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동화식전 저자와 역자 소개

 

저자  李載運, 1721~1782


자는 성거(聖車)이고 호는 식니당(食泥堂)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북인(北人) 당파의 영수인 이산해(李山海)의 직계후손으로 서파(庶派) 지식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 이래 경제사상에 관심이 깊은 가학의 전통이 있었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겨우 몇 달 참봉을 지내다가 파직되었고, 평생을 불우한 지식인으로 살면서 소품문 취향의 작품을 썼다. 1750년 무렵에 지은 《해동화식전》에서 부의 획득을 긍정하고 부자를 찬미하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번역  안대회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대동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문장의 품격》, 《벽광나치오》, 《정조치세어록》, 《궁극의 시학》, 《선비답게 산다는 것》, 《담바고 문화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완역 정본 택리지》(공역), 《연경, 담배의 모든 것》, 《소화시평》, 《북학의》, 《녹파잡기》 등이 있다. 지식인들의 삶과 지향이 녹아든 18세기 지적 성찰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풀어낸 ‘18세기 지식 총서’의 총괄기획을 맡고 있다.

 

 

 

 

2.  해동화식전 (본문)

 

 

 

이재운 (李載運, 1721-1782) 

  
서론


   기자(箕子)는 “사람을 격려할 때는 다섯 가지 복을 활용하고, 위엄을 보일 때는 여섯 가지 벌을 활용한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 를 풀어보면,덕(德)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복된 일을 하도록 격려 하려고 쓴 말이고, 악(惡)하다고 말한 것은 위엄을 보이려고 벌로 내세운 말이다.
   그러나 군자가 덕을 좋아하더라도 처지가 곤궁하면 자기 홀로 선량하게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반면에 만석꾼 집안에서는 굳이 격려의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몸소 실천하여 착하게 살고 있다. 부유하면 덕이 모여들고 가난하면 악함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덕과 악은 복과 벌의 뿌리요, 가난함과 부유함은 또 악행과 덕행의 근본이다.
   군자는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소인은 재물을 얻으려고 자신을 희생한다. 부유하다고 누구나 덕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가난하다고 누구나 악을 쌓는 것은 아니나, 이런 처신의 뿌리와 근원을 깊이 살펴보면 그렇다. 그러하니 소인이 이익의 추구에 밝기는 해도  만물을 이롭게 하면 넉넉히 의로움에 부합할 수 있고, 군자가 본디 의로움을 이익으로 삼기는 해도 이익을 추구하면서 의로움까지 실현할 수 있다. 그러니 군자 역시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군자가 세 곱절의 이윤을 남기며 장사하는 상인의 수완을 잘 안다고 하여  책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생업의 본질


   이사마(李司馬)는 이렇게 말한다. 저 단군(檀君) 이전에 있었던 일까지는 내가 잘 모른다. 동방의 역사에는 여덟 개 조항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그 가르침을 베푼 이래로 남자는 논밭을 경작할 줄 알았고, 여자는 길쌈을 잘하였다. 여러 분야의 장인, 재물을 좇는 점포 상인들과 행상들, 물고기 잡는 어부와 짐승을 잡는 사냥꾼, 나무하고 나물 캐는 사람, 의약을 다루거나 점을 치는 사람, 경전과 역사서를 연구하고 문장과 시구를 고르며 입에 붓을 물고서 끙끙대며 글을 짓는 선비,말을 달리고 검술을 연습하며 활을 당기고 화살을 뽑으며 병서를 읽고 진법을 연마하는 무인 둥 무엇을 하는 누구이든 추구하는 바는 모두 일을 잘하여 먹을거리를 구하는 데 있다.
   갓난아기가 막 태어나서 응애응애 울고 있을 때 젖을 물리면 바로 울음을 그친다. 나이가 100살에 이르러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듯이 골골하는 늙은이도 자손들이 고기와 죽을 내어오면 그때에는 얼굴에 웃음을 보이며 기쁜 표정을 짓는다. 더군다나 장성한 나이로부터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나이에 이르는 강건한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욕망이 번갈아 찾아들고, 온갖 걱정이 여기저기서 솟아난다. 나면서부터 잘 아는 사람이든 아니면 배워서 잘 아는 사람이든 부유함을 구하고 재물을 모으기보다 앞세우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부와 재물을 알게 되면 이를 얻기 위해 계획을 짜낼 수밖에 없고, 계획을 짜내면 솜씨 좋게 얻을 수밖에 없다. 귀와 눈,입과 코, 팔과 다리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어떤 물건이든 마음으로 흠모하고 여기에 정신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이야말로 하늘의 이치로 볼 때 당연하고 인간의 욕망으로 볼 때 팽개쳐둘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치산(治産)을 잘하는 사람은 재물을 크게 불리고, 그다음 사람은 아끼고 절약하며,그다음 사람은 변화를 일으켜 형통하고,그다음 사람은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한다. 아무 수완이 없는 사람은 거지로 산다.

 


팔도 물산의 큰 줄거리


   저 관서와 해서 지방은 명주실과 목면, 찰기장과 메기장, 차조와 좁 쌀, 콩과 보리가 많이 난다. 삼남 지방은 물고기와 소금,옻나무와 대 나무,곡물과 목면, 소나무와 닥나무,생강과 파, 마늘과 부추, 연초와 과일, 삼과 모시, 싸리나무와 칡이 많이 난다. 대관령 북쪽 지역은 말과 가축,올이 가는 베, 다리 만드는 머리털, 각종 해산물이 많이 난다. 강계의 폐사군과 삼수갑산 지역은 인삼과 담비 가죽, 곰과 범, 표범, 산돼지, 산양, 노루, 사슴, 여우, 이리,삵과 맹견이 난다. 경주에서는 수마노와 수정이 나고, 한산과 임천에서는 올이 가는 모시가 많이 나며, 홍산과 남포에서는 올이 거친 모시베가 많이 난다. 영천에서는 노란색의 올이 가는 베가 많이 나고, 제주에서는 큰 말과 귤,유자, 단감,석종유,우황, 진주, 전복,대합이 많이 난다. 은과 철은 1000리 되는 땅의 이 산 저 산에서 왕왕 채굴하여 제련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물산의 큰 줄거리이다. 모두가 온 나라 백성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산물로서 의복으로 지어 입고 음식으로 해 먹으며,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봉양하고 돌아가실 때는 장례를 치르는 도구이다.


분업

 

   따라서 농부는 저 산물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장인은 저 산물로 각종 기구를 공급하며, 상인은 저 산물이 나는 곳에 찾아가 구매하여 산물이 없는 곳으로 가서 판매한다. 이렇게 서로 맡은 일을 나누어 잘하고 각자 삶을 잘 꾸려간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누구나 부지런히 일하고,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다들 스스로 실행한다. 사람마다 자기가 제일 잘하는 재주를 발휘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여 필요한 물건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니 근본이 귀해지면 말단은 천해지고,말단이 귀해지면 근본은 천해진다. 귀해지는 것도 일시적 현상이요 천해지는 것도 일시적 현상이다. 아둔한 부녀자나 어린아이라 해도 모두들 천해지고 귀해지는 변화의 기미를 간파할 수 있다. 제각기 자기 일을 열심히 하여 즐겁게 이윤을 추구하니 마치 바싹 마른 장작에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타는 것과 같다. 밤낮으로 갖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각자 애지중지하는 재물을 내놓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쩨쩨하게 굴거나 아까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으니 이치로 보아 자연스럽고 누구나 욕망을 추구한다는 증거가 아니 겠는가?
   가령 농부가 한 해 내내 고생하여 거둔 열매를 아깝게 생각하여 수확한 곡물을 내놓지 않으면,장인이나 상인은 자기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장인이 기구를 만들어주지 않거나 상인이 재화를 유통하지 않으면 농부가 하는 일에도 문제가 생긴다. 세 부류의 직업은 백성들이 의식(衣食)을 장만하는 근원이다. 근원이 두터우면 물산이 풍족해지고, 근원이 척박하면 물산이 드물어진다. 농부와 장인, 상인은 위로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아래로는 가정을 부유하게 한다.

 

 

빈부의 차이와 치부의 동기


   부자는 남이 재물을 가져다주어서 부유해진 것이 아니고 빈자는 남이 재물을 빼앗아서 가난해진 것이 아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은 시기를 잘 포착하여 넉넉해지고,재주가 모자란 사람은 시기를 놓쳐서 넉넉해지지 못한다. 따라서 시기를 잘 포착하는 사람은 다가오는 해에 신발값이 크게 오를 것으로 보이면 나중에는 얻기 힘든 상품을 사들이기 쉬울 때 자금을 동원해 전부 사재기하기도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로 물건을 비춰보거나, 거북점을 치듯이, 또 부절(符節)을 맞추듯이 정확하게 예측한다. 대대로 나라에서 녹봉을 받은 것도 아니고 조상에게 큰 가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지만, 혼자 힘으로 천금(千金)을 벌어서 부귀 영화를 누리기도 한다.
   부자가 한창 재물을 취할 때는 몰인정하여 눈곱만큼도 남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부를 쌓은 다음에는 비로소 착한 사람으로 바뀌어 비루하고 좀스럽던 예전 태도를 매미가 껍질을 벗듯이 훌쩍 벗어던진다. 남의 아쉬운 소리를 선뜻 들어주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서둘러 구제하여 고매한 선비나 의로운 협객처럼 선행을 베푼다. 이전에는 부자를 향해 침을 뱉고 욕을 퍼부으며 원망하고 헐뜯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그의 의로움을 한없이 흠모하고 은덕에 감복하여 부자를 대신하여 목숨까지 내놓으려 한다. 그렇게 확 바뀐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작은 은혜를 베풀어서는 죽을 지경에서 헤매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면 방해를 받아 큰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명하기는 해도 가난한 자가 있어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사람들은 옳은 말이라 여기지 않고 떼로 몰려들어 비웃는다. 반면에 어리석기는 해도 부유한 자가 있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놔도 사람들은 그릇된 말이라 여기지 않고 번갈아가면서 칭송한다. 부유하면 인색하더라도 이웃을 보살필 수 있지만 가난하면 어질더라도 가까운 가족조차 지키지 못한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현명한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아래라는 말이며,어진 자가 인색한 자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재물을 가진 뒤에야 예절을 갖추게 마련이다. 가진 재물이 아무것도 없거늘 무슨 수로 예절을 차리겠는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 신발을 동여매고 현기증이 나서 비실비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면 더불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고,집에 들어오면 집안사람 모두가 그를 밀쳐냈다. 부모도 그를 자식이라 감싸지 않았고,형제도 그를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 아내도 남편이라 존대하지 않았고, 형수도 시동생이라고 공경하지 않았다. 친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그를 구석에 처박아 두었고,친구들은 술자리에서 그와 더불어 수작하기를 창피해하였다. 이 어찌 가난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부유함을 누리고 재물을 모을 수만 있다면,손이 불에 타고 발이 물에 빠질 망정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난하지만 어진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

 


이진욱 열전


   근래에 이진욱(李震郁)이란 거부가 있었다. 어려서는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았다. 진욱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숙부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숙부가 작은 방 하나를 비워서 머물게 하고는 먹여주고 입혀주면서 무엇을 하든 묻지 않았다. 진욱은 마음 쏟을 데가 없어서 옛 책올 가져다가 밤낮으로 읽고 외워서 책에 나온 큰 뜻을 대충 이해하였다. 진욱은 성품이 순수하고 행동은 근실하였으며, 사특하고 망령된 생각을 품지 않았다.
   이웃에는 아주 부유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진욱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서 은전 1000낭을 주면서 말했다.
“자네는 이 돈을 밑천으로 삼아 재물을 불려서 풍족하게 생활해보게나!”
   진욱은 돈을 공손하게 받아들고 동래로 떠나 왜관(倭館)에 들어 갔다. 왜관에서 머슴으로 일하는 왜인 하나가 땔나무를 안고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옷은 누더기에 태도에는 남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진욱은 왜인을 보고 불쑥 말을 건넸다.
“그대는 천한 일을 하느라 고생하느니 차라리 나와 함께 장사해서 이문을 남겨 나누어 가지는 편이 낫지 않겠소?”
   왜인 머슴은 깜짝 놀라는 한편으로 괴이쩍게 여겼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나는 본디 천한 태생이 아니오. 가난뱅이라 생계를 꾸려갈 밑천이 없어서 남의 머슴이 되어 여기에서 일한지 여러 해가 되었소. 그대는 이웃집 사람도 믿기 어려워 입도 뻥긋 안 하는 사업을 두고 그을음 가득한 부엌에서 만난 타국 사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가볍게 약속하려 드는구려?”
   그의 말에 진욱이 말했다.
“그런 말 마시오.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소.”
그러고는 은 1000냥을 주고는 돌아갔다. 왜인 머슴은 그 돈을 가지고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태 뒤에 진욱이 또 동래로 가서 보니 은이 세 배로 불어 있었다. 다시 왜인에게 주어 왜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왜인은 300냥을 진욱에게 주어 가정을 꾸리게 하였다. 진욱은 그때 막 나이 20여 세가 되어 비로소 아내를 얻어 집을 사서 살았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 조선에서는 통신사가 곧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왜인 머슴은 꾀를 내어 진욱과 싱외하며 말했다.
“그대는 나라 안의 인삼을 전부 거둬줄 수 있겠소?”
   왜인은 가지고 있던 원금과 이문을 합한 돈을 모두 진욱에게 주 었다. 사실 3년이 흐른 사이에 은은 벌써 수만 냥으로 불어났다. 진욱은 그 은을 갖고 관서와 관북으로 가서 일대의 인삼을 모조리 사들이니 더는 남아 있는 인삼이 없었다. 진욱은 사재기한 인삼을 가져다가 왜인 머슴에게 주었다. 왜인 머슴은 인삼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진욱은 한양으로 돌아왔다.
   통신사가 일본으로 출발할 때에 이르렀다. 호조에서 일본에 보낼 예물을 장만하기 위해 돈삼계(獤參契) 상인들에게 인삼을 준비해 놓으라고 독촉하였다. 돈삼계 상인들이 관서와 관북에 가서 인삼을 사려 하였으나 이미 진욱이 죄다 매입한 뒤라 보관해둔 인삼이 없었 다. 상인들이 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인삼을 얻을 수 없었다. 그제야 진욱이 호조에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소인이 삼가 일본에 보낼 인삼을 마련해보겠습니다.”
   호조에서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고 인삼을 구매할 은전을 전부 진욱에게 내어주었다. 통신사가 바다를 건너자 왜인 머슴이 과연 인삼을 은전의 수량에 맞게 현지에 운송해놓았다. 통신사가 귀국한 뒤에 진욱은 인삼을 제때 공급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반았다. 은전의 수량을 세어보았더니 열 배의 보상을 받은 셈이 되었다.
   진욱은 왜관에 가서 왜인 머슴과 인사를 나눈 뒤 은전의 절반을 떼어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왜인 머슴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나는 곤궁하여 내 힘으로 살아갈 길이 없어서 남에게 머슴살이를 하였소. 그대의 도움에 힘입어 나는 지금 나라에서는 관직을 얻고 집에서는 아내를 얻어 살게 됐으니 이것만 해도 벌써 기대 보다 넘치는 생활이오. 그러니 부자가 되는 것까지 어찌 감히 바라 겠소? 그대는 1000냥이나 되는 은을 일개 거지 아이에게 맡겨서 1 만 리나 떨어진 궁벽한 바다 밖, 천길이나 되는 깊고 험한 파도 속을 오가는 외로운 배 하나에 실어 보냈소. 그러고도 보물창고에 보관해 두고서 자물쇠로 잠가둔 것처럼 굳게 믿었소. 설령 관중(管仲)과 포숙아(鲍叔芽)처럼 평생 함께한 친구의 신의라 해도 이처럼 얼굴 한 번 보고 맺은 신의만 하겠소? 나를 인정해준 지기(知己)의 은혜에 감격하고 그대의 고매한 의리에 기뻐서 나는 이익을 불리기에 온 마음을 쏟았을 뿐 터럭 하나라도 감히 함부로 쓰지 않았소. 게다가 물건을 팔면 꼭 이문을 남겼고,때마다 좋은 기회를 만났으니 이는 모두 그대의 복일 뿐 내가 무슨 공을 세웠겠소?”
   왜인은 이렇게 단호히 사양하고 돈을 받지 않았다. 진욱은 이에 은전을 세 꾸러미로 나누고 그중의 하나를 주니 왜인 머슴이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은전을 받아서 귀국하였다.
   진욱은 드디어 거부가 되어 은전으로 넓은 저택과 노비와 가재도구를 구입했다. 그때부터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더는 행상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알고 지내던 가난한 집의 자제들에게 은전을 나누어 주고 팔도에 두루 행상을 다니게 하였다. 북경이나 동래를 오가는 상인과 역관 열에 예닐곱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할 때마다 진욱의 은전을 사용하였다. 진욱은 대체로 원금의 2할을 이자로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재화가 더욱더 풍족해져서 갑부로 불렸다.
   경성의 내의녀(內醫女)와 구사비(邱史婢), 침선비(針線牌) 및 사비(私婢) 가운데 재주와 미모를 갖춘 여인을 빠짐없이 불러들여 그가 알고 지내는 부유한 상인들에게 맡겨 돌보게 주선하였다. 덕분에 기생들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진주 장식을 하고 향낭을 차고 고운 꽃신을 신을 수 있었다. 머리에 얹은 다리는 뭉게구름처럼 호사스러웠고, 보석으로 꾸민 비녀는 순채(수련과의 수초)처럼 찬란했으며, 웅황은 큼직하여 손바닥만 하였다. 벽을 곱게 칠하고, 꽃무늬 병풍, 비단 이불에 수놓은 베개를 사용하면서 얼굴을 곱게 꾸며 몸값을 높인 기생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져서 진욱은 기생들로부터 인심을 크게 얻었다. 밤낮으로 어울려 노는 기생들이 휘황찬란한 차림으로 문을 메울 정도로 드나들었다.
   그 무렵 권세 높은 재상이 한 사람 있었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난 기생을 많이 불러다가 빈객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또 무장(武將)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도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장도 빈객들을 널리 초대하여 기생을 불러서 풍악을 울리고자 하였다. 군교(軍校, 오늘날의 장교)들이 성안에 있는 기생의 집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하나같이 비어 있었다. 그러자 진욱에게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하였다. 진욱이 작은 쪽지에 사연을 적어 기생에게 보내자 권세 높은 재상의 잔치 자리에 있던 기생이 편지를 받아 서로 보여주면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기생들이 서로 손을 이끌어 마루 아래로 내려가 마당에 꿇어앉았다. 재상이 괴이하게 여겨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기생들이 이렇게 말했다.
“이 아무개의 편지가 와서 그렇습니다. 소인들이 가자니 대감께 죄를 얻을까 두렵고,가지 않자니 이 아무개의 부탁을 차마 어길 수 없습니다. 감히 죽기로 청합니다.”
   기녀들의 말을 들은 재상이 “너희들은 차라리 오늘의 좋은 기회를 놓치는 편이 낫겠구나. 어떻게 이 아무개의 뜻을 저버리겠느냐?”라 말하고 즉시 잔치를 파하고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기생들이 무장의 집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무장은 감탄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수로 지낸 지 수십 년이다. 군교들이 나를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여항(閭巷) 사이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건마는 온종일 찾아 다녀도 기생 한 명을 불러들이지 못했다. 이제 이 아무개의 쪽지 하나로 재상 집의 노래하고 춤추는 잔치 자리를 비게 하고 기생을 이렇게 즉시 불러들이는구나! 필부의 권력이 재상이나 무장보다 도리어 클 줄은 예전에는 짐작도 못했다!”
   그들은 기녀들과 더불어 밤새 마음껏 즐겁게 놀고 잔치를 파하였다. 진욱은 창기들로부터 이렇듯이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친척 가운데 촌수가 먼 형제들이나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 중에는 생업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진욱은 그들의 식구를 모두 헤아려 생활비를 대주었다. 혼사를 치를 때는 부조하였고, 장례를 치를 때는 부의금을 보내주었다. 진욱이 팔도에 내보낸 행상꾼의 처자식들 중에는 제힘으로는 밥을 먹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자기 집으로 데려와 먹을거리를 대주었다. 행상 가운데 물건을 팔았으나 손해를 보고 돌아온 자들을 책망하지 않았고, 또 곱절로 은전을 주어 끝내는 이익을 거두었다. 이렇듯이 남에게 은덕을 베풀기를 즐겼다.
   언젠가 의금부 당상관이 나졸을 진욱의 저택에 보내 미장이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때 마침 진욱이 미장이를 시켜 담장에 흙을 바르고 있었다. 나졸이 미장이를 주먹으로 때리고 위협하여 데려가려고 하였다. 진욱은 화가 나서 집에서 부리는 머슴 열댓 명을 불러 나졸을 매로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진욱은 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은 한 봉지를 꺼내어 문객(門客)에게 주어 뒷일을 부탁하였다. 문객이 밖으로 나간 뒤 한참 뒤에 두 명의 나졸이 문득 와서 매를 맞은 나졸을 부축하여 데려갔다. 의금부 당상관은 화가 나서 그 나졸에게 “네놈이 어찌 감히 이 아무개의 집에 가서 불손하게 말하여 내 명령을 욕되게 하였느냐?”라고 꾸짖고는 매를 더 때리고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고 내쫓았다. 진욱은 몰래 머슴 한 사람에게 베 열 필과 돈 50낭을 가지고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매를 맞은 나졸에게 주고 다음과 같은 뜻을 전하게 하였다.
“자네가 나로 말미암아 매를 더 맞고 직무에서 쫓겨났으니 대단히 민망하네. 이 돈으로 약을 지어 먹기 바라네.”
   매를 맞은 나졸은 원한을 다 잊고 오히려 그 은혜에 감격하였다. 진욱은 여항의 필부로서 감히 의금부 당상관이 보낸 사자를 매질하고도 후환이 없었다. 이렇듯이 대궐문을 밀치고 궁궐에 들어가서 죽을 자도 살려내는 위세를 부렸다. 진욱은 나중에는 품계가 올라가 자헌대부 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진욱은 아들을 셋 두었고,손자와 증손자를 많이 두었다. 나이 70 여 세에 죽어서 자식들이 파주에 무덤을 썼는데 한양에서 80리 떨어진 곳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날에는 햇불을 받들고 장례행렬을 보내는 인파가 길 양편에 천막을 연달아 치고 족자를 줄지어 세웠다. 사람들이 각기 줄을 맞춰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있을 때 명정(죽은 이의 관직과 성씨를 적은 기)과 상여가 길 한가운데를 저절로 지나가둣 하였다. 멀거나 가까운 사이를 따질 것 없이 다들 부의금을 보냈고, 찾아온 조문객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왜국 사람들도 부음을 듣고 부의금을 보내왔고, 연경 사람들도 부음을 듣고 부의금을 보내왔다. 부의금으로 쌓인 은전이 대략 수만 냥이었다. 일찍이 서로 물품을 교역하거나 왕래가 있었던 부유한 상인들이 낸 부의금이었다.
    저 진욱은 여항의 필부이자 시정의 자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권세가 장수와 재상을 눌렀고, 사람들이 시기하여 몰래 해코지하려 들지 않았다. 사치와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도 집안이 망하지 않았다. 작은 나라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어 어려서 가난하였으나 남쪽으로는 왜국 사람들과 우의를 맺고, 북쪽으로는 오랑캐 땅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사이가 먼 사람에게도 은덕을 베풀었고, 이웃나라까지 명성이 났다. 이야말로 이른바 ‘치산(治産)을 잘하는 사람은 재물을 크게 불린다’는 사례이다. 지금도 그 자손들이 여전히 잘살고 있다.

 


자린급 열전


   자린급(煮吝給)은 충주 사람이다. 평소에 인색한 사람으로 향리에 서 명성이 자자하여 자린급이라 불렸다. 자린급은 소금 한 되를 보자기에 싸서 들보에 매달아놓았다. 처자식과 더불어 약속하기를, 끼 니때마다 밥을 다섯 숟가락 뜨고 한 번씩 올려다보는 것으로 반찬을 대신하기로 하였다. 어린 아들 하나가 숟가락질을 세 번 하고서 소금 주머니를 한 번 올려다보자 자린급이 꾸짖어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자주 올려다보면 너무 짜다. 네가 물을 마셔대어 배탈이 날까 두렵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이 되어 제사를 드릴 때는 밥 한 사발에 나물 한 접시만을 제사상에 올렸다. 외출하게 되면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닭을 안고 나갔다. 높고 마른 길 위에 놓여 있는 벼나 좁쌀,콩,보리 낟알을 보면 주워서 표주박께 집어넣었다. 소가 지나가 파인 곳이나 길에 고인 물, 그리고 똥 무더기에 있는 곡식은 닭을 내려놓고 줄을 붙잡은 다음 쪼아 먹게 하였다. 닭이 떨어진 낟알을 다 먹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어쩌다가 누군가 생선을 선물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생선을 얻고서 기뻐하며 요리를 하여 밥상에 내어놓았다. 자린급이 깜짝 놀라 말했다.
“당신은 어디서 이런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얻었소? 이 물건이 바로 밥도둑이 란 말이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생선 요리를 집어 들어 울타리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내자 집 안에는 재물과 곡식이 넉넉해져 드디어 부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먼 지방에서 손님이 자린급을 찾아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물었다. 자린급이 “나를 따라오시오. 내가 가르쳐드리리다”라고 말했다. 손 사이 뒤를 따라갔더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은 천길 낭떠러지로 소나무 한 그루가 꼭대기에 서 있었고,가지 하나가 거꾸로 뻗어 있었다. 가지 아래로는 100척(약30미터)쯤 되어 보이는 오래된 웅덩이가 있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린급은 손님에게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라고 하였다. 손님이 소나무에 올라 가자 또 거꾸로 뻗은 소나무 가지를 잡고서 웅덩이 위 허공에서 두 다리를 뻗게 하였다. 손님이 하라는 대로 하자 이번에는 손 하나를 놓고 나머지 한 손으로 가지를 잡으라고 하였다. 이어서 또 마지막 납은 손마저 놓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손님이 말했다.
“지금 제 목숨이 이 한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손을 놓으라시면 저더러 물고기 밥이 되라는 말씀인지요?”
   그제야 자린급이 “나무에서 내려오시오”라고 말했다. 손님이 소나무에서 내려오자 자린급이 그에게 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나는 그대에게 부자가 되는 방법을 다 가르쳐주었소.”
   손님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
“선생께서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귀뜸도 해준 적이 없거늘 이미 가르쳐주었다고 하시니 무슨 말씀인지요?”
   그러자 자린급이 말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으로 터득 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그대는 한 손으로 소나무 가지를 꽉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던데 무슨 마음에서 그랬소?”
   손님이 대꾸하였다.
“손을 놓으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린급이 말했다.
“그대는 좁쌀 한 알을 가지고도 방금처럼 이 손을 놓지 않으려 하듯이 해보시오. 틀림없이 부자가 될 것이오.”
   손님은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라 말하고 떠났다. 이 사람도 결국은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안동 사람 저적도 인색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자린급이 현명한 사람이란 소문을 듣고서 저적이 혼사를 맺고자 하여 매파를 보냈다. 자린급 역시 저적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오래전부터 들었던 터라 청혼을 받자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였다. 저적이 사위를 맞을 날짜를 택하고 종을 보내 자린급에게 알리게 하였다. 자린급이 저적의    종에게 물었다.
“네 주인집에서는 1년에 된장 콩을 얼마나 쓰느냐? 그렇게 하면 된장이 남느냐 부족하느냐?”
   종이 대답하였다.
“1 년에 콩 한 말로 된장을 만들어서 겨우 1년을 버팁니다. 혹여라도 윤달이 들면 부족합니다.”
   자린급이 깜짝놀라 말했다.
“나는 저씨네가 온 나라에서 가장 깐깐하고 질긴 현자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저씨네는 천하에 물정을 모르는 이들이구나. 우리 아이가 저씨네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 우리 집안을 망칠 사람은 틀림 없이 저씨네 딸일 게다. 우리는 1 년에 콩 닷 되로 된장을 만들어 1 년을 먹는데 찌꺼기 된장 닷 되와 맑은 장 닷 되가 남는다.”
   곧 청혼서를 봉해서 돌려주려 하였다. 저적의 종은 자린급의 낯빛을 보고 하는 말을 듣더니 기분이 나빠져서 몸을 돌려 밖을 보고 서 있었다. 자린급이 또 다른 일을 물어보려고 불렀으나 종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예!”라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자린급이 혼을 냈다.
“내가 불렀으면 너는 마땅히 고개를 돌려서 대답할 것이지 고개를 동리지도 않고 대답하다니! 어찌 이리 거만한 게냐?”
   꾸중에 저적의 종이 대답하였다.
“소인이 본디 제 주인님께 분부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부를 때 네가 마침 나를 등지고 서 있을 때는 몸을 돌리지 말고 대답하고, 고개를 돌리지 말고 대답하여 라. 고개는 똑바로 세우고 발은 무게 있게 하여 단지 목소리로만 대답하여라. 급하게 몸을 돌리면 바지 허리께가 웃옷에 갈리고, 목과 턱이 두루마기 옷깃에 스친다. 그러면 웃옷과 바지가 닳지 않겠느냐?’ 소인은분부대로 할뿐이니 어찌 감히 거만하겠습니까?”
   자린급이 감탄하며 말했다.
“참 현명한 분이로구나! 참 사리에 밝은 분이야! 나는 그분보다 못 하다!”
   자린급은 드디어 혼사를 치르고 저적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세상에서 인색한 사람을 말하면 반드시 자린급과 저적을 꼽으니 이것이 이른바 ‘그다음 사람은 아끼고 절약한다’는 사례이다. 저 모래밭이나 자갈밭에 못을 파면 해가 뜰 때 가득 찬 물이 해가 질 무렵에는 바닥을 보인다. 물이 새어나가는 틈이 많은 탓이다. 단단한 흙 구덩이에 물을 모아두면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속 고기들이 말라 죽지 않는다. 물을 가두어둬도 새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밖으로 호걸과 협객의 풍모를 흠모하기만 하고,안으로 곧고 깐깐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나 좋아한다. 아무 관련이 없는 길거리 사람에게까지 선심을 쓰면서 정작 자기 집에는 좁쌀 한 자루 없어서 처자식도 보전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저 인색한 자보다 훨씬 못하다.

 

 

김극술과 부인 열전


   호남 선비 김극술(金克述)은 대로 재물이 넉넉하여 비옥한 들녘의 미논에 볍씨를 100여 섬이나 파종하던 집안 출신이다. 대여섯 대를 이어가는 동안 가세가 점차로 쪼그라들어 김 선비에 이르러서는 팔 아버린 논밭이 열에 아홉이었다.
   김 선비가 하루는 불쑥 장탄식을 토해내며 걱정하고 한스러워하 는 낯빛을 띠고 있자 아내 박씨가 물었다.
“대장부는 곧 죽을 순간에 처하더라도 마음에 두거나 얼굴에 나타 내서는 안 되지요. 지금 나라에는 남쪽 오랑캐나 북쪽 오랑캐가 침략한다는 경보도 없고, 집 안에는 병자도 없으니 걱정할 일이 없어요. 해마다 풍년이 들고 시절은 평화로워 세상도 우리 생활도 모두 번창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영감은 탄식을 토하니 무엇 때문인가요?”
   아내의 말에 김 선비가 대답하였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가업이 쪼그라들어 지금 남아 있는 재산이 겨우 열에 하나뿐이오. 곰곰 생각해봐도 못난 내가 조상의 가업을 지키지도 못하고, 회복할 계책도 없는지라, 이렇게 한스럽게 여기고 있소.”
   그러자 박씨가 말했다.
“옛사람이 ‘암탉은 새벽에 울지 말아야 한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삭막해진다’ 라고 했지요. 그래서 소첩은 감히 바깥일에 간섭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지요 이제 영감이 이 일로 걱정하니 소첩이 대신 걱정거리를 감당하겠습니다. 재물은 늘 형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끝끝내 꽉 막히지도 않지요. 형통하면 오래 유지되고, 오래 유지되면 꽉 막히며,꽉 막히면 또 변화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면 다시 형통하게 됩니다. 옛날 선대에서 집안을 일으켜 부자가 된 것은 형통이요, 부자로 대여섯 대를 산 것은 형통한 상태를 오래 유지한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판 논밭이 많고 남은 논밭이 적은 것은 오래 유지하다가 꽉 막힌 상태입니다. 꽉 막힌 상태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변화를 일으켜 형통하게 하 는 것이 이치상 옳습니다.”
   김 선비는 박씨의 생각을 장하게 여겨 청을 허락하였다. 박씨는 논밭과 저택을 모조리 팔아서 김 선비와 함께 자녀를 데리고 북쪽 서울로 가서 집을 세내어 거주하였다. 집에서 부리는 종을 시켜 도성 안팎에 있는 약포(藥鋪, 약재 가게)를 두루 다니며 당귀(當歸)를 모두 사들이도록 하였다. 구입한 당귀를 밀실에 넣어두고 때때로 구 들을 따뜻하게 덥혀서 습기에 젖어 상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게 한 지 한 달 남짓 지나자 모든 약포에서 당귀가 품절되었다. 탕약이 든 가루약이든 환약이든 당귀가 약재로 많이 들어가는데 당귀가 품절되자 약포 사람들이 값을 열 곱절로 올려 사방에서 구했으나 어디에도 약재가 없었다. 박씨가 그 소식을 듣고서 “이제 됐구나!” 하고 는 조금씩 비밀리에 각 약포에 팔았다. 박씨의 당귀를 산 약포에서 자기만 당귀를 구했다고 요행으로 여겨서 남에게 구매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 다른 약포도 모두 똑같이 하였다. 반년 사이에 얻은 이윤이 벌써 원금의 9할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김 선비는 귀가했을 때 아내가 한가롭게 앉아서 담소를 즐기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 돈이 오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아내가 출입하는 것도 따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 박씨가 말했다.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가도 좋겠군요.”
   박씨의 말에 김 선비가 말했다.
“올라올 적에 전답과 저택을 다 팔았잖소. 가다니 어디로 간단 말 이오?”
   그러자 박씨가 웃으며 말했다.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어디 간들 필부필부가 살 데 하나 없을라구요?”
   김 선비는 박씨의 말을 따랐다. 이삿짐을 꾸려 길을 나섰으나 노잣돈 외에는 다른 재물이 없었다. 고향집에 거의 당도할 무렵 노비 들이 10리 밖까지 나와 맞이하였는데 그들의 숫자가 100명을 헤아렸다. 다들 김 선비가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중에서 늙은 종 하나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옛 저택으로 들어갔다. 김 선비와 박 씨가 자리에 앉자 늙은 종이 작은 궤짝 하나를 앞에 내어놓았다. 김 선비가 자물쇠를 따고 열어보니 땅문서였다. 옛 저택은 값을 더 주고서 되샀고, 몇 대 동안 남에게 팔아치웠던 논밭은 모두 되사서 예전 면적을 회복했다. 노비 가운데 도망하여 흩어진 자들이 소문을 듣고 돌아오기도 했고, 돈을 주고 사서 새로 들인 노비도 있었다.
   김 선비가 박씨에게 고맙다고 사례하며 말했다.
“서울로 들어간 뒤로는 오로지 당귀만을 보았을 뿐 다른 계책을 짜내는 줄을 알아채지 못했소. 당신은 무슨 신묘한 술책을 썼기에 이런 재산을 일구었소?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 한다’ 고 하더니 정말 그렇소."
   김 선비의 말에 박씨가 말했다.
“맨 먼저 당귀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마땅히 돌아가겠다는 뜻을 보였고요 마땅히 영감과 함께 돌아갈 터이므로 영감이 보고서 알아 차리도록 한 것이지요 그다음 일부터는 영감이 굳이 알 필요가 없었고요. 한비자(韓非子)가 ‘일은 비밀을 지켜야 이루어지고, 말은 밖으로 새면 실패한다’라고 말했지요. 재물과 이익이 옮겨가는 시기와 정보가 오가며 생기는 기회를 포착할 때는,머리털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주도면밀해야 합니다. 이러한 묘한 이치는 하나에 집중하느냐 둘로 나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에 집중하면 이익이 달라 불고, 둘로 나뉘면 손해가 따라옵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누설하면 담장에 귀를 대고 엿듣는 자가 일을 둘로 나눠버립니다. 묵묵히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쓰느냐에 달려 있지요. 설렁설렁 지내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내다가 때가 닥치면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고 거센 여울물처럼 힘차게 떨치고 일어납니다. 그 순간 토해내는 한마디 말에 따라 털끝만 한 차이가 끝에 가서는 천 리 멀리 벌어진답니다. 끝까지 남에게 알려줘서도 안 되고요, 또 남들이 배운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랍니다.”
   김 선비는 드디어 조상 때의 부를 회복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그다음 사람은 변화를 일으켜 형통한다’는 사례이다. 중등 수준이 넘는 사람은 수리에 통달하였기에 더불어 변화를 말할 수 있으나,중등 수준에도 못 미치는 사람은 수리에 얽매여 있는 탓에 더불어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예로부터 집안을 망친 사람이 변화를 일으켜 형통을 이루려는 시도를 왜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혜안을 짜내기에는 지혜가 부족하고,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 결단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하여 실패했던 것이다. 천히의 지극한 변화에 힘입지 않으면 그 누가 궁지에서 벗어나 형통할 수 있겠는가?

 


안씨와 늙은 종 열전


한양의 숭례문 밖 청파동에는 과부 안씨(安氏)가 살고 있었으니 선비의 아내였다. 안씨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다. 집안이 본디 거부였으나 그 무렵에는 가세가 기울어 크게 떨치고 일어나지 못했다. 가세가 기울자 안씨는 몹시 걱정스러웠다. 오래전부터 늙은 종을 데리고 있었는데 몹시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사리를 잘 알았다. 이에 항상 믿고 일을 시켜온 늙은 종을 마당에 불러 세운 뒤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의 가세가 너무나 많이 기울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장성했을 때에는 조상 제사를 받들고 우리 집안 보전할 길을 찾지 못할까 두렵구나. 충성스러운 너에게 무슨 계책이 없겠느냐?”
   주인의 말에 늙은 종이 대답하였다.
“소인 역시 밤낮으로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계책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만약 1000냥의 재물을 얻을 수 있다면 소인이 행상을 하여 이윤을 크게 남겨볼까 합니다.”
   안씨가 듣고 말했다.
“논밭을 팔면 대략 2000냥의 돈을 마련할 수 있을 텐데 1000냥으로 충분하다면 절반만 팔아도 되겠구나. 네가 한번 행상을 해보거 라!”
   늙은 종이 안씨의 분부를 정중하게 받들어 논밭의 절반을 팔아서 1000냥의 돈을 얻었다. 짐 실은 말의 고삐를 나란히 잡고서 홀로 말 다섯 필을 몰아 관북 땅을 향하여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도적을 만나 말과 재물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져서 머리를 감싸 쥐고 쥐처럼 달아났다. 도적은 그 꼴을 보고 뒤를 쫓지 않고 가버렸다.
   늙은 종이 제 꼴을 돌아보니 한 손에 채찍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니 주인 볼 낯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과객들에게 밥을 빌어먹으며 철령을 넘어 덕원부(德源府)의 원산으로 갔다. 원산에서 객점을 하는 상인에게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였다. 부유한 상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를 종으로 부렸으나 늙은 종은 순순히 받아들여 한층 더 공순하였다. 오라고 부르면 갔고,발로 차면 몸을 움츠렸다. 일거리를 주고 일을 시키면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고 불로 뛰어드는 일이라도 감히 사양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돈과 재물을 맡기면 품에 안고 종일토록 앉아 있거나 밤에도 자지 않았다. 게다가 사사로이 돈 한 푼 빌려 쓰지 않았다. 여러 상인들이 차츰차츰 그를 공경하고 신뢰하더니 점차로 많은 재물을 그에게 맡겼다.
  늙은 종이 원산에 와서 3년을 사는 동안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결 같았다. 그러자 여러 큰 장사치와 부유한 상인들이 더불어 상의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 머슴은 지금은 비록 몹시 가난하여 여기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으나 심지가 곧아서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일세. 우리가 그를 부려 먹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네. 이렇게 신의를 지키는 사람을 조금도 돌봐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닐세.”
   제각기 돈 300냥씩을 갹출하여 2000여 냥을 만들어 늙은 종에게 주고는 말했다.
“자네는 이 돈을 밑천 삼아서 굴리되 이자는 자네가 취하고 본전은 빠르든 늦든 괘념치 말고 돌려주면 좋겠네. 뭐 본전도 우리에게 돌려주면 좋기는 하지만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네.”
   늙은 종은 나란히 앉아 있는 상인들에게 절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사례를 그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열심히 일하고 하루에 밥을 두 끼만 먹었다.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고 먹을 엄두를 내지 않았고, 한 푼도 감히 허투루 쓰지 않았다. 밤에도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지 않았고, 낮에도 함부로 밖을 나다니지 않았다. 큰 상인들과 원 신 사람들은 그의 부지런함과 노고를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며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좌우에서 도와주었다. 이로 말미 암아 본전은 조금도 축나지 않았고 이자는 갈수록 크게 불어났다. 달마다 계산해보면 넉넉한 이윤을 남겼고, 해마다 계산해보면 두 곱절, 네 곱절로 불어 났다. 그렇게 지낸 지 7년이 지나서 본전 2000낭을 상인들에게 돌려 주었다. 불어난 이자를 계산하니 십수만 냥이 되었다.
   당초 늙은 종은 안씨에게 “1년 안에 꼭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종이 1 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안씨의 친척들과 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늙은 종이 재물을 가지고 도망갔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안씨만은 의심치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 종은 충성스럽고 근면 하니 돌아오지 않는 데에는 틀림없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3년이 지나자 안씨는 늙은 종의 아내와 자녀를 불러놓고 말했다.
“아! 나의 늙은 종이 1년이면 꼭 돌아오겠노라고 나에게 말했었 다. 이제 돌아오지 않은 지가 3년이 지났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번고 먼 타향 땅에서 늙고 병이 들었으나 간호하고 치료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죽음에 이르렀나 보다. 그런 소식을 전해줄 사람마저 없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근래 들어 여관에 불을 지르고 해코지 하는 도적들이 나타나고 도로에는 행인을 겁빅하는 강도들이 많다고 하니 재물을 탐내는 놈들을 막다가 화를 당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백방으로 생각해보아도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올 사람인 데 오지 않으니 죽은 것이 틀림없다. 나는 1000냥을 잃은 것은 슬프지 않으나 이 충성스러운 종을 잃고 너희들이 과부와 고아가 된 것이 슬플 따름이다. 이제는 희망이 끊겼으니 그가 떠난 날을 기일로 삼아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라.”
   늙은 종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슬퍼하며 통곡하고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올렸다. 동네 이웃들도 모두 와서 조문하였다.
   종이 집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저녁 문득 어린 종이 달려 들어와 안씨에게 고하는 것이었다.
“늙은 종이 돌아왔습니다!”
   안씨가 깜짝 놀라 기뻐하며 말했다.
“빨리 불러오너라!”
늙은 종이 들어와 절하고 뵙자 안씨가 울면서 말했다.
“네가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냐? 아니면 원귀가 되어 환한 대낮에 나타난 것이냐? 나는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네가 어떻게 다시 돌아온 것이냐?”
   늙은 종도 울면서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무 달 아무 날에 강원도 길에서 도적을 만나 재물과 말을 잃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몸뚱어리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안씨가 말했다.
“나는 1000낭을 잃었어도 한스럽지 않았고 단지 너를 잃은 것이 한스러웠다. 이제 네가 왔으니 나는 천금도 아깝지 않다. 네가 이제 10년 만에 온 것은 분명히 1000냥을 잃은 까닭에 내 얼굴을 볼 낯이 없어서였구나. 돌아오지 않을 속셈이 아니라 갈등하고 망설이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구나. 너는 어째서 바로 돌아오지 않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느냐? 또 네 아내를 사실상 과부로 만들고 네 자식들을 고아로 만들었단 말이냐?”
   늙은종이 이렇게 말했다.
“소인은 식솔들을 볼 낯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소인의 초심까지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도 없는 채찍만 잡은 처지였으나 요행히도 기대하지 않던 이익을 거두어 돈 13만 낭을 얻게 되었으니 감히 바칩니다.”

    안씨가 말했다.
“네가 맨손으로 무슨 수를 써서 이 많은 돈을 얻었단 말이냐?” 늙은 종은 그사이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모두 고했다.
   안씨가 말했다.
“옛말에 ‘충성된 자는 보답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하더니  지금 네 충성심이 하늘에 이르고 귀신을 감동시켜 네 뜻을 끝내 이루었구나. 네 충성심이 보답을 받은 것이다.”
   안씨는 10만 냥올 받고 나머지 3만 낭은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늙은 종에게 주었다
   늙은 종은 절하고 엎드려 말했다.
“소인이 만약 사사로이 취하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 이런 재물을 얻었겠습니까?”
   완강히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안씨는 드디어 3만 냥까지 모두 차지하였다. 이에 늙은 종의 식구가 쓸 비용을 모두 계산하여 양식과 돈을 대주고 사시사철 의복을 모두 지급하였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늙은 종이 사망하자 안씨는 염습을 하여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불러서 즉시 면천(免賤)시켜 양민이 되 게 하고 돈 3만 냥을 주었다. 늙은 종의 자손들은 대대로 부자로 불렸고, 안씨 집안의 부는 그보다 곱절이 많았다. 이것이 이른바 ‘그다음 사람은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한다’는 사례이다. 재물을 크게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이 안씨의 늙은 종처럼 마음을 쓴다면 재물을 얻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갈쇠 열전


   자갈쇠(者葛衰)는 경성의 종각 모퉁이에 사는 거지이다. 낮에는 저자에서 구걸하여 밥을 먹었고,밤에는 종각 처마 밑에서 잠을 잤다. 볏짚을 엮어 옷을 해 입었고, 새끼줄을 묶어 허리띠로 삼았다. 길을 걸을 때는 거적을 뒤집어썼고, 누울 때는 거적을 자리 대신 깔고 몸에 덮었다.
   그렇게 지낸 지가 몇 년이 되었다. 선전의 시정인(市井人)들이 가엽게 여겨서 해진 옷을 벗어주어 맨살을 가리게 하였고,밥을 먹을 때마다 남은 음식을 모아다 주어 먹게 하였다. 시험 삼아 점포를 지키게 하고는 곁에서 엿보았더니 자갈쇠는 종일토록 시동처럼 꼼짝하지 않고 지켰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더욱 자갈쇠를 친근하게 여겼고, 신뢰하였다. 제각기 비단과 명주, 은과 돈을 자갈쇠 곁에 놓아두고 지키게 하였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르자 자갈쇠는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경성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많은 시정 사람들은 누구나 자갈쇠를 아끼고 중시하였다.
   인젠가 자갈쇠가 자신의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청을 넣었다.
"저도 작은 점포 하나를 열어서 장사하여 이익을 얻고 싶습니다. 열다섯 낭을 빌려서 이자를 놓아 돈을 번 뒤 본전을 돌려드리면 안 될까요?”
  주인이 돈을 주고 자갈쇠가 돈을 보관해둔 장소를 엿보아 두었다. 
  자갈쇠가 돈을 숨겨둔 장소를 지키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자 주인이 몰래 돈을 훔쳐서 다른 곳에 옮겨 보관해두었다. 또 동정을 엿보니 자갈쇠가 밖에서 돌아와 돈을 둔 곳을 뒤졌으나 돈이 보이지 않자 더는 찾지 않았다.
다음 날 주인이 자갈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급히 쓸 데가 생겼으나 돈이 부족하다. 네가 어제 빌려 간 돈을 잠깐 내가 먼저 쓰겠다.”
   주인의 말에 자갈쇠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어제 남에게 주었는데요. 곧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이웃 사람에게 돈을 빌려 원래 금액만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웃 사람이 자갈쇠가 찾아와 돈을 빌린 것을 이상하게 여겨 뒤를 따라와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주인이 자갈쇠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이 돈을 얻어왔느냐?”
“어제 남에게 빌려준 돈을 방금 다시 찾아서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몰래 가져다가 옮겨놓았던 돈을 꺼내놓고 자초지종을 알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뜻을 시험해보고자 한 일인데 네가 정말 이렇게 했구나. 이야말로 진정 미생과 똑같은 사람이로구나.”
   이웃 사람도 돈을 빌려주고 뒤따라 와서 동정을 살펴본 이유를 말하고 주인과 더불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탄복하였다. 온 저자에서 몰려들어 구경하던 사람들이 촘촘히 서서 담장을 이뤘는데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자갈쇠의 이름은 연경까지 알려져 연경 사람들이 역관에게 돈을 주어 자갈쇠의 초상화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자갈쇠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두고 앞에 늘어서서 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분은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신의가 있는 선비이다. 우리들에게 절을 받기에 충분하다.”
   자갈쇠는 시장 사람들이 크게 믿고 아끼는 사람이 되어 재물이 항상 넉넉하였다. 그러나 옷과 밥 외에는 남들이 주는 물건은 받으려 하지 않았다. 만약 남은 것이 있으면 자기보다 못한 거지들에게 곧 잘 나누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자갈쇠를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 인정하였다.
   자갈쇠와 같은 거지는 어려서는 부모와 형제, 자매와 친척에게 양육받을 기회가 없었다. 장성해서는 입을 베옷도 없었고, 한 해 내내 스스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낟알 한 톨 없어서 사방 이웃들에게 구걸하여 입에 풀칠하였다. 또 남의 문 앞이나 마굿간을 빌려서 자지도 못하고 종각의 처마 밑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끝내 몸을 써서 시정의 쌓아놓은 재물을 잘 지켰고,초상화가 다른 나라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또 빌어먹는 음식일지라도 달게 먹고, 거렁뱅이 누더기 옷에도 개의치 않고서 주변 사람에게 혜택을 주었다. 또 남은 재물로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으나 증식하려 하면 꼭 부를 일구었다. 부를 일구지 않은 것이 부를 일군 것보다 훨씬 더 나았다. 옛사람이 “신의가 있는 자는 남에게 의심을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거니와 신의를 바탕으로 생계를 꾸렸으니 기이하지 않은가!
   세상의 거지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나 누구나 바가지와 짚 멍석 사이에서 한평생을 마친다. 자갈쇠처럼 추위에 떨고 구걸하며 성장하다가 풍족하게 늙어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작은 이익을 보느라 큰 의로움을 잊으며, 간사하고 거짓된 짓을 행하여 신뢰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크게는 도적질에 빠져서 형벌을 받고,작게는 향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친척들에게 버림받아서 유리걸식하다가 인생을 마친다. 큰 이유는 오로지 신의가 없어서 남들에게 의심을 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아무 수완이 없는 사람은 거지로 산다’는 사례이다. 거지가 거지 노릇을 하는 데는 애초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으나 결국 스스로 그런 결과를 불러들인 것이다.

 


팔도의 경제지리와 물산


   우리나라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중국에서 낙양에 도읍을 정한 것과 비교할 만하다.  각 지방과 떨어진 거리가 균등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경상도 동래까지 거리가 1000리이고, 전라도 해남까지 거리가 1000리이며, 평안도 의주까지 거리가 1070리이고, 함경 경흥까지 거리가 2400리이며,강원도 양양까지 거리가 500리이고, 황해도 풍천까지 거리가 500리이다. 한양이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참으로 제왕이 거처할 위치이다.
   도성 안팎에는 온갖 점포가 별처럼 늘어서 있다. 땅은 비좁고 인구는 많아 주민들은 잔재주를 많이 부린다. 농업과 길쌈을 본업으로 삼은 자는 자기 역량을 발휘할 터전이 없다. 그러니 각자 선택할 만한 생업은 장사가 아니면 장인(匠人) 노릇이다.
   역대 임금께서 유학(儒學)의 학술을 숭상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자리를 얻은 선비들은 녹봉을 주어 농사의 결실을 대신하게 하였다. 종실(宗室)이나 부마(駙馬), 그리고 공신의 집안은 자산이 수만 냥에 이르기도 한다. 벼슬길은 문과와 음직(䕃職), 무과가 있어 각각의 품계를 따르고 있다. 능력을 갖춘 자는 지위가 높아지고 재물 이 풍족해지기도 한다. 문과,음직,무과 벼슬 아래로는 아전과 복예의 무리가 있고, 서울과 지방의 쌀과 베를 관장하는 관아에서 일하는 자도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책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붓대를 잡은 자들이 앞다퉈 관료가 되기를 흠모한다. 부귀를 얻을 수 있겠다 싶으니 늙은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물밀듯이 휩쓸려 관료의 길로 달려들면서 농업과 공업과 상업과 같은 항구적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관료의 소망을 이루는 자는 기껏해야 만 명 가운데 열 이나 백에 불과할 뿐이다. 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오락가락 떠돌다가 실의에 빠져 늙어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대체로 가난한 처지에서 일어나 부자가 되는 수완은 선비가 농사꾼보다 못하며, 농사꾼이 장인보다 못하며, 장인이 상인보다 못하다. 이것은 제 뜻을 펴지 못하고 가난해진 빈자를 두고 한 말이다.
   전국 팔도의 360개 고을에서 유통되는 토산물 가운데 서울로 몰려든 연후에 사방으로 길을 따라 퍼지지 않는 물건이 없다. 따라서 평시서(平市署) 관원이 있어 경중을 재고 귀천을 조절하여 서울에 모였다가 서울에서 흩어지게 한다. 물건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흩어져서 순환하는 과정은 끝나는 때가 없다. 비유하자면 온갖 하천의 물이 바다로 쏟아져 들어와 미려로 새어 나가는데 이 물이 다시 온갖 하천의 근원이 되어 물줄기가 항상 바다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양이 토지는 나라 전체 에서 400분의 1 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분의 1 에 불과하나 가진 부를 헤아리면 5할을 차지한다.
   옛날 고려는 송도에 도읍을 정하였다. 고려가 망한 뒤로 송도의 이름난 정승과 권세 있는 대신들 가운데 두 나라의 군주를 섬기지 않겠다고 한 이들이 많았다. 따라서 두문동과 부조현이란 곳이 생겨났다. 그런 정승과 대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받던 녹봉을 얻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상인이 되어 물건값이 싸지면 사들이고 비싸지면 내다 팔아서 생계를 꾸렸다.
   송도의 풍속은 좀스럽게 인색하고,세련되게 꾸미고, 오로지 말단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부유한 장사꾼과 큰 상인들이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동료들과 끈을 맺어 북으로는 연경의 비단을 수입하고 남으로는 일본의 은을 가져왔다. 그러니 송도 또한 전국과 통하는 큰 도회지 이다.
    송도는 한편으로 경기 지방이다.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백성들은 한창 밭일을 할 때라도 따비를 잡고 호미질을 멈춘 다음 해 그림자를 돌아보고서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성안에 갔다 와도 충분하겠군! " 혼잣말을 한다. 그러고는 밭을 갈거나 김을 매던 손을 멈추고 낫을 들고 말에 먹일 여물을 베어서 등짐을 짊어지고 성안으로 들어가 판다. 송도에 가까이 사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항상 똑같은 마음이 없고 항구적 생업도 없으니 경기 지역 사람들 가운데 부자가 드물다.
   평양은 단군 임금 한 세계(世系)가 1000년 동안 도읍한 곳이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 왕에 봉한 이후로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자손을 수십 세대에 걸쳐 전하여 1000여 년을 이어갔다. 고구려도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라를 600여 년 유지하였다.
   평양은 땅이 평탄하고 동쪽에는 수려하고 아름다운 산들이 무리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러 땅이 끝난다. 조운선이나 장삿배를 막론하고 바다를 운행하는 배는 모두 패수(浿水, 오늘날의 대동강)에 도달한다. 패수는 평양성 아래를 두르고 있다.
   백성의 풍속은 돈독하고 후덕하여 옛 성인이 남긴 풍모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익을 노리는 거간꾼 무리들이 점차 많아져서 서로 속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이는 주나라 말엽의 폐단과 비숫한 데가 있다. 지금은 관서 관찰사의 감영이 있으니 평앙은 서도의 큰 도회이다. 온갖 물품과 재화,은과 돈이 모였다가 흩어져 한양에 버금간다. 
   삼등현의 연초와 강계의 담비 가죽과 인삼, 정주의 말총은 남북 상인을 불러모으는 토산품이다. 관서의 토양은 척박하다. 강변 일곱 개 고을은 모두 산지이고, 바닷가 고을은 들이다. 산과 들 사이에 끼어 있는 고을을 중산(中山)이라 부른다. 성천은 옛날 백제 비류왕이 도읍했던 고을이다. 땅이 외지고 상인이 적다. 그러나 상인들이 왕래하여 구입하는 물품으로 연초와 올이 가는 면포와 희고 고운 명주가 있다. 안주는 살수의 남쪽에 있고, 살수는 청천강이다. 안주는 칭천강 남북에 걸쳐 있으니 여기도 관서의 큰 도회이다.
   의주의 상인들은 북쪽으로는 연경이나 요동에 가서 장사하고 남으로는 일본과도 통한다. 해마다 동지사(冬至使)나 별견사(別遺使), 뇌자관(賚咨官)이 왕래하는데 그때마다 사행단 전원이 여러 날 동안 의주에서 머물면서 이익이 되는 재화를 운송한다. 때때로 연경 사람들과 시장을 열어 교역한다. 의주는 청나라와 조선 두 나라 국경의 도회이다.
   관서의 풍속은 대체로 생업의 근본인 농업을 가볍게 여기고 말단의 이익을 중시한다. 농사를 지어 거두는 소출이 적으니 누에치는 산업이 흥성해졌다. 남자나 여자나 사치함과 화려함을 서로 뽐내고 음악과 여색을 즐긴다. 관아에 소속된 기생이나 개인의 여종이 가야 금을 안고 춤옷을 차려입고서 지방 관아나 감영과 진영에 불려 다닌다. 나루터 머리에서 남정네에게 눈짓하고 저잣거리 여기저기 문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는 여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아름답다. 큰 부자는 수만 냥의 재산을 축적하고 밤낮으로 풍악을 울리기도 한다. 큰 상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뇌물을 뿌리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를 즐긴다. 나라 안에서 번화하고 화려함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관서를 꼽는다.
   해서는 서쪽으로는 관서와 거래하고 북쪽으로는 관북과 거래하며, 동남쪽으로는 한양과 삼남 지방, 관동과 각각 거래한다. 풍속은 질박하고 촌스러우며, 검소하고 꾸밈이 없다. 본디 농사와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아서 행상하는 사람이 드물다. 바닷가에서는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우며, 산골에서는 밀랍과 면포, 올이 거친 명주, 면화가 난다. 황주와 봉산에서는 배가 나는데 크기가 사발만 하다. 황주도 해서의 큰 도회이다.
  관동은 북쪽으로는 관북과 거래하고 남쪽으로는 영남과 통하며, 남서쪽으로는 한양, 해서와 접해 있다. 강릉은 옛날의 예국이, 춘천은 옛날의 맥국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철원은 궁예가 도읍했던 고을이다. 관동의 풍속은 우둔하고 인색하며,의복이나 음식에 사치하지 않는다. 영서 지역 고을은 모두 깊은 산과 후미진 골짜기이다. 황상목(黃腸木)과 소나무, 인삼,복령, 석청(石淸), 목청休淸),    집에서 반드는 밀랍, 곰과 호랑아 노루, 사슴, 멧돼지, 오소리, 잣,오미자가 난다.  
  영동은 바닷가에 위치한 아홉 개 군으로 구성돼 있다.  철과 소금, 문어, 홍합, 해삼, 생복(生腹), 미역,대구,명태가 난다. 통천의 고본(固本)  또한 영동의 큰 도회이다. 추지령을 넘는 이들은 짐을 말 등에 싣거나 인부가 등에 짊어지게 하고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방으로 흩어진다. 바다로 운행하는 이들은 쌀을 물고기로 바꾸는 영남 사람이거나 물고기를 쌀로 바꾸는 관북 사람이다.
   관북에서 북청 이남은 남도이고, 북청 이북은 북도이다.  때때로 청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시장을 여니 육진의 주민들은 소를 끌고 가서 청나라의 말과 바꾼다. 북쪽은 화폐를 대신하여 사승포를 사용하고,남쪽은 화폐를 사용한다. 관북 땅은 서쪽으로는 큰 산을 끼고 있고, 동쪽을 따라 큰 바다가 뻗어 있다. 철령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아래에 이르고 두만강 강변을 타고 내려가면 구불구불 수천 리가 이어진다. 풍속을 보면 남도는 남방의 백성에 가깝고, 북도는 짐승 가죽 옷을 입고 활쏘기와 사냥을 잘한다.
   삼수와 갑산에서 강을 따라 경흥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인삼과 녹용, 짐승 뿔과 가죽, 곰과 호랑이,노루,사슴, 여우, 이리, 산돼지, 양, 올이 가는 베,다리가 난다. 바닷가 고을에서는 문어와 명태,송어(松魚), 연어,방어,곤포(昆布), 미역,대합조개,전복,강요주, 어란,청어,해삼이 난다.  뭍에서는 말을 달리고,물에서는 배에 실어 보내 덕원부의 원산에 화물이 모인다. 원산 또한 관북의 큰 도회이다. 북쪽 사람이 화물을 가지고 와서 남쪽 상인과 물건을 교역하고 물러 간다.
   호서 지방을 보면,태안에서 한산까지 서해를 끼고 있는 지역을 내포라 부르니 물고기와 소금이 나는 곳이다. 호서의 동쪽  지역은 높은 산이 많고 면포와 종이, 과일이 많이 난다. 호서는 좌도와 우도로 나뉜다. 우도의 경우 사람들이 물리게 먹을 정도로 물고기와 소금이 많으나 면포와 과일이 귀하다. 좌도는 면포와 과일은 넉넉하나 물고기와 소금을 구하기가 어렵다.
   부여는 백제가 도읍했던 고을이다. 그러나 땅이 낮고 습하여 수재를 자주 당하므로 부유한 상인이 지나가면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청산과 보은에서는 대추가 많이 난다. 주민들은 대추가 많으냐 적으냐를 가지고 빈부를 가늠한다. 서울과 여타 지역에서 사고파는 대추는 청산과 보은의 산물이 열에 아홉이다. 임천과 한산에서는 올이 가는 모시를 잘 짜고, 홍산과 남포에서는 거친 모시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나라 안에서 옷을 만들어 입는 모시나 베는 모두 이 네 개 현에서 산출되어 퍼진 물건이다.
   은진의 강경은 호남과 영남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 사람들이 배를 타거나 뭍으로 이동하여 다 함께 찾아 들고 부유한 상인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다. 온갖 물건이 모두 몰려 드니 강경은 또한 삼남의 큰 도회이다. 하루아침에 1 만 냥에 이르는 상품이 거래된다. 상인들이 한편으로는 팔고 한편으로는 사서 며칠 사이에 굴려서 얻은 이익이 본전의 세 배에서 다섯 배에 이르기도 한다.
   호서는 땅이 비옥하고 재물이 넉넉하며, 산수가 수려하고 명랑하고 오래된 가문과 큰 집안 사람들,공경대부를 지내고 실직(實職)에서 벗어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풍속은 생업에 종사하기를 부끄러워하며,명예를 귀하게 여기고 이익의 추구를 천하게 여긴다. 그래서 선비들이 대부분 가난하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백성들 또한 대단히 많다.
   호남은 물산이 가장 풍부하다. 비옥한 들이 수백 리에 걸쳐 펼쳐져 있다. 명주실과 삼실, 물고기와 소금, 온갖 곡물이 난다. 전주는 견훤의 도읍지였고 지금은 호남 관찰사의 감영이 있는 곳이며,또 호남의 큰 도회이다. 온갖 기술을 갖춘 장인이 포진해 있고, 사방에서 상인이 몰려든다. 양정포의 생강과 마늘,파,부추, 나주 영산포의 무,진안의 연초,남원의 곶감, 영암의 참빗, 제주의 큰 말과 나무빗, 갓양태,진귀한 과일, 좋은 약재, 해산물, 노루와 사슴의 가죽, 여러 고을에서 나는 대나무 그릇과 닥나무 종이가 모두 전주에 몰려 든다.
   건장한 말은 행렬을 이뤄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곳까지 간다. 도보 행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버들고리를 묶거나 개가죽을 머리에 이고 화물을 손에 쥐고 등짐을 진 채 팔도에 두루 퍼져 있다. 이들 행상은 모두 전주를 거치게 마련이다. 수십 마리의 소떼를 몰고가는 상인들이 길 위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는데 모두 함열의 황등(黃登) 장터에서 오는 이들이다. 사나운 말에 채찍질을 하고 긴 말고삐를 쥔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 상인들은 모두 영암의 송지(松旨) 장터에서 오는 이들이다. 따라서 호남에는 부유한 백성들이 많다. 그러나 이 지방 풍속은 잔재주를 많이 부리고 꾸미기를 숭상한다.
   영남은 땅이 사방 1000리이고 토질이 비옥하다. 백성들은 농사와 길쌈에 힘을 기울이고 풍속이 질박함을 숭상한다. 현인들 중에는 남보다 뛰어난 이들이 많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뻣뻣하고 사나워 순종하게 할수 없다.
  경주는 신라 적에 세 개의 성씨가 번갈아 1000년 동안 다스린 도읍이다. 지금은 부윤이 다스리는 고을이다. 수마노,수정, 산수유, 옻나무, 명주실이 난다. 문경은 옛날의 문소국이고, 개령은 옛날의 감문국이며, 성주는 옛날의 벽진국이고, 김해는 옛날의 가락국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기이한 감상품이나 재화가 될 만한 보물이 나지 않는다.
   종합하면, 이 도에는 좌도와 우도를 합쳐 모두 일흔 개 고을이 있다. 영해로부터 남해에 이르는 고을은 모두 바닷가라서 물고기와 소금이 풍부하다. 산지 고을은 감과 배,개암, 밤,옻나무, 대나무, 잣, 황장목, 소나무, 닥종이,각종 곡물,무명, 삼베,면화가 많이 난다.
   대구에는 영남 관찰사 감영이 있고,고성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수영이 있으며,진주에는 영남우도절도사 병영이 있어 이들은 모두 큰 도회이다. 울산의 전복, 밀양의 밤,영천의 누렇고 올이 가는 베, 상주와 함창, 문경,거창의 곶감은 모두 나라 안에서 유명하다. 연일의 포항은 물고기와 소금이 모여들어 유통되는 곳이라 또한 해변의 큰 도회이다.
   동래에는 왜관을 설치하여 왜인을 머물게 한다. 왜국의 팔송사와 대차왜는 해마다 우리나라에 오고, 조선의 통신사는 10년에 한 번씩 일본에 간다. 그러니 동래 또한 두 나라 사이의 변경에 있는 큰 도회이다. 큰 상인이 말고삐를 잡고 왜관에 이르러 시장을 연다. 일본의 재화와 연경의 진귀한 물품이 이곳에 다 모인다.

 


생업의 선택


   이를 통해서 볼 때,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송하는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는 잘 알겠다. 정승 판서의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조정의 드높은 장소에 좌정하고 앉아서 나라를 이끄는 방안을 내어놓는다. 그러면 주상께서 대신이 제안한 방안을 그럴듯하게 여겨 이를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시행한다. 온 세상과 더불어 좋은 일을 함께하니 이런 업적과 명성이 당시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눈에 환히 드러난다. 외직으로 나가게 되면 관찰사의 직책을 맡아 지방의 풍속을 살피고 착한 이는 표창하고 악한 이는 도려내어 백성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생업을 꾸리는 것이 옳다. 생업을 영위하지 않고서는 부를 얻을 방법이 없다. 부가 없으면 덕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고매한 선비는 일찌감치 스스로 계획을 짜서 집안 살림을 부유하고 풍족하게 만들었다. 자기 집에 부를 풍족하게 일구어놓은 까닭에 밖에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야말로 부가 덕(德)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부란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맛좋은 생선회나 구운 고기와 같은 것이다.

 


재물의 노예 열 가지 사례


   향기가 풍기는 미끼 아래에는 반드시 미끼를 물다 죽은 물고기가 있듯이, 후한 포상 아래에는 반드시 용맹한 사내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두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중원에서 만났다고 치자. 달과 같은 흰 깃발에 해와 같은 붉은 깃발이 휘날려  갖가지 깃발이 하늘을 뒤덮었다. 창과 검이 서릿발처럼 번쩍이며 부딪히고, 화살과 바위가 메뚜기떼처럼 날아다니며, 포성소리가 우레처럼 울린다. 그런데 이렇게 살벌한 전쟁터에서 한 필 말에 한 자루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들어간다. 몸이 수십 군데 찔리고도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 적의 깃발을 꺾고 적장을 베는 병사가 나타난다. 천금의 포상에 혹했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포도청이 있고 지방에는 토포영(討捕營)이 있어 칼과 쇠사슬을 비롯한 혹독한 형구(刑具)를 갖추고 있다. 관부(官府)를 지키는 수비병이 문에서 보초를 서며 밤을 새우고 담장을 돌면서 경계하나. 부자의 저택에서는 활을 당겨 화살을 재어놓고, 장검을 뽑아 꽂아두며, 큰 곤장을 세워놓는다. 호걸 같은 종과 사나운 노복이 앞과 뒤에서, 왼쪽과 오른쪽에서 에워싸고 집을 지킨다. 거기다 표범 같은 사나운 개가 다섯 마리 열 마리씩 무리를 이루고 컹컹 짖어댄다.  그런데도 왜소한 사내 혼자서 구멍을 뚫고 들보를 넘어 죽음을 무릅쓰고 저택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때로는 구리를 주조하여 동전을 위조하고 무덤을 파헤쳐 불법을 일삼으며 국법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 한 목숨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모두 재물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다.
   성산월(星山月)은 경상도 성주의 기생으로 재능이 매우 뛰어나고 용모가 나라에서 제일이었다. 재상들이 잔치하는 자리에서〈백마강 부(白馬江賊)〉를 읊어 명성과 몸값이 서울 기생들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선공감 서원으로 늙어 쭈그러진 데다 다리를 절고 한쪽 얼굴에 큰 혹이 매달린 남자와 같이 살자 마침내 당시 사람들로부터 버 림받았다.  성산월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노인의 재물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둘 다 귀하게 자란 공자로서 똑같이 지체가 높고 기세가 등등하다. 한 사람은 허름한 도포 차림에 짚신을 신고 길을 갔고,한 사람은 여우 가죽 옷을 걸치고 살진 말을 타고 갔다. 길에서 두 사람을 구경한 행인들이 한 사람은 무시하고 한 사람은 떠받들었다. 이 또한 부를 흠모한 결과이다.
   험준한 묏부리의 인적이 드문 산속이라 풀은 무성하고 나무는 빽빽하다. 큰 곰과 작은 곰이 숨어 있고, 호랑이와 표범이 으르렁대며, 멧돼지가 주둥아리를 휘젓고 다닌다. 사냥꾼이 갑자기 짐승을 맞닥 뜨리면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곳이 없다. 원숭이처럼 엿보고 뱀처럼 노려보다가 화살이나 총을 쏜다. 눈으로 보고 손을 쓰는 사이에 죽느냐 사느냐가 결판난다.
   바다와 깊은 못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이무기와 고래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없다. 동해와 남해에서는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다. 그러나 머리까지 물에 잠겨 죽는데도 경계 삼지 않고, 큰 물고기에 물렸던 끔찍한 사고도 전혀 되새기지 않는다. 자맥질하여 들어가 전복을 캐느라 온종일 물속을 들락날락한다. 모두가 전복을 채취해 팔려는 욕심에 취한 탓이다.
   지위가 높기는 하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와줄 친구는 없다.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운데 헐뜯는 자들은 세력이 드세다. 임금은 위에서 의심을 품고, 손님은 문에서 자취를 감췄다. 멸문지화를 당할 재앙이 조만간에 닥칠 낌새가 보이나 처자식을 쳐다보니 주절주절 요구하는 말이 많다. 당장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어리석은 아내의 잔소리를 듣고 나니 물러나려던 발걸음은 멈칫멈칫하고 결단을 내리려 했으나 망설임이 생겼다. 끝내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아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익과 녹봉을 밝힌 결과이다.
   귀하고 세력 있는 집안에서 대기하고 시중들며 분주하게 지내는 사람은 기예와 재능을 뽐낸다. 어깨를 수그리고 아첨하며 웃기를 잘 하면서  윗사람의 비위를 맞춘다. 욕됨을 참고 종처럼 일하고, 낯빛을 공손하게 하고 분부를 받든다. 의롭지 못한 일을 시키더라도 당연히 할 일이라며 윗사람이 말하면 뒤따라 칭송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끝내 윗사람이 힘을 써주어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형벌을 받게 된다. 윗사람이 기뻐하여 상을 내려주기를 바라서 한 행동의 결과이다.
   공문서를 담당하는 직책이 낮은 관리가 수결(手決)을 위조하고 인장을 훔쳐서 장부와 문서를 교묘하게 바꾼다. 열 걸음 가는 사이에 100가지 잔꾀를 부릴 정도로 못하는 짓이 없어 형틀 위에서 죽는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후한 뇌물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행상과 거상의 비교


   선비와 농부, 공인, 상인 곧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본디 녹봉을 받아 먹고 부를 늘리기 위해 구하는 생업이다. 이렇게 일하다가 힘에 부치고 재주가 다하면 그만둘 뿐이다. 재물을 싫어하고 부유함을 괴로워하여 재산을 쏟아내어 사방에 흩어버리는 자가 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속담에 ‘벼룩 등에다 쇄마 싣는다’라 하고, ‘바 늘 값이 쇠보다 곱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처럼 너무 작은 이익은 공들여 얻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소금을 파는 소금장수는 소금 스무 말밖에 짊어지지 못하고,물고기를 파는 생선장수는 혼자 힘으로 생청어 서른 두름을 겨우 짊어진다  이 물건은 누구나 한 냥이면 살 수 있다. 행상꾼이 한 냥을 밑 천으로 삼아 바닷가에서 소금과 생청어를 산다. 길을 걸어 높은 고갯마루를 넘고 산골의 장터에 도착한다. 등짐을 지고 겨드랑이에 작대기를 끼면 고개는 처지고 발은 부르튼다. 30리 길에 아홉 번 쉬어야 해서 하루에 50~60리 길밖에 가지 못한다. 평상시에는 이틀이면 갈 길을 사흘 만에 가고도 허리는 시큰하고 정강이는 후들거리며 기운은 다 빠지고 정신은 지친다. 더는 한 걸음도 갈 수 없다. 그 때 토착민이 값을 흥정하는 소리를 들으면 등짐을 내려놓고 주어버 려 돈 200문 남짓을 받는다. 값으로 치면 본전의 곱절을 받았다. 그러나 돈 200문으로 여러 날 걸려 왔다가 돌아가는 동안 여관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주막에서 잠깐 쉬어가며, 식량과 땔감, 반찬,담배, 짚신, 엿 등을 사는 값을 모두 치러야 한다. 집에 막 도착하여 본전 100문을 빼고 나면 남긴 이익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소매가 긴 사람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은 사람이 장사를 잘한다”라는 말이 나 은다.
   대상인은 지방의 군과 현을 직접 돌아다니지 않고 대문과 골목을 나서지도 않는다. 집 안에 앉아서 장사하는 방법을 논할 때면,그 앞에는 소상인들이 가득하여 시세 돌아가는 형편을 말하면서 가을 터럭처럼 세밀하게 분석하여 제각기 계책을 꺼내놓는다. 주인은 팔꿈치를 구부려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어 상인들이 하는 말을 듣다가그 중 나은 계책을 채택하여 추진한다. 손해를 입을 것 같으면 정해놓은 계책을 버리고, 이익을 거둘 듯하면 실행하면 된다.
   그다음에는 행상을 나눠 보내 사방팔방을 다니며 이익을 구하게 한다. 행상들은 제각기 간을 드러내놓고 쓸개즙을 걸러내어 지혜를 싸내고 정성을 다하여 기약한 날짜에 돌아오고 약속한 대로 돈을 갚는다. 거두어들이는 이자는 2할로 한다. 물고기나 소금을 파는 등짐장수가 거두는 이익과 비교하면 겨우 5분의 1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이에 앉아서 이익을 거두니 뼈와 근육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고 오가면서 낭비하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얻는 이익을 말하자면 도리어 저들보다 낫다. 게다가 밑천이 두둑한 데다 자기가 장사 밑천올 대준 사람이 매우 많아 1000냥을 대주고 200냥의 이익을 보고, 1 만 낭을 대주고 2000냥의 이익을 본다. 더 말해 무엇하랴?

 


정숭과 거상의 비교


   지금 벼슬에서 나오는 녹봉도 받지 않고 지방의 고을에서 보내는 선물 없이도 삼정승과 더불어 똑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자가 상당히 많다. 아니 그중에는 삼정승보다 더 나은 이들이 많다. 판서급 벼슬아치 이하는 말도 꺼내지 말자.
   오로지 삼정승만이 가장 존귀한 지위라 권력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녹봉은 많고 재물이 높이 쌓인다. 그런데도 각 도의 큰 고을에서 바치고 보내주는 선물이 줄지어 밀려들어서 한 해에 거둬들이는 재물올 대충 계산하면 100만 전(錢, 1 만 냥)에 이른다. 그렇지만 늙고 병든 몸을 부축받아 억지로 일으키고,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며 세수하고 양치한다. 이어서 옷을 단정하게 입고 모자를 똑바로 쓴다. 거울을 잡고서 얼굴을 비춰본 다음에 대문을 나서서 수레에 오른다. 대궐문이 열리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문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노창(矑唱)이 다 끝나면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임금께 국사를 아뢰는데 몇 마디 말에 영예와 치욕이 달려 있다. 일체의 일을 올바르고 정직하게 하여 조금도 회피하지 않자니 임금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하겠고, 노여움을 불러일으킬까 겁이 나서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사사로이 욕심만 추구하자니 사관이 앞에 있고 간언하는 신하가 뒤에 줄지어 있다. 호되게 추운 날인데도 등에서는 땀이 나고 몹시 무더운 날인데도 간담이 서늘하다. 조회를 마치고 대궐문을 나서고 나서야 감히 기를 펴게 된다. 서리치고 눈 내리는 새벽이나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저녁일지라도 추위를 무릅쓰고 습기에 젖은 채로 끝 내 감히 1분 1각이라도 태만하거나 늦출 수 없다. 너무 고생스럽지 아니한가?
   선비와 농부, 공인,상인 가운데 1 년에 쓰는 돈이 100만 전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 부자가 서울과 지방에서 수십 가구에서 100가구에 이른다. 이런 부자들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거나,하고 싶은 일을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게다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속이 편하고 심신이 여유만만하다. 그중에서 형편이 훨씬 나은 자는 은을 20만 냥이나 30만 냥을 쌓아두고 있다. 해마다 돈을 풀어 이자를 챙기면 20만 냥을 가지고 대략 4만 냥의 이윤을 남기고,30만 냥을 가지고 대략 6만 냥의 이윤을 남긴다. 은은 화폐보다  곱절의 이익을 남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그 즐거움이 삼정승보다 낫지 않은가!

 


안정 자산의 품목


   그러므로 경강(京江)의 조운선 다섯 척과 수상선(水上船) 일곱 척,도하민(都下民)의 공물 열 섬, 바닷가의 어살(漁箭) 다섯 기(基),소금가마 열 기, 들녘에서 키우는 소뿔 열 개,  돼지우리 안의 암돼지 300마리, 제주 말 300발굽, 청산•보은의 대추나무 1000그루, 지안•삼등의 담배밭 1000묘, 임천 •한산의 모시밭 1000묘, 영남과 호남에 있는 감나무 1000그루 및 닥나무와 옻나무밭 1000묘, 봉산의 배나무 500그루,전주 양정포의 생강밭과 마늘밭 1000고랑, 양남 지역의 대나무밭 l000묘, 관북의 삼밭 1000묘, 관서의 뽕나무 1000그루, 삼남 지역의 벼논 100결(結), 양서 지역의 면화밭 100일갈이가 있으니 이런 자산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삼정승과 대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생업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예전부터 소유해온 자기 자산이다. 물품을 수송하느라 힘들일 까닭이 없고,판매하려고 시장과 점포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다. 고매한 선비 같은 태도를 지키면서 그냥 앉아서 거두기만 하면 된다.

 


빈자의 굴욕


   예전에는 조상이 물려준 생업이 있었으나 재물을 함부로 써서 가볍게 흩어버리고 결국 집안을 망친 사람도 있고. 대대로 빈궁하게 지내면서도 맑은 담론이나 즐겨하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자긍심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이런 형편이면 늙은이가 비단옷을 입지도 못하고 고기를 먹지도 못한다. 따뜻한 겨울인데도 아이들이 춥다고 울부짖고, 풍년이 들었는데도 마누라는 배고프다고 징징 운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었으나 제삿밥조차 올리지 못한다.
   갓과 신발, 의복을 이웃집에 빌려달라고 구걸하나 그들이 항상 내주지는 않아서 밖에 나가 노닐거나 향리에서 조문하고 하례하는 예의를 차릴 수 없다. 금전을 갹출하여 술을 마시는 자리에 우연히 앉았으나 돈을 거두면서 그에게는 달라고 하지 않는다. 모임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계를 만들고서 그를 끼워주지 않는다. 어쩌다 기생을 불러 풍악을 즐기는 자리에 갔더니 춤추고 노래하는 예쁘고 어린 기생들이 쳐다보고 손가락질하며 은근히 비웃는다. 이런 처지가 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면 한마디 말을 보탤 가치도 없다.

 


치부의 방법


   그러므로 본디 부유한 사람이 더 부유해지고자 한다면 힘들여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얻을 수 있으나 본디 가난한 사람이 부유해지고자 한다면 고생을 많이 한 뒤에야 부유해질 수 있다. 남이 하나를 하면 나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 이것이 이른바 고생 끝에 부를 얻는 비결이다.


   곤경과 불운에 처하여 격분하는 것은 의지가 있기 때문이요,

   무에서 유(有)를 찾아내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계획을 세워 결단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은 용기가 있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이며,

   남과 함께 일하되 속이지 않는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춘 다음에야 이익에 관한 일을 더불어 말할 수 있다. 이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네 가지를 갖추고 있다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아홉 길 되는 높은 산을 만들 때 삼태기 하나 분량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부를 구하는 큰 법이다.

 


시장과 환경의 예측 능력


   지금 생업을 일구면서 당장 부자와 더불어 여유와 부를 동등하게 누리고, 빈곤의 구렁텅이에서 저절로 빠져나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미치광이조차 의문을 표할 것이다. 따라서 최상의 부자는 삼재(三才)를 겸비해야 하고, 중등의 부자는 땅과 사람을 얻어야 하며, 하등의 부자는 사람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삼재란 하늘과 땅과 사람을 말한다. 위로는 하늘의 때와 조화를 이루고,아래로는 사방 땅에 있는 이익을 꿰뚫어 보며, 가 운데로는 사람이 지닌 힘에 통달해야 한다. 그렇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공적을 온전히 세우고 사업을 다 이루게 된다.
   대체로 간지(干支)가 인(寅), 신(申), 사(巳), 해(亥)인 해에는 흉년이 많이 들고 풍년이 적게 찾아온다. 자(子), 오(午), 묘(卯), 유(酉)인 해의 농사는 풍년도 흉년도 아니다. 간지가 진, 술, 축, 미인 해에는 굶주리는 일이 드물고 풍년이 자주 든다. 갑과 기인 해는 흙의 기운으로 진, 술, 축,미가 들어간 해에 견줄 만하고, 을과 경인 해는 쇠의 기운으로 인,신, 사, 해가 들어간 해와 비슷하다. 간지가 정과 임인 해는 나무의 기운으로 자, 오 ,묘,유가 들어간 해와 비슷하다. 병과 신인 해는 물의 기운으로 흙인 해와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무와 계인 해는 불의 기운으로 간지가 나무인 해와 같은 짝을 이룬다.
   태음과 태양은 하늘을 관장하는데 하지 전후에는 각각 30일 동안 비가 많이 내린다. 소음과 소양이 오에 있으면 여름에 가뭄이 든다. 궐음이 사에 있으면 추분 전 60일 동안 바람이 많이 분다. 양명(陽明)이 있으면 추분 전에 일찍부터 추워지고 늦벼가 익지 않는다.
   삼남 지방의 곡식은 동풍에 시들었다가 북풍에 살아난다. 서쪽과 북쪽, 동쪽 지방은 이와 반대이다. 직전 겨울에 눈이 내리고 대보름 날에 달이 뜨면 비와 햇볕의 양이 알맞다. 두 해 동안 큰비가 내리면 한 해는 큰 가뭄이 들고, 가뭄이 세 해 동안 이어지면 한 해는 장마가 진다. 장마가 지면 삼남 지방은 풍년이 들고 서쪽과 북쪽, 동쪽 지방은 기근이 발생한다. 가뭄이 들면 서쪽과 북쪽, 동쪽 지방은 곡식이 여물고 삼남 지방은 흉년이 든다.
   곡물이 이쪽 지방에서 값이 비싸져 저쪽 지방에서 값이 싸지면 그 밖의 재화는 저쪽 지방에서 비싸지고 이쪽 지방에서는 싸진다. 이것이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다. 사람이 지닌 힘은 사람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사람은 곡식을 끊고 단약을 굽지 못하며,세상을 싫어하여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능력이 없다. 속으로는 가난 걱정을 견디지 못하는 주제에 밖으로는 고상하고 시원시원한 주장만 펼치려드는 사람이 있는데 존경할 가치가 없다.

 


빈자의 각성


   일반 백성들은 같은 백성들끼리, 사족은 같은 사족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재물이 없는 자는 가진 자에게 도움을 받고,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에게 도움을 구한다. 날이 추우면 두꺼운 옷을 입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이 인간의 실정이다.
   추위에 살갗이 에이고 배고픔에 창자가 도려지듯이 아파서 지극히 힘들어 누웠다가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하늘의 태양은 노랗고 산은 빙글빙글 돌아서 눈은 어질어질하고 머리는 빙빙 돌았다. 귀에 들어오는 온갖 소리는 마치 발 너머로 지나가는 매미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겨우 기어 이웃집으로 가서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나 죽겠소”라고 말을 꺼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죽을 끓여서 먹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제야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로 땅을 밟으며,눈으로 빛깔을 분간하고 귀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기어서 이웃집에 갈 때 부자를 흠모하는 마음이 어떠 했을까. 또 죽을 배불리 먹고 돌아오며 부자의 좋은 점을 깨달았을 때의 심경이 또 어떠했을까?
   따라서 사람마다 현명한 자와 모자란 자의 차이가 있듯이 사물이 서로 똑같지 않은데 이는 사물이 가지는 본래의 실정이다. 사물이 서로 똑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 또한 각자 생각하는 바대로 움직인다. 오랜 세월을 두고 노력하는 일은 마치 봄날에 풀이 한창 자랄 때는 그런 모습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날마다 쑥쑥 자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태산도 한 줌의 흙이 쌓여서 크게 높아졌고, 황하와 바다도 한 방울의 물이 많이 모여 이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처럼 하루에 1 전이 불어나면 1000일에는 1000전으로 쌓인다.

 


상인의 규모와 종류


   금전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머나먼 여러 나라에 가서 무역하여 온갖 재화를 거두어 온다. 먼 나라보다 작은 지역에서 무역을 하면 가진 본전에 따라 이보다 이익이 조금씩 줄어든다. 교통이 발달한 고을이나 큰 도회지에서는 한 해에 유통되는 재화가 금릉과 단사 1000필, 분주 3000필,올이 거친 명주 5000필, 올이 가는 모시포 500동, 올이 거친 모시포 1000동, 올이 가는 마포 5000필, 올이 거친 마포 7000필, 목면포 2000동, 무미 82 2만 석, 대두 3000석이다. 이런 재물을 거래하는 부류는 화폐를 많이 소유한 상인이다.
   여우 가죽, 황광피 300장, 해삼 500근,부채 2000자루, 두꺼운 종이 100속, 얇은 종이 500속을 소지하고 연경에 가서 융복사 시장에서 갖옷, 진주, 석경, 당필, 당묵, 사탕, 민강, 관모 및 감초, 육종용, 계피, 지등, 공편, 분당지,85 색지 등을 구매하여 돌아오는 상인이 다음 등급이다.
   소를 몰고 가서 관서와 관북에 개설된 시장에서 말과 바꾼다. 인삼을 말에 싣고 동래의 왜관에 개설된 시장에 가서 은과 교환한다. 순한 말을 몰아 남쪽으로 가서 제주도의 세 살, 네 살 또는 대여섯 살 난 길들이지 않은 말과 교환하여 오는 사람이 또 그다음 등급 이다.
   멀리로는 나라 안의 팔도를 다니고,가까이로는 사방 수백 리 사 이에 있는 장시를 따라다니며 지방 특산물을 파는 이들이 시골의 행상이다. 젓갈 몇 단지나 각종 장과 식초를 병에 조금씩 담아서 판다.
   음식전과 과일전,어물전과 고기전,두부전, 선전의 여러 방이 있고, 잡물전에서는 대장장이, 가죽 장인,목수 등 온갖 장인이 만든 물건을 판다. 오색 물감을 염색하는 점포에는 붉은색, 남색, 파란색, 쪽색, 초록색, 검은색,노란색, 분홍색, 자주색으로 물들이는 물감을 모두 여러 단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모두 한양 사람의 생업이다. 그중에서 밑천이 없는 자는 분뇨를 싣고 나르는 일을 일상의 직업으로 삼아 왕래한다.
   대개 밑천이 많은 자는 거둬들이는 이윤이 늘 풍성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취하는 이윤이 늘 자잘하다. 그러니 부유한 자는 큰 이익을 거둬들이기 좋고, 덕분에 작은 이익을 거두는 자도 가난해지지 않는다. 생업을 영위하여 말단의 이익이 채 2할도 안 되어 어떤 때는 이익을 보고 어떤 때는 손해를 보며,어떤 때는 많이 얻고 어떤 때는 적게 얻는다. 그러나 한 해 동안 가져다 쓰고 남은 것까지 모두 셈을 해보면,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내 소유물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근세에 나라 안에서 큰 부자가 되고, 부유해져서 즐거움을 누리는 현자를 소개하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보고서 느낀 바가 있기를 바라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생 열전


   영남 순흥 사람인 김생(金生)은 갓난아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장성하자 숙부가 배필을 구했더니 같은 마을에 정씨의 딸이 있었다. 그 여인 또한 부모가 모두 사밍하여 외숙부에게 의탁하여 살고 있었다. 매파가 혼처를 구한다는 뜻을 전하자 정 씨의 외숙부가 허락하였다.
  혼삿날밤에 아내 정씨가 김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띠집을 짓고 분가해 나가서 생업을 꾸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김생이 “좋소”라고 맞장구를 쳤다.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밖으로 나가 산 아래의 비어 있는 땅에 이르렀다. 남편이 도끼로 나무를 베고,부인은 낫으로 띠풀을 베었다. 김생의 숙부와 정씨의 외숙부가 아침에 부부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찾아다니다가 나무를 베는 곳에 이르렀다. 깜짝 놀라 까닭을 물었더니 부부가 사실대 로 고하였다. 그러자 두 집에서 일을 도와 하루 만에 집을 완성하고 제각기 그릇과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솥 하나,표주박 하나,동이 하 나, 됫박 하나, 숟가락과 젓가락 두 벌,사발 두 개, 사기 찬그릇 네 개, 낫과 호미 각두개, 차조쌀 열 말,좁쌀 스무 말,콩다섯 말, 장 하단지였다.
   김생은 아내와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나는 내 힘을 다해 일할 테니 당신도 나처럼 하구려.”
   아내가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수고하며 쉬지를 않았다. 봄과 여름과 가을에는 쟁기로 개간하고 호미로 김을 맸다. 겨울에는 남편은 짚신을 삼고 자리를 짰으며,부인은 길쌈하고 명주실과 삼실을 뽑았다. 10년이 흐르는 사이에 자산이 수천 금으로 불어났다. 부부는 행상들에게 금전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나중에는 마당 여러 곳을 채울 만큼 노비를 많이 부렸고, 밭두둑이 끝없이 이어질 정도로 광활한 농토를 소유하였다.

 


황두본 열전


   황해도 해주의 황두본은 평민이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하여 제힘으로는 밥을 먹을 방법이 없어서 아침저녁 끼니때마다 이웃에게 밥을 빌어먹었다. 제 손으로 짚신을 삼아서 얻은 돈 세 냥으로 전부 암탉을 사서 닭을 위해 햇대와 둥지를 만들어주고 키웠다. 닭의 무리가 제각기 알을 품었고 병아리에게 모이를 나누어 주었다.
   병아리가 둥지를 내려오면 황두본은 긴 나무막대 하나를 잡고서 병아리를 몰아 들로 나갔다. 소리개가 다가오면 소리를 크게 지르고 막대를 휘둘러서 병아리를 낚아채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니 개나 고양이가 감히 병아리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날이 저물면 병아리를 몰아서 닭장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가슴에 안아서 둥지에 올려놓았다. 병아리가 점차 깃털이 생기자 사다리를 만들어 햇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햇대는 견고하고 촘촘하게 만들어 오소리나 숭냥이, 고양이, 쥐와 같은 짐승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아침에는 병아리를 밖으로 돌아다니게 했다가 저녁이면 닭장에 들여보냈고 이를 하루의 일과로 삼았다. 봄에서 가을이 되기까지 암탉이 알을 각각 세 번씩 품어서 병아리와 어미 닭을 모두 헤아려보니 400여 마리가 되었다. 그것을 모조리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 50여 낭을 벌었다. 았다.

  다음 해 봄에 나무를 베어 우리를 만들고 가운데에는 물이 흐르도록 도랑을 낸 다음 밖에서 물을 끌어왔다. 지대가 낮은 절반의 땅에는 진흙탕을 만들고 나머지 땅에는 튼튼한 기둥을 꽂고 우리에 지붕을 얹은 다음 짚풀을 깔아두었다. 돈 50냥으로 암돼지를 사서 우리 안에서 길렀다.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들었고,이 쌀을 팔아서 얻은 돈으로 또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들어 팔았다. 그렇게 이렇게 사고팔기를 마치면 또 다시 사고파는 일을 시작하였다. 벼를 대껴서 남은 쌀겨를 거칠고 부드럽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큰 독에 넣고 물에 담가두어 썩기를 기다렸다. 큰 구유를 설치하여 쌀겨를 돼지에게 먹였다.
   돼지는 날이 갈수록 살이 찌고 돼지 새끼는 부쩍부쩍 실하게 자랐다. 그렇게 키워 3년이 흐르자 새끼와 암돼지를 모두 헤아려보니 3000여 마리가 되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돼지를 나눠 주고 돼지를 몰몰아 경성에 가서 팔게 하여 6000여 냥을 벌었다.

   이 뒤로는 마침내 장사를 시작하여 6년이 되자 자산이 수만 냥으로 불어났다. 앞뒤로 10년 사이에 근력을 써서 갖은 고생을 다 하였고, 형편없는 옷에 맛없는 음식을 마다치 않으며 많은 부를 일구었다. 황두본이 감수한 고생을 보통 사람은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조막선열전


   호남 낙안의 백성 조막선(趙莫善)은 평범한 사내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본디 가난한 사람으로 가까운 친척이 없었다. 아내와 더불어 힘써 농사짓고 길쌈하여 그다지 밥을 굶거나 추위에 떨지 않았다.
   을해년에 전국에 큰 가뭄이 찾아왔다. 병자년 봄에 쌀 한 말의 가격이 150전으로 치솟아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길을 막았고 들을 덮었으며, 떠돌며 구걸하는 유민이 울타리의 대나 삼밭의 삼보다 빽 백할 정도였다. 막선은 떠돌며 구걸하는 여인들을 살펴보다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순순한 이를 골라 이런 말로 유혹하였다.
“너는 사방으로 떠돌다가 어디서 죽을지도 모를 텐데 차라리 나를 위해 일하고 내 나물죽을 나눠 먹고 나와 동거하는 것이 어떠하냐?”
   여인들은 좋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꼬임에 넘어간 여인이 아홉 명이었다. 그러자 짚을 엮어 움막을 지어 여인들을 거처하게 하고 함께 밖으로 나가 나무하고 나물을 뜯어서 나물죽을 끓여 함께 먹었다. 각자 호미 한 자루에 낫 한 자루를 주어서 농사일을 함께 하였다. 가을이 되어 좁쌀을 수확해보니 이전에 비해 다섯 배가 되었다. 드 디어 각자 흙집을 한 채씩 지어서 거처하게 하였다. 막선은 아홉 명의 여인을 모두 아내로 삼아 동침하였으니 한 집안에 아내가 전부 열 명이었다.
   본부인은 아들 셋을 두었고, 아홉 명의 아내는 대개 아들을 두셋 씩 낳았다. 하나를 두거나 넷을 두기도 하였다. 열 명의 아내가 낳은 자식을 헤아려보니 아들이 모두 서른 명에 딸이 열일곱 명이었다. 딸은 제각기 시집을 보냈고,아들은 아내를 얻어주어 분가시켰다. 서른 명의 아들이 아내를 얻으니 며느리도 서른 명이었다. 막선 은 열 명의 아내에 서른 명의 아들과 서른 명의 며느리,여기에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들을 데리고 살았다.
나가서는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게 하였고,집에 들어와서는 누에 치기와 삼베 짜기, 솜 타기와 같은 일을 하도록 권하였다. 해마다 1000섬의 벼를 수확하였고, 좁쌀은 200섬, 콩 200섬, 보리 500섬, 목면 3000근, 삼 1000속, 거친 명주 서른 필, 참깨 서른 섬, 들깨 마흔 섬을 거두었다.
   그런 뒤에 동네 정중앙에 집을 한 채 지어서 본부인과 힘께 살고, 아들들이 살 집으로 좌우에 각각 열다섯 채씩 모두 서른 채의 집을 시었다. 집을 똑같은 크기로 지어서 마치 자로 재고 저울로 단 것처럼 하였다. 향교에서 동쪽과 서쪽에 같은 크기로 지은 숙소를 본뜬 것이었다. 좌우에 늘어서 있는 집들 중잉께 큰길을 내고 이 동네로 들어오는 대문을 세웠다.
   막선은 늙어서 재산을 여러 아들에게 나누어주고 본부인과 편히 지내면서 부를 누렸다. 매달 30일을 아들 서른 명이 차례대로 부모를 모셔다가 봉양하였다. 초하루는 맏아들이 음식을 장만했고, 그믐 날은 막내아들이 음식을 장만하였다. 아들들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입에 맞는 맛난 음식을 사방에서 구하려고 제각기 힘을 기울였다. 29일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하루 모실 때 진수성찬을 장만하였다. 물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과 바다에서 나는 귀한 해산물 할 것 없이 세상에 난다고 하는 음식물은 무엇이나 다 구해 왔다.
   막선에 관한 소문을 들은 호남 관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다가 낙안 땅에 이르러 막선의 집을 방문하였다. 나이 든 주인이 관찰사를 맞 이하여 안방으로 모시자 서른 명의 아들이 음식을 차려 내어왔다. 관찰사가 깜짝 놀라 사례하면서 “내가 큰 도인 호남 관찰사이기는 하나 당신과는 비교가 안 되오”라고 말했다.
   훗날 막선은 천수를 누리고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여든한 살이었다. 서른 명의 아들은 제각기 아들딸을 낳아 아들은 장가를 보내고 딸은 시집을 보냈다. 또 자녀들이 아들딸을 낳아서 막선이 살아 있을 당시에 친손,외손과 증손까지 모두 합쳐 식구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자손들이 모두 막선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생업을 잘 꾸려서 부를 이어갔다.

 


최 선비 열전


   한양에 최씨 선비가 있었는데 내가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최 선비는 여러 대에 걸쳐 정숭 판서를 지낸 명문가 자제였고,일찍부터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다. 장성한 뒤에는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집안은 가난해지고 부모는 늙어갔으며,처자식들은 처량한 꼴로 변해갔다. 부친의 문하생들과 부하 관리들 가운데 지위가 매우 높아진 이들이 많았으나 권세를 잃자 대문 앞에는 참새 그물을 칠 지경이라 아무도 최 선비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최 선비가 <맹자>를 읽다가 ‘사지를 게을리하여 부모 봉양을 돌보지 않음이 첫째 불효이다’라는 대목을 보고서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면서 “바로 내가 그런 불효자다”라고 말했다. 바로 붓과 먹을 싸매고 벼루를 벼루집에 넣어서 보관해두었다. 그동안 써놓은 글은 전부 모아 불에 태워버렸고,서가를 가득 채운 책은 친구에게 맡겼다. 다음 날 집을 팔아 500냥의 돈을 받았다. 부모를 모시고 처자식을 데리고 집에서 부리는 종 두 명과 계집종 세 명을 이끌고 호서의 청주에 있는 농장으로 내려갔다. 농장에는 제전 10여 결(結)과 일곱 칸 초가집,노비 10여 명, 소 세 마리가 남아 있었다.
   최 선비가 이에 노비를 불러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맹세하여 말했다.
“내가 너희들과 더불어 10년 내에 이룰 바를 약조한다. 내가 밭은 100결, 노비는 100명, 소는 100마리,말은 100개의 다리, 집은 쉰 칸으로 늘리고, 하루 생활비로 만 전을 쓰고, 한 달 생활비는 베 300필이 되게 하마. 내 명령을 따르는 자는 각각 백금의 상을 받을 것이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주인의 말을 듣고 노비들이 물었다.
“누군들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요. 재복이 있어야 할 터인데 꼭 그렇게 된다고 보장하겠는지요?”
   최 선비가 말했다.
“화복(禍福)이란 모두 제 스스로 구하기에 달려 있다. 구하면 얻을 것이니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느냐? 너희들은 내 명령을 따르고 그렇게 안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
   노비들은 속으로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입으로는 알았다고 하였다.
   최 선비는 이에 500냥의 돈으로 오곡을 사서 비축해두도록 하였다. 당시 호서에는 큰 풍년이 들어서 100전에 벼 스물다섯 말을 구매하였는데, 같이 매입한 다른 곡식도 비슷한 수량이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최 선비는 직접 보습과 가래를 잡고 다른 농부보다 앞장 서서 일했고, 늘 봇도랑 사이에 앉아 있었다. 가을에 100섬을 거둔 사람이 둘이었다. 이 해에는 또 큰 풍년이 들어 곡식 가격이 지난해 보다 곱절이나 쌌다. 최 선비가 이에 제전 10결을 몽땅 팔아서 받은 돈 3000냥으로 모조리 오곡을 사들였다. 이전에 사들인 것까지 모두 합해 곡식이 4000여 섬이 되었다.
   이듬해 여름에는 가물고 가을에는 장마가 져서 들에는 서있는 곡식이 없었다. 한 해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겨울을 지나 봄에 이르자 늙고 약한 이들은 죽어 구렁텅이를 채웠고,그나마 힘이 있는 자들은 유리걸식하였다.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고 겉곡식 한 섬 가격이 열 냥에 이르렀고, 벼는 그 곱절이 되었다. 늙은 노비들이 사 들였던 곡식을 내다 팔자고 하니 최 선비가 허락하지 않고는 “너희들은 가서 마을의 노인들을 불러오너라!”라고 하였다.
   노인들이 오자 섬돌 아래에 서게 하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우리 동네 이웃들 가운데 굶주려 죽을 지경에 빠진 이들이 몇 사람이나 되오?”
   최 선비의 물음에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누군들 죽지 않겠습니까? 전답이 없는 자야 본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전답이 있고 소와 따비를 갖추고 아들딸이 많아서 농토에 달라붙어 농사일에 힘써서 1년은 충분히 버틸 사람들도 다들 얼굴이 누렇게 떠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들도 올해 곡식이 모두 여름에는 말랐다가 가을에는 물에 잠겼습니다. 간혹 밭 사이에 서 있는 곡식은 낫으로 베어 수확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지요.”
   최 선비가 말했다.
“오호라! 다 죽게 생겼구나. 내게 곡식이 약간 있으니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차마 우리 마을 이웃이 다 죽는 것은 보지 못하겠구려. 아무데서 아무 데까지 식구의 숫자와 가구의 규모를 기록하여 보여줄 수 있겠소?”
   노인들이 한목소리로 “이야말로 진정 생불이십니다”라고 하며 일제히 절하였다. 돌아가서 사방의 이웃들에게 연유를 알리고 가구 규모와 식구 수를 기록하여 바쳤다. 최 선비가 약속한 날에 징부에 적혀 있는사람을 함께 불렀더니 500여 가구에 1300여 명이었다.
   최 선비는 그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말했다.
“당신들은 굶주릴 것을 걱정하지 말고 본업에 힘쓰면 좋겠소.”
   그로부터 달마다 식구 수를 계산하여 곡식을 주어서 병들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였다. 소를 팔아버려 소가 없는 이에게는 소를 사서 주고, 농사철에 점심 지을 식량과 파종에 필요한 오곡의 씨앗을 대주었다. 이들 걔500여 가구 식구들은 힘을 써서 일제히 농사를 짓고 、근면하게 때를 맞춰 일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권유하였다.
   최 선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난해에는 한 해 농사가 흉년이 될 줄로 알아차리고 나 자신의 농사를 폐하고 말았다. 올해에는 나도 농사를 잘 지어보려 한다. 10결의 논을 이미 팔아버렸으니 다른 사람의 전답을 많이 빌려다가 농사를 짓고 절반을 거둬들여야겠다.”
   그리하여 노비들을 이끌고 직접 농사일을 감독하였다. 이 해의 농사는 그의 말대로 정말 큰 풍년이 들어 농작물을 수확하여 반으로 나누니 100여 섬이 되었다. 500여 가구에서도 제각기 곡식을 많이 수확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수확을 다 마치고 다투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이 곡식은 모두 최 씨 덕택이다. 500여 가구, 1300여 명의 식구들만,열 집에 아홉 집이 텅 빈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극심한 기근을 모면하고 전부 살아남아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같은 집에서 편안히 즐기고 논밭에서 농부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누구의 은혜인가? 이처럼 골육의 은혜를 베푼 은인이 있건만 은덕을 갚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개돼지도 우리 똥은 먹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정말 그렇다!”라고 하였다. 그중에서 세상 경험이 많고 글자를 아는주민들이 모여서 상의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최 씨가 준 곡식은 최 씨의 제전 10결과 서울의 저택을 판 대금을 합한 데서 나온 것이다. 금년 봄에 곡식 값으로 계산하면,4000여 섬으로 4만 냥의 돈을 받을 수 있다. 이 곡식을 팔지 않고 우리들을 살렸으니 이야말로 천하의 어진 사람이자 의로운 선비이다. 우리들이 단지 4만여 냥만 돌려드리면 너무도 야박한 일이니 마땅히 6만 냥으로 보상해드립시 다.”
   다들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구별 식구 수에 맞게 지급한 식량을 비롯하여 농사철 점심 짓는 데 쓰인 식량과 종자,그리고 소 사는 데 들어간 비용 등을 모두 헤아렸다. 이를 가을 곡식 값으로 환산하니 100전이 곡식 스무 말에 해당하여 모두 벼 6만여 섬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백성들의 벼를 등에 실은 소와 말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최 선비의 집 대문 밖에 빽빽이 들어찼다. 최 선비가 괴이하게 여겨 “무슨 일이오?”라고 묻자 백성들이 일제히 답하기를 “지금 한창 일을 하는 중이니 삼가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라 하고 곡식을 문밖 한데에 쌓아놓았다.
   일을 마치고 나이 든 어른들이 마당에 들어와 줄지어 절을 올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곡식으로 계산하자면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은혜로 말씀드리면 태산보다 무거울 뿐입니다. 소인들은 감히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곡식으로 태산보다 무거운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최 선비가“얼마나되오?”라고 묻자 “6만섬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최 선비가 말했다.
"나는 본디 묵적처럼 겸애(兼愛)하여 내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백이처럼 청렴한 사람도 아니요.  그러나 내가 준 곡식은 4만 섬인데 6만 섬으로 되갚으니 본전에다 나시 5할을 더한 양이구려. 이야말로 사방 한 치의 작은 미끼를 던져 임공처럼 큰 자라를 낚은 셈이오.”  이렇게 완강히 사양하며 받지 않으려 하였다.
   노인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금년 봄에 만약 4만 섬을 팔았다면 마땅히 4만 냥을 얻었을 것이고, 그 4만 냥으로 한양과 지방에서 파는 온갖 물건을 사두었다가 가을이 되어 내다 팔았다면 마땅히 12만 냥을 벌었을 것입니다. 12만 냥으로 벼를 샀다면 마땅히 12만 섬을 얻었을 것입니다. 지금 6만 섬은 12만 섬의 절반입니다. 12만 섬을 가지지 않고 6만 섬을 갖게 되었는데 어찌 청렴이 아닙니까. 처음부터 이익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지지 않고서 다 죽게 된 뭇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되 보답을 바란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니 이야말로 겸애가 아닌지요?
백성들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말씀드리자면, 500여 가구 1300여 식구들은 큰 흉년의 춘궁기에는 아무리 돈을 빌리려고 해도 빌릴 길이 없습니다. 설령 돈을 융통한다 해도 이자가 반드시 5할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야 하는데 곡식은 귀하고 돈은 천합니다. 돈을 쥔 자들이 시장에 가득합니다만 곡식을 등에 지고 있는 이는 아예 없거나 그나마 겨우 조금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때에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때맞춰 농사를 짓고 모든 집안이 곡식으로 가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곡식을 받지 않으신다면 소인들은 노비가 되어 만의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이에 최 선비가 답하였다.
“여러분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받지 않을 도리가 없구려.”
   백성들이 모두 절을 하고 말하였다.
“곡식이야 밖에서 옮겨다 놓으면 되고 감사함은 마음속에 맺혀 있습니다. 죽기 전까지 어느 날인들 잊겠습니까?”
   그러자 최 선비가 말하였다.
“준 것은 적은데 받은 것은 많아서 정말 낯부끄럽소! 그대들이 더 감사할 일이 뭐 있단 말이오?”
   이듬해 봄에는 벼 한 섬당 150전에 팔아 약 9만 낭을 얻었다. 가을에 이 돈으로 벼를 사서 9만여 섬을 얻었고, 또 이듬해 봄에 벼 한 섬 당 두 낭을 받아 약 18만 냥을 얻었다. 가을 이후에는 벼를 다 사고도 돈이 남았고, 벼가 많아서 돈으로 다 바꾸기도 어려웠다. 그러자 가구의 이재에 밝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행상을 하게 하였다. 10년 사이에 자산이 가득하고 넘쳐서 노비들에게 맹세했던 바 와 똑같이 되었다. 그제야 노비들에게 각각 100냥씩 상으로 주었다.  500여 가구의 주민들도 그에게 도움을 받아 흉년이 들면 항상 최 선비에게 빚을 얻어 썼다.

 


자수성가 방법


   앞에서 소개한 이들은 부자 중에서도 눈에 띄게 기이한 사람들이다. 누구도 벼슬과 녹봉을 조상에게 물려받지 않았고, 법을 범하거나 금령을 어기지 않았으나 종실과 공신, 왕실의 인척 집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부를 쌓았다. 하늘이 정한 때보다 앞서 움직여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사람의 힘을 다 발휘하게 하면서도 땅의 이점을 잘 살렸다. 재물을 줄일 때는 재나 흙처럼 흩어버렸고,이익을 챙길 때는 금이나 옥처럼 거둬들였다. 변화를 일으키는 수완은 신령할 지경이었고, 재물을 잡아 지키는 일에는 자물쇠보다 견고 하였다. 따라서 부를 쌓아올려 풍족하게 사는 기술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제각기 시대 흐름에 따라서 종류별로 구분하고 미루어 확장함으로써 천 명 만 명이 모이는 시장에서 이익을 독점하여 큰 부를 일구어냈다. 한 도의 부를 차지한 이도 있고, 한 고을의 부를 차지한 이도 있으며,향촌의 부를 차지한 이도 있으니 이런 부자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부자의 미덕


   무릇 부를 쌓은 사람은 어질지 않고,어진 사람은 부유하지 않다는 것은 양호가 한 말이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부자는 위로는 나라가 부과한 세금을 거부하지 않으니 이는 충성됨이고, 아래로는 향촌의 이웃 사람에게 금전을 빌리지 않으니 이는 청렴함이다. 안으로는 육친에게 옷을 따뜻하게 입히고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평화롭게 지내게 하니 이는 효도와 우애와 자애로움이다. 밖으로는 가깝거나 소원하거나 상관없이 친구들이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흔쾌히 허락하니 이는 인자함과 의로움과 신의이다. 관혼상제 예식에 예물을 잘 갖추어놓으니 이는 예절 바름이다. 걱정거리를 풀게 하고 일을 처리함에 구차하지 않으니 이는 지혜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 마을에 살고 있거나 경성의 시장 바닥에서 생업을 꾸리고 있거나 간에 당세의 공경대부들이 앞다투어 알아주려 한다. 그런 까닭에 재물을 써서 관직에 진출하여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몸은 높고 현달한 지위에 이르니 이는 귀함이다.

 


빈자의 악덕


   반면에 가난한 자는 관아에 내야 할 세금이나 환곡조차 제때에 내지 못하니 충성스럽다 할 수 있는가? 이쪽에서 꾸고 저쪽에서 빌리느라 경황이 없고 거리낌 없으니 청렴하다고 하겠는가? 육친이 서로 벌어져 떠돌아 헤매는데도 속수무책으로 구해내지 못하니 효도하고 우애하고 자애롭다 하겠는가? 속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남을 구제해주고 싶어도 힘이 없고, 마음속으로 분개하여 지조를 지키고 싶어도 도로 지조를 빼앗긴다. 남에게 돈이나 곡식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가 지났어도 갚지 못한다. 그를 인자하고 의롭고 신의가 있다고 하겠는가? 부모 살아 계실 때 잘 모시고 돌아가시면 상을 잘 치르며, 제사 지내고 혼사를 치를 때 슬픔과 기쁨의 감정 올 곡진하게 표현하는 일도 못하니 예절 바르다 하겠는가? 귀와 눈은 소리와 빛깔을 분간하고, 코와 입은 냄새와 맛을 분간하며,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통제하여 의지에 따라 취사선택하는데 한 번도 자기 의지대로 행하지 못하니 지혜롭다 하겠는가?
   현명한 사대부가 있어 지조를 고상하게 지켜 군주 앞에서도 공손히 읍하는 예를 보이지 않고 사양하는 처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니 의지가 약해져서 가난을 벗어 나기 위해 벼슬을 하려 하였다. 머리는 허옇고 얼굴은 쭈글쭈글한 채, 늦은 저녁에 권세 있는 자에게 가서 애걸하였다. 주인은 거만하게 앉아서 좌우 사람을 둘러보며 딴말을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 사대부가 부끄러워 밖으로 나오며 미처 섬돌을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주인이 곁에 있는 사람더러 “이런 자들까지 다 찾아와서 관직을 구하니 관직이 너무 천해진 게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사대부는 권세 있는 사람에게 승낙을 받지 못하자 붙들고 하소연할 곳이 없는지라 시정에 사는 부잣집을 찾아가서 구걸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예의를 차리기는커녕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아들을 돌아보고 “잘 지키거라!” 하였다. 이러니 귀하다고 하겠는가?

 


소규모 사업의 성공 사례


   그러므로 부를 구하는 방법은 다양하나 성공에 이르면 다 똑같다.  밭농사는 졸렬한 생업이나 김씨는 그 방법으로 한 개 군(郡)의 부를 독차지하였다. 소를 잡는 것은 천한 일이지만 대구의 장소자(張小者)는 팽택에 몰래 들어가 살면서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투전은 사악한 생업이지만 골김(鶴金)은 이로써 부자가 되었다. 생선 장사는 대장부 처지에서는 비천한 일이지만 저명은 그걸로 풍족하게 살았다. 국밥과 고기산적 장사는 작은 생업이나 군칠은 날마다 300~400냥의 돈꿰미를 챙겼다. 조각은 하찮은 기술이지만 최천약(崔天若)은 관직에 올라 지위가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의주의 잠상(潛商)은 이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죽일 죄인데 송도의 김별장(金別將)이란 자는 옥리에게 천금의 뇌물을 주고 함께 도주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 를 구하여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두 가지 마음도 품지 않아서 부를 얻었다.

 


부자의 재물 운용


   위에서 살펴본 것으로 볼 때 사람에게는 항상 똑같은 마음이 없고, 가문에는 정해져 변치 않는 생업이 없으며, 재물에는 본디 임자가 없어 능력이 있는 자가 사용한다. 재물을 잘 운용하는 자는 손자(孫子)와 오자(吳子)가 군대를 다스리고, 제갈량(諸葛亮)이 나라를 다스리듯 한다. 반면에 재물을 잘못 운용하는 자는 소가 쥐를 잡듯 하고, 호랑이가 물고기를 사냥하는 것처럼 한다.
   부유하다고 해서 다 현명하게 마음을 쓰지는 않으나, 법을 두려워 하고 남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꺼려서 현명하게 처신하려 애쓰는 부자들이 많다. 가난한 자는 뜻하는 바가 모두 악하지는 않으나 의지할 데가 없어서 제멋대로 편벽되게 행동하고,간혹 자포자기한 자도 나타난다. 앞에서 밝힌 ‘부유하면 덕이 모여들고 가난하 면 악이 일어난다’라는 말이 틀린 말이겠는가? 

 

 

 

 

 

3.  역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의 말 

 

 

《해동화식전》의 구성과 사마천의〈화식전〉

 

   《해동화식전》은 전체가 한 편의 글이다. 장과 절을 구분하지 않았고 소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글은 크게 의론(議論)과 서사(敍事)로 나뉜다. 부의 축적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부분과 이를 입증하기 위해 아흡 명의 부자를 소개한 열전 부분이다. 전체 구성과 논지 전개의 개략을 살피기 위해 작은 주제를 자세하게 항목으로 뽑아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서론,생업의 본질, 팔도 물산의 큰 줄거리, 분업,빈부의 차이와 치부의 동기, 거부 열전 다섯 편, 팔도의 경제지리와 물산,생업의 선택, 재물의 노예 열 가지 사례, 행상과 거상의 비교, 정승과 거상의 비교,안정 자산의 품목,빈자의 굴욕, 치부의 방법, 시장과 환경의 예측 능력,빈자의 각성, 상인의 규모와 종류,거부 열전 네 편, 자수 성가 방법, 부자의 미덕,빈자의 악덕,소규모 사업의 성공 사례, 부자의 재물 운용.
   장과 절을 구분하지 않은 한 편의 글이지만 치밀한 구성과 일관된 논지 전개,곡절과 변화의 문장이 돋보인다. 아홉 편의 거부 열전이 분량의 반을 차지하여 의론과 서사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의론 부분에서는 부를 긍정하고 가난을 부정하며 부자의 미덕을 예찬하고 빈자의 악덕을 비판하는 경제론과 경영론이 펼쳐지고, 거부 열전은 의론에서 주장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해동화식전은 다양한 경제 주제를 깊고 넓은 식견으로 종횡무진 긴장미 넘치게 서술하여 읽는 재미가 있다. 전체는 논설문이지만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펼쳐진 열전의 서사를 곁들여 변화무쌍하고 흥미진진하다. 주제와 문장이 잘 어우러져 이규상의 극찬이 지나치지 않다. 또 당시에 막 싹트고 있던 소품문(小品文)의 문체를 구사하였다. 극적 긴장과 세련된 묘사, 다채로운 수사와 소설적 묘사로 뛰어난 문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명문장의 하나로 주저 없이 평가할 만하다.
   한편,《해동화식전은 사마천의 명저《사기》〈화식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재운은〈화식전〉의 주제 의식과 문체, 서술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 부와 상인을 긍정하는 시각과 의론, 서사를 교차 서술하며 전국의 물산과 풍속에 주목하는 관점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화식전〉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이후 유사한 저작이 거의 나오지 않았으나 이재운은 〈화식전〉의 정신을 창의적으로 계승한 책을 지었다. 시각과 구성과 방식의 유사성은 인정해야 하지만 내용 전체와 문체, 관점 등에서 독창적이다. 완전히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저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富)의 새로운 인식과 이재(理財)의 논리


1) 이익을 추구하는 천부적 욕망과 부자가 될 당당한 권리

 

   조선은 부의 추구를 터부시하고, 상인을 멸시하는 태도가 뿌리 깊게 유지된 나라였다. 유학은 개인이 사적 이익이나 물욕을 추구하는 것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재(理財) 활동을 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사회는 경쟁보다 협동을 강조함으로써 도덕경제(moral economy)를 지향하였다. 유학의 이념을 실생활에서 실천한 양반 사대부는 상업 거래를 동반하는 이윤을 추구할 수 없었다. 이윤을 남기고 장사하는 행위를 상인 계층에서 할 일로 제한한 다음 상인을 천한 신분으로 묶어버렸다. 자연히 부의 추구는 천박한 행위가 되었다. 그 결과 국가는 천하의 빈국(貧國)임을 자인하였고,개인은 청빈의 인생 에 안주하였다.
   《해동화식전>은 유학이 세운 기본 구도를 부정하였다. 군자는 의로움을, 소인은 이익을 추구한다는 논리를 부정하여 “군자 역시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군자-의로움-선, 소인-이익-악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해체하여 군자도 이익을 추구하고, 소인도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빈부를 도덕과 연결 하는 도덕주의적 태도와 도덕적 기준으로 부의 추구를 죄악시한 논리를 부정하였다. 돈을 버는 일은 도덕적 행위보다 앞서는 근원적 욕망임을 인정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군자를 포함해 모든 인간은 떳떳하게 이익을 추구해도 좋은 존재이다. “부란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맛좋은 생선회나 구운 고기와 같은 것”이라 하고, “제각기 자기 일을 열심히 하여 즐겁게 이윤을 추구하니 마치 바싹 마른 장작에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타는 것과 같다. 밤낮으로 갖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라고 한 말에 그런 생각이 담겨 있다. 누구나 부를 추구해도 좋다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욕망의 가치가 인정받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노동도 즐겁게 하는 것이 옳다는 당당한 가치관이 마련되었다.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 볼 때 그것은 혁신적 사유로 평가할 만하다. 

 

2) 빈자의 악덕과 부자의 미덕


   이재운은 부자가 될 권리를 강조한 데서 나아가 가난을 비난하였다- 가난은 자긍심을 가질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므로 가난에서 서둘러 벗어나려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세 군데서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빈자의 삶을 묘사한 다음 대뜸 “그러니 부유함을 누리고 재물을 모을 수만 있다면,손이 불에 타고 발이 물에 빠질망정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난하지만 어진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가난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묵묵히 견디지 말고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거듭 말했다.
   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는 부자의 미덕과 빈자의 악덕을 대비하여 보여준 대목에서 한층 더 단호하였다. 도덕경제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부자는 악이고 빈자는 선이라고 보는 관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재운은 그 관점을 재평가하기 위해 현실에서 나타나는 부자와 빈자의 행위를 열한 가지 도덕의 기준을 들이대어 비교하였다. 그중에서 앞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부자: 부자는 위로는 나라가 부과한 세금을 거부하지 않으니 이는 충성됨이고, 아래로는 향촌의 이웃 사람에게 금전을 빌리지 않으니 이는 청렴함이다. 안으로는 육친에게 옷을 따뜻하게 입히고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평화롭게 지내게 하니 이는 효도와 우애와 자애로움이다.


빈자: 반면에 가난한 자는 관아에 내야 할 세금이나 환곡조차 제때 내지 못하니 충성스럽다 할 수 있는가? 이쪽에서 꾸고 저 쪽에서 빌리느라 경황이 없고 거리낌 없으니 청렴하다고 하겠는가? 육친이 서로 떨어져 떠돌아 헤매는데도 속수무책으로 구해내지 못하니 효도하고 우애하고 자애롭다 하겠는가?


   가장 인상적인 대목의 하나이다. 도덕관념을 부자와 빈자의 삶에 너무 완고하게 적용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부자는 악하고 빈자는 선하다는 그릇된 통념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논리에 따르면 사실상 부자가 선하고 빈자가 악하다는 생각이 더 현실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였다. 선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아무리 어질다 해도 가난한 자는 이웃은커녕 제 가족도 지키지 못 하지만,인색하기 짝이 없다 해도 부자는 가족을 물론이고 이웃까지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선량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존재인가 묻는다면,당연히 부자라고 판단하였다.
   이처럼 책 전체는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서술되어 있다. 이재운은 부와 부자를 흠모하고 찬미하는 주장을 당당하게 펼쳤다. 부자와 상인에 대한 조선 사회의 지나친 왜곡과 편견에 맞서 떳떳하게 부를 추구하고 상행위를 인정하자고 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3) 부자의 자격과 부의 경영


   진정 부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책에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치부하는 길을 안내하였다. 하나는 이재(理才)의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영을 잘하여 거부가 된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다. 먼저 이재의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재운은 자본의 크기와 경영 능력, 시장과 환경의 예측 능력 같은 조건에 따라 판단하되 자본의 많고 적음과 생업의 귀천을 묻지 말고 부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하였다. 밑천이 적은 상인과 다양한 생업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다. 밑천이 많지 않아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자본 대신에 “남이 하나를 하면 나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는 노력을 보이라고 했다. 그렇게 노력하면, 마치 봄날에 풀이 자랄 때 처음에는 자라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나중에는 불쑥 자란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재산이 불어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재운은 밭농사,소 도살,투전, 국밥 장사,조각,잠상(潛商)과 같이 당시에는 비천한 생업이라 여겼던 일에 종사하여 큰 부자가 된 사례를 들고 “이들은 모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를 구하여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두 가지 마음도 품지 않아서 부를 얻었다”라며 추켜세웠다. 소백정인 대구의 장소자(張小者)가 큰돈을 번 뒤 평택에 몰래 들어가 살면서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종의 신분 세탁을 했는데 이런 행적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내세기 전반 서울의 광통교에서 국밥과 술을 팔던 유명한 음식점 주인 군칠(君七)은 날마다300~400낭을 번다고 귀띔하였다. 비천한 일이든 아니든 군칠은 술과 음식을 팔아 날마다 상상하기 힘든 거액을 벌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상인이라 하였다 상인을 포함해 생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크게 불린 부자를 비하하지 않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재운은 부자를 상중하의 경영 능력으로 구분하였다. 경영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경영의 대상
으로 삼는다고 보고, 하등의 경영자는 사람의 능력을 잘 발휘하도록 하는 수준이고,중등의 경영자는 땅과 사람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수준이며, 상등의 경영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도록 하는 수준이라고 하였다. 주목할 만한 독특한 경영론을 내세운 것이다.
   경영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부를 얻으려면 기본적인 자격 조건이 있다고 하였다.
   곤경과 불운에 처하여 격분하는 것은 의지가 있기 때문이요, 무 에서 유를 찾아내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계획을 세워 결단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은 용기가 있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 이며, 남과 함께 일하되 속이지 않는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춘 다음에야 이익에 관한 일을 더불어 말 할 수 있다. 이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네 가지를 갖추고 있다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아홉 길 되는 높은 산을 만들 때 삼태기 하나 분량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부를 구하는 큰 법이다.
   큰 부자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으로 의지와 지혜와 용기와 정성과 신의의 다섯 가지 요소를 꼽았다. 20세기 이전에 부자의 경영 능력과 경영자의 자격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부의 경영에 관한 이재운의 생각은 조선 후기의 독특한 경영론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홉 명의 상인과 거부 열전


   《해동화식전에는 상인 열전이 모두 아홉 편 실려 있다. 대체로 자수성가한 큰 부자를 묘사한 전기이다. 20세기 이전에는 부자 또는 상인은 전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존경할 만한 위인의 삶을 묘사하는 전기의 범주에 부자나 상인은 결코 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들에 대해 입에 올리거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상인 전기는 없다고 봐도 좋다.
   《해동화식전》이전 저작인 유몽인의《어우야담(於于野談)》 에 상인을 다룬 야담 몇 편이 실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연성과 환상성이 다분한 상인 행적을 흥미 차원에서 묘사하여 현실성을 지닌 상인 전기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해동화식전》의 거부 열전은 상인의 행적을 본격적으로 묘사한 첫 시도이다. 게다가 아홉 명에 이를 만큼 수도 많다. 채택된 상인은 숙종과 영조 시기의 부자들 가운데 그의 이재론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인물 형상과 치부 과정을 볼 때 대체로 실존했던 상인을 기초로 소설적 긴장미와 흥미를 살려 묘사하였다. 아홉 명 전부 실존했던 인물로 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더 검토할 여지를 두는 것이 좋겠다.
   거부 열전은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각각 다섯 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실려 있다. 앞부분에서는 “치산(治産)을 잘하는 사람은 재물을 크게 불리고, 그다음 사람은 아끼고 절약하며,그다음 사람은 변화를 일으켜 형통하고, 그다음 사람은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한다. 아무 수완이 없는 사람은 거지로 산다”라고 하여 부자를 다섯 가 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 유형에 부합하는 부자의 삶을 묘사하였다. 그가 뽑은 부자는 다섯 가지 유형에 따라 차례로 국제무역과 대부업을 한 거부 이진욱과 충주의 유명한 구두쇠 자린급, 호남 부자 김극술과 부인,한양 청파동의 과부 안씨와 늙은 종,종로 종각의 거지 자갈쇠 등이다. 자린급은 널리 알려진 자린고비의 다른 표현이고, 자갈쇠는 영조 때의 저명한 실존 인물로 박지원의 산문〈광문자전〉에 등장하는 광문과 동일인이다.
   뒷부분에 실린 네 편은 부를 축적하여 즐거운 인생을 구가한 부자의 전기이다. 이재운은 “후세 사람들이 보고서 느낀 바가 있기를 바라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독자들이 부를 일구는 데 모델로 삼을 만한 거부를 선택하였다. 네 편은 순서 대로 무일푼 고아로 10년 동안 고생하여 부자가 된 영남 순흥의 김생(金生)과 부인, 무일푼에서 10년 동안 온갖 노력을 하여 거부가 된 황해도 해주의 평민 황두본, 대기근 때에 열 명의 아내와 가족 마을을 이루어 다복하게 산 호남 낙안의 평민 조막선(趙莫善), 한양에서 충청도 청주로 낙향하여 흉년을 예측하여 축재하고 이웃을 구제하여 거부가된 한양 최 선비이다.
   아홉 명의 거부가 똑같은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은 아니나 우연한 횡재에 기대지 않고 나름의 경영 계획을 세워 독자적인 방법으로 큰 부를 쌓았다는 점은 같다. 저마다 경영 계획과 경영 철학을 직접 밝히거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의 다섯 명은 대체로 출중한 경영 계획이 돋보인다. 반면, 뒤의 네 명은 근면과 성실, 부를 일구어서 성실,인내로 부를 일구어서 다른 점이 있다. 권력의 도움도,조상의 유산도 없이 횡재 를 바라지도 않고,스스로 노력하여 자수성가한 부자가 다수이다. 그렇게 부를 일군 부자들은 존경과 흠모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지은이의 의도가 전기에 드러나 있다.
   아홉 명의 부자 가운데 이전에 알려진 상인은 자린급과 자갈쇠이 다. 자갈쇠는 후대에 몇 명의 문인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으나 이 재운이 가장 이른 시기에 그의 삶을 다루었다. 자린급의 경우에는 구두쇠의 전형적인 인물로 유명하고, 행적이 상당히 다른 사연이 《어우야담》에 실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책에 처음 실린 자린급 의 사연이 나중에《어우야담》사본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마지막에 실린 최 선비 열전은《이조한문단편집》에 ‘귀향’이란 제 목으로 수록된 유명한 이야기이다.《기문총화》를 비롯하여 많은 야담집에 동일한 내용으로 전재되어 있다. 다만 어떤 문헌도《해동화식전》에서 베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또 자갈쇠 열전,조막선 열전 등 여러 편은 후대 야담집에 실린 많은 치산담(治産談)과 비슷 하다. 18세기 중후반 이후 야담집에 재산 축적을 다룬 치산담이 크게 불어난 현상은《해동화식전》이 폭넓게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해동화식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해동화식전>은 부와 이재 활동을 작정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책이다. 이재운은 국가의 재정이나 부의 분배와 같은 거시적 주제는 다루지 않고 개인 차원의 이재를 다루면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가치관의 혁신을 꿈꾸었다. 부의 추구는 유학 이데올로기가 말하듯이 속물적이고 비도덕적인 욕망에 기인한 게 아니라 개인과 사회에 기여하는 행위이자 도덕적으로 우월한 행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다. 여전히 도덕경제의 이념이 지배하던 조선 후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사유를 펼치고 있다.
   이렇게 혁신적이고 폭발력을 지닌 책이라면 다양한 측면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큰 영향을 끼쳤을 법하다. 이 책의 출현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가치가 존중받고 서둘러 근대 사회로 변화해가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정신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데 기여한 바 있듯이 그런 역할을 기대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몇 세대를 거치면서 이 책의 존재조차 잊혔다. 그 이유를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지은이가 남인 서파 지식인으로 당시 주류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다. 관직에 진출하지도 못했고,유력한 지식인 집단에 편입되어 활동하지도 못했다. 세력이 없는 고독한 지식인인 지라 아무리 탁월하고 가치 있는 주장을 펼친다 해도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드물었다.
둘째로〈화식전〉의 논리와 문체를 채택함으로써〈화식전〉의 18세 기 조선판으로 가치가 희석되었고, 결국 핵심 주장과 이론의 의미가 축소되고 사장되 었다. 이재운 자신도 대담하고 과격한 주장이 지닌 위험성을〈화식전〉의 구도를 빌려서 피해 가려 했다. 그리하여 저술 의 독립성과 현재적 가치를 훼손하게 되었다.
셋째로 상인과 부를 긍정하는 시각, 경영과 시장,이재 등의 저술 내용은 당시 학문의 세계에 편입되기 힘들었다. 설령 편입된다 해도 학문의 변방에 속하므로 딩시 지식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 었다. 이규상이 ᅳ근세 100년 사이에 이런 작품이 없다”라고 극찬했으나 이마저도 문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 이 책의 큰 가치 는 사회나 경제 분야가 아니라 야담과 같은 문학의 분야에서 발현되 었다.
넷째로 이재운의 주장이 탁월하고 가치 있고 폭발력을 지녔다 해도 조선 사회의 각 분야에는 이를 수용하고 긍정할 세력이 없었고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 말기에 서구 제국과 접촉하기 이전까지 상업과 부자를 보는 관점에 근본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 중후반에 심대윤과 최한기가 이윤 추구를 긍정하는 논지 를 펼치기는 했으나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상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책의 내용이 시장경제를 중시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영조와 정조의 정책 방향과 부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조 치세 중후반에 유수원의《우서》 (1737년), 이중환의《택리지》(1751년),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1778년)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농업 중심의 조선 사회를 향하여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수립 하고, 상업을 진흥하며,부를 긍정하고,상인을 우대하자고 주장하였다. 중상주의적 경제론이 이때 반짝 활기를 띠었는데 이는 조선왕조 500년 지성사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다. 이재운의《해동화식전은 저 위대한 사상가의 서클에 당당하게 동참할 자격을 갖춘 저술이라 평가한다.
   공교롭게 이재운을 포함한 네 명의 사상가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다. 위대한 사상가인 유수원은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당했고,이중환은 역적으로 몰렸다가 풀려나 한평생 불우하게 살았다. 서파 지식인인 이재운과 박제가 역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불운은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  
에 가깝다. 조선왕조와 유학이 가지 말라고 완강하게 막아놓은 길을 대담하게 헤쳐갔던 중상주의적 경제학자들의 학문 방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재운의 주장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대단히 불온하고 위험한사상이었다. 부가 악이고 가난이 선이라는 조선 사회의 도덕적 명제를 가난이 악이고 부가 선이라는 역전된 명제로 반박하여 독자들의 사유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진지하게 반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선 사회가 외부의 충격에 무 너진 뒤에는 자연스럽게 그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재운은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 2019년 8월 퇴계인문관 연구실에서 옮긴이 쓰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