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야심이 숨은 글씨, '곤설(衰雪)'
석문잔도는 진령 남북을 잇는 주요 도로의 하나로 한나라 때부터 사용된 고도(古道)다. 지금도 잔도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길 옆으로는 한나라 때 이후의 석각이 많이 있다. 그중에 국보급 석각 13점을 한중박물관인 고한대(古漢臺)에 옮겨 놓았는데, 거기에는 조조가 쓴 ‘곤설(衰雪)' 이라는 비석이 있다.
가로 1 미터, 세로 50센티미터 정도의 암석에 새겨진 이 글씨는 조조가 석문을 지나다가 흰 거품을 날리며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를 보고 시적 감흥을 받아 쓴 것이라고 한다. ‘곤설’ 이란 글씨는 소용돌이치며 물거품을 날리는 격류가 마치 굴러가는 눈덩이와 같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글자인 ‘곤(滾)’ 에서 물을 의미하는 삼수변(氵)이 빠졌다. 조조가 잘못 쓴 것일까? 아니다. 이는 조조의 손에 물거품이 날아와 묻어서 삼 수변까지 쓸 필요가 없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시인 조조의 탁월한 예술적 면모를 보여 주는 참으로 멋진 일화다. 하지만 이 글씨에는 또 다른 사실이 숨어 있다. 그것은 조조의 야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 조조는 적벽대전 이후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다. 천하통일이라는 조조의 야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이제까지 조조의 힘에 주눅이 든 정쟁자(政爭者)들에게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 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조는 이러한 경쟁자들을 단속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권위를 회복해야만했다.
서기 210년,황제는 조조에게 3만 2,000호의 봉지를 늘려 주려고 했다. 이에 조조는「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을 발표하여 이를 사양한다. 대신 조조의 세 아들이 각각 후(候)에 봉해진다. 조조는 봉지를 사양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반대파들의 지탄을 면하고, 아들들에게는 작위를 주어 든든한 기반을 구축하게 했다. 그리고 마초와 한수를 무찔러 건재함을 과시하고 위공(魏公) 에 오른다. 조조가 천하통일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내보이며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조조는 이번 기회에 정적들을 소탕하고 확고한 권력을 유지할 필요를 느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안정적인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장로 정벌을 통한 한중평정은 조조의 이러한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조는 전쟁터에서 시간을 소비할 수 없었는데, 이는 한중평정 후 곧바로 허도로 돌아와 조정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조조가 물이 묻었기 때문에 빼고 썼다는 ‘곤(哀)’ 이라는 글자는 임금만이 입는 옷인 곤룡포를 의미한다. 조조가 한중평정이라는 원정길에서 이러한 글씨를 쓴 것은 그가 한중을 평정한 뒤에는 위왕에 오르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중을 평정하고 위왕이 되었다. 사마의가 촉까지 진격하면 유비를 물리칠 수 있다고 진언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이처럼 조조가 위왕에 올라 정치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위왕에 올랐지만 끝까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권위는 황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에 부하들이 황제가 될 것을 간청하자 조조가 이렇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정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 곧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소. 만약 하늘의 뜻이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나는 주나라 문왕이 되겠소. 그 정도로도 홉족하오.”
조조는 자신이 이룬 공덕은 왕으로 족하고 문왕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태자인 조비가 나서서 황제가 될 것을 암시했다. 그만큼 조조는 정치적으로 영리했던 것이다.
정치가들은 국가적 안위와 백성들의 평안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권좌를 동경한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역사가 이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록하겠노라고 별려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권좌가 역사 위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 > 三國誌 기행, 허우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8. ‘선비’로 인정받고 싶었던 신의(神醫) 화타 (0) | 2022.02.16 |
---|---|
27. 관우에 필적할 명장, 황충 (0) | 2022.02.16 |
25. 한말 청류의 대표주자 순욱, 난세에 그뜻이 지다 (0) | 2022.02.16 |
24. 방통의 죽음, 촉한 멸망의 시작 (0) | 2022.02.16 |
23. 한수, 양주(凉州)의 실질적인 맹장 (0) | 2022.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