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 2023. 5. 13 (토) 09:30 - 17:00 (7시간 30분)
2. 걷기 거리 : 27km
- 강화나들길 1코스 강화터미널-갑곶돈대 18km,
- 강화나들길 2코스 갑곶돈대-광성보 9km
3. 일기
날씨 : 약간 흐림 (기온 최저 9도, 최고 20도)
천문 : 일출 05:27, 일몰 19:35
4. 강화나들길 걷기 :
- 강화도는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는 군으로 걸어 가는 곳마다 역사 속의 이야기가 살아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고려시대, 조선 말까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있다.
- 사람이 거의 없던 지난 경기둘레길과는 달리, 걷는 길 내내 인가는 물론 관광객과 이들을 맞이하려는 식당과 팬션들이 수시로 나타나서 강화나들길은 사람의 길이라는 특성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 걷는 길에는 잡풀이 제거되어 있고 쓰레기도 거의 안보이는 등 강화나들길의 관리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 요소요소에 배치된 표지목을 방향타로 삼아 길을 걸으면 되는데, 카카오 앱 등의 인터넷 지도와는 약간 다르므로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민가를 자주 지나므로 민가 건축 등의 사유로 원래 둘레길이 변형되기도 하여, 지도보다는 표지목을 기준으로 둘레길을 걸어야 하는 것 같다.
- 오늘 걷는 길 초반에는 강화나들길 도보여행 수첩을 받느라 1시간을 소비하여 어수선하였다. 원래 강화버스여객터미널 1층에 관광안내소가 있는데 문이 닫혀 있어 강화군청 당직실에 문의하니 오늘따라 안내담당자가 몸이 아파 못 나온다고 알려 주었다. 대신 강화읍도시재생마을안내소(남문안길 24-1)를 알려 주어 그곳으로 가니 담당자가 아주 친절하게 수첩은 물론 여러 지도를 건네주어 아침부터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 강화 시내는 도시 자체가 역사 유적지이다. 나들길을 따라 걷기도 하지만 곳곳에서 만나는 유적지 안에 들어가 구경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된다.
- 오늘 걸은 길을 빨간 색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course1. 심도역사 문화길 : 강화버스터미널 - 갑곶돈대 거리 18km >
<고려시대의 임시수도로서 도서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강화산성, 고려궁지 , 용흥궁, 강화성공회한옥성당과 아늑한 대산마을 벌판을 보며 연미정으로 가는 길은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향같은 길이다>
(1) 강화의 관문 : 강화여객터미널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에 있는 버스 터미널이다. 소유자는 개인사업자이며, 선진그룹 계열사인 강화티엘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름이 상당히 특이하다. 끊어서 읽으면 '강화 여객자동차 터미널'이 된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서 버스, 택시 등 승객을 실어나르는 운송수단을 '여객자동차'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냥 '강화버스터미널'이라는 뜻이다.
- 일단 수도권 관광명소인 강화도답게 강화군의 관문인 이 터미널은 매일 혼잡하다. 강화군 외곽 산간 시골지역에서 읍내로 장보러 오시거나 병원가는 노인들부터 강화읍에서 서울로 출퇴근및 등하교하는 사람들, 강화도로 여행이나 출사오는 사람들(특히 MT나 우정여행온 학생들)등으로 발길이 항상 끊기지 않는다. 다른 군 지역의 터미널처럼 농촌지역 버스교통의 쇠락으로 인해 수요가 적을 거라는 편견과 달리 기존 인천, 서울에서 강화도를 잇는 시외버스들이 시내버스로 형간전환해서 승객이 늘어난 덕분에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북적거린다.
-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터미널하고 읍내가 약간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읍내로 볼일보러 오가는 교통이 은근 취약한데 3000번, 90번, 70번, 71번, 800번은 강화병원/강화장례식장 정류장에서 바로 터미널로 들어오고 88번은 강화읍을 거쳐서 들어온다. 96번은 88번과는 반대로 터미널을 들른 후 강화읍으로 간다.
- 그래서 이 터미널은 나쁜 접근성을 역세권 개발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였는데 1994년 터미널 옆에 '풍물시장'을 설치하고 터미널 상가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여 군 지역에서 거의 시내버스만 운행하는 터미널임에도 상업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어 굳이 도심지로 들어가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볼일을 해결할 수 있는 편이다.
- 시외버스터미널이라기 보다는 강화군내를 오가는 많은 버스들이 환승하는 곳이다.
- 터미널을 밖에서 본 모습
- 터미널관광안내소의 문이 닫혀 있어 군청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도보여행 수첩 받을 수 있는 곳을 가르켜주었다.
- 안내를 받고 도보여행 수첩을 받기 위해 남문 부근으로 출발한다.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바쁜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다.
- 터미널 건너편에 풍물시장 공용주차장이 있어 차를 가지고 오는 경우 여기에 주차하고 여기를 베이스캠프로 하여 강화나들길을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종일 주차: 선불 6,000원)
- 도심에 성곽 흔적이 있다.
(2) 강화 남문
- 강화시내를 관통하는 48번국도를 따라 가다 우측의 강화우체국 도로 맞은편에 위치한 강화베다교회의 맞은편에 유적이 있다. 현재 남문의 앞뒤는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江華山城 南門은 1711년 건립되었으나 1955년 폭우로 허물어져 1975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육축부 위에 지어진 문루로 정면 3칸, 측면2칸이다. 창호는 모두가 판문으로서 방어용으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남측면으로 ‘江華南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북측으로 ‘晏波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1975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쓴 것이다.
-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 하나다. 조선 숙종 47년에 건립했는데 2층 누각 앞쪽에는 강화남문, 뒤쪽에는 안파루라 쓰인 현판이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하고 시원스런 누각이다.
- 남문은 출입구가 4.0*4.5*7.5m이며 성문 전체 크기는 길이가 20m, 높이가 5m, 여장의 높이는 1m이다. 남문에서 산 방향으로의 여장은 복원되어 있지 않고 석벽만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석벽은 길이가 24m, 높이가 3.4m, 폭이 1m이다. 문에서 도로 방향으로 36m의 석벽을 복원하였다. 0.9*1.0m의 여장을 복원하였는데 이곳에 사용한 개석은 38*91*14cm이고 , 총안은 28*31cm이다.
* 강화산성(江華山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곽이다. 1964년 6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제23대 고종이 몽골의 제2차 침입(1232년)에 항전하기 위하여 내성·중성·외성을 쌓았다. 초기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인조 15년(1637년) 병자호란때 파손되었다. 효종 3년(1652년) 성곽 일부를 수축하고, 숙종 3년 (1677년)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여 길이가 7,122m에 이른다.
(3) 강화 시가지
- 동문으로 가는 중간에 강화읍 시가지를 내려다 본 광경, 멀리 강화경찰서 건물이 보인다.
(4) 강화 동문
(5)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옛터 부근
- 보호수 느티나무 (지정번호 4-9-1호, 수령 650년, 수고 19m, 나무둘레 5.9m, 강화읍 관청리 41-28)
(6) 대한성공회 강화 성당
- 1981년 7월 1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으로 번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 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7) 조선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
- 왕이 살았던 집 앞에 주차된 자동차 모습이 이색적인 감흥을 준다.
- 용흥궁 공원
(8) 강화문화원
- 1947년 10월 9일 설립되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강화문화원은 지역문화의 계발, 연구조사 및 문화진흥의 설립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1) 지역 고유문화의 계발,보급,보존,전승 및 선양
2) 향토사의 발굴,조사,연구 및 사료의 수집․보존
3) 지역문화 행사의 개최
4) 문화에 관한 자료의 수집,보존 및 보급
5) 지역 전통문화의 국내,외 교류
6) 지역문화에 대한 사회교육활동
7) 지역 환경보존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 활동
8) 지역문화의 창달을 위한 사업
9) 기타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
(9) 천주교 강화 성당
- 진무영은 숙종 때 해안 방어를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강화도와 그 주변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를 계기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고, 양인과 내통한 혐의로 1868년 음력 5월 장치선, 최영준, 박 서방, 조 서방 등이 순교하면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지가 되었다. 특히 장치선과 최영준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다. 현재 강화 성당 구내에 진무영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나 진무영 터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하고 있다. 강화 본당은 2004년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10) 강화초등학교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서, 1898년 4월 1일 성내을종공립소학교로 개교하였다. 1921년 3월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성내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광복과 함께 강화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 광복 전까지 36회에 걸쳐 총 2,963명(여자 59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46년 7월 광복 후 첫 졸업생 175명을 배출하고, 1953년 갑곶분실을 설치하여 2학급을 편성하였다. 1964년 3월 한해 전에 설립된 대월국민학교(大月國民學校)에 학생 697명을 배속하였고, 1970년 갑곶분실이 갑용국민학교로 독립하였다.
- 1979년 33학급으로 편성하였으며, 1981년 화재로 본관이 전소된 뒤 이듬해에 다시 본관 3층을 개축하고 37학급으로 편성하였다. 1996년 3월 강화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1) 고려궁지
-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다.
-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번호 강화-9-102호, 수령 400년, 수고 20m, 나무둘레 4.3m,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 외규장각
조선시대 왕립 도서관격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 서적의 안전한 관리를 목적으로 인천 강화도에 설립되었다.
1781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하여 왕실 관계 서적 1,000여 종, 6,000권 가량을 보관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이 약탈되고 나머지는 소실됐다.
한편 1975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처음 발견된 후, 한국 정부는 이 도서들에 대한 반환을 추진해 왔다. 이후 1999년 한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고, 미테랑 전(前) 프랑스 대통령이 2001년까지 외규장각 고문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2010년 3월 한국 정부는 약탈도서에 대한 영구대여 방식을 프랑스 정부에 공식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11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5년 단위 갱신의 대여방식으로 반환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11년 4월부터 약탈해 간 294권의 조선왕실 의궤를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가 4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 고려궁지에서 남서쪽 헐구산(466m)을 바라다 본 모습
- 보호수 회화나무 (지정번호 4-9-63호, 수령 416년, 나무높이 20m, 나무둘레 6m, 관청리 743-1)
강화동종 (보물 제11-8호)
강화 동종은 1711년(숙종 37)에 강화성문을 여닫을 때 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1688년(숙종 14)에 강화유수 윤지완이 만들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균열이 생겼기 때문에,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깨진 종을 녹이고 여기에 재료를 더하여 정족산성에서 다시 만들었다. 종래 이 종은 사인(思印)이 중심이 되어 만든 종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명문을 상세히 판독한 결과 사인은 깨진 종을 만들 때의 주종장이었고, 다시 만들 때의 주종장은 조신(祖信)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이 얼굴을 좌우로 향하여 몸이 서로 얽히어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8) 강화유수부 이방청
보호수 은행나무 (고유번호 4-9-2호, 수령 688년, 수고 25m, 나무둘레 7.5m, 관청리 738)
(9) 강화유수부 형방청
- 형방청을 돌아 나오면 좁은 민가 골목길로 계속 강화나들길이 이어진다.
- 수레국화가 여느 집 담밑에 꽃피우고 있다.
'수레국화'는유럽 동부와 남부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가꾸는 장미목에 속하는 식물이다. 높이 30∼90cm이고 가지가 다소 갈라지며 흰 솜털로 덮여 있다. 잎은 어긋나고 밑부분의 것은 거꾸로 세운 듯한 바소꼴이며 깃처럼 깊게 갈라지지만 윗부분의 것은 줄 모양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피지만 온실에서 가꾼 것은 봄에도 핀다. 두화(頭花)는 가지와 원줄기 끝에 1개씩 달리고 많은 품종이 있으며 색깔이 다양하다. 꽃 전체의 형태는 방사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모두 관상화이지만 가장자리의 것은 크기 때문에 설상화같이 보인다. 총포조각은 4줄로 배열하며 날카롭고 긴 타원형 또는 타원형 줄 모양으로 가장자리는 파란색을 띤다. 독일의 국화(國花)이며, 꽃말은 '행복감'이다.
(10) 강화여자고등학교
- 1954년 7월 7일 강화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은 후 1955년 3월 25일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교하였다. 1958년 3월 3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1972년 12월 12일 강화여자종합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79년 9월 1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하였다. 2002년 3월 1일 강화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8년 기숙형 공립고에 선정되었으며, 2012년 2월 기숙사를 완공하였다.
- 교훈은 ‘성실’이며,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개나리이다. 다양한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봉사활동과 방과후 활동을 시행하고 있다.
- 강화여고 지나 강화 향교 지나기 전에 어느 집 담에 심어져 꽃피운 '삼색버드나무'이다.
https://cyoon.tistory.com/5789
(11) 강화향교
1127년(인종 5) 3월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고려산(高麗山) 남쪽 기슭에 창건되었다. 1232년(고종 19)에 지금의 갑곶리[甲串里]로 옮겼다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다시 서도면(西島面)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沈悅)이 소동문(小東門) 밖의 송악산(松岳山) 옆에다 복원하였다. 1629년에는 강화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문 근처로 이건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李溵)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12) 강화산성 올라 가는 길
(13) 강화산성 북문
- 高麗宮址 좌측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약 400여m를 가면 관청리와 대산리의 경계지점인 北山의 북문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북문의 앞부분은 鎭松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문루로 벽이 없는 채로 지어져 방어용 이라기보다는 관망용으로 지어진듯하다. 현재의 북문은 1976년 복원한 건물이며 강화산성 서문과 같이 프리케스트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워졌다. 초익공으로 공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협칸에 비해 어칸의 폭이 매우 넓으며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지붕은 유일하게 우진각 지붕형태를 보인다.
-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북문은 본디 바로 아래 고려궁터의 든든한 보호막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로써 강화도천도(1232)한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던 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토성이었던 당시의 성은 개경 환도때 헐리고 조선 초에 개축하였다. 그 뒤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된 것을 숙종37년에 석축으로 완성하였다. 이때까지 문루는 없었다. 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했으며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하였다.
- 북문의 출입구는 2.9*2.5m이고 문 전체의 크기가 11m이다. 문에서 북장대 방향으로 42m의 성벽을 복원하였으며 서문 방향으로 50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
(14) 산성길 주변
(15) 북장대터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강화산성의 망을 보던 장대 중 하나다. 강화산성의 북문에서 석축으로 쌓은 산성길을 따라 800m 가량 오르면 북장대에 다다른다. 북산 정상으로 전망이 탁 트여 망을 보기 위한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이곳에서는 남장대와 고려산이 바라다보이고, 강화 읍내는 물론이고, 바다 건너 북녘까지 조망할 수 있다.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 역사 문화길이 지나고 있어 많은 도보 여행객이 찾는다.
- 강화산성은 고려후기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시기 세워진 성곽이다. 강화산성의 방어시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와 망을 살필 수 있었던 장대라는 시설이다. 강화산성의 장대는 모두 셋으로, 북장대 이외에도 남장대, 서장대 등이 있다.
- 이밖에도 강화산성에는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 서문 첨화루, 동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 통로인 암문 4개, 수문이 2개 남아있다. 성 위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여장도 있었으나 모두 무너졌다.
- 아까시나무 꽃 향기 그윽하다.
(17) 강화산성길에서 대산리로 내려가는 길
- 짤레꽃
(18) 청송부락앞 48번 국도 가로지르기
- 강화산성에서 내려와 48번 국도를 마나는 지점에서 카카오 지도에 표시된 강화나들길 1코스 길은 실제 이정표 길과 다르니 주의해야 할 장소이다. 실제 표지목은 길을 가로 질러 대산리로 가라고 하나, 카카오맵은 대월초등학교를 지나 왼쪽 산으로 들러가라고 표시하고 있다. 일정 거리를 가다가 리본이나 표지목이 안 나오면 길을 잘못 든 것이어 이전 위치로 다시 가서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대월초등학교
- 대산리 마을 안길을 가다가 숲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 섭니다.
*** 한참 길을 가다 보니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고 미리 준비한 보조 배터리도 성능이 떨어져서 이후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유감입니다. 다음부터 더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19) 월곶리 연미정
- 바다 건너 북쪽이 북한 개성이 바로 앞에 보입니다.
-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자이다. 최초 건립연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시련을 겪고 파손된 것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팔각지붕의 겹처마로 돌기둥 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건축한 민도리집이다. 임진강과 염하강의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하여 연미정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파주, 김포시, (북한)황해도 개풍군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마니산, 전등사, 보문사와 함께 강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며 연미정에서 맞는 달맞이가 일품이다.
(20) 갑곶 돈대 가는 길에는 곧 모내기를 하려고 논을 갈고 물을 대놓고 있습니다. 강화의 논은 고려 때부터 오랜 간척의 역사를 가진 곳이라 합니다.
(21) 강화대교 위에서 김포쪽을 바라본 광경 (왼쪽으로 문수산이 보입니다)
강화대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993년 8월에 착공하여 1997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극동건설(주)에서 설계하였고 코오롱건설(주)에서 시공하였다. 연장은 780m, 폭은 19.5m(4차로), 경간수 13개(최대경간장 60m), 상부구조는 Steel Box Girder, 하부구조는 라멘식, 기초는 강관말뚝으로 시공된 1종시설물이며 본 교량의 개통으로 1969년도에 준공되어 사용하던 노후된 기존의 옛 강화대교는 폐쇄되었다.
- 아래는 갑곶돈대 가기 직전에 천주교 갑곶성지 입구이면서 강화 통제영학당지가 되는 곳이다.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여겨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해군편제로 개편하면서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치령을 공표하고 갑곶진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893년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개교와 함께 W.H.Callwell 등 영국장교들이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이듬해 발발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등의 영향으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1894년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 course2. 호국 돈대길 : 갑곶돈대 - 초지진 거리 17km >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해안가 철조망은 남북대립의 상징물이며 5진7보53돈대의 옛 군사적 방위시설을 잇는 국방유적인 호국 돈대길
조선조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든 돈대와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며 다져진 민족의 자긍심과 국난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동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함민복 시인의 감성글판을 하나하나 찾아 읽어보며 걷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는 풍광이 아름다운 코스이다.
건너편 김포와 강화해협(염하)를 사이에 두고 호국돈대길이 이어 집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 강화 5진, 7보, 8포대, 54돈대
★ 반 년에 걸쳐 축조한 강화의 54돈대 ★
< 강화로닷컴 By 관리자 - 2020년 6월 9일 >
국가가 계속된 전쟁과 기근으로 어려운데도 강화에 돈대(墩臺)를 축조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정정의 불안은 곧 조선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라고 인식한 숙종은 1678년숙종 4년 10월에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1634~1684)를 강화도로 보내 진·보를 설치할 곳을 살펴보도록 했다.
이에 김석주가 순찰하고 돌아와서 49개소의 돈대가 적절하니 조속히 축조할 것을 보고하였다.
돈대는 중국 북방에서 사용하던 소규모 군사 기지로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선조 26년에 검토를 했지만 많은 병력이 소요되어 포기한 시설이고, 이후 많은 논의를 거쳤던 군사 시설이다. 또 《남한지南漢志》에 “인조 시대에 축성한 남한산성에는 2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유적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은 그해 11월 강화도에 돈대를 설치하기 위해 <강도설돈처소별단>을 반포했는데, 김석주의 시문집인 《식암유고》에 실린 반포 내용을 보면 제1 월곶진으로 시작해서 제49 휴암돈까지 명칭과 위치 및 형태를 규정해 축조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돈대의 성곽을 만들기 위해 그해 12월 1일부터 석재를 채취해 운반하기 시작했으며, 《비변사등록》 기록에 보면 석수가 400여 명, 야장철 다루는 대장장이 50명에다 조역까지 합치면 1,400명이 투입되었다고 했다. 또 돌을 나르는 운석선이 75척으로 각 배의 사공과 격군 2명 등 3명이 투입되었다면 대략 1,635명 이상이 돈대 축조를 위한 사전 석재 공사와 운반에 들어간 것이다.
이후 관용 나룻배 7척이 더 투입되고, 1679년 2월에는 잡물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 2척도 더 투입되었으니 석재를 캐고, 석재 운반과 그에 필요한 잡물을 나르는 배가 84척에 약 1,700명이 동원된 것이다.
1679년 숙종 5년 1월 13일의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 기록된 돈대 축조에 동원된 승군(僧軍)을 보면 전라도 2,800명, 충청도 1,800명, 강원도 500명, 함경도 400명이며, 경상도는 이미 승군을 동원한 바 있으므로 감해주기를 청하고 2월 26일 경기도 김포 통진현에 모여 점호를 하고, 3월 2일부터 공사에 투입하기로 보고하고 왕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2월 27일에는 마니산에서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경관이 주관하게 함에 따라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안전 기원을 위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이며, 강화유수가 돈대 축조에 관한 모든 현장 작업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돈대를 완성하고 지은 김석주의 <돈대필축순심후서계>에 의하면 2월 26일 통진현에 실제 모집된 승군은 8,000명이다. 그 외에 석재를 다루는 경석수 570명, 석수 540명 등 총 1,110명이 투입되었으며, 이후 <강도지> 기록에 따르면 승군 900명이 더 증원되어 총 8,900명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3월 6일에는 숙종이 강화 돈대 축조로 고통을 받는 강화 백성들에게 쌀 100석과 전포(錢布 : 금전) 50통을 내린 다음 축조에 참여하는 승군이나 군사, 기술자들이 백성들에게 절대로 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비망기를 내렸는데, 당시 강화도 백성들은 돈대 축조 공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논밭의 경작 등에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 계획한 대로 49곳을 다 설치한 것이 아니라 제11 오두정과 제13 광성보 사이에 있는 제12 불은평돈대가 제외되어 48개소만 축조했는데, 불은평은 조수가 깊이 들어오는 지역이지만 오두돈대와 광성보 사이가 서로 보이고 평평하기 때문에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공사는 48곳의 돈대를 4소로 나누어 1소당 12곳을 감독했으며, 축성장으로 동원될 사람이 마땅치 않다며 병조판서 김석주가 시장에 재물을 파는 일로 탄핵당한 전 수군절도사 이세선(李世選) (1628~1698) 양우급(梁禹及) 등을 추천하고 이우(李㒖) ( ?~1679) 등이 맡았다.
그중 이우의 경우 강화도에서 이유정(李有湞) ( ?~1679)의 흉서(凶書)를 전달받아 김석주에게 고변했다가 오히려 축성장에서 파출당하고 고문을 받다 죽었다. 흉서는 “인조의 장남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1663~1724)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결국 이혼은 아우인 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煌) (1665~1690)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비변사등록》 4월 5일자 기록에 의하면 당초 승군 동원은 40일로 기한을 정했지만 공사 기간이 길어지자 왕을 호위하던 어영군 4,262명을 강화 돈대 공사를 주관하는 김석주로 하여금 직접 인솔해서 4월 6일 투입하도록 해 승군 8,900명과 교대하였다. 계룡돈대의 경우 당시 축조한 돈대중 유일하게 석축 하단에 ‘강희18년군위어영축조(康熙十八年軍威禦營築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경상도 군위에서 부역할 어영군이 올라와 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돈대를 쌓은 후 성문을 달 때는 한양에서 직접 성문을 제작해 운반했는데, 약 7만 근의 주철이 들어갔다. 또 석회 18,000섬, 생칡 880동, 잡목 8,000조 등과 운석선 75척에 관용 나룻배 9척이 동원되었다.
특히 양곡만 12,791섬이 소요되는 대공사로 동원된 인원은 승군 8,900명, 어영군 4,262명, 채석장 약 1,700명, 축성 기술 인원 1,110명 등 직접 공사에 15,972명, 한양의 주물 기술자까지 합하면 약 16,000명 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완공하기까지는 《강도지》에 80일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3월 3일에 착공해 5월23일 준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강화도의 돈대 축조는 채석을 시점으로 본다면 12월 1일부터 5월 23일까지 약 반년에 걸친 대역사인 셈이다.
이후 1690년숙종 16에 48개소이었던 돈대가 1696년숙종22에 49개소로 증가되었는데, 이때 마니산 서쪽 기슭 아래에 있는 검암돈대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18년 숙종44년 빙현돈대, 1719년 숙종 45년 철북돈대, 1720년 숙종 46년 초루돈대가 완성돼 숙종 시대에 총 52개 돈대가 완성되었고, 1726년 영조 2년에 작성돈대가 완성되어 총 53개 돈대가 강화 해안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1977년에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정화 사업을 하면서 광성보의 손돌목돈대 아래에 돌출된 지형을 육군박물관팀이 조사할 때 옛 석축이 남아 있어 망루로 보지 않고 돈대로 보면서 이름도 용두돈대라 붙이고, 54개소의 돈대가 강화도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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