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건강 수명 73.1세… 우리의 노년은 건강해지고 있다 

 

< 조선일보,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2023.04.26.  >

 


전 세계의 고령화와 함께 노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여기저기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요즈음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큰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은퇴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상향하는 것과 관련된 법안을 둘러싸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 프랑스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초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대중교통무임승차 등 다양한 복지제도가 현재 65세를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기준 연령이 조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이 문제는 민감한 주제로 간주된다. 1981년 이래로 현재까지 고정되어 있는 노인 기준 연령을 조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으로는 첫째, 현재의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며, 둘째, 기대수명은 늘고 있지만 그에 비해 건강수명이 늘고 있지 않아 아픈 노년을 오래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건강수명이 늘지 않고 있는 현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자료는 통계청의 ‘유병기간 제외 기대수명’ 추이다. 사실 이 ‘유병기간 제외 기대수명’은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과 같은 만성질환을 재빠르게 잘 찾아내 의학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건강수명이 짧아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만성 질환을 앓으며 약제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병기간 제외 기대수명’ 방식으로 계산한 건강수명은 2012년 65.7년에서 2018년 64.4년으로 오히려 감소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2020년 66.3년으로 다시 약간 증가되었다. 참고로 2012년, 2018년, 2020년의 기대수명은 각각 80.9년, 82.7년, 83.5년이었다. 그런데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 질환에 대해 적절히 투약을 받으면서 젊었을 때와 다름없는 활동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도 건강수명이 끝났다고 간주되는 것은 상당히 억울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노년내과에서 진료를 받고 계신 환자분의 사례를 들어보자. 90세 남자인 A씨는 만성 폐쇄성 폐 질환과 말초혈관질환, 만성콩팥병, 고혈압 등 10여 가지의 만성질환을 앓고, 7종의 약을 복용한다. 여러 질병으로 병원을 다니는 중에도 평소 여러 가지 운동을 꾸준히 챙기고 있는 그는 병원 진료를 포함한 일상적인 일들을 모두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 보행속도나 근력은 젊은 성인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A씨는 사실 건강하지만 통계청 방식으로는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국제 표준 건강수명 계산법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사용하는 건강수명 개념인 ‘건강보정기대수명’이다. 여러 보정 공식을 이용해서 질병, 사고 때문에 일상생활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하는 시점을 추정하므로, 경증의 만성질환만 걸리더라도 건강치 않은 것으로 분류되는 억울함을 피할 수 있다. 지난 20년간 기대수명이 7.3년 늘었고, 그동안 이 방식대로 계산한 건강수명은 5.7년 늘었다. 통계청 방식과는 달리 상당히 ‘선방’했다고 볼 수 있다. 2019년 데이터에서는 73.1년으로 WHO 자료가 있는 나라들 중에서 일본(74.1년), 싱가포르(73.6년)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미국 66.1년, 영국 70.1년, 독일 70.9년, 프랑스 72.1년 등 여타 부유한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건강하게 나이 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노인병 의사들은 사람의 노년을 숫자 나이로 보기보다는 실제 기능 정도로 판단하는 훈련을 받는다. 병의 개수, 약의 개수가 늘며 스스로 걷기, 씻기 등 일상생활의 수행이 어려워지면 노쇠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코로나에 걸리거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 등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숫자 나이는 같더라도 얼마나 노쇠한지가 이후의 사망 여부나, 기능 저하에 의한 요양병원 입소 등을 결정하게 된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전남대학교병원 노년내과 강민구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같은 노쇠 정도(노쇠지수 0.2)에 도달하는 연령 또한 증가 추세인데, 2010년 71.3세, 2019년 75.0세로 WHO 건강보정기대수명과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쇠지수 0.2면 노화와 만성질환이 어느 정도 겹쳐 있고 걷는 속도가 다소 느려지며, 허리가 약간 굽고 근육이 다소 빠진 상태로 지팡이를 사용해서 걷게 되는 정도이다. ‘노쇠 전 단계’라고 칭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노년의 몸’이라 할 수 있다. 근육 건강과 인지 건강에 특별히 신경 써 주어야 노쇠의 진행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람들 인식은 어떨까? 2022년 서울에 거주하는 1957년 이전 출생자 3010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서울시 노인실태조사’에 참여한 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노인 기준 연령은 평균 72.6세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서도 과반(52.7%)은 노인 기준 연령을 만 70~74세로 인식했다. 우리나라의 실질 은퇴 연령이 2018년 기준 72.3세인데(OECD), 신체적·인지적으로 성인기에서 노년기로 전환되는 시점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평균값은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지성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어느 나이대가 되면 흔히 생각하는 ‘노년의 몸’을 보이기 시작하는지 관찰한 경험들을 모두 한데 모은 것인데, 그 결과가 WHO 방식의 ‘건강보정기대수명’이나 강민구 교수의 국민건강영양조사 분석 결과와 흡사한 것이 재미있다.

우리의 노년은 건강해지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다. 골골거리며 오래 사는 노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안타깝게도 불리한 계산 방식을 보여주면서 빈곤하며, 아픈 노년의 기간이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겁주는 기사가 많다. 우리 나라의 미래가 급증하는 의료비용과 복지비용으로 우려된다는 통계 자료와 전문가의 의견들이 매일같이 지면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즐링의 이야기처럼, 실제 데이터를 들여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생각보다 더 좋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더 긴 청춘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퇴직해도 현역 때처럼 활기차게 사는 사람의 비법 3가지 
인생 후반기, 사회 고립과 단절을 이겨내려면
나의 은퇴 고독지수, 자가진단 해보세요


노년학 전문가 사토신이치 교수 인터뷰  
[행복한 노후 탐구]

 

 

< 조선일보, 이경은 기자,  2023.04.11.  >

 

 


한 직장에서 30년 근무했고 곧 퇴직합니다. 오로지 은퇴만 바라보면서 직장 생활에 매진해 왔는데, 막상 다가오니 두렵고 공포스러워요.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아쉽고 후회만 생기니 아이러니하네요.”(50대 A씨)

‘은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반백살이 넘어 은퇴가 코앞으로 다가오면, 막연한 불안과 이유 모를 두려움에 떨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꿈꾸고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두렵고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10일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 따르면, 50대 중산층이 생각하는 ‘은퇴 이미지’는 ‘재정 불안, 건강 쇠퇴, 외로움, 타인 의존, 지루, 하찮음’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다<아래표 참고>.


사토신이치(佐藤眞一·67) 전 오사카대학교 대학원 노년행동학 교수는 11일 조선일보 [행복한 노후 탐구]와의 인터뷰에서 “인생 후반기에는 퇴직으로 인한 사회 단절과 경제 불안, 부모와 배우자 사망, 질병과 노화 등 부정적인 사건들이 많이 벌어진다”면서 “내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 미리 알아두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미리 생각해놔야 한다”고 말했다.

사토 교수는 일본 사이타마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메이지대, 오사카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본 노년행동과학회장을 지낸 노년학 전문가인 그는 노후 관련 서적도 다수 펴냈다. 국내엔 <우리 가족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나이 든 나와 살아 가는 법> 등이 번역 출간돼 있다.

 


1️⃣  돈보다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라

– 노년에 대한 이미지는 왜 부정적인가.

“정년 퇴직, 궁핍한 가계, 노부모 수발, 부모 사망, 배우자 질병·죽음... 60대 이후 인생 후반기에는 이런 부정적인 생애 사건(life event)들이 연달아 발생한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나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사건들이라서 사람들은 애써 외면한다. 그런데 늙는다는 것이 ‘상실’만 존재하는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채움’으로 바꿀 수 있다. 돈보다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한 이유다.”

–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퇴직 후엔 사회와의 관계가 크게 달라진다. 이 시기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노년 행복감이 크게 달라진다. 퇴직을 앞두고 ‘이제 내 인생은 9회말 2아웃’이라며 절망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정년퇴직 축하연에는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급여는 없지만 새로 생긴 모 연구센터에서 ‘특별초빙교수’란 직함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잃어버릴 뻔했던 미래 비전이 생기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 평범한 직장인도 미래 비전을 찾을 수 있나.

“퇴직 이후 일에서는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야’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돈으로 성과를 추구하기 보다는 시간을 즐기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돈은 못 벌어도 꼭 해보고 싶다’거나 ‘돈을 들여서라도 해보고 싶다’고 느끼는 일이야말로 퇴직 이후 내가 꿈꿀 수 있는 진정한 미래 비전이다. ‘대기업 부장 출신인데... 은행 지점장이었는데...’ 이렇게 퇴직 후에도 본인 체면만 먼저 생각하고 그에 맞는 일자리에서 대접 받길 원한다면, 비참한 인생 말로만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2️⃣ 명함 없다고 ‘방구석 여포’로 살지 마라

– 정년퇴직 고독감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라서 ‘사회에 받아 들여지고 싶다’는 근본적 욕구가 강하다. 그런데 정년퇴직은 그야말로 사회적 정체성을 잃는 일이다. 마치 자기 자신을 잃는 것과 같은 의미이므로, 일터를 떠나 관계가 단절되면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에 집착하고 명함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하면서 회사를 원망하고 신세를 비관해봤자 소용없다.”

– 은퇴 충격을 치유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일본에선 한때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는 일명 ‘폭주노인’이 화제였다. 평소엔 온화한 사람이 갑자기 욱해서 화부터 낸다거나 학력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고령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며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식이다. 폭주노인이라는 사회 현상은 말 그대로 정년 퇴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ΟΟ회사의 부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잃고 ‘그냥 사람’이 되어 버린 자신에 대한 분노를 엉뚱한 곳에 폭력이라는 형태로 표출한 것이다.”

– 퇴직 스트레스가 ‘폭주노인’을 일으킨다니 놀랍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온화해지고 성숙해진다는 통념이 있지만 폭주노인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퇴직 후 부하가 해주던 일을 스스로 하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내가 그런 폭주노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고독지수 테스트가 있어서 소개한다<아래 표 참고>.


내가 직접 조사해보니 50세 이상 남성의 평균 점수는 11.8점, 여성의 평균 점수는 11.2점이었다. 평균 점수와 표준편차를 근거로 고독지수를 산출해 보면, 18점 이상이면 위험한 상태고, 15~17점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내 고독지수가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타인과 관계 맺기가 어려워 괴로운 상황이다. 사람을 만날 기회부터 많이 만들어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고독감을 해소할 수 없다. 부지런히 밖에 다녀야 사람들에게 호감도 사고, 나도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다.”


3️⃣ 은퇴 여행도 질린다... 일상을 만들어라

– 퇴직하면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을 것 같다.

회사 다닐 때의 ‘일하는 시간’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기쁨과 보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런 일상이 있어야 비일상도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퇴직 후에는 평일과 주말, 일하는 날과 쉬는 날 구별이 없어진다. 평일 아침에도 휴대폰 알람은 울리지 않고, 나를 찾는 전화도 거의 걸려오지 않는다. 현역 시절 일할 때처럼 충실한 일상을 보내기가 어려워진다.”

– 퇴직해도 일상은 꼭 확보하라는 의미인가.

“일본에서 ‘퇴직하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는 질문을 하면 1위 대답은 늘 ‘여행’이다(한국도 아마 비슷할 것 같다). 제약회사 임원이던 지인 얘기다. 회사 다닐 땐 바빠서 못 가지만 퇴직하면 한 달에 한 번씩 꼭 호화로운 여행을 떠나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실제로 처음 한두 번은 무척 즐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반년도 지나지 않아 시큰둥해지고 질려버렸다. 여행은 일상 생활권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는 이렇다 할 ‘일상’이 없는 퇴직자였기에 여행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이다. 매일 한가롭다며 괴로워했던 그 지인은 제약회사와 관련된 병원을 소개받아 봉사 활동을 시작했고, 어느새 본업인 양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활력을 되찾았고 부부 여행도 다시 시작했다.”

– 그런데 퇴직 후 일상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회사원 시절에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신문을 읽으면 재미있다. 바쁜 일상이 있는 와중에 경험하는 비일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갈 곳이 없어 의무적으로 도서관에 가야 한다면, 그리고 그게 일상이라면 과연 즐거울 수 있겠는가. 일상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미래 비전을 가져다 줄 알찬 일상이어야 한다. 가령 도서관을 다니는 것이 일상이라면 본인 스스로 관심 있는 주제를 찾고 ‘블로그에 공유하기, 유튜브로 알리기, 지역 대회에 참가하기’ 등 구체적인 세부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 만들어나가야 한다.”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건 40년 만에 처음이니까,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막상 1주일 같이 있어보니 숨이 막혀서... 오늘 뭐해? 어디 가? 몇 시에 들어와? 내 밥은? 매일 꼬치꼬치 캐물어서 성가셔 죽겠다. 밥 먹고 나면 각자 그릇 치우고 식탁도 닦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한다. 스스로 찾아서 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고, 잔소리 좀 하면 듣기 싫다고 버럭하고, 모순 덩어리다.”

일본의 평범한 주부가 ‘시니어라이프’라는 제목으로 만든 6분짜리 유튜브 영상 자막의 일부다. 65세에 정년 퇴직해서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위해 집밥을 준비하는 요리 동영상이다. 주부의 주름 잡힌 손과 음식, 냄비, 그릇 정도만 화면에 비칠 뿐, 얼굴과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단순한 집밥 요리 영상이지만, 퇴직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솔직한 심정이 자막에 깨알같이 담겼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조회수는 315만회에 육박한다. 영상에 달린 댓글도 2600개가 넘는데, ‘아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와 ‘그동안 남편이 힘들게 돈을 벌어왔는데 구박이 지나치다’는 찬반 양론이 가득하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퇴직 이후 인생 전환기에 부부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퇴직 후 부부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재정비하느냐에 따라 제2의 신혼을 보낼 수도 있고 황혼이혼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다. 은퇴 연착륙 승패는 부부 관계에 달렸다.

사토신이치(佐藤眞一) 전 오사카대학교 대학원 노년행동학 교수는 12일 조선일보 [행복한 노후 탐구]와의 인터뷰에서 “꿈과 낭만을 추구하는 남성은 정년퇴직을 종착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정을 추구하는 아내는 새출발이라고 여긴다”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려면, 퇴직 이후 예상되는 배우자의 심리 변화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토 교수는 일본 사이타마(埼玉)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메이지대, 오사카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노년학 전문가인 그는 <노인 심리를 알기 위한 112개 키워드>, <우리 가족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나이 든 나와 살아가는 법>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1️⃣ ‘천국 vs 지옥’ 은퇴 부부의 동상이몽

–월급이 끊기는 삶은 공포스럽다.

“인간은 수입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일할 땐 월급이 있으니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퇴직 후에는 (연금이 넉넉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여성은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남성보다 더 많이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꿈과 낭만을 추구하는 남성은 아내의 불안감엔 아랑곳하지 않고 ‘은퇴 환상’을 품는다. 돈이 필요해서 일했으면서, 꿈이나 낭만이 더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 ‘은퇴 환상’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현역 시절엔 안정을 추구하는 아내와 낭만을 추구하는 남편 심리가 균형을 이룬다. 그런데 남편이 퇴직하고 나면 이런 균형이 깨진다. 아내는 ‘남편이 일을 계속하고 돈도 벌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괜찮은 일이 없다’거나 ‘그런 일은 하기 싫다’면서 모른 척 하니 결국 부부끼리 다투게 된다. 퇴직한 남편은 ‘지금까지는 일을 우선시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내랑 여생을 즐겁게 보내야지’라고 제멋대로 제2의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퇴직이 없고 집안일이 일상인 아내는 ‘이제 나를 제발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아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자유 시간’인데 남편만 모른다.”

남성의 행복도는 배우자 유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배우자가 있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2️⃣ 은퇴 부부는 이심이체(二心異體)

– 퇴직하면 왜 아내 의존형 남편이 많아지나.

“퇴직 전에 부부의 만족도를 조사해보면 대부분의 항목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어긋나는 항목이 하나 있는데 ‘사회적 평가’가 그것이다. 아내가 직업이 있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만약 아내가 전업주부거나 파트타임만 했다면 스스로 사회적 평가가 부족하다고 느껴 본인 삶에 썩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분야에서 높은 사회적 평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가령 집안일을 효율적으로 해서 자기 시간을 조금씩 만들거나 취미 활동, 지역 봉사 등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녀가 독립하면 이런 외부 활동은 더욱 왕성해진다. 아내는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사회적 평가를 받고 자기 만족도 느껴간다.”

– 아하! 남편은 일에서 소속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그렇다. 남성들은 주로 직장에서 사회적 평가를 얻고 만족하기 때문에 직장 밖의 세계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퇴직 후다. 일에만 집중했던 남성은 직장을 떠나면 자신의 세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출퇴근이라는 일상을 잃은 남성은 사회에서 단절되고 고립되어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아내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밖으로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라면서 ‘혼자만 놀러다니니 서운하다’고 불만도 내비치게 된다.  일하는 날과 쉬는 날, 일상과 비일상이 있어야 부부 관계도 원만해지는데, 퇴직으로 일상이 무너지니 부부 관계도 틀어지는 것이다.”

–부부 사이가 틀어지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나.

“아내에게 끼니 차려 달라고 보채지 말고, 집안일도 나눠야 한다. 아내에게 어디 가는지 묻지 않아야 한다. 아내가 걱정되어서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다. 아내가 외출한다면, 잘 다녀 오라고 배웅하고, 그 시간에 집에서 청소라도 해 놓으면 귀가한 아내가 엄청 고마워할 것이다. 나도 서툴긴 하지만, 연초에 퇴직하고 나서는 장보기, 쓰레기 버리기, 세탁소에 옷 맡기기, 침구 정리, 창문과 화장실 청소 같은 것을 맡아서 하고 있다. 은퇴는 부부가 다시 부부로 돌아가는 시기이지만 젊은 시절처럼 일체(一體)가 되는 건 아니다. 인생 후반전에는 배우자를 동료나 짝, 동반자로 생각해야 한다.”

– 아내 의존형 남편은 배우자 사별이 큰 충격이겠다.

“아무리 사이 좋은 부부라고 하더라도 언젠가 한 사람은 먼저 떠나고 한 사람은 남는다. 여성은 평균 수명이 길어서인지 ‘남편이 먼저 죽지 않을까’ 생각도 하는데, 남편은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특히 아내에게 평생 의존해 살던 고령 남성이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정신적 충격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집안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니 자식들을 애먹이고 잘 먹지 않아서 점점 노쇠하고,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많다. 사별하는 연령대도 큰 변수다. 젊은 사람은 배우자 사별로 인한 정신 충격 회복 속도가 빠르지만, 80세 전후로 사별하면 굉장히 힘들다. 혼자서 회복하긴 어려우니 가족 등 주위에서 신경을 써줘야 한다.”

– 사별, 이혼 등으로 혼자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여성은 집안일에 능숙해서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다. 남편이 떠난 뒤 요리하기가 싫어져서 영양실조에 걸린 여성도 꽤 많다. 똑같이 요리를 해도 남편이 맛있다고 기뻐할 것을 기대하며 요리하는 것과, 나 혼자 먹기 위해 요리하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르지 않는가. 혼자 산다면 의식적으로 지역에서 내가 ‘있을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좋다. 문화 행사, 취미 동호회, 봉사 단체, 노인 대학 등 아무 곳이라도 참여해서 활동하면 회원으로서 존재를 인정받고,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있을 곳이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학창 시절 친구 관계도 부활시키면 좋다. 동창들과 만나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청춘 시절의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고, 그들이 내 마음의 ‘있을 곳’이 되어 준다.”

숲 위에 아스팔트, 비석도 세웠다…자연 해치는 수목장림

 

 

<  중앙일보, 김민욱 기자, 2023.04.07  >




지난해 9월 경북 경주 하늘수목장림 내 추모목 주변이 마치 민둥산 같다. 추모목 아래에 잔디를 심어 작은 묘지처럼 꾸민 곳도 있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하늘숲추모원. 이곳은 2009년 문을 연 국내 1호 국립 수목장림(樹木葬林)이다. 수목장은 화장한 골분(骨粉)을 나무 밑이나 주변에 묻는 것을 말한다. 하늘숲추모원은 축구장 67개 넓이인 48ha에 추모목 6315그루가 있다. 추모목은 주로 소나무다.

겉으로 볼 땐 여느 숲과 같다. 하지만 산에 오르면 듬성듬성 자라는 추모목만 보인다. 다른 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추모목 곳곳에 작은 봉분(封墳)이 눈에 띄었다. 수목장림을 ‘묘지’처럼 쓰고 있어서다. 추모목엔 고인 이름과 출생·사망일 등 정보가 담긴 목재 표찰 정도만 걸어야 한다. 또 추모원 중심부는 아스팔트 포장을 하는 바람에 숲이 끊겼다.

자연 친화적인 장사시설인 수목장림이 오히려 숲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도 양평 국립하늘숲추모원 내 한 추모목은 소나무재선충병에 감염돼 잎이 말랐다. 

을지대 산학협력단이 최근 내놓은 ‘국유 수목장림 중장기 발전방안 연구’ 보고서 등에 따르면 국내 수목장림 도입 논의는 2005년 전국 화장률이 50%를 넘으면서 활발해졌다. 매장 대신 다양한 장사 시설이 생기면서 환경 훼손을 최소화할 자연장지 필요성이 커졌다. 화장률이 낮은 90년대엔 매년 서울 여의도 면적의 1.2배(9㎢) 만큼 묘지가 들어섰다.

이후 자연장 도입을 골자로 한 장사법이 개정됐고, 양평 하늘숲추모원이 문을 열었다. 현재 주요 공공 수목장림은 하늘숲추모원 외에 국립기억의숲(충남 보령)·하늘수목장림(경북 경주)·보배숲추모공원(전남 진도)·자연숲추모공원(전남 장성) 등 5곳이 있다. 민간 수목장림도 여러 개 있다. 경주·진도·장성 수목장림은 산림조합이 운영한다.

을지대 산학협력단 보고서 등에 따르면 현재 수목장림은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2년 전 개장한 경주 하늘수목장림(면적 7.1ha·추모목 2991그루)이 대표적이다. 무리한 간벌·정비로 숲이 제모습을 잃었다고 한다. 일부 구역은 민둥산처럼 보인다. 또 유골을 안치한 곳에 아예 잔디를 입히거나 작고 네모난 비석을 놓기도 했다.

반면 자연장지 특성을 살린 곳도 있다. 2012년 문을 연 진도 보배숲추모공원은 인공적인 도로포장 등을 최소화했다. 이런 사례는 해외에도 있다. 네덜란드 베르허보스 자연장지 역시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다. 도로를 포장하지 않아 운구에 수레를 이용한다. 박태호 장례와 화장문화연구포럼 공동대표는 “수목장림이 점차 묘지화되면서 오히려 숲 건강성을 해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수목장림에 안식년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 공동대표는 “숲과 같은 자연의 복원에 가장 효과적이고 쉬운 방법은 휴식을 주는 것”이라며 “과거 서울 남산 숲이 황폐해졌을 때도 출입을 통제해 살렸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려면 유족 동의가 필요하다. 한국 사람은 추석과 설 명절 등 1년에 두 차례 묘지를 찾는다. 이때 추모목까지 가지 말고 입구에 공동 제례단 등을 만들어 활용할 수도 있다. 이정선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추모목이란 공간에만 한정해 꼭 그 앞에서만 절하고 술을 올리지 말고 숲 자체에 영면해 계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론 수목장림에서 ‘산림장’으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스웨덴 추모의 숲 민네스룬드가 모델이다. 이곳은 골분을 묻거나 뿌린 장소는 관리자 말고는 출입이 어렵다. 추모 길과 공용 추모공간에서만 헌화 등을 할 수 있다.

‘자살론’으로 본 한국 사회

 

 

 

< 경향신문,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3.04.04  >

 

 


한국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누군가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보도는 하루가 멀다고 언론에 등장한다. 혼자 사는 어르신도, 가난을 견디지 못한 모녀도, 학교폭력 피해 학생도,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도 목숨을 버린다. 도덕적 흠결이 드러난 정치인도, 횡령 혐의를 받는 기업인도,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연예인도 목숨을 버린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한 야당 정치인의 주변 인물들 중에는 벌써 다섯명이나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무엇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이리도 서둘러 목숨을 버리도록 하는가.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국제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은 지 이미 오래됐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자살률은 10만명당 24.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동의 1위다. 2등인 리투아니아가 20.3명, 3등인 슬로베니아가 15.7명이니 한국의 자살률이 얼마나 높은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노인 자살률은 80세 이상의 경우 10만명당 61.3명이고, 70대에서도 41.8명이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여준다. 청년들의 자살도 증가하는 추세다. 학계와 언론이 꼽는 자살의 위험요인은 정신건강, 경제적 어려움, 혼인상태, 사회적 고립, 총기와 같은 자살도구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 술이나 약물 의존성 같은 것들이다. 하나하나 일리가 있는 분석이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무엇, 더 깊은 곳에 어떤 요인이 있다는 예감 같은 것이다.

 


미국의 자살방지 캠페인에 등장하는 한 중년 남자는 자살 충동이 드는 순간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면서 생각해요. 이걸로 충분해. 더는 못하겠어.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어.” 이 순간을 넘기지 못하면 충동이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은 현격히 높아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뇌는 일반인에 비해 훨씬 유연성이 떨어지고 부정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지금의 괴로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거나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힐까. 아마도 한국 사회의 어떤 정신적 위기와 맞닿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자살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라면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떠올리게 된다. 뒤르켐은 자살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적 자살이 그것이다. 

 

 

사회에 통합되지 못하고 홀로 고립됨으로써 택하게 되는 이기적 자살은 1인 가구가 대세가 된 한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형이다. 특히 노인의 경우 평생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가족의 연대가 붕괴하고 가난과 병마 속에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할 때 이기적 자살이라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게 된다. 

 

 

슬픈 것은 노인층에서 이타적 자살조차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식 세대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에서 벗어난 지 오래건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끝내 저버리지 못한 노인들은 자식의 부담이라도 줄여주고 싶어서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모든 것이 압축적으로 변해온 한국 사회에서 규범의 혼란으로 인한 아노미적 자살도 많은 것이 당연하다. 개인들은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규범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급격하게 변동하는 사회에서는 어제 당연했던 것이 오늘은 당연하지 않게 되고, 그 도덕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아노미적 자살을 택한다. 코로나19와 경기침체의 와중에 하루아침에 달라진 처지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과도하게 강요된 규범으로 인한 숙명적 자살은 아노미적 자살의 반대말이다.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대중 앞에 발가벗겨진 사람들의 경우 공인이라는 핑계로 잔인하게 사생활까지 들춰내며 무결점을 강요하는 세태는 숙명적 자살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고 동시에 피해자이다. 한국에서 당신이 40세가 되기 전에 혹시 사망한다면 가능성 높은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전 연령 평균을 내더라도 자살은 5번째 원인이다. 당신은 당뇨나 알츠하이머, 후천성면역결핍증으로 사망할 확률보다 자살로 사망할 확률이 더 높다. “이걸로 충분해.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어”라는 생각은 당신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올 수 있다. 잠시라도 미움을 내려놓고 주변을 돌아보자.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배불뚝이, 새우등, 버럭, 울컥... 남성호르몬 부족한 중년남의 특징
남성 호르몬 감소하면 의욕 줄어 ‘무기력 뇌’
‘쌩쌩한 뇌’ 유지해야 사회적 고립 피한다


[행복한 노후 탐구]

 

< 조선일보, 이경은 기자, 2023.03.10 >

 

 

 


일본의 유명한 노인정신의학 전문의 와다히데키(和田秀樹)씨. 노화 관련 책을 다수 써온 베스트셀러 작가다. 62세인 와다씨는 남성 호르몬 수치를 중요한 건강 지표로 삼고 있다. 와다씨는 “남성 호르몬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를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남성 호르몬일까.

와다씨는 “남성 호르몬은 중장년기 삶의 활력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변수”라며 “남성 호르몬 수치가 낮아지면 심신이 녹슬고 ‘무기력한 뇌’를 갖게 될 위험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남성 호르몬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으론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 꼽힌다. 남성 호르몬 수치를 검사한면, 통상 테스토스테론 수치 측정을 의미한다.

남성 호르몬은 대개 40~50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70~80대에는 청년 시절의 3분의 1까지 감소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30대부터 남성 호르몬 감소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30대 남성인데 에너지가 없어보인다면, 남성 호르몬 부족이 원인일 수 있다. 줄어드는 남성 호르몬은 노화로 점점 둔해지는 뇌에 영향을 미친다.

와다씨는 “나이가 들면 시력, 청력, 근력, 기력, 집중력 등 여러 신체 능력이 후퇴하게 된다”면서 “동시에 삶의 의욕도 줄어드는데, 인간의 마음과 사고를 관장하는 대뇌 전두엽의 노화 속도가 신체에서 가장 빠른 것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로 치료받았던 50~60대 남성은 2017년 약 16만6578명에서 2021년 19만2636명으로 16% 늘었다. 


전두엽 기능이 약해지면, 주의력·직관력·창의력·판단력 등이 전부 나빠진다. 

 

‘귀찮다’, ‘재미없다’, ‘지루하다’, ‘우울하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일상을 삼키고, 사소한 일에 화부터 내게 되고, 삶에 대한 의욕도 사라진다.

 


누구보다 다정다감했던 남편(혹은 아빠)이 요즘은 입만 열면 버럭 짜증부터 낸다”는 가족들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남성 호르몬은 중년 이후 남성의 체형도 바꿔버린다. 복부 비만으로 ‘배불뚝이’가 되기도 하고, 몸이 앞으로 구부정해지는 ‘새우등’도 나타난다.

와다씨는 작년에 발간한 <언제까지나 쌩쌩한 뇌>에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면 성적 기능만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만남도 귀찮아지고, 새로운 일에 흥미나 재미도 잃게 된다”면서 “체력이나 음주 능력도 예전 같지 않고 젊은이들을 보면 어울리기 어렵다는 심리적 거리감도 느낀다”고 말했다.

남성 호르몬은 외부 활동과도 연관이 있다. 와다씨는 “지난 2013년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가 남성 호르몬을 도포한 집단의 특징을 조사해 발표했는데, 기부나 자원봉사 등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많았다”면서 “남성 호르몬이 많은 사람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높고, 곤경에 빠진 약자들을 돕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말했다.

항상 무기력해 보이고,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없는 사람에겐 아무도 끌리지 않지요. 남성 호르몬이 부족하지 않아야 쌩쌩한 뇌를 가질 수 있고, 이런 사람은 늘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차서 사람들이 절로 모여듭니다.”

 


✅외로운 인생 후반전 보내지 않으려면

 


일본 간병업계에는 ‘현역 시절에 ‘사짜’였던 사람은 거만해서 보살피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다. 일본에서도 사짜는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일본어로는 代議士), 교사 등의 직업을 의미한다. 현역 시절에 고위직에 종사했던 사람일수록, 나이가 들어서까지 거만한 태도를 취하며 간병인에게 고성을 지르고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짜 직업을 가졌던 고령 남성이 ‘급발진’하게 되는 이유로, 와다씨는 남성 호르몬 부족을 꼽는다. 인생 후반기에 호르몬 이상으로 짜증과 화를 많이 내면 주위에 사랑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 ‘외딴 섬’에 갇힌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와다씨는 “남성 호르몬 부족으로 인한 남성 갱년기 장해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여성과 달리 증상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서 “남성 호르몬 수치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면, 마음의 병(무기력, 피로, 건망증, 불면증, 우울증 등)이 깊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라클 피부과의 김성권 원장은 “남성 호르몬 수치는 혈액 검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정상 범위는 대략 3~9ng/ml”라며 “만약 수치가 정상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면 금주, 금연, 수면, 운동, 스트레스 관리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권 원장은 이어 “가공육이나 과자, 탄산음료 등은 피하고, 생선과 채소, 과일, 견과류 등을 충분히 섭취하면 남성 호르몬 수치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서 “수치가 지나치게 낮다면 의사와 상의해 주사 치료를 받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초고령사회로의 전환이 재앙이 되지 않는 법

 

 

 

< 경향신문,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3.02.28  >

 

 


저출산 소식은 더 이상 충격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출생률이 0.8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은 달리 받아들여야 할 신호이다. 이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냄비 속에 있는 개구리 처지에서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지펴지고 있는 불을 꺼야 한다.


비유는 이렇게 했지만 사실 물을 확 들이부어 불을 끄는 접근을 하기는 어렵다. 우린 개구리도 아니고 사회는 냄비 속보다 복잡하다. 저출산은 여러 현상들 중 하나일 뿐이다. 비슷한 경제력을 갖춘 여러 나라 중 한국은 유독 아이들은 덜 행복하고, 일하다 다치거나 죽는 사람의 비중이 높으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노동시간은 길지만 저임금노동자 비중이 높고 직장에서는 이른 나이에 퇴출된다. 핵심 연금제도인 국민연금은 다른 나라보다 보장수준이 낮다. 강도 높게 일하다가 자주 다치고 나이 들면 일자리의 질은 낮아지고 노후는 불안하다는 것이다. 아이를 갖지 않는 각자의 선택은 생애 전반에 걸친 행복의 함량 부족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사람을 희생시키는 성장’을 해왔다. 수십년 동안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이런 성장 방식은 각자가 쓸모를 다한 순간 주변으로 밀려나도록 만들었다. 또한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데에도 희생의 정도와 분배 몫이 일치하지 않는 경험을 오랫동안 하였다. 초기 산업화의 주역이자 가장 가난한 세대인 현재의 고령노인이 대표 격이다.

 


혁신이 성장을 견인하는 시대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사회와 삶을 이끄는 원리에서 사람은 소외되어 있다.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과거 노동력을 집중 투입하는 성장이 노동과 함께 가지 않는, 사람 없는 성장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이다. 노동력을 갈아넣는 성장과 노동 없는 성장, 이 두 가지는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듯 보이지만 사람을 희생시키는 성장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전환기에는 유능하고 운 좋은 소수가 되거나 도피하거나 하는 선택지만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둘 다 평범한 다수가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다.

 


흐름을 바꿔야 한다. 사람들이 다른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변화에 적응하는 책임과 그 결과를 경쟁과 운에 맡겨두는 방식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 초고령사회에서 노동력 공급이 부족해진다면 더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을 요구할 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학습과 일이 같이 가도록, 더 늦은 나이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사회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동안 저출산 대책에 쓴 돈을 각자에게 나눠줬다면 성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랬다면 정말 결과가 달랐을까? 또 다른 이들은 국민연금 보장수준을 줄이고, 각자 낸 만큼만 받는 제도로 바꾼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 말한다. 노후보장의 세대 간 계층 간 연대를 끊어내자는 말이다.

 


초고령사회로의 이행에서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 온전히 떠안도록 하는 생태계에서는 냄비 속 온도는 계속 올라갈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기초한 노동, 연금, 교육, 돌봄, 주거제도 등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특히 사람을 중심에 놓는 성장과 분배체계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냄비 속 온도는 떨어지기 어렵다. 성능 좋은 선풍기를 가진 누군가는 덜 불편할 수 있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래 설계에 사회연대에 기초한 복지국가 구상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정부의 노동·연금·교육개혁이 개인과 사회의 연결, 성장과 분배에 대해 어떤 철학에 바탕을 두게 될지, 이 속에서 사람과 행복은 과연 중심에 놓여 있을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년내과 의사가 말하는 느리게 나이 드는 법
팔팔하게 99세까지 살다 2~3일 안에 여생을 마치려면? ‘내재역량’이 중요하다. 

내재역량은 이동성, 마음 건강, 건강과 질병 그리고 ‘내게 중요한 것’에 따라 달라진다.

 


< 시사IN 803호, 김연희 기자,   2023.02.10  >

 



신간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를 쓴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

 



여기 아찔한 숫자가 있다. 현재 한국의 노인 돌봄은 50~60대가 거동이 불편해진 80대 이상 부모뻘 세대를 보살피고 간병하는 형태이다. 2022년 기준, 60대 인구(약 720만명)가 80대 이상 인구(약 220만명)보다 월등히 많지만 돌봄 인력을 구하고 돌봄 비용을 부담하는 일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앞으로 60년 뒤 지금 20대가 80대에 접어드는 2082년으로 가면 정말로 문제가 심각해진다. 약 670만명인 20대 대부분이 80세 이상까지 생존할 텐데 그때 가서 돌봄을 제공할 핵심 연령층인 0~9세 인구는 절반 수준(360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2082년의 노인들이 2022년의 노인들처럼 공적·상업적으로 돌봄서비스에 의존한다면 그야말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는 노년내과 전문의이다. 그는 신간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더퀘스트)에서 “성공적인 나이 듦은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젊은 세대에게 아주 중요한 삶의 과업”이라고 강조한다. 고령화 저출생 시대에 ‘기대수명’은 늘어나는데 ‘건강수명’이 획기적으로 연장되지 못한다면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의료비와 돌봄 비용에 휘청거릴 위기에 처한다. 정 교수는 “현재 20~40대가 믿고 의지할 것은 40~ 50년 후에도 잘 작동하는 스스로의 내재역량밖에 없다”라고 썼다.

‘내재역량(intrinsic capacity)’은 세계보건기구가 2015년에 제시한 개념으로 얼마나 건강하게 나이 들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내재역량을 키우면 가속 노화를 막고, 말년까지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그림 1〉 참조)

 

흔히 말하는 ‘8899234 (팔팔하게 99세까지 살다 2~3일 안에 여생을 마치는)’ 삶이다. 정 교수는 성공적인 나이 듦, 즉 내재역량을 떠받치는 네 가지 기둥으로 4M을 제시한다. 

 

4M은 

 이동성(Mobility), 

 마음 건강(Mentation), 

 건강과 질병(Medical issues),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의 약자이다. 

 

의사가 썼지만 이 책에는 의료적 처치나 약물 복용을 권유하는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 교수는 ‘항노화 요법’이라며 일선 병의원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러 시술의 허와 실을 과학적으로 가려낸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주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초고령 사회 진입을 앞둔 한국이 무한 증식하는 의료비의 늪에서 빠져나와 지속가능성을 갖추려면 노인에 접어드는 실질 연령을 높이고, 국민들이 의료 이용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노인의학은 이를 위한 필수적 분야이지만 한국 풍토에서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의료계는 진료 과목별로 분절화돼 있고, 저출생 고령화 담론도 주로 인구학·사회복지학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된다. 지금은 방 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있는데 통합적인 접근을 못하고 제각각 부분 부분을 보고 있는 형국이다.”

실용서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실은 노인의학 프로파간다(선전물)가 아니냐고 묻자, 정 교수는 웃으며 그렇다고 인정했다. 1월18일 서울아산병원에서 120분 동안 ‘느리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 노년내과를 포함한 노인의학은 아직 한국에서 생소하다. 

   책을 읽으며 고령자를 진료하는 분야라는 개념을 넘어 몸과 건강에 대해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노인의학을 한다고 하면 65세 이상 환자를 다 보겠다는 거냐며 기존 의료계에서 위협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확하게는 65세라는 연령이 아니라 ‘노쇠’가 있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곳이 노인의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77세이다. 이건 노화과학자들이 평균을 구한 것일 뿐, 어떤 사람은 60대 후반인데 몸의 기능이 떨어지고 병이 많아 노쇠한 모습일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80대가 넘어도 노년내과에서 볼 필요가 없을 수 있다. 노쇠는 노화 정도와 기능 상태, 질병 상태에 따라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개별 질환이 아니라는 뜻에서 ‘노인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근감소증을 앓는 환자가 있다. 현재 의학적 접근법으로는 먼저 약을 찾는데 근감소증은 별다른 약이 없다. 그러면 병원에서는 보통 단백질을 섭취하고 근력운동을 하라고 한다. 그 처방으로는 대부분 좋아지지 않는다. 근감소증 같은 노인증후군은 여러 요인이 맞물려 생긴 악순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근육이 빠지는 이유 중에 우울증이 있다. 우울증이 있으니 밤에 잠을 못 자고, 식사를 못하고, 활동량이 줄어든다. 이런 분들이 일반 성인과에 가서 식욕촉진제나 소화제를 처방받는다. 그러면 더 빨리 나빠진다. 이런 약은 장의 예민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는데 동시에 사람을 더 가라앉게 만든다. 그 결과로 활동량, 식사량이 줄어드니 근육이 또 빠진다.

이렇게 해결되지 못한 노인증후군이 쌓여갈수록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고, 어느 정도가 되면 밥을 지어 먹거나 청소·빨래 등 집안일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면 장기노인요양보험에서 4등급이 나온다. 여기서 더 진행돼 스스로 씻을 수가 없으면 노인장기요양 3등급이 나온다. 돌봄 요구가 생기는 것이다.

 


□ 증상이 생긴 부위나 장기만 들여다봐서는 답이 안 나온다?

 

그렇다. 방금 사례를 노인의학적으로 접근하면 그 증상에 한정된 효과를 가진 약이 아니라 악순환을 초래한 원인들을 하나하나 찾아 들어간다. 우울과 수면을 나아지게 하면 영양이 좋아지고, 활동량이 늘어나면서 다시 사람들을 만나러 절이나 교회에 나가게 되고, 결과적으로 근력 손실을 막아 환자의 컨디션이 좋아진다. 선순환이 생긴다. 안타까운 건 이 같은 문제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일찌감치 이런 접근법이 도입되었는데 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은 1940년대부터 노인의학(geriatrics)이 있었다. 영국 NHS(국영 의료서비스)를 보면, 물론 그 안에 여러 전문 분과가 있지만, 의료체계가 크게 소아과·성인과·노인과로 분류돼 있다. 미국과 캐나다도 1970년대에 노인의학을 도입했다. 우리나라와 노화 속도가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 타이완, 싱가포르도 부지런히 노인의학을 도입해서 성인의 질병과, 장기요양보험을 통해 돌봄이 필요할 정도로 신체기능이 나빠진 어르신들 사이에 있는 시기를 지탱하게 한다.

우리나라는 이 시기를 담당하는 의료서비스가 붕 떠 있다. 이대로면 고령화 시대에 의료비가 무한 증식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 병의 개수가 계속 늘어난다. 현재 분절된 의료체계에서 혈압은 순환기내과, 당뇨는 당뇨과, 실금은 비뇨기과, 관절 통증은 류마티스 내과 이런 식으로 찾아가다 보면 7~8개 끝도 없이 늘어나는데 이 환자의 전체적인 기능은 누구도 보지 않는다. 어르신이 휠체어를 타고 이 과, 저 과를 전전하다 요양시설로 들어가게 되는 거다.

 


□ 한국에는 왜 노인의학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나?

 

현재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는 노인의학이 전문 분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진료비에서 노인의학 수가가 따로 책정이 안 되어 있다. 우리는 진료를 보면 포괄진료를 하기 때문에 환자를 20~30분씩 봐야 한다. 그런데 전문 분야가 아니라 노인의학에 맞게 지정된 수가가 없으니 일반 내과 선생님들이 받는 1만원 초진 진료비를 동일하게 받는다. 수익이 나질 않는다. 나도 따지고 보면 지금 병원에 돈을 벌어주기보다는 손실을 입히고 있다. 그러니 종합병원에서 노인과를 개설하지 않고, 노인의학을 하는 사람들도 갈 자리가 없다.

 


□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데다 다들 젊게 살고 싶어 하니 노인의학이 각광받는 분야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노인의학 보급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쓴 책이 전작 〈지속가능한 나이 듦〉(두리반, 2021)이다. 보고서처럼 써서인지 거의 읽히질 않았다. 이번 책에서는 노인의학적 개념인 내재역량과 4M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노인의학적 사고방식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계가 아니라 국민들을 설득해보자 싶었다.

 


□ 이번 책에서는 아직 주요한 장기 이상이 발생하거나 노쇠하지 않은 대다수의 성인, 특히 30~60세의 사람들을 위한 조언들을 담았다고 밝혔다.

 

‘가속 노화(accelerated aging)’가 철학 또는 임상의학과는 거리가 먼 연구에서 쓰이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지난 10년 동안 사람의 노화를 측정하는 기술에 엄청난 혁신이 생겼다. 현재는 ‘노화시계’라는 과학적인 툴이 나와 있다. 원래 노인의학에서 쓰던 ‘노쇠지수’는 어느 정도 노화가 진행돼 기능저하가 생긴 사람들만 측정이 가능했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기술의 발전으로 생리학적인 여러 파라미터(변수)를 이용해 젊은 사람일지라도 가속 노화 정도와 생물학적 나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서 젊었을 때 어떤 생활습관을 가지고,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인생에서 무엇을 중요시했는지에 따라 노화시계나 생물학적 나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사실 이제는 증거가 너무 많이 쌓였다.

 


□ 제목만 보면 ‘안티에이징(anti-aging)’ 책인가 싶은데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안티에이징, 항노화와 결이 꽤 다르다.

요즘 흔히 언급되는 안티에이징은 피부 미용 같은 거라서 노화과학자 시각에서는 엄밀하게 말해 항노화라고 할 수 없다. 노화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안티에이징은 뭐냐면, 노쇠가 진행되는 분들에게는 노화세포가 있는데 그걸 터트려버릴 수 있는 치료이다. 쥐를 대상으로 ABT263 같은 백혈병 약을 실험해보면 생물학적 나이가 줄어든다. 역노화가 일어난다.

(역노화 말고) 가속 노화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저속 노화’라는 개념이 있는데 실제 노화 속도를 늦추는 것으로 나타나는 물질들이 있다. 가장 유망한 물질이 라파마이신이다. 해외에는 이런 약재의 조합을 사람들에게 쓰는 클리닉이 있고, 지금은 막혀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약들을 비보험으로 처방하는 클리닉들이 몇 년 안에 생길 거라고 본다. 주의해서 봐야 하는데 이건 노인의학과 구별되는 ‘노화의학’이라는 다른 분야이다.

 


□ ‘내재역량’이 책의 핵심 키워드이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재역량은 사람의 신체기능, 인지기능, 감각기계, 활력, 사회자원, 보건의료적 환경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개념이다. 삶의 질을 지키면서 노년의 삶을 독립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게 필요하다. 어찌 보면 좋은 삶을 구성하는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의학적 문제도 당연히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의사 선생님들이 자기 과목의 진단명 딱 하나만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건강식품, 재산, 이런 식으로 하나의 포인트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내재역량을 키우려면 투자 포트폴리오처럼 총체적으로 삶을 가꾸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에 나오는 네 개의 기둥 ‘4M’이다.



□ 이동성·마음 건강·건강과 질병·나에게 중요한 것. 이 네 가지를 합쳐 4M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직접 만든 건가?

아니다. 4M은 미국노인병학회 등에서 발표한 노인의학적인 핵심 프레임워크(뼈대)로 노인의학 비전공자도 내재역량 강화를 시도해볼 수 있도록 고안된 매뉴얼이다. 굳이 노쇠한 어르신들만이 아니라 악순환에 빠져 있는 환자가 문제의 원인을 찾아들어가 선순환을 만드는 데에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그림 2〉 참조).

 


□ 첫 번째 기둥이 ‘이동성’이다. 책에서 “현대인의 이동성 내재역량은 원시인류에 비해 큰 폭으로 낮아졌다”라고 지적한다.

인간의 골격계는 100만 년 이상 이동과 생산수단 역할을 했다. 자동차, 엘리베이터 등 기계가 발전하면서 근골격계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현대인들은 근골격계의 불편과 질병, 노년기 신체기능 저하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동성이 중요한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내재역량이 어느 정도 이하로 떨어지면 기저귀를 차야 한다. 이 단계가 되면 많은 어르신들이 요양시설에 들어간다. 많은 분들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이동성을 높이는 방향으로는 고민해본 적이 없다. 보통 무슨 운동을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이동성 내재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처럼 여러 요소를 쌓아가야 한다(〈그림 3〉 참조).


□ 그럼 어떤 식으로 운동을 해야 하나?

일단은 평소 신체 활동과 움직임을 최대한 통합해야 한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더 많이 움직이도록 설계돼 있다. 하루 20㎞를 걷고 뛰는 정도는 끄떡없다. 그다음에 피라미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선 충분한 영양과 수면이 필요하고, 관절 가동 범위를 확보해야 하고, 코어나 둔근을 강화하는 운동을 해줘야 하고, 그다음에 개별적인 근력운동, 그다음에 유산소 운동과 요가 같은 밸런스 운동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 것이 다 된 상태에서 더 하자면 스포츠를 추가할 수 있다.

 


□ 지금 말한 요소를 두루 갖춘 운동은 없나?

그런 종목은 없다. 그나마 광범위한 운동으로, 유산소 운동과 관절 가동 범위를 모두 커버하는 수영을 들 수 있는데 그래도 한 가지 운동만 하면 안 된다. 한 가지 운동을 몸에 밴 습관으로 반복하다 보면 안 좋은 관절 자세가 점점 고착된다.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얼마간 비용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동성 내재역량이 줄어들면 말년에 요양시설에서 보내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근육 1㎏ 감소는 적어도 400만원의 경제적 손실에 해당한다. 병에 걸리면 최첨단 치료를 받고자 수천만 원을 쏟아부으면서, 기대여명과 독립적인 삶의 기간을 늘리는 운동과 생활습관에 투자하지 않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책에서 정희원 교수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민체력100 체력인증센터’를 방문해 운동 관련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한다.)

 


□ 두 번째 기둥이 ‘마음 건강’이다. 정신과 심리는 어떻게 가속 노화와 연결이 되나?

‘마음 챙김’이 되지 못한 ‘마음 놓침’ 상태는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계속 내리면서 무언가를 지르려는 상태와 비슷하다. 뇌의 전두엽 기능은 떨어지고 도파민을 쫓아 쉽게 자극에 빠진다. 집중력과 인지기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건강에 좋지 못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속 노화 라이프스타일을 촉발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이비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뇌과학 연구가 진전되면서 중독이나 보상 시스템 관련해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즐거움의 적응 현상’ 때문에 중독과 보상으로 얻는 자극은 곧 줄어들고, 더 큰 자극이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재산이 두 배로 늘어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품을 사도, 술을 마셔도, 합성 마약을 해도 마찬가지다. 이는 또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높여서 몸에 만성염증을 불러오고 가속 노화로 이어진다.


□ 세 번째 기둥이 ‘건강과 질병’이다. 

   드디어 메디컬한 얘기가 나오나 했는데 주요 내용은 식습관, 특히 체형과 영양분 섭취이다.

이번 책은 노쇠가 진행된 분들이 아니라 예방하는 관점에서 쓴 책이라 의료적인 내용은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는 정말로 중요하다. 가속 노화를 만든다고 알려진 몇 가지 키 플레이어가 있다. 정제 곡물과 단순당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둘은 혈당을 급격히 올려 인슐린(혈당을 낮추는 호르몬) 분비를 유발하고, 몸에 들어온 에너지가 근육이 아니라 지방과 간에 쌓이게 만드는 주범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잡곡밥 등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해 흡수 속도를 완만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많은 분들이 ‘저탄고지’ 같은 식단을 굳이 찾고 있다. 혈당 변동성이 크지 않은 식사가 좋은 식사라는 것을 기억해두면 된다. 또 여기 그래프(〈그림 4〉 참조)에 나오는 것처럼 근육을 키우면 근육이 흡수하는 혈당이 증가해 혈당 변동성을 완만하게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이동성 내재역량이 낮고 근육이 없는 사람은 흡수할 수 있는 혈당도 적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만 불룩한 ET 체형이 된다. 이처럼 내재역량을 구성하는 4M은 다 연결돼 있다.



□ “당 떨어진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나. 나도 기사를 마감하다 보면 당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자꾸 초콜릿 같은 

    단당류에 손이 간다.

그건 사실 당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와서 몸이 도파민을 찾는 것이다. 당분은 보상회로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을 빠르게 분비시키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그걸 섭취하면 곧 인슐린이 나오고 혈당이 뚝 떨어지면서 다시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간다. 그러면 또 당분을 찾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 현대인의 생활습관, 태도, 가치관이 내재역량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고 가속 노화를 불러온다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그런데 지금처럼 인간이 건강하게 오래 살았던 시대도 없다.

지금 노년기에 있는 분들은 젊어서 가속 노화의 압력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현대 의료시스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58년생 개띠를 기준해 앞뒤로 10년에 해당하는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건강했던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지금 20~30대는 어려서부터 초가공, 정제 곡물을 필두로 하는 식품 산업과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플랫폼 비즈니스에 흠뻑 노출돼 살면서 노화를 앞당기고 있다.

미국, 유럽 쪽 연구를 보면 1990년대 이후에 노인들의 노쇠 정도가 악화되고 있다. 한마디로 1990년대 노인보다 2020년 같은 연령대 노인의 건강 상태가 더 나쁘다. 우리나라도 그걸 따라갈 거라고 생각한다. 물증이 있다면 ‘국민건강영향조사’에서 한국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 노쇠 정도가 개선되던 경향이 2014년에 멈췄다. 또 2008년과 비교해 2020년 한국 성인 남성의 비만 유병률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대로 간다면 2020년대 30~40대는 부모뻘 베이비부머보다 기대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다.

 


□ 책을 다 읽고 나면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 한 명이 떠오른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술·담배도 많이 하고, 인생의 온갖 쾌락을 즐기며 살다가 건강하게 여생을 마친 어르신들도 있다.

사람들은 원래 내러티브에 취약하다. 데이터를 제시해도 반례가 하나 존재하면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 나온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가속 노화의 삶은 본인만 고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식 세대에 과도한 돌봄의 짐을 지우고 사회경제적 압력을 가중시킨다. 

 

모든 사람이 이 책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한두 분이라도 동참해준다면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한 설움이 가면 다음 봄꽃들이 피어나

 

 

< 한겨레, 김병익 | 문학평론가, 2023-02-16  >

 

 


“살아가는 데 잠이 꼭 필요하듯이 죽음도 생명에게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육체의 소멸을 넘어 생명의 본원을 가리키는 손짓을 보았고 “누군가는 죽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지혜에서 ‘생명의 법칙’을 읽었다.



지난해,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 유달리 많이 작고하셨고 그래서 그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간곡했다. 그럼에도 그 한풀이는 밝은 새해의 첫 글로 미루었다. 먼저 가신 분들이 나와 한 또래 나이들이어서 바로 나 자신을 미리 조문하는 듯 묵지근한 느낌에 눌리기도 했지만, 한 해가 지고 있다는 우수에 젖어,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말로나 글로나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분들을 다시 뵐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득해 있었다. 그처럼 허망해하는 나를 달래준 것이 정우현의 <생명을 묻다>였다.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이라고 표지에서 밝힌 것처럼 생리학, 유전학에서 형이상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관련된 뭇 물음들에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그의 책에서 나는 내 앞의 어두운 함정을 다시 보고 새로 생각할 수 있었다.

 


가령 “살아가는 데 잠이 꼭 필요하듯이 죽음도 생명에게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육체의 소멸을 넘어 생명의 본원을 가리키는 손짓을 보았고 “누군가는 죽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지혜에서 ‘생명의 법칙’을 읽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라며 모든 생명이 죽음의 잉태를 통해 태어나는 순환-지속의 과정임을, 종교를 넘은 과학에서 해탈로 다가가는 자연의 도리로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서의 변화 속에서 내가 지난해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회상의 무거움을 새해 밝은 봄기운의 환하고 싱싱한 쪽으로 견뎌, 바꿀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사상계>에서 진지한 서양 지성으로 익힌 글들로 나를 깨우쳐준 분이 불문학자 정명환 선생님이었고 그분의 첫 비평집을 내가 일하던 출판사에서 간행할 수 있었기에 자주 뵙지 못해도 친근한 스승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우리 지식사회에 서구 인문학을 자양으로 들여오면서 후진적인 우리 지성계를 세련시켜주셨다. 

 

서광선 선생님은 우리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지성과 화해를 위한 신학으로 발전시킨 신학자였다. 6·25 때 목사였던 아버지가 참혹하게 학살당한 모습을 보고 복수를 작심했지만 하우스보이에서 미국 유학생이 되어 신학자로 귀국한 뒤 민중신학으로 그 지향을 개척하셨다. 같은 교외 도시에 살면서도 메일로만 소통한 내게 서 목사님은 2년 전의 성탄에 “환호와 소음의 축제가 아니고 조용히 문 닫고 식구들만 모인 가난한 식탁 위의 촛불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이어령 선생님은 분명 우리 문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분 중 한 분이어서 그분의 때 이른 작별은 더욱 안타깝다. 대학생 때 ‘우상의 파괴’로 기성 문단을 요란하게 흔든 선생은 서울 올림픽에서 소년의 굴렁쇠로 개막한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했고 일본인을 ‘축소지향형’ 인간으로 분석해 왜인을 놀라게 한 탁월한 문화비평가였다. 선생님을 처음 뵙기는 1966년 남정현의 <분지> 사건 재판에 피고 측 증인으로 나왔을 때였다. 문학작품이 북에 이용되게 했다는 검사의 비난에, “장미는 자신을 위해 뿌리를 뻗는 것이고 그걸 파이프로 만든 것은 인간”이란 촌철살인의 반론에 말이 막힌 검사가 분별을 잃고 선생에게 “당신 군대 갔다 왔어?” 하고 엉뚱한 질문으로 분기를 터트리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남정현 작가의 변호인이 한승헌 선생님이었다. 당시 소장 변호사였지만 그분부터 황인철 홍성우 등의 ‘인권변호사’란 이름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시인으로서의 그의 문재도 유명했지만 사석에서 그분과 자리를 함께하면 즉흥적으로 만드는 그의 재치와 유머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치적 불의에 대한 그의 단호함은 의연했다.


유머는 역사학자 김동길 선생님에게도 방창했다.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님의 동생인 김 박사는 시국에 대한 야유 섞인 비판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분이다. “이게 뭡니까”란 말로 유신 시절의 억압당한 세태를 야유하면서 그가 전공한 미국사에서처럼 우리 사회도 정치적 자유를 향유하고 싶은 소망이 막힘 없이 시원한 목소리의 강연에 담겨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부터 한 세대 동안 유신 정치 억압에 가장 강렬하게 저항한 시인 김지하도 청년 시절부터 여러 고비를 잘 넘겨왔음에도 끝내 지난해 이승을 떠났다. 유신을 앞둔 박정희 정권의 억압 체제에 담시 <오적>으로 폭탄을 던진 김지하의 젊은 시절은 그 문학적 반항 때문에 군부 체제의 가장 혹독한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비판과 저항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가장 뜨거운 증례였고 문학과 문학인이 독재자의 억압 아래 어떻게 고통받아야 했고 또 반항해야 하는지 보기를 보여준다. 그런 그도 생명사상에 젖은 후기의 조용한 생애에 다가온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빙모 박경리 선생님 작고하신 빈소에서 조용히 침묵으로만 추모의 자리를 지키던 자그마한 여성을 눈여겨보았다. 나중에 기회가 닿아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던 그분은 파리에서 활동하는 화가 방혜자 선생님이었다. 빛, 무한, 우주, 근원 등 인간의 영원한 아프리오리를 주제로 추상화를 그리시던 방 선생님과의 메일이 문득 끊기더니 몇 달 후 그의 작고 소식이 들어왔다. 조용히 말을 아끼며 인간의 원초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형상화하던 방 선생님이 선물하신 한 점 작품이 내 설움을 다듬는다. ‘三百六十日三百六十花開’(삼백육십일삼백육십화개)의 글씨가 쓰인 김지하의 매화 그림과 이 그림은 함께 그 두 화가와 이별한 것이다. 

 

여기에 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에게 더불어 추모의 인사를 바친다. 내가 출간할 수 있었던 그의 뛰어난 난장이 연작들은 우리 근대화로의 역경을 치르던 시대에 가장 아름다우면서 슬픈 벽화가 되어 그 시절의 아픈 정서를 따듯한 설움으로 되새겨준다.


이렇게, 80대 정신들이 이해에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분들은 전쟁과 변란, 갈등과 혼란이 난만했던 한 세대 동안 그 암울한 미래를 어떻게 열어야 할지, 우리 지적 정서를 어떤 모습으로 다듬어야 할지 고민해온 지성들이었다. 

 

이제 그분들이 비운 자리에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정신들이 들어설 것이다. <생명을 묻다>가 깨우쳐준 대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비한다. 이 빈자리에 다시 새로운 생명들이 돋고 자랄 것이다. 한 설움이 가면 다음 봄꽃들이 새로 피어나 세상을 싱싱하게 만들듯. 그 환생을 밝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렇게 가고, 가면 또 오리니, 이 거듭되는 세상의 끝없는 이어짐이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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