가 짧다. 몸이 늘어지기 전에 다시 산으로 든다. 

“J3클럽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장거리 개척을 시작했어요. 당시에 외국 산이 좋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도 길게 걷기 좋은 코스가 많으니 함께 걸어보자는 게 만들게 된 계기죠.

“그런 장거리 극한산행이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그땐 막 IMF가 지나고 모두들 사는 게 참 힘들 때였어요. 그러니 이런 산행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기원했죠. 호연지기도 키우고,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느낄 수 있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체력단련장으로 여기고 있어요.”

“결국 걷는다는 행위 자체는 똑같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의미는 다르죠.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하는데 자꾸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겁니다. 걷는 과정에서 산을 알아가고,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데 육체적으로 산을 정복하는 개념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물론 그런 산행 방식을 질타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개척자로서 아쉽다는 거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를 아이스로 먹는 걸 보면 혀를 찬다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감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어려울수록, 더 어려워야

그는 그렇다고 해서 장거리 산행의 근본적인 매력이 성취욕이란 점을 부정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 성취감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장거리 산악회와는 다른 차이점을 만들었다. 바로 ‘무지원’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J3클럽의 종주 대원칙이다. 중간 중간 보급지점에서 다른 회원들에게 물이나 식량, 장비를 지원받으며 걷는 것이 아니라 처음 시작점에 설 때부터 끝까지 갈 식량과 장비를 스스로 짊어지고 걷는다.

“그래서 제 배낭 무게는 보통 20kg을 넘어요. 다만 이 원칙은 100km 이하 코스에서는 잘 안 지킵니다. 오히려 지원을 장려해요.”

“잠깐만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오히려 거리가 길수록 더 지원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깐 어려울수록, 더 어렵게 이겨내야 더 값진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100km 이하는 극한의 도전이라기보다는 친목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는 이를 “숯과 도자기의 차이”라고 표현했다. 숯은 굽다가 실패하면 재만 남지만, 도자기는 굽다가 중간에 실패하더라도 그 흔적이 남는다. 그러니깐 지원을 받고도 실패하면 남는 게 없고, 무지원으로 도전해 최선을 다했으면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그 흔적이 분명 남는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킨다.

“힘들 땐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힘든 적은 없어요. 저는 그냥 ‘가다보면 끝이 난다’ 이 생각만 합니다. 탈출하고 싶었던 적도 없어요. 3일 동안 걸어야 되는 길이면 ‘3일 걷자’ 하는 겁니다. 육체적으로 힘들 때면 길 끝을 떠올려요. 보통 이렇게 장거리를 가면 길 끝에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회원들이나 가족들이오. 그걸 떠올리면 참고 끝까지 가게 됩니다. 사람이 끌어내는 힘이죠.”

 


개척에 인문을 더하다

그는 정말 무수하게 많은 코스를 개척했다. 땅끝 종주, 마창진 종주, 거제 남북 종주 등 지역을 꿰뚫는 코스부터 각 국립공원별 환종주, 혹은 국립공원‘들’을 엮은 종주길을 만들기도 했다. 

“개척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건 3가지입니다. 교통편이 괜찮은가, 또 산길은 안전한가, 그리고 중간 탈출로가 충분한가. 이것들이 보장되지 않은 채 무턱대고 만들면 분명 사고가 나요. 익스트림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안전이 최우선이죠. 그래서 제가 만든 코스에선 큰 사고가 난 경우가 없어요.”

초기에는 상징적인 명산들과 주능선들을 중심으로 코스를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다소 그 성격이 달라졌다. 하천이나 역사를 따르는 길들이 주를 이룬다. 비법정탐방로에 대한 단속과 인식이 그가 처음 길을 개척할 때와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산 공부를 다시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반영했다”고 했다.

“2016년에 모 단체에서 산에 대해 강의해 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중학생인 아들을 앉혀놓고 시범 강의를 해봤죠. 한 5분 지났을까요. 아들이 지겨워서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우리가 산에 대해 뭘 알아’ 라면서요. 아차 싶더라고요. 바로 단체에 전화해서 제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강의가 힘들겠다고 무기한 연기 요청을 했어요. 산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시작한 게 강 따라 걷기다. 산을 안이 아니라 밖에서 보기 위한 결단이었다. 낙동강과 한강, 영산강 금강 등 100km가 넘는 하천 17개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코리아둘레길이 만들어지기 전, 해안선과 DMZ 탐사도 마쳤고, 이름 있는 하천 168개를 모두 걸었다. 물이 있는 곳에 으레 문명이 발상하다 보니 이 과정에서 1개 특별시, 2개 특별자치시, 6대광역시, 75개 시, 82개 군, 69개 구를 모두 주파했다. 그리고 다시 대간에 들어섰다.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22일에 걸쳐 한 번에 종주했다. 그중 17일이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저녁에 내려와 산 밑 모텔에서 드라이기로 신발과 양말을 말리고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어나서 대간을 타는 나날이었다. 또 다음엔 백두대간의 둘레를 둘러봤다. 2,000km를 세 구간으로 나눠 대간에 수없이 많은 골들을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수경과 산경을 같이 보니 산만 다닐 때는 배우지 못했던 걸 알 수 있게 됐다”며 “다시 말해 산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산을 똑바로 본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산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문’입니다. 단순히 자연적, 지리적, 지형학적, 미학적인 ‘형태’에 매몰되지 않고 그 산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걸어가며 봐야 합니다.”

 


재미있는 산행에서 의미 있는 산행으로

자연지리적 등산에서 인문지리적 등산으로 노선을 바꾼 그가 만든 길들은 이런 것이 있다. 5대, 8대 적멸보궁을 잇는 부처님 진신사리길 760km, 송광사와 해인사, 통도사를 잇는 삼보종찰길 340km, 가장 최근에는 팔만대장경이 옮겨진 길을 추적해 걷는 이운길 520km 등이다.

물론 이 길들은 대부분 우리가 산행에서 얻길 바라는 장쾌한 조망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재미가 없다.

“역사와 인문을 중시하는 분들도 있지만 상당수 분들이 풍경이 아름답고 예쁜 산과 길을 더 선호하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그 길을 만들어 걸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산지체계 인식의 기본은 산경표입니다. (산경표는 한반도 지형을 산줄기와 하천 줄기를 중심으로 파악한 책이다.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경표를 비롯해 조상들이 대동여지도, 동국지도 등을 만든 목적은 등산이 아닙니다. 산과 하천의 모양과 줄기가 인문과 역사를 형성하니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만든 거죠. 그러니 인문을 빼고 산을 얘기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산을 판단하는 가치척도가 ‘예쁜지’가 대부분이죠. 얼마나 ‘의미’있는지는 뒷전이고요.”

그는 트레일러닝을 하지 않는단다. 뛰는 데 집중하다보면 반드시 놓치고, 걸어야만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저히 단독행을 지향한다. 그는 “누군가와 같이 가면 떠들다가 정작 봐야 할 것, 생각해야 할 것들을 다 놓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거리 산행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늘 단독행을 해보라고 권하고 있어요.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완주했을 때 성취감은 두 배가 되죠. 포기해도 괜찮아요. 그저 자기가 배낭에 넣은 만큼 가보는 거죠. 이겨내고 날머리에 우뚝 섰을 때 자기 자신이 오롯이 보일 겁니다.

 


생리대가 등산 장비?

“넣은 만큼 간다고 하시니 배낭에 어떤 걸 넣고 다니시는 지 궁금한데요.”

평범합니다. 물은 기본적으로 500ml 생수통 6개 정도 챙깁니다. 그리고 산행하면서 샘터에서 보충하죠. 추가로 보조배터리 5개, 헤드랜턴, 건전지, 돗자리, 침낭, 갈아입을 옷, 여유 신발 정도죠. 식사는 빵과 마른반찬, 그리고 미리 전자레인지에 돌려놓은 햇반으로 합니다.”

그중에서 특이한 것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파이어스틱. 그는 “저체온증이나 유사시를 대비해 늘 지니고 다닌다”며 “일반인이 파이어스틱을 사용해 본 적 없으면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훼손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선택”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생리대다. 

“생리대를 왜 사용하시는 건가요?”

“400~500km 이상 코스를 한 번에 걸을 때 주로 챙겨요. 다른 용도가 아니라 물집 때문입니다. 워낙 장거리에 배낭 무게도 무겁다 보니 늘 물집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발바닥 하중이 엄청나거든요. 그러니 온갖 방법을 다 써요. 깔창을 빼고도 걸어보고, 양말을 안 신고도 걸어보고, 두 켤레 신고도 걸어보고 하는데 저는 깔창 빼고, 양말 벗고, 생리대를 넣고 걸을 때 효과를 좀 보는 편이에요. 물집이 생길 조짐이 있는데 무시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중엔 방법이 없어져요.”

 


고생을 즐긴다? 고생을 이기는 걸 즐긴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걸으면 주변에서 ‘왜 고생을 사서 하나’란 소리는 안 들으시나요.”

“하하. 안 그래도 형수님이 한 번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안 해보면 모른다’고만 했죠.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산꾼이라면 기본적으로 고생에 대한 갈증이 있죠. 특히 백두대간을 한 사람들은 그 길에서 정말 온갖 고생을 다 겪었는데도 일시종주기가 올라오면 눈을 초롱초롱 뜨는 법입니다. 물론 고생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 고생을 이겨내는 순간 몸과 가슴에 무언가가 한가득 차오르는 그 경험을 좇는 거죠.”

“백두대간이라고 하면 또 비법정탐방로 때문에 곤혹스럽지 않습니까.”

“예민한 문제를 짚으시네요. 사실 제가 초기에 만든 코스들도 일부 비법정탐방로 구간이 있습니다. 이젠 그래서 그 부분을 건너뛰거나 안 가는 추세인데 아무래도 백두대간은 얘기가 다르죠.”

“어떻게 다른가요?”

“그 의미가 너무 남다르고 우회하는 방법도 너무 작위적이잖아요. 답이 없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비법정구간인 설악산 황철봉에 국립공원공단이 설치한 야광 띠지를 보면 어느 정도 정답이 있다고 봐요. 이게 어떤 뜻이냐면 ‘혹 여길 지나간다면 조난당하지 말라’는, 즉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거든요. 안 가는 것이 좋지만, 간다면 조용하게 안전히 가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공단 직원들을 악마화하는 건 나쁘다고 봅니다. 이분들도 산꾼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거든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좀 돌아봐야죠. 그런 비법정탐방로로 들어가서 라면 끓이고, 고기 굽고, 쓰레기 버리면서 산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그의 산 얘기는 끝이 없었다. 돌고 돌던 이야기는 어느덧 다음에 개척하려는 코스와 자신의 뒤를 이어 국토에 의미 있는 족적을 이으려는 사람들에게까지 닿았다. 문득 그는 왜 이렇게 개척에 열을 올릴까 궁금해졌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처럼 길 끝에 일확천금이 감춰져 있지도 않다. 또 공명심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힘을 자랑하기 위해 억지로 산길을 새로 뚫고 어려운 길을 만들었을 텐데 그는 단지 묵은 산길을 재정비하고 거기에 감춰져 있던 의미를 드러낼 따름이다.

제 뒤를 걷는 사람들이 있으니 좋은 길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게 가장 큰 동기입니다. 제가 선답자로서 틀린 길을 갈 수도 있어요. 그럼 그걸 바탕으로 다른 분들이 맞는 길을 내겠죠. 그 길들이 계속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 길 위와 끝에서 저마다 어떤 의미를 찾아낼 테지요.” 

14좌 완등한 한국인 없다”…“왜 이제 와서 성과 폄하”

 

< 마운틴뉴스, 서현우기자, 2023.06.07  >


[끊이지 않는 14좌 완등 논란]
한국등산연구소 세미나서 문제 제기… 산악계 ‘발칵’
 

“…이에 따르면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한국인은 0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로 넓혀도 에드먼드 비에스터스Edmund Viesturs, 베이카 구스타프손Veikka Gustafsson, 니르말 푸르자Nirmal Purja 3명만이 14좌의 정확한 정상을 밟았습니다(세미나 이후 중국 동홍쥐안이 시샤팡마를 등정하며 8000ers.com의 기준에 따른 14좌 완등자는 총 4명이 됐다 _  편집자 주).”

지난 4월 25일 한국등산연구소가 서울시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개최한 ‘8,000m 14좌, 그 정상은 어디인가’ 세미나에서 나온 발표자의 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은 웅성거렸다. 이어진 자유토론 시간엔 객석에서 “어렵게 일궈낸 한국 등반 성과를 일방적으로 폄훼한 연구인데 왜 대응하지 않느냐”는 격앙된 목소리도 나왔다.

1962년부터 시작된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에 걸쳐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거나,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은 총 8명이다. 이 중 일부 사례를 제외하곤 정상 등정 자료와 사진이 뚜렷하다고 여겨져 그간 등정 시비가 일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주장이 제기된 걸까?


논의 안 하면 ‘집단적 방관’

사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등반가들 중 상당수가 실제 정상은 다녀오지 못했다는 주장은 이미 2년 전부터 국제 산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에버하르트 주르갈스키Eberhard Jurgalski를 주축으로 하는 산악기록단체 8000ers.com은 2021년 가을 마나슬루 등정 자료를 분석해 그간 대부분의 등정이 실제 정상에 못미치는 전위봉에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또한 범위를 히말라야 14좌 전체 정상으로 넓혀 검토한 결과 단 4명의 등반가만이 14좌의 정확한 정상을 밟았고, 나머지 등반가는 정상이 아닌 곳까지만 올랐다고 밝혔다.

이번 세미나는 한국 산악계의 첫 공식 반응이다. 남선우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은 개회사를 통해 “누군가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논의조차 안 하면 ‘집단적 방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다만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등반가들도 정상이 아닌 곳을 정상으로 여겼단 점에서 이는 착각이나 앞선 등정자들의 자료가 만든 오류가 주 원인으로 보인다. 따라서 등정, 미등정을 새롭게 가리는 것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논의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대한산악연맹 손중호 회장,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명예교장, 서울시산악연맹 석채언 회장, 한국산서회 최중기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곽정혜 연구원은 8000ers.com의 주장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오영훈 연구원은 뜨거웠던 한국의 히말라야 14좌 신드롬의 원인과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했다. 이후 박정헌 대장, 오은선 대장의 칸첸중가 등정 논란을 공론화했던 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박준우 감독, 서현우 월간<山> 기자 등이 참여한 토론이 있었다.

 


너무 완만한 정상 능선

먼저 8000ers.com의 주장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곽정혜 연구원은 “정상의 모양이 삼각형으로 명확한 봉우리들은 대부분의 등반가들이 정확한 정상 지점을 다녀왔지만, 정상부가 평평하고 완만한 경우 그 능선부에서 가장 높은, 다시 말해 정확한 정상을 다녀오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GPS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기 이전에 이곳을 오른 등반가들은 정확한 정상의 위치를 앞서 오른 등반가들의 자료나 셰르파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비롯된 오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봉우리는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다. 한국 등반가들 대부분이 이 세 봉우리 중 2~3곳의 진짜 정상을 오르지 못한 것으로 파악돼 완등자가 0명이 됐다.

먼저 마나슬루의 경우 진짜 정상은 수평으로 20m, 고도 상으로 3~6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한다. 문제는 노멀 루트를 통해 오를 경우 그간 정상으로 오인한 전위봉이 정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네팔 룽다(장대 깃발)도 걸려 있어 더욱 오해하기 쉽다. 진짜 정상은 이곳에서 4~6m 내외의 안부를 지나야 갈 수 있다. 해당 안부는 몬순 이전에는 바위 리지며, 몬순 이후에는 완전히 눈으로 덮인다. 단 1956년 5월 일본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은 진짜 정상에서 이뤄졌다.

다울라기리도 정상 능선이 동서로 길며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정상을 한눈에 구별하기 어렵다. 다울라기리는 기존엔 동릉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덜한 서릉으로 우회하는 경향이 늘었다. 문제는 동릉으로 갈 때면 철로 된 막대가 꽂혀 있는 ‘메탈 폴’이라고 불리는 곳, 서릉은 서릉 전위봉을 각각 정상으로 오인하고 등반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정상에서 60m, 140m 떨어진 지점들이다. 연구진은 “서릉을 따라 동쪽을 향해 진행하면 정상을 빼먹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안나푸르나 또한 마찬가지다. 정상부 능선이 다울라기리보다 더 평평하며, 그 길이가 300m 정도 된다. 매우 평평한데다 적설 상황에 따라 지형이 바뀌기 일쑤다 보니 실제 정상에 못미친 곳을 정상으로 오인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라인홀트 메스너다. 그는 정상에서 수평으로 65m, 고도 5m 낮은 곳을 정상이라 여겼다. 연구진은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면 정상 능선을 완전히 종주해 횡단하라”고 조언했다.

한편 이외에도 연구진은 칸첸중가 정상을 연구해 오은선 대장의 정상 등정 사진이 찍힌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기도 했다. 원래 8000ers.com 연구진은 2021년 대만 산악인 그레이스 쳉의 칸첸중가 미등정 의혹을 분석하기 위해 칸첸중가 정상부 지대를 세밀하게 분석했는데,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오은선 대장의 정상 인증 사진을 보면 사진 왼쪽 하단 바위가 어퍼 블록upper block이라 불리는 바위로 보인다. 이 바위는 정상으로부터 고도상 약 100m 아래에 있다. 이에 연구진은 오 대장의 등정 인증 사진을 찍은 위치가 정상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등정 인정 구역’ 설정 안 해

메스너는 자신이 안나푸르나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 연구진에 대해 “그 긴 능선 위에서 (정상에) 겨우 5m 못미친 곳에 갔다고, 누군가 내가 한 등반이 바보 같은 짓Bullshit이었다고 한다면 마음대로 생각하라Think what you want”며 날선 반응을 보인 바 있다. 특별하게 더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있지 않은 정상 능선에서 딱 정확한 ‘정점’을 밟지 못했다고 하여 미등정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연구진도 초기에 ‘등정 인정 구역Tolerance Zone, TZ’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한 바 있다. 즉 ‘여기까지 올랐으면 정상에 오른 것으로 인정’해 주는 구역을 정하자는 것이다. 가령 상당수의 등반가가 정상으로 오인했던 다울라기리 메탈 폴, 서릉 전위봉에서 등반을 마쳤어도 정상 등정으로 인정하자는 개념이다.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제안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은 최종적으로 등정 인정 구역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실제 지리적 경계를 설정할 때 모든 등반가가 납득하기 어렵다. 두 번째, 무엇보다 실제 정상에 도달한 등반가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을 등정 인정 구역 내에만 진출하고, 실제 정상은 가지 않은 등반가들과 동일시하는 건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등로주의는 등정주의보다 우월하지 않다”

이처럼 곽정혜 연구원은 8000ers.com의 연구 결과를 객관적으로 전달한 데 이어 오영훈 연구원은 한국 히말라야 14좌 완등 시대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오 연구원은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다고 알려진 이는 총 53명이며 국적 순으로 보면 대한민국, 이탈리아(8명), 스페인(7명), 네팔(6명), 폴란드(3명) 등”이라며 “앞선 나라들은 일상적으로 알파인 등반이 행해지는 데 반해 대한민국은 만년설이 있는 산도 없고, 알파인/고산 등반을 하는 등반가도 극소수인 것을 고려하면 매우 미스터리한 결과”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산악계 내의 의미부여, 대중매체의 대국민 포장, 기업체 후원이라는 3요소가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등반가 자신은 물론, 비평가들은 등반을 영웅 서사로 재구성하고, 히말라야 고봉을 신화화했습니다. 산악전문지와 대중매체는 개인 대 개인, 국가 대 국가의 경쟁 구도로 내몰았고,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장에 뛰어든 기업들은 영웅 탄생에 조력하며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꾀했습니다.”

또한 오 연구원은 히말라야 14좌 프로젝트가 한국에서 가졌던 의미를 국가와 민족의 승리 서사, 진보와 우열의 서사, 체험 우선주의의 서사, 인간관계의 서사 네 가지의 집합으로 봤다. 즉 등반가들의 성취가 국가주의적 승리로 표상됐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이 다른 등반에 비해 ‘우월한’ 최고의 등반으로 여겨졌으며, 극한의 환경에서 이뤄진 등반 과정은 체험주의적으로 해석돼 직접 이를 체험해 본 적이 없으면 말할 자격조차 없어지는 신성한 영웅의 영역이 됐고, 그러면서도 함께 등반한 선후배나 타인을 위해, 혹은 그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서사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곡해된 것이 아니라 등반가 집단의 진심과 실제 의도가 녹아 있는 서사들이다.

끝으로 오 연구원은 “이번 8000ers.com의 연구가 한국 산악계의 유산에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대한민국 산악계의 불행이라면 그들의 진심과 의도가 경쟁 구도와 기업 논리에 가려, 그렇게 전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음에도 산악계 밖의 많은 이들에게 등반의 즐거움, 자연 체험의 소중함을 공유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일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월주의, 진보주의, 체험우선주의에 얽매여 정상 수집 등반의 독자성, 나아가 등반 개개의 가치를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이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며 “흔히 한국 산악계가 등로주의를 등정주의보다 우월하고 발전된 개념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는 서로 별개의 가치를 지닌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재탄생한 ‘여성 최초 14좌 완등자’ 

이어진 토론에선 박준우 감독은 “상업적 등반과 비상업적 등반을 구분하되 서로 다른 영역으로 보고 서로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헌 대장은 “과거에는 정확한 정상을 판별하기 어려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면서 “등정주의 시대는 저물었고, 등로주의 시대가 왔기에 이번 연구로 인해 등정 기록이 취소된 이들이 큰 반응을 내놓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본 기자는 “그간 정상의 모호성이 곧 모험성을 만들어냈는데 이번 연구는 완전히 히말라야 14좌를 하나의 스포츠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며 후원 유치 양상도 변할 것”이라며 “단기적으로는 최초의 기록이 초기화된 상태라 새로운 물결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미 셰르파나 다른 나라 등반가들은 자신의 실익에 따라 이번 연구 결과를 해석하고 있는데 한국 산악계도 실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편 토론에선 구체적으로 의견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애초에 이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등정 인정 구역TZ’을 설정하고 등정 기록을 해석할 것인지, 또 이 구역을 설정한다면 향후 등반은 어떻게 볼 건지, 반대로 연구진의 주장대로 등정 인정 구역을 두지 않는다면 기존 등정자들의 유산은 구시대의 것이 되는 건지, 또 근본적으로 산을 ‘등정’한다는 개념이 꼭 ‘정확한 꼭지점’을 밟아야만 하는 것인지 등 이번 연구에 대한 한국 산악계의 입장을 정리하려면 논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다만 세계적으로 이번 연구 결과를 적용해 14좌 완등 레이스를 펼치는 산악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공론장을 만들어 모종의 결론을 내놓을 필요는 있어 보인다. 지난 4월 26일 중국 여성 등반가 동홍쥐안董紅娟, Dong Hong Juan은 시샤팡마를 등정하며 자신을 8000ers.com이 공인한 ‘진짜 정상’을 모두 오른 ‘최초의 여성 14좌 완등자’라고 선언했다.

*상세한 세미나 자료는 ‘한국등산연구소’ 홈페이지 mountaineering.kr ‘공지사항’ 게시판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전체 세미나 영상은 유튜브 ‘한국히말라얀펀드’ 채널에 업로드될 예정이다.

 

 

국내 산줄기 1만3,000km 최연소 완주, 그의 등산화는 3만원

 

 

< 조선일보 월간 산, 마운틴뉴스 서현우,  2023.05.16  >

 


[산지컬100 - 재야의 고수를 찾아서]

 


하루에 수십km 걷는 장거리 산행 고수 김점석씨
“욕심으로 걷지 않고, 호기심으로 걸어야 끝까지 간다”

 


등산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산림청의 ‘2022년도 등산 등 숲길체험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등산 소요시간이 2시간 이내라는 응답은 2008년 22%에서 2022년 38%로 늘어난 반면, 동기간 5시간 이상 산행하는 비율은 36%에서 21%로 떨어졌다고 한다. 트렌드의 변화가 확실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새벽 어스름에 출발해 한나절, 혹은 그 이상을 쏟아부어가며 집요하게 산을 오르는 이들이다. 이러한 산행 방식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태도와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울 낙산공원에서 만난 김점석씨.

 


서울 동대문은 한국 등산의 요람이었다. 수십 년 전에는 모든 안내산악회 버스가 동대문에서 일렬종대로 집결했었다. 등산객들은 일단 등산 채비를 마친 뒤 둘러보다가 구미에 맞는 행선지를 가진 버스를 골라잡아 타면 됐다.

그 시절 전남 신안 압해도에서 올라온 한 청년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동대문 인근에서 패션 섬유 일을 하며 혹독한 서울살이에 지친 그는 산에 가고 싶었다. 산도 잘 모를 때라 그냥 아무 버스나 탔다. 그리고 지리산에 빠졌다. 어느 날 지리산행 버스를 탔는데 알고 보니 백두대간 지리산 구간이었다. 그렇게 대간을 알게 됐다. 종이지도를 보며 52구간에 걸쳐 대간을 완주했고, 자연스럽게 장거리 산행에 빠졌다. 3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거리 산행 클럽 중 하나인 ‘무한도전클럽’을 운영한다. ‘산너머’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김점석(55)씨다.

김씨는 산악사진에 관심이 많지만 장거리 산행을 위해 무거운 DSLR 대신 가벼운 콤팩트 카메라만 사용한다.

 


산줄기 1만2,931km 최연소 답파

3년 전에 우리나라 산줄기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을 완주했어요. 7년 걸렸죠. 전체 거리는 1만3,000km쯤 됩니다. 전국에 완주하신 분들이 몇 명 있는데 그중에선 제가 가장 어려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정년퇴직 후에 시작하신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빨리 마칠 수 있었던 비결은 간단하다. 한 번에 많이 걸었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 15km 정도 걷게끔 구간을 잡는데 김씨는 하루 40km씩 걸어서 끝냈다. 백두대간도 총 4번 완주했다. 15구간으로 한 번, 10구간으로, 마지막엔 5구간으로 나눠 걸었다. 5구간으로 나눴을 때는 한 구간을 4일에 걸쳐 200km씩 소화했다.

혹시 과장이나 거짓이 섞여 있진 않을까? 그가 산악회 카페에 남긴 산행기록을 확인해 봤다. 꼼꼼하게 들머리 날머리는 물론 운행 중 만난 봉우리마다 사진을 남겼고, GPX 트랙도 빠짐없다. 또 이것이 없더라도 직접 그가 다녀간 길을 걸어보면 그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무한도전클럽’이라고 새겨진 등산리본이다.

 


“무한도전클럽은 어떻게 만들게 되신 건가요?”

“처음에는 ‘산과 여행’이란 블로그를 통해서 활동했었어요. 장거리 산행스타일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죠. 이분들이랑 같이 무언가 해보려는데 아무래도 블로그는 불편해서 2004년 2월에 카페를 만들었죠. 문자 그대로 ‘무한대로 도전하겠다’는 뜻으로요.”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이름을 딴 줄 알았는데 카페가 더 먼저 만들어졌군요. 무한도전이 2006년에 방영을 시작했으니.”

“그래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아요. 산악회 버스를 대절해서 가다 휴게소에 내리면 사람들이 한참을 버스 옆에서 기웃거렸어요. 버스 앞에 ‘무한도전클럽’이라 써있으니 예능팀인 줄 안 거죠. 제가 대장이라 맨 앞에 앉아 있으면 자기네끼리 ‘엄태웅 아냐?’ 이러면서 수군거리더군요.”

김씨는 자신이 개통한 장거리 코스에 ‘무한도전클럽’ 등산리본을 단다.

 


멀리 가는 법? 안 자고 걷기

그는 조국산천의 목격자다. 짧으면 수십km, 길면 100km 이상. 대체 어떻게 생활하기에 가능한 걸까? 그의 일주일 일정은 대략 이렇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오전 9시까지 동네에서 테니스를 친다. 눈비가 내리지 않는 한 거르지 않는다. 이외에 다른 운동은 따로 하지 않는다. 담배는 오래 전에 끊었지만 술은 좋아하며 식사도 따로 챙겨 먹는 것 없이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대개 무박 산행의 형태로 수십km 정도 걷고 온다. 그리고 산행기를 꼬박꼬박 쓴다. 한여름이나 한겨울, 본업에 여유가 생길 때면 주말 앞뒤로 휴가를 붙이고 나간다. 그리고 200~300km씩 쏟아 붓곤 돌아온다. 

 

그래도 20년 동안 부상이 없었다. 다만 작년에 처음 1년 정도 휴식기를 가졌다. 발목 부상을 입어 복숭아뼈에 물이 찼다. 지금은 완전 회복됐다.

장거리를 위해 많은 걸 버렸다. 짐을 최소화하고, 비박도 하지 않는다. 코스 근처에 식당이 있으면 매식한다. 잠을 자야 되면 중간에 산줄기에서 내려와서 자거나 정말 불가피하면 서바이벌 블랭킷(은박담요) 정도만 덮고 눈을 붙인다. 사실 웬만하면 안 잔다. 자면 도저히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거리를 마칠 수 없다. 암벽, 리지 등반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산행스타일의 틀은 어떻게 잡으신 건가요?”

“대구에 본부가 있는 산악회 J3클럽 운영자 배병만씨가 큰 도움을 줬죠. 일단 좀 더 배워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찾아갔어요. 같이 5년을 산행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우리 산악회와 J3클럽은 웬만한 산행은 다 공유하면서 같이 하고 있고요.”

 


“팁 좀 주세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걸을 수 있나요?”

팁이 아니라 경험이 중요해요. 장거리는 몸이 그 강도를 기억하게끔 만드는 게 핵심이거든요. 처음엔 힘들어도 이 기억을 몸에 새겨두면 나중에 점차 편해져요. 철저하게 자기경험의 산물이라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리라 볼 수 없죠.

가령 저 같은 경우 산에서 잘 안 먹는 편이에요. 예전엔 사탕 하나 물고 10km 간 적도 있죠. 중간 행동식도 최소한으로, 물도 잘 안 마시고요. 그런데 어떤 분은 꾸준히 먹어야 가는 분도 계시죠.

그래도 제가 지키는 몇 가지를 얘기하자면 먼저 배낭 무게를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것. 배낭이 갑자기 무거워지면 적응하기 무척 힘들거든요. 또 오르막, 내리막, 평지 모두 똑같은 속도를 낸다는 것도 있네요. 그래야 꾸준히, 끝까지 걸을 수 있거든요.”


영하 30℃에 170km, 우천에 260km

다만 운행 전체로 놓고 보면 약간 다르다. 가령 100km를 걷는다면 일단 처음 20km는 정상속도보다 조금 천천히 걷는다. 20km를 넘으면 페이스가 확 올라오면서 40km까진 빠르게 간다. 50~60km에 도달하면 몸에 고비가 오고, 그럼 페이스를 살짝 늦춘다. 간신히 80km를 넘기면 끝이 보이면서 기운이 새롭게 솟는다. 5km 남았을 땐 날머리까지 뛰어갈 새 힘이 다리에 붙는다.

 


“그렇게 전국의 온갖 산을 다녔는데, 가장 좋았던 산은 어딘가요?”

“딱히 없어요. 보통 설악, 지리를 뽑던데 산이란 게 어딜 가도 갈 때마다 달라요. 계절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 다르죠. 산은 늘 다르고 새로운데 어떻게 가장 좋아하는 게 있을 수 있겠어요?”

대신 기억에 또렷이 새겨진 산들은 있다. 백두대간 조령산이다. 그가 처음 대간을 타던 옛날엔 밧줄을 타고 오르는 암릉구간이 40개 있었다. 겨울이면 밧줄이 바위에 딱 달라붙은 채 얼어 있어서 이걸 떼는 게 일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산행은 경기태극종주와 호남국공 종주를 꼽았다.

“경기태극은 무한도전클럽에서 만든 건데 경기도 5악 중 관악산을 뺀 4악을 거쳐 태극 모양을 따라 걷는 170km 코스입니다. 또 호남국공은 월출산부터 무등산을 거쳐 내장산까지 걷는 260km 코스고요. 각각 무박4일, 무박6일로 주파했어요.”

 


“정말 뜨악스럽네요. 그런데 거리로 따지면 더 긴 장거리 코스도 많잖아요?”

문제는 날씨였죠. 경기태극은 송년+신년 산행 콘셉트라 12월 30일부터 1월 2일까지 했었는데 한파주의보가 내려서 그때 체감온도가 영하 30℃였어요. 뼛속까지 추웠죠. 호남국공은 한여름이었는데 일정 중 절반이 비였어요. 온 몸이 푹 젖은 채 계속 걸었죠. 같이 하신 분 발 사진을 보면 그때 고행이 어느 정도 가늠이 될 겁니다.

고생한 것만 얘기하니 좀 그렇네요. 의미 있는 산행도 있어요. 현충원에서 자료를 받아가지고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따라 격전지만 엮어 일주일 동안 320km를 걸은 적이 있어요. 호국영령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분투했던 그 역사 속 현장을 직접 발로 찾아다닌 거죠.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김점석씨의 배낭은 단출하다. 가벼워야 빨리, 멀리 가기 때문이다.

 


30년을 봐도 설레는 능선

 


현실성 없는 숫자들이 이어지자 그 거리감이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았다. 헤아려지지 않는 만큼,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산행을 하는 걸까.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렇게까지 산을 타시는 건가요?”

“하하. 굳이 이해할 필요 있습니까? 저희는 보통 이해해 달라고 안 해요. 우리만의 세계고, 우리만의 걷는 즐거움인걸요.”

 


“그 즐거움의 원천이 궁금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낸 성취감에서 살아 있단 걸 느끼죠. 하지만 이것만으론 그렇게 오래 걸을 수 없어요. 걸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산의 연결성, 그 매력에 빠져야 가능하죠. 밤에 보는 능선 실루엣은 30년을 산에 다닌 지금도 제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그렇게 밤새 걸으며 온몸의 에너지가 빠지고, 칠흑 같은 어둠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공포감이 밀려올 때 이제 일출이 떠오르죠. 온 몸 구석구석이 따뜻한 에너지로 채워지는 기분은 말로 다 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능선이 그려낸 곡선에서 단순히 기하학적인 아름다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살아 있는 생물을 말하는 듯도 했고, 어떨 땐 능선이 하나의 운율을 이루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말로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으니, 직접 그렇게 걸어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능선을 바라보다가 뭔가 ‘이거다’ 싶으면 집에 와서 지도를 보고 코스를 만드는 거죠. 저기서 이렇게 오르고, 여기서 쉬고. 그렇게 트랙을 먼저 만들어 놓고 날을 잡아서 직접 걸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자료를 만들고 산행기 쓰고 이름을 붙이면 걷기 코스 하나가 탄생하는 거죠. 전부 신나는 작업입니다. 지금도 트랙만 만들어놓고 아직 걸어보지 못한 곳들이 아주 많아요.”

 


“이제 딱 트랙을 만들고 출발지점에 섰다고 칩시다. 첫 걸음을 내딛고 난 뒤로부턴 어떤 생각들을 하시나요?”

별 생각을 다하죠. 또 아무 생각을 안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람이 참 웃긴 게 걷다가 힘들면 ‘여기 오지 말걸’하고 후회해요. 30년을 걸어도 그래요. 다 끝나고 집에 오면 ‘이 산은 다신 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근데 또 하루 자고 일어나면 ‘이번엔 또 어디를 가볼까?’란 생각이 솟구치죠.”

 


“산이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 건가요?”

“저에게 산은 도시를 떠나 찾는 도피처입니다. 산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그 속에서 산이 변한 것도 보고, 산이 하루를 시작해서 하루를 마치는 과정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어요.” 

김씨는 한국의 산하가 그려내는 아름다움에 빠졌기에 “해외여행은 잘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딱 한 번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산에서 등산한 것이 전부. 그는 “해외 나갈 돈이면 우리나라 산을 더 다니는 게 낫지 않나.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산도 잘 모르면서 외국 산을 찾는 건 아니라는 게 개인적 소신”이라고 했다.

김씨의 신발은 단 3만 5,000원의 트레킹화. 발에만 맞으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무거운 등산화보단 트레킹화 선호

 


“돈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장비는 어떤 걸 쓰시나요?”

지금 신고 있는 건 3만5,000원짜리네요. 브랜드 이름도 몰라요. 신어보니 발에 맞더라고요. 사실 발에 맞기만 하면 어떤 신발이든 좋아요. 요새 장거리 산행하는 사람들은 무거운 등산화 대신 트레킹화로 갈아타는 추세죠. 옷도 비싼 거 안 입어요. 요샌 저가 상품도 웬만큼 기능이 좋거든요.

아 물론 비싼 게 안 좋다는 건 아니죠. 비싼 거 좋아요. 그런데 저흰 거친 산길을 자주 가니깐 금방 훼손돼서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그러는 거고요.”

 


“계속 말씀을 들으니까 저도 흥미가 생기는데요. 요새 장거리 산행에 도전하는 젊은 분들도 많죠?”

“맞습니다. 대신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어요.”

 


“어떤 점이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과정을 기록하려 하지 않고, 시간을 기록하려는 점이죠산을 스포츠의 관점에서 타요. 백두대간을 아무리 빨리 10번, 1000번 탄다고 해도 자기가 어느 구간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고, 저 산이 어느 산인지도 모르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요. 산의 기본은 알고 타야죠.

요즘 많이 하는 불수사도북을 예로 들게요. 다들 ‘종주’라고 그래요. 국어사전에 종주는 ‘능선을 따라 산을 걷는 것’이라고 돼 있어요. 우리나라 산자분수령에 따르면 능선은 물을 건너지 않아요. 즉 종주는 물을 건너지 않아야 됩니다. 백두대간도 수백km 동안 한 번도 물을 건너지 않아요. 근데 불수사도북은 중랑천을 건너야 하죠. 그러니 종주가 아니라 일주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이 정도 용어의 기본은 알고 걷는다면 더 뜻 깊을 텐데 이런 부분을 등한시하고 완주 속도에만 목매는 게 좀 아쉬워요.”

 


“그런 속도도 산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 아닐까요?”

“물론 스타일의 차이지 우위에 차이가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렇게 다니면 쉽게 산이 질려요. 겨울에 얼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고, 쓰러진 고목의 울림, 렌즈가 담지 못하는 자연의 색, 이런 진기하고 감동적인 것들을 모두 외면하고 꾸역꾸역 걷는 데만 집중하는 방식이잖아요. 그게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죠 뭐. 또 위험하기도 하고요.”

 


“어떤 점이 위험하다는 말씀이시죠?”

주안점을 기록에 두면 사람이 욕심이 생겨요. 이렇게 욕심으로 걸으면 사고가 나는 겁니다장거리 산행은 마음을 비우고,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가야 성공해요.”

아무리 마음을 비운다고 해도 동력은 필요하다. 그 동력이 무엇인지 물으려는 찰나 잿빛도시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북한산 산줄기에 닿자 초롱초롱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걷는 만큼 정직하게 펼쳐지는 산천. 이에 대한 진득한 호기심이 그가 가슴에 품어둔 동력이었다.

김씨는 올해 봄 꽃을 보기 위해 80km 길이의 마창진 종주 코스를 완주했다. 그의 산행은 대개 이런 식이다.

 

 


< 김점석 대장의 장거리 하이킹 팁 >

(1) 일정한 배낭 무게를 유지하라

배낭은 당연히 가벼운 게 좋다. 더불어 일정한 무게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거리 도중 물 보급 등으로 배낭 무게를 갑자기 늘리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일정한 무게를 유지하면 몸이 무의식적으로 적응해 안 무겁게 느껴지게 된다.

(2) 일정한 속도로 걸어라

오르막이나 내리막, 평지 모두 똑같은 속도로 걸어라. 특정 구간에서 오버페이스를 하면 그로 인한 반작용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온다.

(3) 처음부터 빨리 걷지 마라

처음에 힘이 있다고 빨리 걸으면 중간에 꼭 한 번쯤 마음이 꺾이는 타이밍이 오는데 이때 버틸 체력이 남아나질 않는다. 몸이 풀릴 때까진 천천히 걷고 이후 페이스를 끌어 올리다가 지치면 살짝 느리게, 그리고 마지막에 스퍼트를 내는 식으로 운행하는 것이 좋다.

(4) 잠을 충분히 자라

잠은 최고의 휴식이다. 산행지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꼭 잠을 자둬야 길게 걸을 수 있다. 전날 잠을 충분히 자는 것도 중요하다.

(5) 운동 삼아 등산하지 말고, 운동하고 등산하라

꾸준하게 체력 관리를 해둬야 오래 걸을 수 있다. 단발성의 주말 등산만으론 장거리를 걸을 체력을 만들기 어렵다.

 

[김영미 단독 인터뷰] “철저히 혼자였던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

 

 

 

< 월간산, 서현우기자, 2023.3월호 >

 


아시아 여성 최초 무지원 단독 남극점 도달 김영미 인터뷰
 
서울 인왕산에서 만난 산악인 김영미. 출국 전에 비해 10kg가량 살이 빠진 상태였다.
인왕산 능선에 올라선 산악인 김영미는 서울을 낯설어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 있다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잿빛 도시를 두리번거릴 따름이었다. 그의 남극일기에 적혀 있던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아직 힘드세요?”

“1월 25일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코로나에 걸렸거든요. 제가 정말 건강한 체질이라 그 흔한 감기 한 번 잘 안 걸리는데 이번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걸렸어요. 정말 남극에 다 쏟아내고 오긴 했나 봐요.”

 


가장 먼저 한 일 ‘기부’

 


지난 2월 10일 서울 인왕산에서 산악인 김영미를 만났다. 김영미는 지난 2022년 11월 26일 22시 43분(칠레 현지 시간) 스키가 달린 트윈오터 경비행기를 타고 허큘리스 인렛(79˚ 59.210 S, 079˚ 26.290W)에 내려 하룻밤을 자고, 27일 아침 운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식량과 연료 등을 중간에 보급 받지 않고 단독으로 1,186.5km를 50일 22시간 35분 만에 걸어 1월 16일 21시 18분(칠레 현지 시간)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번 완주로 김영미는 무지원 단독 남극점 완주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첫 아시아 여성이 됐다. 그런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됐다. 늘 하던 대로 대장?

 


“앞서 다른 매체와 한 인터뷰들을 쭉 봤습니다. 이번 원정으로 수식어가 많이 붙었던데요. 철의 여인, 월드스타부터 대장, 탐험가 정도가 떠오릅니다. 어떤 호칭이 가장 마음에 들던가요.”

“저는 산악인이 제일 좋아요. 산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자 근본이거든요. 산에서 쌓은 배움과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 남극도 갈 수 있었고요. 그러니 산악인 김영미라고 해주세요.”

 


“그럼 산악인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문득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는 말이 또 떠올랐다. 천성이 산이란 생각과 함께 “그래서 서울이 더 외로운 건가요?”라고 묻자 웃으며 답한다.

“서울에는 원정에 대한 갈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 말이에요. 그들 틈에서 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엔, 서울이란 도시는 꽤 고독하고 외롭거든요. 

물론 서울에서 사회인 김영미로 산다는 게 싫은 건 아녜요. ‘사회인 김영미’가 없던 20대 시절 히말라야를 다닐 때는 엄청 불안했어요. 원정을 나가 설벽에서 등반하면서도 ‘이번 달 월세는 어떻게 내지’ 하고 고민하고 그랬죠. 그래서 30대 초반까진 원정에서 돌아오면 허전했어요.

지금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갈 회사, 살아나갈 정상궤도의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더 이상 불안에 떨진 않아요.”

사람들은 전 재산을 털어서 세계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부러워하지만, 전 재산을 털어서 원정이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은 비난한다. ‘그 위험한 데를 왜 가냐’며. 행위가 가진 리스크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한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리스크와 가치는 저울 양쪽에 매달고 비교해야 하는, 완전히 분리된 양가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들은 보통 저울 한쪽에 이 두 가지를 몰아 놓는다. 리스크가 곧 가치다. 

게다가 이런 ‘탐험의 위험 논쟁’에서 김영미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기도 하다. 하이리스크의 수직 등반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매일 에너지를 쉬지 않고 쏟아 부어야 하는 수평의 세계로 자신의 모험세계를 옮기고 이를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호칭을 정리한 후 코로나 자가 격리가 끝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을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 매체 인터뷰나 후원해 준 이들에 대한 감사 인사 등 으레 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기부다.

“기부를 처음한 건 아니에요. 처음 기부한 게 7대륙 최고봉 완등했을 때죠. 모교 요청으로 특강한 후 받은 강연료 일부를 모교산악부에 장학기금으로 전달했어요. 그 이후로도 엄홍길휴먼재단 도전상, 박영석특별상 등 상을 받거나 강연료를 받을 때면 종종 기부하곤 했죠. 이번 원정은 유급휴가로 처리된 터라 월급이 통장에 고스란히 있기에 생활비 일부를 기부한 겁니다.

기부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저도 도움 받아서 원정을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부하면 약간 마음의 빚을 덜어내는 기분이에요. 이번에도 도전 형식은 단독이었지만, 이 단독 도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는지 일일이 말할 수 없어요.”

 


남극점 도달 후 재보니 14kg 빠져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오르막이 끝나고 범바위다. 가뜩이나 대화하며 차오를 대로 숨이 차올랐는데 서쪽에서 올라온 차디찬 골바람이 폐로 와락 쑤셔 넣어진다. 굳이 산에서 만나자고 했던 건 이렇게나마 그의 남극을 추체험해 보려는 의도였다. “남극에서 했던 운행에 비하면 어떻냐?”고 우문을 던지자 비교도 말라는 듯 일화 하나가 돌아온다.

 


“이번에 심박변이도HRV를 측정해 주는 시계를 차고 갔어요. 몸의 움직임, 수면시간과 질, 심박수 등으로 컨디션을 알려주는 척도인데 한국에서 일상생활할 땐 평균적으로 50~60 정도 나와요. 그런데 남극에선 26~28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계속 ‘빨간 불’ 경고등이 들어오더라고요. 이러다 자다가 과로사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줄줄이 김영미의 남극이 펼쳐졌다. 

그는 이제 문명에서 이격된 채 50일 22시간 5분의 고독을 보낸다. 그리고 원정을 시작하자마자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113kg으로 맞춘 썰매의 무게가 너무 과도했다. 그의 키와 체중에 비해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남극점을 지나 남극대륙을 횡단하려는 한 여성 탐험가의 썰매 무게가 120kg였다고 하니 무거워도 한창 무겁게 짐을 쌌다. 촬영을 위해 여분의 배터리 등 전자 장비를 챙겨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예상도 했지만 그 예상은 상상 이상의 고통까지 상정하진 못했다.

악재는 또 찾아왔다. 남극전용으로 챙긴 나침반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 메인으로 쓰려던 나침반은 3일 만에 관리소홀로 깨졌고, 예비용 나침반은 꺼내고 보니 오작동을 했다. 한 시간 운행하고 GPS를 꺼내 확인하니 3km나 본래 코스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직 눈뿐이라 지형지물을 통해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고, 화이트아웃이라 태양도 길잡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하루에 25km 내외를 꼬박 걸어야 일정이 맞는데 3일 동안 27km를 운행했다. 그나마 이 3일 동안 고장 난 나침반이 ‘얼마나’ 오차가 있는지 GPS와 대조해 찾아냈다. 방위각이 딱 20° 달랐다.

원정 초반 전체 일정의 20%를 고작 위도 1°를 올리는 데 다 써버렸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방법은 있었다. 잃어버린 3일을 되찾기 위해 시간을 갈아 넣으면 됐다. 운행 시간을 늘려 하루에 11시간씩 걸었다. 그의 운행기록을 본 남극물류 대행사 ALE는 “시작부터 너무 오래 걷는다”고 걱정했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었다. 사스투르기(요철지대)에 썰매가 걸릴 때면 초보 운전자의 거친 급브레이크처럼 불쾌한 건 물론, 간신히 붙잡고 유지하던 페이스와 호흡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30일이 지나자 한계가 왔어요. 물론 예상했던 시나리오죠. 살은 빠질 대로 빠진 상태에서 해발고도 2,000m를 넘기자 눈과 바람, 추위가 엄청나게 심해졌죠.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갔습니다.

원래라면 이즈음부터 4,500Kcal에서 5,000Kcal로 열량 섭취를 올려야 했어요. 500Kcal가 0.3kg니깐 20일치면 6kg이죠. 그런데 저는 이 식량을 빼고 촬영 장비를 실은 거죠.”

심박수는 늘 150과 160 전후. 갈수록 추워지고, 바람은 거세졌다. 그런데 바람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김영미는 값비싼 첨단 동계 피복을 찢고 들어와 피부에 동상을 남기기로 악명 높은 극점의 바람소리보다 “내 숨소리가 더 컸다. 매 순간 살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40일차가 될 때까지 걸으며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래도 11시간 넘게 걸었다. 이를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2시간짜리 경기를 5번하고, 나머지 한 시간을 예정 거리를 채우기 위해 더 악착같이 페이스를 올려 뛴 셈이다.

걸으면서 촬영도 해야 했다. 잠시 파일 장갑만 끼고 고프로 버튼을 누르다가 손가락 끝 뼈마디가 조각나는 통증이 등줄기 신경까지 찔렀다. 그렇게 추운 곳이었다. 고작 셔터를 누르는 동작에서 문지방에 발가락, 아니 손가락을 찧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고통의 시간 사이에 휴식 하나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루도 쉬지 못했다. 이 모든 고통이 끝나고 남극점에 도달한 순간, 김영미의 체중은 14kg나 줄어 있었다. 
 

 

가장 생각났던 것? 술마시고 푹 자는 것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인왕의 겨울바람이 마치 저 멀리 남극에서부터 불어온 듯 시리다. 계속 궁금증이 치솟아 몸이 들썩거렸다. 눌러 담아뒀던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던졌다.

 


“원정 중에 왜 하루도 쉬지 않은 건가요?”

 


“가장 먼저 매일 에너지를 쏟아내는 기분이 어떤 건지 궁금했어요. 물론 식량이랑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니 중간에 하루쯤 휴식해도 되는 날이 있긴 했어요. 초반에 늦어진 걸 어느 정도 만회한 시기였죠. 마침 블리자드도 거셌고요. 근데 ‘한번 이 블리자드를 뚫고 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갔어요. 그 이후에 다시 변수가 생기면서 쉴 수 있는 여유가 없어졌어요. 그래도 계속 남은 거리를 잘 계산해서 식량이 딱 떨어지는 순간 남극점에 도달하게끔 운행 일정을 짜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원정 중에 제일 생각났던 건 뭔가요?”

 


“술집이 너무 가고 싶었어요. 오후 7시 30분까지 걷고, 텐트 치고, 밥 먹고 9~10시에 자려고 막상 누우면 잠이 안 와요. 백야인데다 너무 몸이 힘드니까 바이오리듬이 망가져서 잠을 깊게 잘 수 없던 거죠. 그래서 따뜻한 겨울 코트를 입고 분위기 있는 술집에서 음악 들으면서 시원한 샴페인을 마시고 깔끔하게 취해서 아침 10시까지 푹 잠드는 상상을 여러 번 했어요. 놀라운 건 저 사실 술 안 마시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꿈도 많이 꾸셨겠네요?”

 


“꿈은 잘 안 꾸는 편인데 기억에 남는 아주 선명한 꿈은 있어요.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글을 쓴 다음에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자려고 짐을 정리하다 보니 폰이 없어진 날이었어요. ‘아 진짜 망했다’하면서도 일단 잤는데 꿈에서 제 뒤를 따라 남극점으로 가는 한 노르웨이 탐험가가 ‘오다가 휴대폰 주웠어요~’하면서 저에게 주는 꿈을 3번이나 꿨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텐트를 걷으니까 그 밑에 있더라고요. 하하”

 


“밥은 어떤 걸, 얼마나 먹은 겁니까?

 


아침, 저녁 두 끼로 매일 4,500Kcal를 연료 주입하듯 먹었어요. 도합 22만5,000Kcal, 50kg을 먹었죠. 근데 이것도 적은 거예요. 이번에 최연소 여성 단독 남극점 도달 기록을 세운 헤드빅 헤르테이커는 매일 5,700Kcal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칼로리는 숫자일 뿐 체내에 흡수되는 양은 그보다 적고요.

메뉴는 아침은 소불고기에 알파미, 저녁은 제육에 알파미였죠. 반찬은 없고 고추장만 500g 챙겼어요. 맛있었냐고요? 그냥 연료죠. 그래서 정말 힘들 땐 먹다가 토한 적도 있어요. 그래도 안 먹을 수 없어서 물이랑 같이 억지로 넘기다 또 토하고, 토한 걸 치운 뒤엔 다시 또 남은 밥을 먹고 그랬죠. 어쨌든 걸어야 하니까.”

 


“남극에서 용변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말하자면 오픈 토일렛이죠. 대신 환경보호구역에서는 철저하게 대변 봉투를 써야 돼요. 저도 분뇨를 수거해서 도착지에서 반납했죠.”


이번 원정을 위해 특별히 보이스레코더에 자연의 소리와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갔는데 어떤 소리가 가장 큰 위로가 됐나요?

 


“원래 자연의 소리가 큰 위안을 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지인들의 응원이 더 힘이 됐어요. 누구 한 명을 콕 짚으면 다른 사람들이 삐질 수 있으니, 어떤 내용이었냐고 하면 ‘무리하지 말고 욕심내지 마라’는 거였죠. 가까운 사람일수록 꼭 성공하라고 격려하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오길 염려해 주더라고요. 물론 성공하라고 말한 사람 자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되기도 하고요.”

 


매일 똑같은 하루가 지겹진 않았나요? 또 기억에 남는 하루는?

 


“전혀요. 하루하루가 다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어요. 초반, 중반, 후반의 패턴이 다 달라요. 날씨도 다르고, 몸도 매일 상태가 달라지죠. 기억에 남는 하루는 달을 본 날? 원래 백야라 밝아서 안 보여야 하는데 오후 5시에 아주 흐릿하게 구름 사이로 반투명처럼 맑은 초승달이 보였었어요. 신기했죠.”

 


“일기를 보니깐 중간에 다른 탐험가와 마주친 적도 있더라고요. 일화가 있나요?”

 


“아 맞다! 핀란드 탐험가들을 만났는데 보통 인연이 아니었어요. 이름은 미코 베르마스Mikko Vermas랑 테로 티라티Tero Teelahti인데 삼극점하는 분들입니다. 근데 테로가 2009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저를 봤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원정대에 있었는데 제가 당시 원정대에서 유일한 여자라 기억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노스페이스를 입고 있는 걸 알아보더니 ‘박영석 파운데이션 주니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박영석 대장이 재단 꾸려서 후배 양성하는 걸 핀란드 등반가들도 알고 있던 거죠. 외국은 그런 문화가 없어서 각자 스폰서를 구해야 하고, 예산이 부족하니 상업 등반대를 가거든요. 그래서 다들 한국 산악문화를 부러워했어요.

또 테로는 2005년 북극원정에서도 박영석 대장을 만났다고 했어요. 그때가 박 대장님의 첫 북극원정이었거든요. 다만 실패했고, 다음 원정 때 사용하려고 120리터짜리 노스페이스 휠백을 남겨두고 갔었죠. 근데 이걸 테로가 가지고 있더라고요. 박영석대장에 연락해서 ‘이 장비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가지라’고 해서 쓰고 있대요.”

 


“기연이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남극점에 도달할 때 기분은 어땠나요?”

 

남극점 도착 감상이 없는 이유는?

 


막힘없이 이야기하던 산악인 김영미가 처음으로 주저하며 말을 가다듬는다. 인터뷰 시작 전 “고산등반가들이 ‘저산증’을 겪는 것처럼 문명에 부적응한 상태”라며 “50일 동안 대화 없이 지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마저 지친다. 아직 남극에서 돌아오지 않은 느낌”이라고 얘기했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그건 느낌이 아니라 진짜다. 50kg의 식량과 14kg의 체중을 남극에서 소모했다. 따지자면 사람 한 명분이다. 남극을 꿈꿨던 사회인 김영미를 오롯이 녹여 산악인 김영미로 새로 태어나 돌아온 셈이다. 김영미가 어렵게 말문을 연다.

남극점에 도달한 순간에 감상은 없어요. 단지 내일은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정도죠. 오히려 마지막 날 아침 출발할 때 복잡 미묘한 감정이 올라와서 울컥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 당황했다. 보통이라면 이 대목에선 환희나 성취감, 인간 승리, 희망 따위의 말들이 나온다. 그래야 시련을 이겨낸 승리자가 된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승리자로서 자신을 뽐낼 권리가 있다. 한국, 아시아 여성 최초를 기록했다. 나는 50일은커녕 단 하루도 그의 운행을 똑같이 따라갈 역량이 없다. 더욱이 살아 돌아올 자신도 없다.

 


그에게 원하는 답을 듣고자 “그럼 남극에는 무엇이 있었나요?”라고 조금 더 캐물어봤다. 한참 고민한 끝에 나온 대답은 이랬다.

 


상상했던 그대로였어요. 하얀 눈과 파란 하늘, 바람, 고독.”

 


생각해 보니 그는 인터뷰 내내 좀처럼 남극의 삶을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힘들다’ 정도. 그 ‘힘들다’는 표현도 객관적인 칼로리 소모와 체중 저하, 심박수로 전달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객관화된 원정만을 전달하려 했다. 김영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뭔가 끝났다는 감동이나 감상은 귀국 후 생활하면서 서서히 찾아와요. 그래서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아차 싶었다. 그리고 왜 그가 감정이나 감상을 전하지 않으려 했는지 분명해졌다. 남극엔 그저 감정 없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하얀 지평선이 있다. 감상은 그 위에 덧입혀지는 것일 뿐이기에 매순간 변한다. 그래서 그는 섣불리 남극이 어땠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또 하나 김영미가 남극점에 도착한 직후 쓴 일기에도 단서가 있다. 그는 ‘내일이면 과거에 불과하다’고 썼다. 김영미에게 남극점은 산악인으로서의 삶과 꿈 중 거쳐 가는 한 점일 뿐이다. 마지막도, 새로운 시작도 아니다. 그는 늘 걸었다. 2017년 바이칼 종단 원정 이후 지난 6년 동안은 남극점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이젠 남극점을 지나 걸어가고 있다. 

중간 보급도 없이... 김영미, 한국인 처음 단독으로 남극점 밟아
1186.5㎞ 51일만에 완주... 여성으로는 아시아 최초

 

<  조선일보, 정병선 기자,  2023.01.17  >

 


한국의 대표 여성 산악인 김영미(43)씨가 단독으로 남위 90도 남극점을 밟았다.

김영미 씨는 지난해 11월 27일(현지 시각) 남극 대륙 서쪽 허큘리스 인렛을 출발한 지 50일 11시간 37분 만인 2023년 1월 16일 오후 8시 57분 남극점에 도달했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식량과 연료 등 중간 보급 없이, 그것도 단독으로 남극점 완주에 성공했다. 그동안 단독으로 남극점을 밟은 여성은 캐나다, 프랑스, 독일, 아이슬란드, 영국인 등 총 17명이다. 아시아인은 없다. 이 중 무보급, 즉 중간에 식량이나 물자를 지원받지 않은 채 남극점에 도달한 여성은 김씨에 앞서 10명뿐이다.

 


김씨는 국내에선 알아주는 베테랑 산악인이다. 2003년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 2008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이후 국내 최연소로 7대륙 최고봉들을 완등했다. 2017년 겨울엔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723㎞를 단독 종주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조선일보의 통일 기원 사업인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대장정’ 원정대의 유일한 홍일점 대원으로 참가해 100일 동안 1만5000㎞를 완주하기도 했다.

 


허큘리스 인렛부터 남극점까지 직선거리는 1130㎞다. 하지만 김씨가 평균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과 칼바람을 이겨내고 무게 110㎏이 넘는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면서, 하루 11시간씩 스키를 타거나 걸어서 장애물을 헤치고 종단한 거리는 1186.5㎞였다.


김씨의 도전은 그만큼 목숨을 건 사투였다. 그는 “화이트아웃(눈 표면에 가스나 안개가 생겨 주변의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현상)이 최대 훼방꾼이었다”며 “난반사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돼 가시거리를 구분 못 할 정도였고, 방향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방향감각을 잃었을 때는 베테랑 산악인다운 경험을 살려 태양과 그림자의 위치, 그리고 풍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극에서는 바람이 내내 정해진 방향에서 불기 때문에 풍향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태양광 충전 배터리 2개 중 1개가 혹한을 견디지 못한 채 멈춘 적도 있었다. 지난 7일 남극 88도 도착 하루 전엔 썰매를 끌던 슬링(몸과 썰매를 연결한 끈)이 떨어져 나가 애를 먹기도 했다.

 


극점 자기장의 영향으로 나침반이 이상 작동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수차례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는 원정 도중 페이스북을 통해 “10° 정도의 나침반 오류를 GPS와 비교해 수정할 수 있었다”며 “3㎞를 전진할 때마다 GPS를 확인해야 했다”고 했다.

 


김씨의 이번 남극점 도전은 2011년 안나푸르나 등정 중 사망한 선배 산악인 박영석 대장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면서 시작됐다. 박영석 대장은 허영호 대장과 함께 남극점 원정에 성공한 ‘유이’한 한국인이다. 둘 다 단독 원정이 아닌 4명 이상 팀을 구성해 남극점에 닿았다. 김씨는 이번 도전을 시작하면서 “박 대장님이 들려준 남극점 도달 과정이 나를 끝없이 자극했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도전을 위해 지난해 노르웨이와 러시아 아무르강, 네팔 히말라야를 찾아 강도 높은 전지훈련을 했고, 박 대장보다 더 고통스러운 도전을 추구했다.

 


원정을 하면서 중간 보급을 물론 위급 상황에서의 지원도 받지 않았고, 풍력(연 사용), 개 보조(개 썰매), 차량 보조 등이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이용해 걷거나 스키를 탔고, 썰매를 끌었다. 무전기, 나침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등은 보조 여부에 해당하지 않는다.

 


김 씨는 남극점에 선 뒤 “부상(동상) 없이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짝 맞춰서 데려갑니다. 오늘 20여㎞를 걸어야 하는데 동상이 염려되어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내내 걱정이 됐어요. 어떻게 1000㎞ 넘는 거리를 썰매를 끌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남극점에 섰지만, 50여 일의 여정이 하룻밤 꿈 같아요”라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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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7일 09시 

남극점에서 보냅니다. 1월 16일(월/현지시간) 51일째인 마지막 날 27.43km를 걸어 오후 8시 55분에 남위 90도에 도달, 전체 누적 거리는 1186.5km, 운행 중 낮의 기온은 영하31도.

"많이 추웠지만 좋은 사람들, 따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응원해주신 분들께 많이  감사합니다. 덕분에 부상 없이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짝 맞춰서 데려갑니다. 오늘 20여 km를 걷는 것도 동상이 염려되어 어제 밤 잠들기 전까지 내내 걱정이 되었어요. 어떻게 1,000km를 넘게 무거운 썰매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남극점에 섰지만, 내일이면 지난 과거에 불과하단 생각이 듭니다. 

 

길의 끝에 서니 50여일의 긴 여정이 하룻밤 꿈 이야기 같아요. 

 

춥고 바람 불던 날들, 흐리고 배고프던 시간들이 버거웠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맑고 따뜻한 날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모두 행복하시기를 가장 남쪽 끝에서 차갑지만 맑고 따뜻한 기도를 보냅니다."

김영미 드림

 

 

 

 

 

https://youtu.be/txkohIDP260

 

 

2023/1/17일 현재  50일째 1122km를 걷고 있네요.

 

 

 

 

‘걸어서 남극점까지’ 김영미, 418.54㎞를 걷다

< 스포츠경향, 이유민 온라인기자, 2022.12.20 >


‘철의 여인’ 김영미 대장이 희망과 위로, 감동을 전한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 에이스토리는 20일, 산악인 김영미 대장의 남극 원정을 응원해 달라고 밝혔다. 한반도의 강추위와는 비교조차 무의미한 ‘냉동의 남극’에서 김영미 대장은 말 그대로 고군분투 중이다. 동시에 이곳의 뜨거운 응원이 목숨을 걸고 극한과 맞싸우고 있는 저곳의 김영미 대장에게는 힘과 온기를 더해주고 있다.

김영미 대장의 남극 원정은 여성 단독 무보급 남극점 도달을 목표로 하는 원정이다. 지난 11월 9일 출국해 현지에서 열흘 내외 준비 및 이동 기간을 가진 후 현지 시각 11월 26일 밤 남극 유니온빙하에서 45일간의 대장정에 나섰다. 그동안 홀로 남극점을 밟은 여성은 총 17명, 무보급으로 범위를 좁히면 10명뿐이다. 이번 도전이 성공하면 김영미 대장은 아시아 여성사에 새로운 금자탑을 쌓게 된다.

남극 원정 22일째를 맞이하는 김영미 대장은 114kg에 이르는 썰매를 홀로 끌면서 남극점을 향해 한발 한발 418.54㎞를 걸었다. 남극점 도달까지 남은 거리는 약 711km다.

남극 운행 1일 차 김영미 대장은 “안녕하세요, 김영미입니다. 한국 떠난 지 17일째, 유니온빙하에서 6일 만에 허큘리스 인렛에 도착했습니다. 무척 춥고, 깜짝 놀랄 정도로 발밑이 빙판입니다. 지금 거기 한국이랑 12시간 차이가 나요. 저는 이만 꿀잠 자고 내일 힘찬 하루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안녕”이라는 메시지를 서울로 보내 도전의 시작을 알렸다.

김영미 대장의 남극 원정 소식은 ‘화이트아웃’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내 ‘Live from Young-mi’ 에는 남극 지도 위로 김 대장이 그려간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미 대장의 이번 남극 원정을 다큐멘터리 ‘화이트아웃’으로 제작하는 에이스토리 관계자는 “장장 45일에 걸친 김영미 대장의 혈혈단신 인간승리는 내년에 50 분물 2부작으로 방송될 예정이며 세계인에게 희망과 위로 그리고 감동을 전할 것이다”고 밝혔다.

한편, 화이트아웃 홈페이지에서는 응원 섹션을 통해 김영미 대장의 단독 남극점 도전을 성원하는 조진웅, 이제훈, 곽윤기, 브레이브걸스 등 40명이 넘는 셀럽들의 응원 영상도 볼 수 있다. 각계각층의 전문가 또는 셀럽이 함께하는 ‘화이트아웃 챌린지’에는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다.

 

 

 

http://whiteout.kr/live/

 

Live from Young-mi - 화이트아웃 Whiteout

Live from Young-mi ※ 이 지도는 김영미 대장의 남극에서의 실시간 위치를 나타냅니다. 총 이동 거리 / 이동일 / 현지 온도는 하단 바에 표시됩니다. 또한 지도를 확대할 경우 김영미 대장이 각 지점

whiteout.kr

 

7대륙 최고봉을 오른 그, 다음목표는 80대 에베레스트 등정

 

< 월간 산 마운틴뉴스 서현우, 2022.11.14 >

 



7대륙 최고봉 완등기 '남산에서 에베레스트까지' 펴낸 이성인씨

 


“산은 제가 바로 서면 그곳이 정상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힘에 부치고 죽을 것 같은 순간을 겪었지만, 그럴수록 제 자신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산을 올라야 했습니다.

  이번엔 글로 다시 한 번 7대륙 최고봉을 올랐습니다.

   14년 전 평범했던 한 사람이 어떻게 7개 대륙의 최정상에 섰는지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재미교포로서 두 번째로 지난 2008년 9월 24일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던 이성인씨가 완등기 〈남산에서 에베레스트까지〉를 출판했다. 그는 2005년 8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를 시작으로 3년 1개월 만에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완등하는 데 성공했다. 책은 킬리만자로부터 칼스텐츠까지 각 산을 등반하면서 겪은 일들을 풍부한 인문학적 시선으로 담고 있다. 

현재 LA에 거주 중인 이성인씨는 “코로나 이후 미국 대부분의 산이 입산 금지돼 꼼짝 없이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며 “산을 걸어 오를 수 없게 돼 답답한 나머지 기억을 되새겨 글로 산을 올라가기로 했다”고 저술 동기를 밝혔다.

 


하루 3시간 헬스, 볼디산 600번 올라

 


이성인씨는 1979년 모 경제지 LA특파원으로 미국에 입성했다. 몇 년 후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매일 아침 출근해 자정이나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51세 때 사업장 사다리에서 추락해 오른쪽 골반이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는다. 병원에서 이씨의 어머니는 “덜 먹고 덜 쓰더라도 마음 편히 살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악착같은 삶 대신 새로운 인생을 찾기로 결심, 조기 은퇴한다.

새로운 취미를 찾던 그는 골프도 치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요세미티 엘 캐피탄에서 거벽등반가들을 보고 그들의 도전정신에 감격한 그는 운명처럼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등산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4년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남산을 오르며 시작했던 생애 첫 야외활동이자 취미였다. 또한 고교 산악부 시절 1년 동안 활동하며 인왕산 치마바위, 북한산 인수봉 등반을 했던 추억도 간직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 중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같은 말을 들었어요. 그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이민생활전선에서 싸우며 ‘목숨을 걸면 못 할 게 없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산이든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도전하기 전 그의 체력은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평범한 사람 수준이었다. 등정을 위해 하루 3시간 헬스장에서 운동했고, 꾸준히 산에 갔다. 처음에는 6시간 걸려 올랐던 볼디산(3,068m)을 600번 이상 올라 종국에는 1시간 50분 만에 등정할 정도로 체력을 올렸다.

등정 릴레이 중에는 원정에서 만난 대원들에게 들은 노하우를 실천했다. 장봉완 대장으로부턴 “베이스캠프에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뱃살을 키워 둬라”는 조언을 들었고, 고 고미영 대장이 후배 대원에게 건넨 “여기 입맛 좋은 사람 없다. 강제로라도 먹어라”는 조언도 더불어 새겼다. 다른 외국인 대원들이 원정 중에 꾸준히 운동하는 것과 다른 방법이었는데 이게 체력관리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산으로 ‘아콩카과와 빈슨’을 꼽았다. 책에선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던 순간들이 급박하게 펼쳐진다. 아콩카과에서는 등정일에 세 번 혼절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서 정상을 밟았고, 빈슨에서는 악천후에도 등정을 강행했다가 설맹과 안면동상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다녀왔다.

에베레스트 정상. 산소마스크가 끊어진 순간 그는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산은 에베레스트입니다. 에베레스트는 마치 어머니 같았어요. 경외감이 들었고, 숨이 멎을 듯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정상에 오르던 날엔 그 기운에 짓눌려 환호하지도 못했죠. 

정상 등정 인파에 밀려 산소마스크의 고리 끈이 끊기는 사건도 일어났어요. 나는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좁아지던 시야가 되살아났어요. 셰르파 타케가 자신의 산소마스크를 제게 내어준 거죠. 영원히 잊지 못할 은인입니다.

하산하면서도 정상을 수없이 뒤돌아봤죠. 마치 훈련소로 입영하는 날 배웅해 주던 어머니를 뒤돌아보던 것 같았어요.”

14년 만에 꺼낸 기억이지만 꼼꼼히 기록해 둔 산행일지 덕에 마치 원정에 실시간으로 동행하고 있는 듯 생생하다. 그는 “산행기를 쓰면서 정작 문제가 된 건 기억이 아니라 감정”이었다고 했다.

어떤 기억에 대한 당시와 지금의 감정이 편차를 보일 때 적잖이 당혹스러웠어요.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왜곡된 건지 감정이 장난을 치는 건지 몰랐어요. 께름칙하지만 조금씩 써 나가다 깨달았죠. 이 과정이 단순히 산행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산을 오르며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란 걸요. 그래서 글로 오르는 이번 산행은 그 자체로 독립돼 있었고 실제 산행의 의미를 확장시켜줬습니다.


다음 목표는 80대 에베레스트 등정



올해 70대 중반에 이른 그는 지금도 여전히 산으로 간다. 그는 “산에서만큼은 꿈을 꾼다. 지금 꾸는 꿈은 80대에 들어섰을 때 한 번 더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생긴 꿈입니다. 이게 노욕과 허욕을 미화해서 꿈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나름 치밀한 연례 산행스케줄을 세워놓고 천천히 실천에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7대륙 최고봉 완등에 도전하면서 느낀 건 꿈이 이뤄지고 말고의 핵심 열쇠는 제가 아니라 산이 쥐고 있었다는 거거든요. 책을 읽는 독자분들도 산에 감사하며 꿈을 꾸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월간산 (2022년) 11월호 기사입니다.

[초점ㅣ니르말 푸르자 최단시간 14좌 완등]

 

 “푸르자처럼 오르면 5개월 만에도 히말라야 14좌 가능”

 

 

< 조선일보 서현우 기자 2020.01.15 >


189일 만에 완등한 푸르자에 “알피니즘 아니다” 지적 잇따라…
이용대 교장 “기록 남겠지만 의미 없어”…알피니즘 현대 트렌드 한 단면일 수도

 


캐러밴을 하지 않고 헬리콥터를 이용하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등반이 가능하다.


네팔인 니르말 푸르자Nirmal purja(38)의 최단시간 히말라야 14좌 완등이 산악계를 연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푸르자는 2019년 10월 29일 마지막 시샤팡마를 오르면서 189일(6개월 6일) 만에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으나, 산악계에선 ‘푸르자의 등반은 알피니즘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푸르자는 빠른 등정을 위해 고정로프와 산소를 사용하고, 셰르파를 여럿 고용해 노멀 루트로 등반했는데, 이는 ‘무산소, 단독, 신 루트’로 요약되는 현대 알피니즘을 역행한 등반 방식이기 때문이다.


등정주의의 극을 보여 준 푸르자의 등반 방식이 세계 산악계에 던진 충격은 몹시 크다. 최근 히말라야 고산등반은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완전히 이행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오영훈 본지 기획위원은 “최근 세계의 알피니스트들은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도전하기보다 6,000~7,000m급 고봉에서 난이도 높은 신 루트 개척을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트렌드 변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가 고 김창호 대장이다. 김 대장은 지난 2013년 히말라야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한 뒤, ‘코리안웨이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고난도 신 루트 개척에 앞장선 바 있다.

 

 


국내 고산등반 전문가들도 푸르자의 등반 방식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 “기록은 분명 남겠지만 알피니즘으로서 의미는 없다”며 “고도보다는 태도를 지향하면서 ‘정당한 수단by fair means’으로 산을 오르는 것이 금세기 알피니즘의 화두”라고 말했다. 엄홍길 대장은 “기술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진 등반 방식”이라며, “푸르자처럼 등반하면 5개월 만에도 14좌 완등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오 위원은 “히말라야 등반의 체계화, 상업화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푸르자는 누구이며, 왜 이런 등반을 계획한 것일까? 먼저 푸르자는 군인 출신으로 고산 등반 경험은 적은 편이다. 2003년부터 구르카 용병으로 영국 해병대Special Boat Service에서 복무하다 2018년 병장Lance Corporal으로 전역했다. 이번 등정 이전의 고산 등반 경험으로는 2012년 로부체 동봉(6,119m), 2014년 다울라기리, 2016년 에베레스트 등반이 전부다.


2018년 전역한 푸르자는 2019년 4월 23일 안나푸르나 등정을 시작으로 7개월 안에 14좌를 모두 오른다는 ‘프로젝트 파서블Project Possible 14/7’을 개시했다. 푸르자는 “세계에 네팔 등반가들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고 싶었다”며 “또한 많은 이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14좌 등반을 결심한 이유를 밝혔다.


 
푸르자는 해발 7,500m 이상의 지대에서 산소를 사용했다.
완등 성공요인, 재정 관리와 탁월한 체력

 


프로젝트는 3단계로 구성됐다. 봄 시즌에는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칸첸중가, 에베레스트, 로체, 마칼루, 여름에는 파키스탄에 위치한 낭가파르바트, 가셔브룸 1·2봉, K2, 브로드피크를, 가을에는 초오유, 마나슬루, 시샤팡마를 계획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다울라기리부터 마칼루까지 5개 봉우리를 단 12일 만에 오른 것과 다른 원정대가 날씨가 좋지 않아 시도하지 않을 때 K2를 등반한 점이 눈에 띈다. 

 

물론 고정로프와 산소를 사용하고, 베이스캠프로 이동할 때 캐러밴(인근 도시에서 물자를 갖고 베이스캠프로 진입하는 일로 적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열흘 이상 걸린다)을 거치지 않고 헬리콥터를 이용하면서 거둔 성과다.


등반 중에 동료 산악인을 구조하면서 휴머니즘을 실천하기도 했다. 안나푸르나에서 식량, 물, 산소 없이 40시간이나 고립됐던 말레이시아인 친 위 킨Chin wui kin 박사를 구조하기도 했고, 칸첸중가에서는 갖고 있던 보조 산소를 등반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두 명의 등반가에게 지원했다. 네르말 푸르자의 14좌 완등은 세계 43번째 기록이다. 


푸르자가 최단시간 14좌 완등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고산등반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재정 관리와 탁월한 신체 능력을 꼽고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푸르자의 등반을 두고 “진귀한 산악 업적Unique mountaineering achievement”이라며 “지도력, 협동력, 재정 관리능력, 신체 능력이 뒷받침한 결과”라고 평했다.


푸르자가 고산 등반에서 뛰어난 신체 능력을 발휘한 것은 선천적, 후천적 요인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푸르자는 다울라기리산군에 위치한 해발고도 1,600m대의 미아그디Myagdi 지방에서 태어난 고산족 구르카 출신이며, 16년간 군복무하면서 특수부대 훈련을 받아 강인한 육체와 정신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군복무를 통해 기초 자본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성공 요인 중 하나다. 구르카 용병은 영국 군인에 준하는 연봉을 받는다. 미국 구인구직사이트 ‘글래스도어’에 의하면 영국 군인의 평균 연봉은 약 2만8,000파운드(약 4,300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네팔에서는 부유층에 속하는 소득 수준이다. 물론 개인 소득만으로는 14좌 완등을 위한 자금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푸르자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러 후원사를 섭외하고 인터넷을 통해 크라우드펀딩을 전개했으며, 자신의 집을 저당 잡고 대출을 받기도 했다.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타 원정대의 셰르파로서 참여했다.


오 위원은 “치밀한 준비성과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담대함, 많은 인력과 자금을 큰 잡음 없이 동원해 낸 출중한 인격 등 정신적인 면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왜 다른 등반가들은 푸르자와 같은 방식의 등반을 시도하지 못한 걸까? 오 위원은 “푸르자 이전에도 최근에 몇몇 등반가들이 ‘1년 이내 14좌 완등’을 꾀하고 시도한 바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며 “체력이나 고산병 등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자연재해, 당국의 입산통제 등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 문제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엄 대장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가능해진 등반”이라고 분석했다. 엄 대장은 “내가 고산 등반에 주력할 때는 자금도 적고, 정보도 적어 원정을 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현지의 모든 행정 절차부터 통관절차, 대원구성, 훈련, 예산 마련, 식량 장비 구입, 포장, 수송까지 일일이 챙겨야 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 모든 행정 절차를 손쉽게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누가 해외 원정 갔다 오면 보고서 하나 받기 위해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인터넷 검색하면 산의 정보가 다 나온다”고 말했다.


마나슬루의 실제 정상. 푸르자는 사진을 촬영한 위치까지만 오르고 돌아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결과만 중시’ 현대사회 풍조의 산물


푸르자의 등반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알피니즘으로 보긴 어렵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중시하는 현대사회 풍조의 산물”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용대 교장은 “각 등반마다 등반의 내용을 면밀히 고찰할 필요는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무산소도 아니고, 신 루트도 아닌 등반을 알피니즘으로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교장은 “물론 최단기간이라는 기록은 인정해 줘야겠지만 알피니즘과 고산등반에 있어 다른 산악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터닝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엄 대장은 “국내 산행으로 치면 백두대간 종주와 오색코스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른 뒤 헬리콥터를 타고 중산리로 가서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행위를 비교하는 꼴”이라고 비유하며 “다른 원정대나 셰르파가 먼저 길을 내고 고정로프를 설치한 곳을 따라 오르는 건 그저 타의에 의한 등반, 거저먹는 등반에 불과하고, 이런 식이면 5개월 만에도 완등이 가능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편 오 위원은 “알피니즘이라는 잣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오 위원은 “현대 알피니즘은 세분화, 체계화되면서 현재는 6,000m급 고봉에서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주된 형식”이라고 정의하면서 “8,000m 14좌 완등이 알피니즘에서 출발한 것은 맞지만, 오늘날에는 극지도달, 대양횡단처럼 구체적인 규정 속에 기록을 측정하는 하나의 모험 분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한 오 위원은 “무엇보다 푸르자가 자신의 등반을 알피니즘이라고 내세운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재 푸르자의 등반을 지지하는 팬들은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푸르자의 등반을 알피니즘으로 공격하는 건 모종의 식민주의”라며 “서양인들이 네팔인의 성공을 깎아 내린다”고 반응하고 있다.


푸르자의 등반이 고산등반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히말라야 14좌를 짧은 시일 안에 완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히말라야 14좌 연속 등반 상품’을 고산등반 대행사들이 앞 다퉈 출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 위원은 “이미 일부 대행사들은 헬리콥터를 이동수단으로 하며 산소를 무제한으로 쓰고, 셰르파도 다수 고용하는 ‘럭셔리 14좌 등반 상품’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고산등반가들의 활동이 한층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작게는 단일 산악회, 크게는 지역과 국가의 명운을 건 프로젝트였던 과거와 다르게 히말라야 8,000m급 고산의 위상과 가치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오 위원은 “이제 고산등반은 지극히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돼 고산등반가들이 협찬사를 찾기 더 어려워질 것이고, 산악인들도 고산에 대한 동기부여를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르면 극한도전의 표상이었던 고산등반이 보조수단을 풍부하게 사용해서 오르는 ‘고산관광’으로 변모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산악인들이 우러러봤던 히말라야 14좌나 7대륙 최고봉 등의 인기와 가치가 끝물에 다다른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한편, 산악커뮤니티 <익스플로러웹>에서 등정 사진을 기반으로 푸르자가 마나슬루 정상을 20m 앞두고 돌아섰다는 등정 의혹을 제기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푸르자는 이에 관해 아직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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