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로 인정받고 싶었던 신의(神醫) 화타

 

후한 말기의 전설적인 의사로 알려진 화타는 원래 수리와 경전에 해박한 학자적 선비였다. 그는 의술에도 능통하였는데, 어지러운 난세에 질병과 부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는 데 활용하였다. 화타의 의술은 신기에 가까워 내과와 침구뿐만 아니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 인해 원근각지에서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화타가 살던 시대의 의술은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런데 화타 는 마비산(麻佛散)이라는 마취약을 발명하여 외과수술에 응용하였다. 이는 조제와 침구 위주의 당시 의술에서 볼 때 매우 혁명적인 치료법이었다. 화타가 신의로 추양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자가 배에 병이 생겼는데 가운데가 끊어질 둣이 고통스러웠다. 십여 일 만에 머리털과 눈썹이 모두 빠졌다. 화타가 말하기를 '비장이 반이나 썩었지만 배를 갈라서 고칠 수 있다.’ 며 약을 먹인 뒤 배를 가르니 화타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 칼로 썩은 살덩이를 떼어내고 고약을 바른 뒤 약을 마시게 했다. 그랬더니 100일 만에 병이 나았다.”

 

그렇다면 화타는 어떻게 이러한 치료법을 알았을까? 후한 말기에는 동서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이란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여 궁중에서는 이란의 옷차림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화타는 이때 이란인(幻人)의 환술(幻術), 즉 인도의 대마를 내복하고 행하는 전신마취의 절개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화타는 의술 외에도 ‘오금희’ 라는 심신수련 체조를 만들었다. 이는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그리고 학 등의 동작을 흉내 내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외과의 비조이자 체육의학의 창시자’ 인 화타가 조조에게 죽음을 당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말을 빌리면, 본래 선비로 인정받길 바랐던 화타가 조조에게 한낱 방술사(方術士)로 간주되자 마음속으로 항상 괴로워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학문 숭상이 최우선인 동양적 사유방식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지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기술적인 분야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화타의 이야기를 「방기전(方技傳)」에 넣고 ‘현묘하고 세밀하며 매우 뛰어난 기술이기에 사마천을 따라 나 역시 기록해 놓는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화타는 선비가 아닌 신의였기에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며 칭송받고 있다. 이는 화타 자신에게 역사적으로 운명 지어진 의사로서의 길을 충실히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세치 혀로 사는 위정자들의 이름은 잊혀져도 한 명의 소중한 목숨을 살려준 손길은 만대(萬代)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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