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영의 동반자 김재수 산악 대장
이혜민│신동아 기자 2009-09-11
● 누구나 산을 오를 수 있지만 아무나 히말라야 등반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한 발은 고통이고 한 발은 희망이다’ 계속 그렇게 주문을 걸고 간다
● 나하고 같이 간 대원이 또 문제가 있으면 힘들어 못 산다
●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위해 히말라야에 간다
부산 구포역, 나무처럼 길쭉한 두 다리가 위태로이 서 있다. 얼마 전 사망한 산악인 고미영의 동반자(同伴者·어떤 행동을 할 때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 김재수 산악대장은 담배를 손에 쥔 채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김광석의 노래가 흐르는 그의 차에 오르자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그가 먼저 아이들 얘기를 꺼낸다.
필리핀에서 돌아와 아빠 사업을 돕고 있는 큰아이, 의대 다니는 둘째, 고등학교 다니는 막내…. 그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세 아이의 사진과 함께 눈 덮인 산 사진이 손님을 반긴다. 좋은 추억부터 꺼내 보면 마음이 편해질까 싶어 등산 계기부터 물었다. 줄담배를 피우던 그가 경상도 말투로 나직하게 말했다.
▼ 산에는 언제부터 가셨습니까.
“열일곱 살 때, 누님이 권하셨어요. 성인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되려면 취미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처음엔 별 재미가 없더라고요. 힘만 들고. 그러다 자그마한 산에서 새벽에 텐트 밖으로 나와 해가 막 떠오르려는 순간을 봤어요. 산골짜기에 안개가 자욱한데 봉우리 사이로 햇살이 퍼지며 해가 떠오르는 그 광경이 가슴에 확 와 닿더라고요. 섬에 와 있는 것 같고. 이런 광경만 볼 수 있다면 등산을 취미로 삼아도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다녔죠. 산동네에서 자라 처음부터 잘 올랐습니다. 몸도 적당하고요. 30년 동안 175cm 61kg 허리 28인치 그대로니까요.”
▼ 전문 산악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던 건 아니네요.
“당시에는 없었죠. 그러다 1977년 고상돈 선배님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소식을 듣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일본의 ‘산과 계곡’, 미국의 ‘클라이밍’ 잡지를 사다 보면서 ‘나도 이런 거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1989년에 해외여행이 자율화되자마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갔는데 그때 나이가 스물 아홉입니다. 등반 퍼미션(허가서)을 얻으려면 3000달러 정도가 들어 하루에 20달러 하는 트레킹 퍼미션으로 산자락만 돌다 왔는데, 더없이 아름다운 산이었습니다.”
▼ 저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와도 별 감흥이 없던데, 어떤 점이 좋으셨나요.
“안나푸르나는 처음에 모든 걸 보여주지만, 에베레스트는 한 발짝 들어갈 때마다 조금씩 보여줍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쫘악 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죠. 그런데 처음 가서 그런지 고소증으로 부종도 생기고 구토도 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매일 아침저녁으로 20㎞씩 뛰었습니다. 이듬해 부산오사카합동대 대원으로 참가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다녀왔지요. 그런데 내 얘기만 합니까.”
▼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셨군요.
“정복이 아니라 등정(登頂)입니다. 산악인은 그런 표현 안 씁니다. 산꼭대기에 잠시 머물다 오는데 어떻게 정복이란 표현을 씁니까. 오를 등, 봉우리 정자를 씁니다.”
▼ 네, 다시 질문 드리겠습니다. 에베레스트 등정이 쉬운 건가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니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갔다 오고 보니 허무하더라고요. 내가 고작 이걸 하려고 그 노력을 했나 싶고. 그래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아 다음해에는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원으로 시샤팡마 정상에 올랐습니다.”
▼ 그 뒤부터는 허무하지 않으셨나요?
“예. 숙명이라고 할까, 운명이라고 할까. 히말라야를 계속 가야겠다는 열정이 생기더라고요. 당시 애가 둘이고, 비닐하우스 한 동은 사업체로 쓰고 나머지 한 동을 집으로 쓸 때인데도, 산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세 번째로 갈 때는 제가 팀을 꾸렸습니다.”
▼ 대장을 맡아보니 어떠셨습니까.
“리더로서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올라가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후배들을 올려 보내지 않고 제가 올라갔어요. 식량도 부족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인원 전체가 등정하기는 어렵거든요. 보통 1차, 2차, 3차로 나누는데, 1차 대원들이 다녀오면 부담되죠, 혹시 사고가 나진 않을까 하고. 그 뒤에는 금전적인 이유도 있고, 4,5개월씩 나가 있기도 그래서 혼자 짧게 다녔습니다.”
▼ 금전적인 문제요?
“대장으로 갈 때 자비 2000만원을 들였습니다. 선배님들은 기본 경비를 부담하셨지만 후배들한테는 경비 부담시키기가 어려워서…. 팀을 리드한다는 건 그 사람들을 책임진다는 건데. 그런데 너무 내 얘기만 하는 거 아닙니까.”
▼ 마저 여쭙겠습니다. 혼자 어디를 다니셨나요.
“러시아 쪽에서 두 번, 티베트 쪽에서 한 번 7000m급을 올라갔는데, 혼자 다니면 내 몸 상태에 맞게 움직일 수 있지만 불편한 점도 있더라고요. 위험에 빠질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거. 그 뒤로는 같이 다니면서 1년에 2개월가량은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1999년에 가세르브룸에 갔을 때 대장인 제가 아닌 대원 2명을 정상에 보냈고 그 뒤로는 리더로서 명예를 얻었다고 봐야죠.”
▼ 왜 후배를 보내셨습니까.
“한국 산악계를 위해서는 이런 등반을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일(로프)의 정’이란 노래도 있듯이 우리는 로프라는 핏줄로 맺어진 형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형제보다 더 애틋한 사이입니다. 누군가 묶은 그 로프를 함께 잡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 그때도 비용을 대셨나요?
“당연하죠. 만약 후배가 냈다, 그럼 ‘빳따’(몽둥이) 맞을 짓입니다. 선배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선배는 선배입니다. 제가 어릴 때 주위에 많은 선배 분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재정적으로 여유 있지는 않았죠. 조선소에서 용접하는 사람, 막일하는 사람, 조그마한 중소기업 현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선배님들과 산에 갔다 오면 뒤풀이를 해주시는데, 없는 돈으로 튀김 1000원어치에 소주 한 병을 선뜻선뜻 사주셨어요. 오비베어 같은 데 가서 (맥주) 500cc 한 잔이랑 닭튀김도 사주시고, 가는 길에 택시 타라며 1000원 2000원 손에 쥐여 주셨죠. 제게는 그게 지금의 1억, 2억원보다 가치 있습니다. 그분들께 받은 거 후배들한테 돌려줘야죠.”
▼ 은혜는 도움 준 선배한테 갚아야지 왜 후배들에게 갚습니까.
“도와준 선배님이 무수히 계신데, 부자 된 사람이 사회에 환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되돌려줄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후배를 아는 사람이죠.”
▼ 선배들이 도와주셨다는 게 뭔지….
“…그분들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열악한 환경에서 등반 루트를 만들고, 산길을 만들고, 자료로 지도를 만들고. 그 기록이 있어서 우리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어요.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다 대물림이거든요. 대한산악연맹의 지원으로 내가 얻은 명예를 후배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비 2억원을 들여 2007년에 에베레스트원정대를 꾸렸습니다. 후배들에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는 명예를 주면, 등정을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에베레스트나 K2는 누구나 아니까 거기 올랐다 하면 인정해주죠. 원정대 20명 중 10명이 등정했습니다. 히말라야 후배를 9명 기른 겁니다. 2008년 K2에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고. 내려오다 추락사한… 후배 세 명과 고미영, 나 이렇게 다섯이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 대장님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가고 싶은 산에 시간 내서 간다는 거였어요. 직업도 있고 가정도 있으니까 욕심내기가 어려웠죠. 고미영씨 만나기 전에 8000m급 봉우리 4개를 등정했고, 60세 되면 8000m 14개를 다 오르지 않겠느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제 얘기만 하는 거 아닌가요?”
▼ 이제 고미영씨 얘기를 하겠습니다. 두 분이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소문 안 나면 제가 병신이라고 했잖아요. 연인을 뛰어넘은 관계였던 건 맞습니다. 나보다 나은 산악인도 많은데 그중에 나를 믿고 인정해준 사람인데, 어떻게 애틋하지 않겠어요. 미영씨가 힘들어할 때, 걷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업고라도 하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1993년 에베레스트 등반하던 외국 산악인도 같이 온 사람을 살리다 죽었는데, 나를 믿어주는 동료를 위해서 내가 왜 못 죽습니까. 남자들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까. 다 손가락질해도 누군가 나를 믿어주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개를 다 오르고 나서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 보도가 있었는데요.
“그렇게 보도한 언론사한테 사과, 다 받았습니다. 사실이 아니에요. 저도 아내와 헤어진 사람이라 문제될 건 없어요. 미영씨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3년간 그렇게 붙어 있어도 이런 감정은 서로 얘기해보질 않았어요. 미영씨가 외향적이지만 진정으로 속마음을 얘기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내한테는 이것저것 많이 얘기했죠. 당뇨로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 산에서 만났지만 경제 문제로 이혼한 남편 얘기, 앞으로 만들고 싶은 등반학교 얘기…. 제가 미영씨네 집으로 상견례 갔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김장할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갔던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영씨 모친이 그러시더라고요. 작년 여름에 와서 좋은 사람이 있다고 그랬다고…. 사람들이 저보러 자기 살 궁리하려 빠진다고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인이다 아니다 부정하기 어렵죠. 말이 오가는 과정에 가족들은 상처 받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관계가 발전할 수도 있었으니 부정할 수만도 없습니다.”
▼ 생전에 고미영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찬 사람이었어요. 집요하게 전화해서 다 꾸려진 에베레스트원정대에 참여하겠다고 하고, 내려와서는 히말라야 14좌 목록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자기 목표라고 도와달라고 하고. 제가 머뭇거리니까 국제전화로 회사에 전화해 김재수 대장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많습니다. 자기가 목표 세웠다 하면 자기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다 얘기하고, 낯선 사람에게도 계획표에 사인하곤 ‘제 계획이 이렇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이 산에 두 번 오기 싫다고, 목표지점까지 한 번에 가겠다고 당차게 웃는 그런 산악인이었습니다. 이런 후배를 키우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매니저가 되었고요. 삼겹살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구운 돼지고기를 못 먹는데, 미영씨는 점심때고 저녁때고 구워 먹었어요. 과일캔도 좋아하고, 구운 오징어는 한 마리씩 가지고 다녔어요.”
▼ 고미영씨에게 큰소리도 치셨나요.
“로프를 안전하게 설치하지 못한다거나, 팔자로 걸으면 혼냈습니다. 힘들면 팔자걸음으로 걷기 쉬운데 산악인은 두 발끝이 조금 안쪽을 향하게 걸어야 합니다. 로프에 옷이 찢어지거나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몹시 혼냈죠. 평소 서로 경어를 썼지만 화낼 때만큼은 반말했습니다. 그럴 때면 미영씨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고만 있어요. 메모한 걸 보니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같이 있을 때는 든든해서 좋았고, 화를 낼 때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고…. 그 추운 데서 얇은 면장갑 하나 끼고 동영상 촬영하고 있는데, 힘들다고 협조 안 해도 화냈습니다. 힘들어도 내가 더 힘든데 고도가 얼마고 경사가 얼마고 지점이 어디란 것만 말하면 되는데… 그래도 알죠, 미영씨 힘든 거.”
▼ 고미영씨의 생전 인터뷰 말미에 김 대장님께 감사하다는 멘트가 많던데요.
“같이 산에 올라도 늘 그림자 취급 받는 절 안쓰러워했던 사람입니다.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지만, 아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자기 도와주느라 동영상 찍는다면서 손가락 발가락 동상 걸리고, 아무런 영광도 없이 있는 그 사람을 봤을 때 더 힘들다고…. 인터뷰 중에 눈물 비치던 사람입니다. 또 생각 나네요…. 나로서는 그래도 마 여성 산악인을 하나 키운다는 보람이라도 있지만…, 외로움 안 느낀다면 거짓말이겠죠…. 계획부터 등정까지 많은 걸 이끌었는데, 공식적인 자리에 가도 인사도 못 받고, 사진 수만장을 찍어도 이름 한 자 못 올리고… 그럴 때마다 옆에서 저를 챙겨주던 사람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세계 초등(初登)도 하고, 한국 초등도 한 적 있는데 소개할 때마다 제외되니까 자기는 따라간 것밖에는 없는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미안하다고 하던 고마운 사람이에요. 등정하지 못하고 하차한 후배에게 도와준 덕분에 등정했다면서 십자수로 에델바이스를 만들어주던 사람이죠.”
▼ 그럼 이제 사고 얘기를 여쭙겠습니다. 너무 무리하게 하다 사고가 났다고들 합니다.
“무리가 아닙니다. 많은 팀이 한 개만 목표로 해서 가지 않습니다. 한 산에 올랐다가 내려와 도시에서 며칠 쉬고, 다시 헬기 타고 베이스캠프로 가서 며칠 적응하다 산에 오르는 게 세계적 추세입니다. 사실 한국에 들어와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보다 현지에서 머물다 오르는 게 체력 면에서 더 낫습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현상 유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보통은 중간에 도시로 가서 체력을 보강했습니다. 이런 계획이 무리라고 생각했으면 진작 지적했어야 합니다. 갈 때 조심하라 한마디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조심하라 그리 일렀는데 무리했다고 말하는 선배들은 그렇게 말할 자격 없습니다. 나가기 전에 밥 사 먹으라고 돈 만원 준 적 없고,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서야 수고했다 말 한마디 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죠.
자숙하고 반성해야 할 때 왜 인터뷰하느냐고들 하는데 이 부분을 명확히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봉우리 하나 오를 때마다 1억원씩 준다고 해서 그랬다는 소문도 도는데, 내 뭘 보고 회사에서 돈을 줍니까. 원정 경비만 받았습니다. 사람이 아까운 겁니다. 스포츠클라이밍 빙벽등반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사람, 히말라야 고봉을 2년6개월에 11개 오를 수 있는 사람, 생존해 있으면 세계적인 영웅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좋은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실수로 깼습니다. 이 얘기밖에 할 수 없어요. 너무너무 아까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10년, 20년 등반해온 사람이 아니라, 뒤늦게 시작해 한 분야의 정점에 있다 다른 정점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 오은선씨와 과도한 경쟁을 했던 점도 지적되던데요.
“사진 찍는 분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찍고 싶은 마음이 안 듭니까. 글 쓰시는 분도 그렇지 않아요? 미영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더 잘해보려는 마음이 들지요. 프로는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물론 매니저가 코치이니 경쟁에서도 잘할 수 있게 이끄는 점이 있죠. 등정 계획을 짜고 눈길을 내고 그 노력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게 제 일인데요. 그렇지만 계획을 무리하게 짜진 않습니다. 경쟁만이 등정의 목적은 아닙니다.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 사고 당시 상황을 다시 말씀해주세요.
“7월10일 오후 7시11분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습니다. 강한 바람 때문에 하산이 늦어졌고 정상과 캠프4 사이에서 고소 포터가 심한 고소증으로 전혀 거동을 할 수 없어서 전 대원이 합심해 고소 포터를 캠프4까지 데려다주느라 하산이 더 늦어졌습니다. 캠프3에서 캠프2까지는 전 루트가 로프로 연결돼 있는데 캠프2의 30m 위쪽 완경사 지점에 로프가 묻혀 있었습니다. 먼저 내려오면서 그 로프를 드러내려고 했지만 3m만 드러났고 나머지 10m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로프 없이도 내려왔기 때문에 저는 먼저 내려와 뒷사람을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미영씨가 그 지점을 지나다 신발 밑의 아이젠 부분이 옷이나 다른 쪽 신발의 아이젠 끝에 걸려서 추락한 것 같습니다.”
▼ 구조 과정은 어땠습니까.
“사고 다음날 헬기로 수색하는데 전날 보였던 시신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주위를 네 바퀴 돌고 못 찾아 돌아가려는데 제 눈에 뭔가 걸렸습니다. 그래도 미영씨랑 나랑 인연이 있기는 했는가 봐요…. 구조하려고 하는데 구조하다 또 사고가 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헬기로 구조하려고 했는데 파키스탄 헬기회사 쪽에서 번복하는 바람에 3일 만에 우리가 직접 들어가게 됐습니다. 우리보다 산 오르는 기술이 없는 파키스탄 포터들이 자기들이 수습해서 올 테니 1만달러를 달라고 했는데,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그래서 찾으러 나섰습니다. 미영씨 있는 지점이 (오전) 9시 반 이후엔 눈이 녹아 위험해질 것 같아 딱 계산해서 다섯 번으로 나눠 새벽 3시에 출발해 로프를 설치하면서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마디는 박희용이란 친구가 하고, 나하고 같이 있던 후배 윤치원이가 그 다음 구간을 하고, 문철환이란 친구가 그 다음 구간하고, 마지막 구간은 제가 했습니다. 미영씨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더라고요.”
▼ 왜 보여주기 싫었습니까.
“보여주기 정말 싫었어요. 평상시에 그 좋은 모습들만 기억하라는 의미도 있고. 예쁜 모습 보여주고 싶지 그런 모습은…. 보니까 반쯤만 노출됐는데 외상은 없더라고요. 가슴 쪽에 부종이 있는 걸로 봐서, 가슴 아픈 얘기인데, 한두 시간은 혈액이 돌았던 것 같아요. 머리를 다쳤으니 고통은 없는 상태였겠지만, 의학적으로 그렇다고 하대요. 입술은 까맣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데… 많이 변했더라고요. 그래서 20년 동안 제가 쓰고 다니던 분홍색 모자를 벗어서 씌어줬어요. 바라크바라고 하는 모잔데 뒤집어씌우면 얼굴이 안 보입니다. 뒤를 보니까 함몰되어 있더라고요. 물이 흐르는 지역이니까 그 안에 물이 고여 있었고…. 얼어 있는 상태라 몸이 묶여지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부드러워졌습니다. 근데 제가 미영씨랑 첫 등정하고 나서 사준 목걸이가 보이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디로 떨어졌나 했죠.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길래, 고미영의 m이고 마운틴의 m이라면서 준 건데, 늘 하고 다녔는데…. 그런데 파키스탄 병원에서 남편이라고 말하고, 옷 갈아입히는데 그게 딱 나오는 거 있죠. 그 목걸이가 일부러 풀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건데. 미영씨 가족들 만나 보여주고, 다른 건 몰라도 이 목걸이는 제가 가지고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걸고 있는 게 그 목걸이입니다. 코오롱, 정말 의리 있는 회사입니다. 사람이 보이질 않아 헤맬 때도 대표 분이 그러셨습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지 간에 시신은 찾는다고요. 지금도 고마움 잊지 않고 있습니다.”
▼ 결과적으로 대장님과 함께 2008년 K2를 등정한 산악인 4명이 모두 떠났습니다.
“미영씨 영결식 마치고 (K2에 오르다 사망한 대원 3명의) 1주기 추모식에 참석했습니다. 머리를 못 들겠더라고요. 참 정말 힘들더라고요…. 유가족이 저 놈아만 가면 사고 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K2는 자연재해고, 미영씨는 실수인데. 내가 떠민 것도 아니고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어느 누가 위로해도 내 귀에는 안 들어옵니다. 스스로에게 위로해야지….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는 슬프긴 했지만 애석하다 조금 더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했지, 이렇게 속에 꽉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요, 죄책감이나 부채감, 이런 거 있습니다. 그 후배들이 나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 대원들이 사고를 당했는데도 산이 무섭지 않습니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무섭지는 않습니다.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눈사태 때문에 움직일 수는 있지만 산 자체는 그대로거든요. 저도 정말로 힘듭니다. 작년에 그랬고, 올해 그랬고…. 그래도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두 번 다시 산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고, 산의 바깥 테두리에 있는 사람밖에 안 되고, 등반을 통해서 그 시련을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 그냥 잊으면 되지 왜 산에 갑니까.
“저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부채감, 그렇죠. 못했던 거를 대신이라도 해주자는 생각. 이걸로 해서 명예를 얻자는 게 아니라, 얘들이 하고 싶어했던 등반을 내가 한번 해보자, 대신이라도 해서 거기에 내가 위안을 얻자.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죠. 내가 했지만 너희가 한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히말라야를 죽기 살기로 가고 또 가는 게 이해가 됩니까.”
▼ 이번 등반은 혼자 하십니까.
“부담스럽게 다른 사람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이 힘듭니다. 나하고 같이 간 대원이 또 문제가 있으면 나 힘들어 몬 삽니다. 차라리 문제가 있더라도 나 혼자 죽지. 혼자 가더라도 산에 가면 다른 나라 대원들하고 같이 다니겠죠. 그 큰 산에 혼자 로프를 깔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8000m 산 오르려면 로프 3000m를 들고 가야 할 겁니다. 8월 27일에 안나푸르나로 들어갑니다. 미영씨가 오르지 못하고 남겨둔 봉우리 세 개를 오를 생각입니다. 내년 여름까지는 다 끝날 것 같네요.”
▼ 그러다 사고가 나면…
“말씀 잘 하셨습니다. 각오하고 가는 겁니다.”
▼ 산에서 목숨을 잃어도 괜찮습니까.
“괜찮기는 하지만 땅에서 편안하게 죽고 싶습니다.”
▼ 산에 오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산마다 다르겠지만, 산에 올라가면서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으면 오히려 산이 아니죠. 땀을 뻘뻘 흘리다 모퉁이를 지나 바람을 맞으면 누구나 시원하다고 말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드는 거죠. 큰 산이나 작은 산이나 오르고 나면 이런 잔잔한 만족감이 듭니다.”
▼ 그럼 왜 큰 산에 갑니까.
“사업하는 사람한테 작게 하지 왜 크게 하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느끼는 감정은 같지만 성취감은 다르죠.”
▼ 무슨 생각을 하며 산에 오릅니까.
“낙석, 눈사태 같은 것들이 나를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안전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그건 히말라야 오르는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높은 산에 오르다보면 고통스럽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스스로 주문을 겁니다. ‘한 발은 고통이고 한발은 희망이다’ 계속 그렇게 주문을 걸면서 갑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산에 오르진 않습니다. 내 좋아하는 산인데 가서 우울하면 되겠습니까.”
▼ 신을 믿습니까.
“나는 종교는 없지만 나를 관장하는 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관장하는 신께 감사합니다.”
▼ 일부러 험한 산에 가는 건 아닌가요.
“더 험한 목표물을 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러 위험한 쪽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안전을 첫째로 합니다. 해외 산악대에 비해서 한국은 히말라야 등산에 치중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40,50년 정도 뒤진, 걸음마 단계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준에 맞지 않게 외국과 비슷하게 가라는 건 죽으러 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8000m를 가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산소통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영씨도 처음 몇 번은 신체를 보호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 산소통을 썼습니다.”
▼ 험한 산에 오르는 산악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이 다 하는 겁니다. 산악인이 일을 안 한다고 해서 국가 경제가 안 돌아가는 거 아닙니다. 세계화에 발맞추려면 해야 합니다. 사람한테는 각기 제 몫이 있어요. 산악인이 이렇게 등정함으로써 사람들의 도전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대장님에게 산은 무엇입니까
“산은 삶의 일부이면서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안 가면 왠지 내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소외된 것 같고, 살면서 뒤지는 느낌이 들어요. 삶이 무의미하다고 할까. 내가 살아가는 이유 중 90% 이상이 등산입니다. 산이 엄마 품 속 같다던 미영씨는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2년 동안 등산을 해왔으니까 그 자체가 삶이 된 겁니다.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산에 오를 수 있지만 아무나 히말라야 등반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내가 선택되었고,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열심히 하고 싶어요.”
▼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내 자신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전 명예를 위해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산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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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대장은 산악인 고미영이 목표로 삼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재개했고, 고미영이 밟지 못한 네 개의 봉우리 모두를 기필코 올라 그 정상마다 활짝 웃고 있는 고미영의 사진을 묻어두고 내려왔다. 안나푸르나에서는 눈사태를 만나 죽을 뻔도 했고 기상악화 때문에 발길을 몇 번 돌리면서도 줄기차게 도전한 끝에 이룬 성과였다. 8천미터의 극한 상황을 함께 견딘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히말라야 정상의 눈자락 밑에 파묻고 온 고미영의 사진은 영원히 그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이고 저승에서도 그녀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애인이든 동료든 자신이 목숨 걸고 좋아했고 하려고 했던 일을 역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완수해준 사람이 있는 건 인간이면 누구나 바라는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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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성의 부산산악인 열전 <31> 김재수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한 세계적 거인
(국제신문 디지털콘텐츠팀 2014-10-12)
'코오롱스포츠챌린지 팀'의 김재수 대장이 2011년 가을 초오유(8201m) 등정에 성공, 1990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1년 만에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는 위업을 이뤘다. 이로써 그는 세계 27번째, 아시아에서 8번째, 한국에서는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에 이어 4번째 14좌 완등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8000m급 거봉을 오른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하물며 14좌를 모두 등정한다는 것은 진정 대단한 기록이다. 눈사태와 폭풍설, 크레바스 외에도 높이가 만들어 내는 저기압과 저산소 등 극한의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 또 수없이 반복되는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 목숨을 건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과 불굴의 도전정신이 없다면 꿈을 이룰 수 없다. 함께 고통을 나눈 가족과 동료 대원, 현지 고용인, 후원자들의 숨은 공이 지대함은 물론이다. 이에 더해 히말라야 신이 받아들여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 산악계의 거인 김재수. 그는 1961년 영화 '친구'의 무대인 부산 서구 남부민동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누나의 영향이 컸다. 동생에게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등산을 적극 권유했고, 고교시절 보수동 헌책방에서 구한 등산잡지를 탐독하며 등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다. 성지공고를 졸업하고 군 입대 전 5개월간 금정산 암벽에 매달렸다. 비록 독학으로 암벽기술을 익혔지만, 열정으로 몰입하다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 당시 부산 등반계에서 '바위 잘하는 놈'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그는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으로 등산을 꼽는다.
그의 첫 고산등반은 1990년 한일합동대의 에베레스트 원정이다. 매일 아침저녁 20㎞를 달리며 체력을 다진 그는 다른 대원보다 2시간 빠르게 지구의 용마루에 섰고, 동료를 기다리다 2시간 반 동안 정상에 머무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듬해 대한산악연맹의 시샤팡마(8012m) 원정대에 부산 대표로 참가, 남서벽을 통산 두 번째로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1992년에는 로부제 동벽에 '블랙 다이아몬드' 루트를 개척, 국내 산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줬다. 이어 칸텡그리, 초오유, 포베다를 단독으로 오르는 진보된 등반활동을 폈다. 특히 1997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에서 12시간 만에 등·하산을 모두 마쳐 최단시간 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고소체질'인 그는 고산에서 지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고소적응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처음부터 14좌 완등 타이틀을 목적으로 히말라야 등반을 한 것은 아니다. 1990, 2000년대 스포츠클라이밍계의 여제였던 고미영의 14좌 완등을 돕기 위해 등반파트너로 다시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다. 고미영이 2009년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 후 하산하다 추락사하는 시련을 겪었으나, 그녀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의지로 고미영이 못다 오른 8000m급 봉을 모두 올랐다.
14좌를 완등하기까지 여정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2008년 경남산악연맹 원정대를 이끌고 K2(8611m)에 도전해 고미영과 함께 등정에 성공했지만, 대원 3명과 고소포터 2명을 눈사태로 잃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한동안 깊은 갈등에 빠졌으나, "그들의 몫까지 함께 올라야 한다"는 고미영의 격려에 힘입어 14좌 완등 행보를 계속해 나갔다.
고미영과 팀을 이뤄 3년 만에 8000m급 7개 봉을 올랐다. 당시 오은선과의 14좌 완등 레이스가 언론에 부각되면서 무리한 경쟁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빠른 진행이었다. 고미영이 낭가파르바트에서 추락사하자 많은 비난이 뒤따랐다. 특히 선정적인 일부 언론에서는 고미영 가족이 공개한 메모 형식의 편지를 근거로 두 사람을 '연인 관계'로 보도해 깊은 상처를 줬지만, 이를 일축하고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4좌 완등에만 전념했다.
2009년에는 고미영의 14좌 완등 라이벌이었던 오은선의 캉첸중가(8586m) 등정 의혹을 제기해 국내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해 가을 악연이던 오은선과 안나푸르나 등정을 시도하다 눈사태에 휩싸이는 등 고전 끝에 악천후로 물러났고, 2011년 봄 재도전해 정상에 올랐다. 당시 국내 언론은 14좌 완등을 인정했지만, 일각에서는 1993년 등반허가를 받지 않고 오른 초오유 등정을 부정했다. 그 역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등정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네 차례의 도전 끝에 2011년 가을 초오유 등정에 성공, 무허가 등반의 멍에를 벗고 14좌 완등의 종지부를 찍었다.
부산이 낳은 세계적인 산악인 김재수. 낙천적이고, 표정이 밝다. 단순 명료함을 좋아하며, 예의바르고, 겸손하다. 산사나이의 의리를 중요시 여기는 그는 박영석 대장이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중 실종되자 현지로 날아가 수색에 나서는 휴머니즘을 발휘했다. 14좌 완등 후 20여 년간 고산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코오롱등산학교의 해외 등반과정을 맡아 고산등반을 꿈꾸는 산악인들을 위해 히말라야에서 실전을 전수하고 있다. 비록 경남산악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부산산악포럼과 서성호기념사업회의 이사로 활동하며 고향 부산의 산악문화 발전에 헌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