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의 죽음, 촉한 멸망의 시작
방통은 형주 양양 출신이다. 어렸을 때는 매우 평범했고 인물도 추남이어서 그를 높이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사마휘만이 방통의 인물됨을 알고 남주(南州)선비들 가운데 1인자가 될만하다고 평가했다.
방통은 인물을 평가하고 사람을 교육시키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을 평가할 때마다 칭찬만 했는데 과한 칭찬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자 방통은 명쾌하게 말했다.
“지금 세상이 크게 혼란하여 정도(正道)가 쇠퇴하니 착한 사람은 적고 악한 사람만 많습니다. 이제 한창 풍속을 되찾고 도업(道業)을 일으키려고하는데, 무엇보다 말을 아름답게 해야만 홈모하며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선한 일을 하는 자도 줄어들 겁니다. 이제 열 명을 뽑아 다섯 명을 잃어도 오히려 그 절반은 얻는 것이며,세상을 점점 더 교화하고 뜻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력하게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방통의 추한 얼굴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손권을 만났 을 때도 그랬고 유비도 결과는 비슷했다. 장비와 노숙, 제갈량의 천거가 드러나서야 군사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첫인상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장비가 술에 취해 공무를 보지 않고 있는 방통을 꾸짖기 위해 찾아간 부분은 작가가 꾸며낸 허구다. 그러므로 장비가 보는 앞에서 공무를 처리한 것도 사실이 아니다.「촉서」“방통전”을 보면, “선주(유비)가 형주를 관리하면서 방통에게 뇌양현의 현령 자리를 제수하였는데, 현령으로서 본연의 업무를 하지 않아 해임되었다. 오나라 장수 노숙은 선주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방통은 일개 현령 따위를 맡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니 치중(治中)이나 별가 정도의 중 책을 제수해야 그의 재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논데, 나관중은 이 내용에 근거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 장비가 관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삼국지연의』의 모태라 할 수 있는『삼국지평화』에 장비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즉 방통의 행동거지에 유비가 분개하자 이를 본 장비가 방통을 잡아다가 죄를 묻겠노라고 큰소리를 치며 뇌양현 관아로 쳐들어가 칼을 휘둘러 생포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비가 난동을 부릴 줄 미리 알고 방통이 도술을 부려 개를 자신의 모습으로 바꿔 놓은 것이었다. 나관중은 이처럼 초기의 황당무계한 내용을 보다 사실적인 이야기로 재창작하였는데, 이는 어수룩한 장비를 통해 방통의 뛰어남을 한층 돋보이게 한 것이다. 또한 방통이 낙봉파에서 매복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것도 사실이 아니다. 군사를 이끌고 낙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을 나관중이 보다 극적인 장면으로 연출해 놓은 것이다.
『삼국지연의』로 인해 발생한 오해와 억지가 마치 진실처럼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낙봉파도 그 대표적인 예다. 나관중에 의해 방통이 죽은 곳이 결정되자 후세 사람들이 사천성 덕양의 험준한 지점에 낙봉파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그런데 청나라 때 시인이자 학자인 왕사진이 「낙봉파에서 방사원을 조상하다」라는 시를 지었고, 이것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수록되었다. 이쯤 되면 관련 석학이나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진실처럼 믿게 마련이다. 『삼국지연의』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중독이 아닐까? 잘못된 아홉이 사실이라고 떠들면 진정한 하나는 묻혀버리는 대중심리의 활용,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적 • 역사적 공고화. 이는 비단 문학에서만은 아니겠지만 『삼국지연의』는 이 부분에서 최고, 최선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방통은 익주공략으로 촉나라 건국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아쉽게도 그 과정에서 전사함으로서 결국 촉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 방통의 죽음으로 제갈량이 익주로 오고 형주에 홀로 남은 관우는 교만한 마음에 정세판단을 잘못하여 형주를 빼앗기고 목숨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사태는 급격히 변하여 오와의 동맹이 깨지고 쟁비와 유비도 사망하니, 촉은 건국과 함께 도미노처럼 멸망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삼국 가운데 인재가 가장 적었던 촉의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 천년대계(千年大計)의 최우선은 뛰어난 참모가 얼마나 포진해 있느냐에 달려 있으니 제왕의 덕도 결국 참모의 역량에 좌우되는 것이다.
진수는 방통을 가리켜 ‘순욱의 형제뻘’ 정도로 보았는데, 이는 방통 역시 뛰어 난 인재이지만 제갈량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통은 인재난을 겪고 있던 유비진영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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