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 2023. 5. 21 (일)   09:00 - 16:00   (7시간)

 

2. 걷기 거리 : 파란색 줄친 구간 26km

 

  -  강화나들길 2코스  (초지진 광성보) 부분 구간 8km

  -  강화나들길 6코스  (광성보 → 강화버스터미널) 전체구간 18km

 

3. 일기

 

날씨 : 흐린 후 맑음 (기온 최저 14도, 최고 18도)

천문 : 일출 05:20, 일몰 19:41

 

 

4.  강화나들길 걷기 

 

 - 지난 주 걸은 강화나들이 2코스 대부분의 사진이 휴대폰 배터리 문제로 찍을 수 없어서, 오늘은 초지진부터 2코스 돈대길을 걷다가, <6코스  화남생가 가는 길>을 역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 6코스 초반부 역시 2코스와 일부 겹치는 길이다.

 

 - 오늘 날씨는 서늘하고 흐린 날씨에 황사까지 겹쳐, 점심 무렵부터 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우중충하고 멀리 조망도 좋지 않다. 

 

 - 그래도 사람 사는 강화나들길에 도처에서 관광 캠핑족, 나들이객, 농사 짓는 사람들, 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너무 구경하느라 - 딴 생각하느라 정작 이 길의 제목인 화남 생가를 찾아볼 생각 없이 스르륵 자연스럽게 길이 끝나버려 아쉬웠다. 나중에 후기를 찾아 보았더니 화남생가 위치가 정확이 어디인지 동네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고 하나, 농번기철에 동네분을 만날 수 없다면 찾기 힘들 것 같다.  집주변 강화나들길에 표지판을 붙이거나 강화나들길 홈페이지에 주소 표시가 있었으면 좋을 듯하다.

 

 

 

 

<  course2. 호국 돈대길 下  :  초지진 → 광성보 8km  >

 

- 김포골드라인 구래역 앞에서 인천 71번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면서 바라본 주위 모습이다. 김포는 옛날 농촌 모습이 이제는 아파트로 다 바뀌었다. 

- 초지진부터 시작하는 돈대 길이다. 오늘 걷는 구간에서 만나는 돈대는 다음과 같다.

 

- 초지진 바로 앞에 선 보호수 소나무 : 일련번호 9-48호, 수령 400년, 높이 10미터, 둘레 2.3미터,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 초지진 망루 안의 모습

- 바람이 불고 있다.

- 물살도 세다.

- 썰물 때이다.

- 찔레꽃 가득하다.

- 아까시꽃이 활짝 피어있네 ...

- 강화나들길 2코스는 해변 바로 옆을 따라 걸어가는 길이다.

- 덕진진을 앞에 두고 차길로 나오더니 다시 숲으로 나들길이 이어진다.  나무숲 사이로 들어서면 싱그러운 나뭇잎의 푸르름이 기다리고 있다.

- 지도에는 학사재라고 나오는 데 개인 주택인 듯하다.

- 붉은병꽃이 피어 있다.

- 덕진진의 덕진돈대이다.

- 신미양요 때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다.

- 남창포대

- 덕진진

- 표시는 없지만 강화나들길은 화장실 옆 주차 및 진입금지 길로 들어선다. 바닷가를 따라가는 길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길을 가야 알바가 없다.

- 길다운 길이 아니라 일단 밭둑길로 가다가 바닷가길로 올라간다.

- 조그만 섬 사이로 바닷물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

- 길이 걷기에 참 좋다.

- 갯벌에 사는 염생식물 함초가 여기도 있다.

- 찔레꽃도 있다.

- 길은 광성보 광성포대에 다다른다.

 

< 광성보 이야기 >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 좌 홍이포 - 포구장전식 화포로서 사정거리 700m이며 조선영조때 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 중간 소포 - 장전후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 300m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 우 불랑기 - 불랑기는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 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 광성 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 손돌목 돈대 - 이 돈대는 조선 숙종(1674-1729,재위)때 축조된 돈대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처가 있었다.손돌목돈대는 성곽 길이가 108m이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 광성보의 주력 중의 하나인 손돌목돈대로 오르는 길이다.

- 약간 높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손돌목돈대이다.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라 하는데 위치는 좋으나 무기가 너무 형편없이 차이가 났던 전장터의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애달프다.

- 손돌목돈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 광성보 대문 옆에 세워진 무명용사비이다.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장군과 함께 수백 명이 전사하였다.

- 광성보의 중심 안해문이다.

 

 

 

 

< course6.  화남생가 가는 길  :  광성보 - 강화버스터미널  18km  / 소요시간 6시간  >

 

광성보에서 2km 정도 해안길을 걸어가다가 해안동로를 건너 오두리 마을로 길을 들어서면 모내기가 한창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지나게 된다. 가끔 마을 뒷산 길로 들어서서 햇빛을 피하여 푸른 녹음을 즐기는 맛도 선사해준다.  팔만대장경을 처음에 제작하였다고 선원사에서 작은 습지와 흔적만 남은 토성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일품이다. 강화읍 가까이까지 소나무숲이 이어지고 이어 논길이 나오고 논길을 지나면 강화풍물시장이 나오게 된다.  

 

 

* 화남 고재형(1846-1916) 선생

 

강화 나들길의 밑바탕에는 강화 지역의 유래와 풍광, 인물 등을 노래한 강화도 선비인 화남 고재형(1846-1916) 선생이 남긴 ‘심도기행’이란 기행시집이 있다. 심도기행은 화남 선생이 1906년 복사꽃이 흐드러진 어느 봄날 고향인 두두미 마을(현 불은면 두운리)을 출발해 강화도 전역의 100여 마을을 여행하며 남긴 256수의 7언 절구의 기행시가 담긴 시집이다. 강화군은 화남 선생이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암울한 시대에 급속히 사라져가는 풍속을 개탄하며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땅을 걸었던 길을 100여년이 흐른 지금 인문지리지로 되살려 생태문화탐방로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강화 나들길은 화남 선생이 고향을 노래한 시(詩)의 길이요,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살아있는 길이다.

 

 

- 6코스 길은 광성보를 나와서 오른쪽 염해(강화해협)길을 따라 길을 시작한다.

- 처음으로 보는 붉은아까시나무이다.

- 해변길이 끝나고 이제 오두리마을 쪽으로 향하여 걸어간다.

- 해안도로 건너 오두리마을로 가는데 논에 모내기가 끝나 있다.

- 기계로 모를 심고 난 후, 손으로 보완할 목적으로 추정되는 모판 일부가 대기하고 있다.

- 오두리 마을회관

- 오두리경로당

- 마을 뒤산 숲길이 시작된다.

- 연녹색 그윽한 숲길

- 숲길이 끝나고 능촌마을이 나온다.

- 오랜만에 보는 오동나무꽃

- 차단문 옆으로 통과하여 왼쪽으로 간다.

- 모내기 대기 중인 논

- 비상하는 학 한 마리, 통상 사람이 가까이 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민감함이 있다.

- 두운2리마을회관, 길위에 사람이 없다.

- 길옆 담으로 심어서 피어난 붉은병꽃과 작약.

- 두운2리두두미경로당이다. 1906년 복사꽃이 흐드러진 어느 봄날 고향인 두두미 마을(현 불은면 두운리)을 출발해 강화도 전역의 100여 마을을 여행하며 남긴 화남 선생이 사시던 생가가 분명히 근처에 있을텐데 표지목 찾아 길가기에 바쁘다 보니 그냥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쉽다.

- 보호수 상수리나무 : 등록번호 강화70호, 수령 300년, 높이 25m, 둘레 2.5m, 불은면 두운리 산 699

- 이정목은 없으나 짐작하여 마을 끝 부분에서 우회전한다. 

- 보기드물게 보호수로 지정된 물푸레나무이다 : 등록번호 강화6, 수령 300살, 높이 255m, 둘레 2.6m, 불은면 두운리 산 82

- 고씨 영모회 사당

- 다시 마을 숲길

-  숲이 끝나면 불은면 고농1리이다.

- 상동암천을 지나, 모내기가 한창인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간다.

- 숲길은 항상 좋다.

- 숲길이 끝나는 부근에 절터 비슷한 곳이 나오는데, 이 장소를 알리는 표식이 길 끝나는 부분에 붙어 잇다. 한참 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듯하다.

- 이곳은 선원사 입구이다.

 

* 선원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사찰이다.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종 32)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 격인 사찰이었으며, 역대 주지에 진명국사(眞明國師)·원오국사(圓悟國師)·자오국사(慈悟國師)·원명국사(圓明國師)·굉연선사(宏演禪師) 등 신망 높은 당대 고승들이 임명될 정도로 역할과 중요성이 컸다. 충렬왕 때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기도 했다. 이때 조각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에 봉안되어 있는데 1398년(태조 7)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 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순천 송광사(順天 松廣寺)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절터 역시 잊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93년만해도 이곳엔 요사 한 채만 있던 곳에 연꽃을 주제로 중건하기 시작하여 조촐한 사찰이 들어서 있다.

- 강화둘레길은 선원사 경내를 통과하여 절터 상단 좌측 숲길로 이어진다.

- 숲길은 거의 대부분 소나무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뚝 서있는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숲을 나오는 마지막 길 부근이다. 여전히 선원면이다.

- 멀리강화버스공용터미널과 강화풍물시장이 보이나 중간에 넓은 논들을 지나가야 종점에 도착하게 된다.

- 길을 따라 갔으나 표지판 끝나는 부근에 공사중이라 길이 끊어져 있어 우회 징검다리를 찾아야 한다. 오른쪽보다는 왼쪽으로 한참 가다 징검다리를 발견하여 앞에 보이는 동락천 앞 둑으로 가는 길을 찾아 간다.

- 오른쪽 길로 와서 마지막에 유턴하여 6코스 종점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순방향으로 출발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야 징검다리길로 갈 수 있다.

- 바로 앞에 풍물시장이 펼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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