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政略)’에 희생된 여인,  손부인

 

손견은 본처 오부인 외에도 여러 명의 소실을 두었다. 오부인은 손책과 손권 등 아들 넷을 낳고 딸을 하나 낳았는데, 옛날 역사서가 그렇듯이 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하지만 그 딸은 정략결혼에 의해 유비에게 출가한 손부인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 「촉서」 "법정전”을보자.


“손권은 자기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냈다. 여동생은 재기(才氣)가 있을 뿐더러 강인하고 용감해서 오빠들을 닮은 구석이 많았다. 또한 100여 명의 시비가 모두 칼을 차고 도열해 있었기에 유비는 내실에 들어갈 때면 항상 마음이 두려웠다.”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오라버니들의 기질을 닮은 손부인은 오부인의 딸 일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부인의 이름을 인(仁)이라고 했지만,이는 손견의 서자 (庶子)인 손랑의 다른 이름이지 손부인의 이름은 아니다. 원나라의 잡극에서는 손안(孫安) 소저(小祖)라고 불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손상향(孫尙香)이라는 처녀다운 이름율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손부인의 이름은 아니다.

 

손부인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라비의 패업달성을 위해 시집온 것이기에 애당초 유비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시녀들로 하여금 칼을 차고 호위하도록 한 것도 손권의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이 선택한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유비가 익주를 점령 한 뒤 손부인이 오나라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유비 또한 익주를 차지한 뒤 곧바로 과부로 지내던 유장의 형수인 오씨를 아내로 삼았다. 손부인이 오나라로 간 것은 유비에게 있어서도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유비도 손권과의 동맹을 위해 손부인을 맞이했을 뿐이지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북하고 다분히 위협적인 상황에서 부부관계가 원만할 수 없었고, 손 부인의 귀향은 오히려 가슴 졸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유비의 숨통을 틔워주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의 전신인 송대(宋代)의 『삼국지평화』나 원대(元代)의 연극 “두 군사가 강을 사이에 두고 지혜를 겨루다(兩軍師隔江鬪智)” 에서는, 손부인은 처음에는 유비를 해치려고 했지만, 유비를 사랑하게 되어 오히려 추격해 오는 오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관중은 이러한 기본적인 내용에 유비가 데릴사위가 되는 이야기를 붙여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했다. 이 로써 손부인은 사랑과 결단성을 갖춘 여장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손부인의 말로는어떴을까? 촉한정통론의 대표주자인 습착치(習䥣齒)의 『한진춘추』 를 보면,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하자 손부인은 돌아가지 못하고 장강을 보며 슬프게 울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아두를 데리고 오나라로 가려고 할 때, 장비가 이를 막고 꾸짖는데 이에 수치심을 느낀 손부인이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나관중은 손부인의 마지막을 차마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없었던지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못했다. 모종강은 이 모두를 참고하여 “오에 있던 손부인은 유비가 효정전투에서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을 듣고 강변으로 가서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흐느끼다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고쳤다.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온 여인이 무엇 때문에 강물에 투신한단 말인가? 이는『삼국지』뿐만 아니라 남존여비라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하여 손부인을 열녀로 만들고 후세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하였으니 지금도 북고산 정상에는 손부인이 강물에 투신한 곳이라며 제강정(祭江亭) 을 세워 놓았다.


손부인은 죽음조차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으니 이는 손부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이는 중세 봉건사회의 모든 여성이 겪었던 것으로 비단 손부인만의 일은 아|었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은 철저히 무시되는 사회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유비와 손부인의 혼인은 역사상 수없이 행해진 정략결혼 가운데 하나였고, 손부인은 그러한 정략결혼의 철저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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