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삶
< 법보신문, 금해 스님, 2017.04.03 >
출가했던 행자 속퇴 후 찾아와
오히려 삶 수행으로 더 깊어져
결실은 끝아닌 다음 순간 과정
봄꽃이 피어나는 시절입니다. 붉은 매화꽃이 서울 끝자락 우리 절에서도 화사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7년 전, 우리 절에서 몇 개월을 행자로 지낸 보살님이 있습니다. 불교공부 하면서 출가하려는 마음을 내고, 본사 행자로 들어가기 전이었지요. 승려로서 기본적인 습의와 염불, 목탁 등을 지도해주고 기초 교리와 기본 경전에 대한 공부도 했었습니다. 본사로 가면서 헤어진 후에는 따로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심성이 따뜻하고 심지가 곧아서 좋은 스님이 되었으리라 생각할 뿐이었지요. 그런데 몇 년 후, 속퇴한 모습으로 찾아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보살님의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출가보다 더 큰 결단이었을 테니까요.
그 후, 보살님은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고마운 것은 옛 정을 잊지 않고 꾸준하게 안부를 전해 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갑자기 우리 절을 방문했습니다.
기도와 사찰 소임으로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서로 얼굴을 보며 눈인사만 했습니다. 저녁 공양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마주 앉았습니다. 잠깐의 출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제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와 사람들과의 문제를 불교 공부와 수행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이 참으로 대견했습니다. 식어버린 밥, 겨우 몇 가지 반찬에도 마음 따끈따끈한 공양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이 마주앉은 저녁 참선 시간은 풍경소리 가득 흘러내리는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승복을 입었든 입지 않았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삶의 수행으로 더 깊어진 그를 만날 수 있었지요. 다음날 아침 이별할 때 보살님이 말했습니다.
“출가 시절 공부했던 힘이 저를 더 열심히 살도록 해 주었어요. 그 시절이 있어서 삶의 어떤 순간도 두렵지 않고, 더 행복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삶에서 어떤 일을 할 때, 크든 작든 우리는 오래도록 고민하고 선택합니다. 하지만 항상 원하는 결실을 얻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 ‘결실’은 끝이 아니라, 곧 다음 순간의 ‘과정’이 됩니다. 그렇기에 순간의 결과를 두고 삶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는 것도, 삶의 모든 것이 결정된 듯 포기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실패였다고 생각했던 결과가 오히려 힘이 될 때도 있습니다.
큰 사업을 하던 한 노거사님은 IMF로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처럼 사찰에서 5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했습니다. 이후 다시 사업을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더 즐기며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절에 사는 동안 욕심을 버리고 나눌 줄 아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같은 시절 사업을 했던 대부분의 친구들이 여러 가지 병과 우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 나이 아흔이 되어가는 노거사님은 등산을 즐길 정도로 건강하고 통찰력이 있으며 환한 미소를 갖고 있습니다.
▲ 금해 스님
가득 피어나는 꽃, 바람결에 날리는 꽃잎들을 보며 본래의 나무를 칭찬합니다. 꽃 피워내고 떠나보내는 나무는 한 해 동안 그렇게 자라날 겁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삶의 순간순간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기쁨과 성장을 주며, 삶의 의미가 됩니다. 죽음도 다음 삶의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순간, 결과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내시길 바랍니다.
2.
두려움을 이기는 길
< 한겨레, 강우일ㅣ베드로 주교, 2021-01-07 >
지구 생태계는 영겁의 세월을 두고 조금씩 공들여 빚어낸 창조주의 조화로운 작품이지만, 그중에서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최고의 솜씨와 사랑으로 창조된 걸작 중의 걸작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최고의 걸작이다. 창조주께서 그토록 오래 준비하시고 빚으시고 가꾸신 걸작을 함부로 쓸어버리지 않으리라. 지나친 두려움은 허구다.
2020년은 한 해 내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불안에 시달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지구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 바이러스에 언제 어디서 감염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방역 전문가들의 조언, 행정당국과 언론이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경고와 주의, 시시각각 휴대전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코로나 관련 안전정보에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완전히 포위되고 점령되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경제활동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어디에 가든 마스크를 써야 하고, 보고 싶은 사람 방문도 삼가야 하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멀찍이 서서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인정과 선의가 꽃피는 얼굴을 보고도 서로 환하게 웃어줄 수 없으니 세상이 삭막함과 고립감과 우울감에 짓눌려, 최악의 미세먼지가 가득한 뿌연 하늘보다 더 짙은 암흑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우리를 이렇게 가라앉게 하고 침울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가장 크게 압도하고 위협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다. 철학자들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내던져진 존재’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매 순간 죽음과 대면하며 살아간다. 죽음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고 회피하여도 죽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니 죽음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외면하거나 죽음에서 되도록 멀리 도피하려 하지 말고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직시할 때 오히려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애 여러 길목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여섯 살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온 가족이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피난길에 나섰던 일은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든 두려움이었다. 피난 가서 등굣길에 야전병원 천막 옆을 지나곤 했다. 전선에서 실려 온 부상병들이 통증에 짓눌려 울부짖는 신음은 내 어린 가슴을 꿰뚫었다. 부상당하여 팔다리가 잘려나간 상이군인들이 대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할 때마다 무서움과 연민이 뒤엉킨 마음으로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원인 모를 열병에 걸려 한 달 넘게 집에서 요양했다. 열이 내리지 않아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주사로 연명했다. 동네 사람들은 “저 집 아이 얼마 못 살겠다”고 수군거렸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기사회생했다. 그 후로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2년이나 한약에 의지했다.
중학교 3학년 때 4·19를 맞았다.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경무대 쪽으로 가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발포에 여러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잘 모르지만 어리다고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어 학교 파한 후 집에 가방을 갖다 놓고 다시 종로에 나갔다. 나도 모르게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시위 군중에 끼어들었다. 평소 자동차만 다니던 대로 한복판을 시위대와 함께 걸으며 함성을 올리니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탱크가 굉음을 내며 시위대를 향해 전진하다가 하늘을 향해 기관포를 쏘았다. 어둑어둑할 무렵이어서 포탄이 폭죽처럼 벌건 불꽃을 튀기며 하늘로 발사되는 모습에 시위 군중은 공포감으로 모두 썰물처럼 양쪽 골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나는 설악산을 좋아해서 계절 따라 산행을 즐겼다. 어느 한겨울에 오색에서 출발하여 대청봉을 거쳐 설악동으로 산행 일정을 잡았다. 새벽에 출발할 때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으나 쌓이지 않았다. 대청봉에 이르니 눈이 무릎까지 왔다. 그러나 하산을 시작하며 계곡으로 들어서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계곡 양쪽에 쌓였다가 흘러내린 눈이 계곡으로 밀려 내려 등산로가 사라졌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사력을 다해 헤치며 하산했으나 평소 같으면 오후 3시에 설악동에 도착하는 길을 밤 11시까지 걸어도 반밖에 못 내려왔다. 온몸에 기력이 다 빠져나가 산행을 계속하면 고통 없이 눈 속에 잠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하산을 멈추고 모닥불을 피워 제자리걸음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해가 뜨자 다시 하산을 계속하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설악동에 도착했다. 도착 후 발바닥이 너무 아파 등산화를 벗어보니 36시간 넘게 아이젠을 차고 걸음을 계속하여 발바닥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날 산악구조대는 울산바위 쪽에서 추락사한 등산객 2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가톨릭에서 성직자로 서품을 받는 사람은 성경의 짧은 성구를 좌우명으로 택한다. 나는 주교 서품 때 다음 성구를 택했다. “네 생명, 주님께 맡기고 그를 바라라!” 제주에서는 한라산을 끼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에 급경사가 여러 곳 있다. 해마다 브레이크 파열로 사고가 난다. 나는 내리막을 달릴 때마다 혹시라도 어느 부품 하나가 탈 나지 않을지 무섭기도 하고, 경사를 다 내려오면 안도와 감사의 한숨을 쉰다.
해마다 우리나라에서 각종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8만여 명 정도이고 2019년 교통사고로 죽은 이들이 3349명이다. 2019년의 사망자 총수는 29만5100명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대부분의 죽음은 일상화되어 언론도 보도하지 않고, 정부도 대책본부 차려 대응책을 마련하지도 않는다. 죽음이란 언젠가 모두가 필연적으로 가야 하는 길임을 아무도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로나 감염증과 관련된 정보와 소식은 좀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마다 수시로 전달된다. 시시각각으로 어느 지역에 몇 명이 확진되었고, 몇 명이 사망했는지 휴대전화 문자 착신음이 들린다. 지난해의 코로나 전체 확진자가 6만여 명이고, 세상을 떠난 이는 900명 정도다. 그런데 2019년 독감을 앓고 진료를 받은 사람이 54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가 720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코로나에 대한 현재의 두려움, 불안, 고립, 우울 증세는 왜 이렇게 유별날까 하는 생각이 든다.
137억년 전 대폭발로 무에서 우주가 생성된 후, 아득한 세월을 두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별들이 생겨났다. 지구는 45억년 전에 탄생하였고, 처음 불덩어리였다가 서서히 식으면서 온갖 물질과 생명들이 차례로 탄생하였다. 10만년 전에 이르러서야 인류의 조상이 등장하였고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것은 1만년도 채 안 되었다.
지구 생태계는 아득한 영겁의 세월을 두고 조금씩 공들여 빚어낸 창조주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작품이지만, 그중에서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최고의 솜씨와 사랑으로 창조된 걸작 중의 걸작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최고의 걸작이다. 창조주께서 그토록 오래 준비하시고 빚으시고 가꾸신 걸작을 함부로 쓸어버리지 않으리라. 지나친 두려움은 허구다.
3.
등산 갔다 쓰러져… 죽음 근처에서 “천국을 봤다”는 남자
< 한겨레, 전홍진, 2023-04-16 >
심정지와 망상
등산 중 쓰러진 60살 호식씨
위기 넘기고 ‘신 영접했다’ 생각
호식씨는 60살 중소기업 대표로 지난 30년간 식자재를 만드는 업체를 운영했습니다. 회사가 잘되어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대학 졸업 뒤 호식씨의 회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어 일에 대한 부담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호식씨는 회사에서 회의 중에 갑자기 가슴 왼쪽 심장이 심하게 뛰면서 두근거리고 답답하며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쉬고 나자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고 그 뒤 인근 대학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습니다. 호식씨는 심장내과에서 진찰 후에 24시간 홀터 심전도(하루 동안 심전도 기록계를 몸에 부착하고 생활하면서 일상생활 중 심장의 상태를 확인하는 검사)를 찍었는데 ‘심방세동’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정맥 질환의 일종인 심방세동은 심방에서 발생하는 맥이 정상을 벗어나 빠르고 불규칙한 맥박을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호식씨는 심장내과에서 약물치료를 받게 됐고 좋아하던 술·담배도 이참에 끊었습니다. 그 뒤 호식씨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이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심방세동 질환이 있다는 걸 금세 잊어버리고 약도 불규칙하게 복용하며 병원 외래진료도 찾지 않았습니다.
의식 잃고 들은 ‘신의 목소리’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호식씨는 가족들과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 중턱을 오르다 갑자기 심하게 식은땀이 나면서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쓰러진 호식씨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며 119에 신고했습니다. 심장 정지가 발생했을 때 흉부를 압박하는 심폐소생술을 심정지 뒤 1분 이내에 시행하면 생존율을 2~3배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옆에 함께 있던 아들이 그가 쓰러지자마자 즉시 심폐소생술을 한 덕분에 호식씨는 뇌나 심장의 후유증 없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심정지가 오지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날 산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내려오면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호식아, 호식아….” 천국에서 자신을 부르는 신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하늘에서 어렴풋하게 오렌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호식씨는 그에게 “제발 용서해주세요. 제 죄를 용서해주세요. 제발, 제발이요”라며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날부터 호식씨는 자신이 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며 회사가 아닌 종교단체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확인한 결과, 호식씨가 빠진 그곳은 사이비 종교단체였습니다.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호식씨를 말렸지만 가족들에게 “나는 천국을 보았고 오렌지색 옷을 입은 신에게 회개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며 회사까지 처분하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호식씨를 설득해 인근 정신건강의원에 데려가 이런저런 검사를 받게 했습니다. 호식씨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우울증이 심해져 망상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망상이란 사실과 다른 그릇된 믿음을 확신하는 상태로, 호식씨의 경우 자신이 심정지 상태에서 경험한 일을 종교적 신비 체험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섬망, 두려움, 잘못된 믿음
심장의 기능이 정지하면 뇌로 가는 피가 부족해져서 혈중 산소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저하돼 저산소증이 발생하게 됩니다. 뇌가 저산소증 상태가 되면 이상감각·환청·환시 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우울증이 발생하면 이때의 경험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뇌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 호식씨는 뇌졸중이나 뇌 손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경인지기능 검사상 단기기억력의 저하와 전두엽 기능 저하가 나타났습니다. 뇌 기능이 저하되면 우울증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호식씨는 의사의 설명과 치료 후에 자신이 심정지 때 경험한 것들이 뇌의 저산소증으로 인해 당시 상황을 왜곡되게 인식한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도 이전보다 많이 회복되었고, 심장내과에서 처방한 심방세동 약도 잘 복용하고 규칙적으로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의 절반은 없어졌지만 나머지는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보았다는 신, 즉 ‘오렌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심정지 상태에서 본인이 목격한 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이비 종교단체에선 호식씨의 벌을 단죄하기 위해 내려온 신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가 본 오렌지색 옷은 정신을 잃은 호식씨를 구하려고 출동한 119 구조대원의 복장이었습니다. 구조대원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신의 음성으로 왜곡해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호식씨처럼 뇌 기능 저하로 의식과 지남력(날짜·장소·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문제가 생기는 질환을 ‘섬망’이라고 합니다. 섬망 증상으로는 주의력·언어력 저하 등 인지기능 전반의 장애와 환각·초조함·떨림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섬망은 다양한 원인으로 갑자기 발생하지만 심장 질환이나 큰 뼈의 골절, 전신마취 수술을 통해서도 흔히 발생합니다.
섬망 상태에서는 연상 작용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과 어렴풋하게 파악한 정보를 연관해 해석하기 쉽습니다. 두려움이 심한 경우엔 섬망에서 회복되고 나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친한 지인이나 권위 있는 사람이 이를 부추기면 이 믿음은 더욱 강화됩니다. 두려움에 판단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결정하기 전에 가족과 꼭 상의하고 전문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두려움이 만드는 환상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4.
죽음과 소멸의 공포
< 한겨레, 정현채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2023-03-31 >
7년 전 한 대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저는 지금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며칠 전 죽음에 관한 꿈을 꾼 이후 죽음이 두려워졌습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지금 고생하거나 즐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에 지배되어 저는 매우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몇 십 년을 더 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자살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이 학생이 느끼는 공포는 18년 전 나이 50을 바라보는 시점에 불현듯 필자에게 떠오른 두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가 궁금증의 핵심이자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내과의사로서 20년 넘게 환자에게 심폐소생술도 하고 많은 환자의 임종을 옆에서 수없이 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는 죽음을 늘 타자의 것으로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어서 내 존재와 이를 받쳐주던 모든 게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밤에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을 겪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러나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과 두려움에 대해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과대학의 긴 교육 과정과 전공의 과정에서 배운 건 오로지 생물학적 죽음뿐이어서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고, 죽음에 대해 오래전부터 인류가 해온 철학적 사유 역시 죽음 너머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으면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깜깜한 암흑 내지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니, 암울하고도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함과 막막함이 몰려들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해 볼까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수십 년간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입각한 과학교육을 받아오면서 그러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끝없는 훈련을 받아 온 터라, 그때 내게 필요한 건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객관적 사실 자체였다.
그러던 중, 아내가 사다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의 '사후생-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죽어감 그리고 죽은 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이 책을 읽으며 단번에 해소되었다. 수십 년간 의료 현장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겪은 삶의 종말체험과 심장이 멎었다가 되살아난 환자들이 경험하는 근사체험의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목격하고 관찰한 후 쓴 책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신뢰할 수 있었다.
사망 판정을 받아 육체는 부패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인간의 의식은 명료하게 유지될 뿐만 아니라,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이 없더라도 의식체는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경이로움은 내 인생 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눈이 뜨이면서 시작된 죽음에 대한 탐색은 존재와 우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켜 주었다.
죽음으로 자아가 완전히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크나큰 두려움과 불안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더 이상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사후에 의식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삶의 유한함이나 죽음의 예측불허성에 대해서도 더 이상 허망함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5.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 국제신문, 김문홍 극작가·부산공연사연구소장, 2022-09-20 >
무릇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사람도 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이 들면 늙고 늙으면 죽는 것은 자연순환의 한 형태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으스대는 것도 꼴사납지만, 나이 든 사람이 그것을 큰 훈장처럼 자랑하며 내세우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죽으면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산다.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으면 불멸의 삶을 사는 것이고, 존재감 없이 잊히게 되면 거기서 그 사람의 삶은 끝이 나게 마련이다. 기억의 인자는 선한 영향력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았느냐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나이 들면서 부쩍 부고를 많이 접한다. 더러는 지인들의 아픈 소식도 바람결에 듣는다. 엊그제 문학 모임에 갔다가 도반들의 아픈 소식을 전해 듣고 감정이 알싸하게 저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는 파킨슨과 치매라는 이중고를, 또 어느 분은 엊그제까지 멀쩡했는데 병마에 덥석 덜미를 잡혀 있다는 아픔의 기별이다. 그런 느닷없는 전언은 어느새 스멀스멀 좌중에 옮아 붙어 그날의 분위기를 침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걸 보니 삶과 죽음은 늘 함께 뒤섞여 있고, 또한 동전의 양면처럼 수시로 바뀌고, 이들 중 어느 것이 문을 두드리느냐에 따라 존재의 판도가 달라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하는 일상을 살아온 것 같다. 자고 일어나 눈을 붙일 때까지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그래서 누구보다 죽음에 대한 면역력에 자신이 붙었다고 내심 자랑하기까지 한다. 죽음의 굳은살이 많이 붙어 웬만한 일에도 그리 놀라는 일이 없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 버릇처럼 층계 수를 헤아린다. 층계가 끝나면 그 수에 지금의 내 나이를 합한 뒤 나의 수명을 설정하는 이상야릇한 버릇이다. 그 숫자가 만족할 만한 값이 못 되면 또 다른 계단을 찾아 층계 숫자를 세는 것이 일상화되어 버렸다.
죽음의 날을 미리 대비하는 것도 그리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단 면역력의 굳은살이 붙으니 두려움에 대한 망상이 걷히고, 하루하루 나날의 삶이 더없이 값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그날이 마치 끝이라도 되는 것처럼 충만한 시간을 만끽하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의외로 덤으로 오는 것도 많다. 그동안 살아온 날의 흔적과 문학적 업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버릇도 생겼다. 얼마 전엔가 여섯 번째 희곡집을 내어 고별 북 콘서트를 열었고, 두 해 뒤에는 역시 여섯 번째 소설집을 내어 고별 콘서트를 할 계획도 세워 놓았다. 내자와 나 둘 중 누가 먼저 떠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세탁기 조종하는 규칙과 순서를 비롯해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생활의 지혜를 하나하나 배워나가고 있다.
얼마 전에 두 편의 외화를 보았다.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하나는 카뮈의 부조리 사상을 바탕으로 죽음 앞에 놓인 한 남자의 무기력하고 나태한 일상을 파편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였고, 다른 한 편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품위 있게 죽을 권리인 ‘존엄사’ 문제를 제시하고, 두 딸이 티격태격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문제를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로, 내 죽음의 굳은살을 불리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이처럼 죽음의 두려움을 자연의 순환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면역력의 증강, 남은 인생을 충만하고 값지게 사용하는 현재적 삶의 태도 형성, 그리고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불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의 존재감에 근력을 붙이기 위해서라도 죽음은 삶의 반면교사가 충분히 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집을 나선다.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안은 채 걷고 말하고 밥을 먹는다. 두 개의 화두가 양면에 적힌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떠들며 얘기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죽음이 방문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이웃집 마실 가듯 한 다리 건너 훌쩍 뛰어넘고 싶다. 그래서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면역력을 높이고 삶의 군살을 빼는 나날을 영위하고 있다. 나는 매일 죽는 남자이고 싶다. 매일 죽으며 하루하루를 찬란하게 사는 불가지의 삶을, 실존적 삶을 살고 싶은 것이 꿈이다.
6.
“죽음 무릅쓰고 총알 날랐던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 매일신문, 이영욱 기자, 2023-03-30 >
세계 190여 개국을 다닌 오지여행가로 유명한 도용복(81·사진) (주)사라토가 회장은 건강하고 활기찼다. 대구 대백프라자 카페에서 만난 그는 지인 전시회 관람과 특강을 위해 대구에 왔다. 도 회장은 음악과 여행을 사랑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도 회장은 다부동 전투 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줄타기를 했다.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 때였다.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저와 어머니, 동생 등 네 식구는 우여곡절 끝에 칠곡 다부동 고개를 넘었는데,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이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안동서 걸어 다부동까지 온 도용복과 동생들은 배가 너무 고팠다. 어머니에게는 타지에서 자식을 챙겨 먹일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그때 귀가 번쩍하는 희소식이 들렸다. 국군의 총알 나르는 일을 하면 흰쌀밥을 고봉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소년은 자기보다 큰 지게로 전투가 벌어지는 다부동 고지로 총알을 날랐다. 소년은 고지를 오가면서 군인과 민간인이 죽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또래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른에게 물어보니 인민군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무서웠다. 그만하겠다고 했다.
도 회장은 “살면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는가. 죽음(고개를 가로저으며), 배고픈 것이다. (총알을 나르는 일을) 안 한다고 작심하고도 아침이 되면 쌀밥 유혹에 또 간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소년에겐 죽음의 두려움보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 컸다. 아침 식전 탄약통 2상자를 왕복 3~4시간 거리의 고지로 나르고 오면 정말 혼자서는 다 못 먹을 양의 쌀밥이 나왔다. 집에서 굶고 있을 어머니와 동생 생각에 호박잎을 따 주먹밥 두 덩이를 먼저 만들어 챙겼다.
그렇게 소년은 15일 정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부동 고지로 총알과 전쟁 물자를 날랐다.
도 회장은 “(살면서)무섭고 겁나는 게 없다”고 했다. 어린 시절 사선을 넘나들었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참전국에 각별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위정자들은 불경일사 불장일지(不經一事 不長一智·한 가지 일을 거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 구절을 꼭 새겨야 합니다. 6·25전쟁을 겪었지만 교훈을 얻지 못하면 같은 불행은 반드시 다시 오기 때문입니다.”
7.
'삶의 위대함은 존엄한 죽음으로 완성된다'
< 데일리메드, 박중철 교수(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2022.04.09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부속병원 이식전문 외과의사인 폴린 첸은 어느 날 의과대학 동기인 에리카의 전화를 받는다.
에리카는 폴린에게 하소연했다. “그 의사는 딱 한 번 죽음에 대해 우리와 의논했어. 그 다음에는 아빠에게 어떤 처치를 할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지. 우리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데 왜 이렇게 서툴까?”
그의 아버지는 간암 말기환자였는데 죽음에 임박해서야 담당의사는 그를 불러 그 사실을 전했다고 했다.
폴린 첸의 ‘나도 이별이 서툴다’라는 책에 있는 내용의 일부다.
에리카도, 그의 아버지를 돌보는 담당의사도, 폴린도 모두 의사다. 의사의 사명은 고귀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행히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학은 어느 순간 편히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지워버리고 있다. 일말의 가능성에도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속하던 현대의학이 결국 죽음을 막지 못하고 두 손을 드는 순간 환자와 보호자는 우주에 내던져지는 듯한 혼란과 절망에 빠진다.
2009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최선은 곧 선행’이라는 의사들의 오랜 믿음을 깨뜨렸다. 가고 멈춰 섬을 분별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달려가는 의학은 인간의 존엄한 마무리를 망가뜨려 오히려 해로움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김 할머니 사건 이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서둘러 제정됐다. 늙지 않고 장수하려던 ‘웰빙’ 열풍은 이제 의미 없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웰다잉’으로 대체됐다.
의료계에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질병과 싸우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하던 병원들이 하나둘씩 호스피스완화의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의과대학도 생명만을 절대시하며 달려가는 경주마 같은 의사를 길러내던 기존의 교육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을 모두 견줘볼 수 있는 인간적인 의학교육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란 한 마디로 인간이 삶의 마지막까지 자기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의료다. 인간은 모두 고유한 자기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간다.
"환자는 물론 가족들에게 죽음보다 더 한 고통 안겨주는 무의미한 연명의료"
때문에 잠시 생명을 연장하더라도 가치의 훼손이 심각하다면 그것은 본인과 가족들 모두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 할머니 사건에서처럼 바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환자에게 기계장치와 약물을 통해 단지 몇 시간 또는 수일간의 기계적인 삶을 연장하는 것은 생명존중이 아니라 고통을 증가시키고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것일 수 있다. 말기환자의 여생 동안 고통을 최대한 제어하면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소중한 의료의 역할이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존엄한 죽음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기에 단순히 의학의 힘만으로는 그 역할을 완성할 수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신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역사가 담긴 사회적이고, 인격적이며, 영적인 존재기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전인적인 돌봄이 요구된다.
호스피스완화의료에 의사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영양사, 종교인, 예술치료사, 자원봉사자 등이 참여하는 이유다.
내게는 잊지 못할 환자가 있다.
25살에 자궁경부암이 온몸으로 퍼진 여성환자였다. 그는 미혼모 상태에서 임신을 했고 산부인과에 갔다가 말기암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한 후 곧바로 항암치료에 들어갔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남자친구였던 아이 아빠는 연락이 끊겼고 이혼한 친부모 역시 찾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의 항암치료가 불가능하자 극심한 우울증 상태에서 모든 사람과의 대화를 거부한 채 종일 침대에서 울며 죽음을 기다렸다.
우리는 모여서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고 일찍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편안하게 안길 수 있는 엄마라는 울타리란 결론을 내렸다. 그 역할은 그가 입원한 병실 간병도우미가 맡았다.
간병도우미 분은 그의 사정이 딱하다고 마냥 끌려다니지 않고 심한 응석과 투정에는 야단도 치고 의젓한 모습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마치 친엄마처럼 그를 대했다. 어느샌가 환자는 마음을 열고 간병도우미를 엄마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과도 대화를 시작했다. 심리적 변화와 함께 통증 때문에 투여되던 진통제는 10분의 1로 줄었다.
우리는 그가 남은 삶을 침대에 누워 보내지 않고 매일 무언가 할 일을 찾길 바랐다. 다행히 그는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는 법을 배워 사진작가처럼 매일 병원의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인화해 가져다주면 그 사진을 다른 환자들과 의료인들에게 선물했다.
그는 호스피스완화의료팀과 새롭게 가족을 이루고 아마추어 사진작가라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죽음의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고 평온하게 임종을 맞았다.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로 전원돼 온 지 42일 만이었다.
물론 모든 환자가 평화로운 마무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통해 결정된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환자를 볼 때마다 인간의 위대함이 단지 생명의 가치에만 있지 않음을 깨달으며 숙연해진다.
삶의 위대함은 존엄한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믿는다.
8.
번번이 죽고 태어나는 경험이 붐비는 곳, 문학
< 한국일보, 진은영 시인, 2023.05.13 >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어떤 책은 독자를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반드시 이해하고 말겠다고 다짐하지만 다가갈 때마다 늘 쫓겨나는 기분을 들게 하는 책, 바로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문학의 공간'이다. 그런 책을 만날 때면 우리는 우회로를 택한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그가 쓴 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블랑쇼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레비나스, 바타이유와 절친이었으며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사람. 프랑스의 68혁명을 지지하는 정치 활동에 참여했고 1968년 이후에는 은둔하며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사람. 이게 전부다. 사진도 거의 남아 있질 않다. 레비나스와 찍은 젊은 시절의 사진 한 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얼굴도 모를 뻔했다. 신비한 책의 신비한 저자이다.
운 좋게도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블랑쇼가 80세에 한 시사잡지에 실은 글 덕분이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친구 레비나스의 권유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지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1933년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하는 행태로 두 사람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사유의 위대한 순간에 우리들에게 가장 고귀한 질문,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온 질문을 던지도록 초대하던 바로 그 글과 언어를 하이데거는 히틀러를 위해 투표할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 (…) 다시 사용했다.”
이 철학자의 행보는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는 말할 것도 없고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레비나스의 가족을 탈출시켰던 블랑쇼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사랑이 깊으면 환멸도 깊기 마련이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하이데거식의 죽음론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다. 그것도 하이데거가 그토록 좋아했던 릴케와 톨스토이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은 오직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본래적인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인간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떠올리며 유한자임을 깨닫고 그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의 중요성에 몰두하느라 타자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은 파울 첼란의 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나치 협력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첼란은 직접 쓴 시 한 편을 건네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길 원했지만 하이데거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3년 뒤 시인은 센강에 몸을 던졌다. “용서받지 못할 일에 대해 끝내 용서를 청하지 않은 그의 거부가 첼란을 절망 속에 몰아넣었고 아프게 만들었다”고 블랑쇼는 탄식했다. 하이데거는 타자의 말에 응답할 줄 모르고 타자의 죽음도 영향 받지 않는, 정말이지 대단히 독립적인 실존이었다.
아름답고 난해한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메아리치는 것은 이 오만한 실존에 대한 저항이다. 블랑쇼는 ‘나는 나의 죽음을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메노이케오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블랑쇼는 키릴로프와 아리아의 예를 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청년 키릴로프는 신이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든 환상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무신론자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며 신이 없다는 것과 인간은 자유 의지로 죽음과 결연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이 의기양양하게 죽음과 만나려는 순간, 그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부재이다. 그는 죽음을 정복하려는 찰나에 사라졌다.
아리아는 고대 로마의 귀부인이다. 남편이 모반죄로 황제의 자결 명령을 받고 두려움에 떨자 아리아는 대담하게 단도를 자기 가슴에 깊이 찔렀다가 뽑아 남편에게 주면서 말했다고 한다. “전혀 아프지 않군요.”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결을 고대 로마에서는 ‘고귀한 죽음’이라고 불렀다. 아리아의 손녀가 전한 이 일화는 로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귀한 죽음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일화는 죽음의 낯선 심연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리아는 몹시 훌륭하게 죽는다. 끝까지 죽음에서 돌아선 채 “삶을 향하여” 있는 죽음. 침착하고 절도 있는 방식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는 죽음. 이 고귀한 죽음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의 순간을 예의바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끝까지 인간적 품위를 지키려는 삶의 욕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죽음을 향해 홀로 달려가는 존재’일 때만 본래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인간은 자기 죽음과 제대로 만날 수조차 없다.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죽음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이 덮쳐와 그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 뿐이다. 블랑쇼는 이것을 ‘비인칭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나(1인칭)와 너(2인칭)도 아니고 그/그녀(3인칭)도 아닌 누군가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없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는 비인칭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항상 나의 바깥 경험이다.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이 사건이 체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억해줄 사람이 없는 죽음은 우리를 비통에 빠뜨린다. 그래서 에밀리 디킨슨도 “작년 이맘때 나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시에서 그토록 궁금해한 것이다. “누가 나를 가장 그리워하지 않을까?”(그들이 날 그리워할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죽음을 상상하며 죽은 뒤에도 영혼이 남아있을지 그 영혼은 어디로 갈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더 절실하게 궁금한 것은 시인과 같다. 누가 제일 슬퍼하고 그리워할까? 언제까지나 나를 기억할까? 혹은 우리 강아지는 누가 데려갈까? 등등이다.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니라 타자들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더 고통스러워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를 구하려고 죽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살린 사람이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타자를 ‘위해서’, 즉 ‘대신해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력함을 넘어서, 인간은 타자를 “향해서” 죽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비인칭의 죽음이라면 타자의 죽음은 내게 가장 격렬하게 닥쳐오는 비인칭의 경험이다. 타자의 죽음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근원적 전복에 처하게 된다. 고통을 통과하며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고, 다른 존재로 바뀐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 이런 비인칭성의 경험들로 붐비는 곳이라고 여겼다.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속에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종종 사는 데 지쳐 힘이 빠질 때 바닥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는 것은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유한성의 자각이 아니라 오래된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다. 학생시위가 연일 계속되던 1991년 5월의 어느 토요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한 학생이 시위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균관대 불문과 3학년 김귀정. 나와 내 친구들이 있던 윗골목에서였다. 영정 사진으로 처음 봤던 여학생의 말간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나는 그 불문과 여학생의 영원히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그 애와 함께 블랑쇼를 읽고 문학의 공간을 힘내서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