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와 건안문학, ‘동한말(東漢末)의 실록(實錄)’
조조는 전쟁터에서도 틈만 나면 시를 지었다. 전란의 비참함을 가식 없이 표현했으며. 인간적인 고뇌와 정감을 낭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호쾌하고 진솔한 조조의 시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진수는 이런 조조를 가리켜 “안으로는 문학을 수양하고 밖으로는 무공을 완성했다.” 고 평했다. 문치무공(文治武功)한 조조의 업적을 잘 표현한 것이다. 조조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맏아들 조비와 셋째아들 조식에게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삼조(三曺)라 불리며 당대 문학을 주도하였다. 조조는 업성의 동작대 안에 문창전(文昌展)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공융(孔融), 진림(陳林), 왕찬(王粲) , 서간(徐幹), 완우(抗瑀), 응창(應瑲), 유정(劉楨)이 유명했다. 이들을 일컬어 헌제의 연호를 따서 건안칠자{建安七子)라 한다. 삼조와 더불어 건안칠자는 새로운 문학을 추구했다.
민요라 할 수 있는 악부체의 현실주의를 계승하여 오언시(五言詩)로 완성했고, 유가적(儒家的) 취향을 벗어나 웅장한 기개와 청신한 격조를 표현했다. 시에 나타난 이러한 풍격을 ‘건안풍골(健安風骨)’이라 하였고, 이러한 문학적 변화는 ‘건안문학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켜 이후의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건안풍골 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위진남북조시대의 문학이론가인 유협(劉勰)은 그때까지의 문학이론을 망라하여 『문심조룡(文心調龍)을 저술하였다. 그 책에서 유협은 이렇게 적고 있다.
"건안시기의 문학은 강개(慷慨)함을 선호했다. 내란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풍속이 쇠퇴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만 가득 쌓였다. 그래서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시름을 붓에 의지해 풀어냈다 즉 건안풍골이라 함은 ‘강개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개한 풍골은 조조의 시풍에 잘 드러난다. 이는 조조가 천하대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통솔하길 30여 년, 손에서는 글을 떼지 않았고 고지에 오르면 반드시 부(賦)를 지었으며, 새로운 시를 쓰면 어떤 악기에도 잘 어울리는 노래가 되었다.”는 말처럼, 조조는 전란의 와중에서도 시인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리하여 만가(輓歌)의 형식을 빌려 전란과 민생의 질고를 그린「호리행(蒿里行)」, 군대생활의 고통을 묘사한「고한행(苦寒行)」, 천하통일의 웅대한 포부와 진취적 기상을 노래한「단가행(短歌行)」등 그의 시는 24수가 전해 온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당시의 혼란한 정치상황과 난세에서 생활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동한말의 실록” 으로 일컬어진다.
「호리행」 의 일부를 보자.
투구 갑옷 속에는 이가 끓고 鎧甲生蟣蝨
만백성은 죽어만 가네 萬姓以死亡
백골은 이슬에 젖어 들녘에 나 뒹굴고 白骨露於野
천리 안의 닭 울음도 들리지 않는구나 千里無鷄鳴
산 백성이란 백에 하나쯤인가? 生民百遺一
생각하면 할수록 창자가 끊어지는구나 念之斷入腸
조조는 군사전략, 정치, 문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다. 교양이라 할 수 있는 음악과 서예에도 출중했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조조는 역사의 낙오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간신'이라는 멍에가 그가 이룩해 놓은 많은 공적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소동파는 조조와 제갈량을 비교하면서 병법, 영토, 전쟁은 조조가 월등하지만, 지극한 충신이었다는 점에서는 제갈량이 뛰어나다고 했다.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재능과 공적을 평가하기보다는 덕망이 높은 사람을 선호하는 전통적인 방법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스스로 재능을 쌓되 덕망도 경비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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