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이 늙지 않는다,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꼽은 세가지

 

< 조선일보 이가영 기자,  2022.07.15 >

 

 


1920년생인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윤동주 시인과 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직접 들었다. ‘살아있는 역사책’이라고 불릴 만하다. 

 

여전히 책을 쓰고, 강연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김 교수는 “요새는 정신적으로 젊은 내가 신체적으로 늙은 나를 업고 다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신체는 누구나 다 똑같이 늙게 돼 있다”며 “정신이 늙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이어 “(정신을) 어떻게 키우느냐가 문제인데, 자기가 안 키우면 할 수 없다”고 했다.

김 교수는 정서적으로 늙지 않는 사람에 관해 

 

‘계속해서 공부하는 사람’ 

‘독서하는 사람’ 

‘사회적 관심을 두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행복하면 된다며 사회적 관심을 잃어버리면 내 정신력이 약화된다”고 했다. 또 “젊었을 때 문학이나 음악, 예술적인 정서를 풍부하게 가졌던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늙지 않는다”며 “감정적으로 메마르면 늙어버린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인생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했다. 

 

30살까지는 내가 나를 키워가는 단계, 

65세쯤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며 

90세까지는 사회를 위해 일하는 단계라고 했다.

김 교수는 “우리 시대에는 두 단계로 끝났지만 지금 세대의 여러분은 3단계 인생을 가야 한다”며 정년퇴직 이후에는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하는 시기라고 했다. 

 

그는 “연세대학교 정년퇴직하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난 늙었다’ 하고 그냥 있었으면 (나는) 없어질 뻔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50~60살쯤 되면 이런 직업을 갖고, 이런 사상을 갖고 살 것이다 하는 자화상이 확고해야 한다”며 “젊은이들의 희망은 만들어가는 거지, 까놓고 주어지는 건 아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제는 자신을 위한 꿈은 없어졌지만 사회를 위한 꿈이 강해졌다고 했다. 그는 “안창호 선생 무덤에 가서 ‘통일이 됐어’ 그걸 얘기하고 싶다”며 “오기는 온다. 내가 한 200살쯤 되면 올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본받을 어른이 없다’는 아이들
젊은 세대가 배워야할 지식, 더 이상 부모 경험에 있지 않아
세대 간 이해 높이려면 어른이 먼저 마음 열고 다가가야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22.06.09 >


트로트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했던 젊은 지인이 “활동하기 참 힘들다”고 털어놨다. 고령층 회원의 비율이 높은 그곳 팬카페에서 해당 가수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글을 올렸더니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이 있으면 신곡 스트리밍(음원 실시간 전송)이나 한번 더 하라”는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까지 ‘꼰대질’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거 할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는 식의 말투는 타인의 일상에 개입해 제어하려는 오만한 자세로, 이른바 ‘꼰대’들의 대표적인 발화(發話) 방식이다.

지역과 이념 갈등에 이어 성(性) 갈등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세대 갈등일지도 모른다. 이건 가정이나 직장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균열이 남을 수 있는 갈등이다. 

 

최근 뉴스1·타파크로스 조사에선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서 산출된 올해 1분기 한국 사회 세대 갈등 지수가 2018년에 비해 5.2%p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처럼 가족을 집 안에 모이게 했을 코로나19 사태가 오히려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든 셈이다.

그저 같은 나라에서 생활할 뿐, 이제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는 사용 어휘는 물론 사고 방식마저 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디지털 용어가 출현하는 지금, 젊은 세대가 습득해야 할 지식은 더 이상 어른들의 경험이나 경륜에 있지 않다. ‘후진국 시절 조부모와 개도국 시절 부모가 선진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키운다’는 말도 나온다. 스마트폰 작동법이나 신어의 뜻을 물어보는 쪽은 대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불하문(無不下問)’의 시대가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 든 세대에게 남은 권위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모범’의 제시다. 그것은 마을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서슬퍼런 꾸지람과 적확한 고전 인용으로 구성원을 반성케 하고 중심을 잡아주던 대쪽 같은 백발 어르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 그런 ‘어르신’이 있는가? 지하철을 타 보면, 다른 빈자리를 놔두고 임산부석에 버티고 앉거나, 이어폰 없이 TV 앱을 크게 틀어 놓거나, 우렁찬 목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들은 청년보다 어르신의 비중이 훨씬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널드 토인비는 “세대 간 오해를 줄이려면 기성세대가 먼저 스스로 책망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봐서는 도무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반면 ‘요즘 애들’ ‘MZ세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평가절하되기 일쑤인 청년들은 어떤가. 그들은 지독한 개인주의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부당한 관습에 저항하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기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공정(公正)에 어긋나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낭비가 심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글로벌한 문화 체험에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보릿고개 시절에나 어울릴 만한 ‘그게 밥 먹여 주느냐’는 타박이 이들에게 먹힐 리 없다.

코언 형제의 영화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예이츠의 시구에서 따온 것으로, 노인의 경험과 지혜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세상이 이미 변했는데도 새로운 세대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광화문 집회에 청년층이 좀처럼 유입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향후 젊은 세대에 의해 실현되기 어렵고, 끝내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노인이 원하는 나라는 없다’고.

생(生)과 사(死)-----<법정 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 中 에서


향봉 노스님이 지난 5월31일 입적 하셨다.
어제 오후 염을 하여 입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새삼스레 헤아리게 되었다.

호흡이 멎고 혼이 나가버린 육신이란 한낱 나무토막만도
못한다는 걸 거듭거듭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영결식을 치르고 다비(화장)를 한 뒤 습골(拾骨)하여
그 뼈마져 가루를 만들어 흩어버리고 나면,

한 생애의 무게가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또 텅빈 가슴으로 한 아름 안게 될 것이다.

사람은 홀로 태어났다가 홀로 죽는다.
다른 일이라면 남에게 대행시킬 수도 있지만,

나고 죽는 일만은 그럴 수가 없다.
오로지 혼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저마다 자기 몫의 삶에
그만큼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의 빛갈과 무게를 혼자서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승들은 생과사를 따로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살 때에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체를 드러내고,
죽을 때에도 또한 죽음에 철저하여
자기 존재를 통째로 드러낸다.

그러니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이고,
죽는 일이 곧 사는 일이다.

영원한 회귀(回歸)의 눈으로 보면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죽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
현재의 우리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새 길을 찾아 떠나는 길목이라고.

김형석의 100년 산책
90세부터는 '아름다운 인생' 살고 싶었다, 외모보다 중요한 것

 

<중앙일보 2022.04.29,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내가 90까지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욕심을 갖지도 않았다. 두 친구 안병욱·김태길 교수와 같이 열심히 일하자고 뜻을 모았다. 셋이 다 90까지 일했다. 성공한 셈이다. 90을 넘기면서는 나 혼자가 되었다. 힘들고 고독했다. 80대 초반에는 아내를 먼저 보냈는데, 친구들까지 떠났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 90대 중반까지는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100세까지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철학계의 선배 동료 중에는 97, 98세가 최고령이었고, 연세대 교수 중에도 100세를 넘긴 이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새 출발을 해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결과가 ‘아름다운 늙은이’로 마무리하자는 소원이었다. 삶 자체와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우선 외모부터 미화시켜야 한다. 몸단장이다. 70~80대의 후배 교수들이 “나야 늙었는데” 하며 허름하거나 초라한 차림으로 외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옷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의상이 아닌 품격 있고 조화롭게 입어야 한다. 쉬운 일도 아니지만 관심에서 멀어지면 “나 편하면 그뿐이지” 하는 습관이 더 앞선다. 그래서 모임에 나갈 때나 강연장에 갈 때는 신사다운 품격을 갖추기로 했다.

아흔 넘기며 친구들도 다 떠나가
“아름다운 늙은이 됐으면…” 소원
외모부터 신경, 옷차림 품격있게
노욕 줄이고 지혜 키우려고 애써

지금도 생각나는 선배 둘의 향기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유산

 

 

아침 세수 후에 꼭 화장품 사용

뒤따르는 과제는 얼굴과 자세의 미화다. 내 얼굴은 절반 이상이 대머리다. 중학생 때부터 고민이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보아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가발은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아름다움이 못 된다. 머리 색깔이라도 보기 흉한 백발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100세가 넘으면서 좋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마가 넓어지기는 하면서도 백발이 더 생기지는 않았다. 거울로 살펴보았다. 뒤 머리카락은 더 빠지지 않았고 약간씩 검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회춘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 밖으로 말은 못하지만 더 빠지지도 말고 희어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얼굴에서는 주름살이 문제다. 아침마다 세수한 뒤에는 90대 후반부터 사용하는 두 가지 화장품을 쓴다. 이마와 두 뺨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입 언저리 주변에는 주름살이 깊어진다. 못 본체하고 주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늙음을 위해서는 더 큰 과제가 있다. 아름다운 감정과 정서적 건강이다. 생각과 감정을 미화시켜야 한다. 옷이나 얼굴보다 몇 배나 힘든 정신적 작업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욕이다. 나이 들수록 욕심은 줄이고 지혜가 앞서야 한다. 그런데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자제력이 약해지면 젊었을 때 채워보지 못한 노욕에 빠지기 쉽다. 욕심쟁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한다. 거기에 치매까지 겹치게 되면 보기 싫은 늙은이가 된다. 손주와 싸우는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내 주변에는 그런 늙은이들은 없다. 그런데 돈과 명예 때문에 노욕을 부리는 실수를 범할 가능성은 잠재돼 있다. 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거나 장년기에 갖지 못했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늙음을 위해서는 욕심, 다시 말하면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지혜로운 늙은이는 그 욕망의 대상을 후배들에게 돌린다. 후배와 제자들을 칭찬해 주며 키워주는 선배가 되어야 한다.

 

나 같은 나이가 되면 자제력이 약해진다. 좋지 못한 옛날의 습관이 튀어나온다. 칭찬보다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받고 싶은 잠재력 때문에 혼자서 대화를 독차지하기도 한다. 내 주장이 옳다는 자세다. 수준 낮은 정치인과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도 실수를 한다. 대화의 분위기를 해치며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존경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침묵과 겸손이 미덕이라는 예절을 지키지도 못한다.

 


심한 고통 중에도 미소 간직

지금 나는 존경스러운 두 선배를 기억에 떠올린다. 철학과 선배인 정석해 선생이다. 미국에 갔다가 97세 일 때 찾아뵈었다. 20년이나 연하인 나를 귀빈과 같이 대해 주었다. 그 말씀과 향기가 너도 늙으면 나같이 품위 있는 인격을 갖추어 달라는 자세였다. 나를 그렇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 한 사람은 나와 나이가 비슷한 황 목사님이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예전과 다름없는 미소와 사랑이 풍기는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 장로의 얘기를 듣고 오신 것 같습니다. 제 건강은 괜찮습니다. 공연히 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회복되면 또 교회에서 뵈어야지요…”라면서 여전히 온화하고 밝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20여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교우들에게 어렵고 힘들다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정석해 교수는 4·19 교수 데모를 주도한 애국자였고, 황 목사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생애를 보낸 분이다. 두 분에게는 애국심과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인격과 삶 자체의 향기와 모습을 끝까지 간직하였다. 아름다운 노년기는 역시 수양과 인격, 그리고 어떻게 살았는가에 있다. 보통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풍성한 마음의 열매였다. 나는 과연 고귀한 인생의 목표를 갖추었는가를 묻게 된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선한 인생의 결실이다. 이웃과 사회를 얼마나 사랑했고 무엇으로 보답했는가 는 생애의 유산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조용헌 살롱] [1337] 넥슨 김정주의 죽음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조선일보 2022.03.07 >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나, 도를 통한다거나, 근심·걱정을 벗어나서 달관하는 것이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야말로 궁극적 관심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다. 하느님을 만났다고 믿는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불행하게 일찍 죽으면 세상 사람들은 뭔가 충격을 받는다.

신흥 재벌 ‘빅5′ 가운데 하나인 넥슨 김정주(54)의 우울증 죽음은 인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쟁터에서는 죽기 싫어도 총 맞고 죽지만 평화시에 수조원을 가졌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에도 급수가 있다. 가장 높은 급수는 고종명(考終命)이다. ‘고종명’은 오복(五福) 중 하나에 속한다. 죽을 때 후회가 없이 ‘잘 놀다 간다!’면서 큰 고통 없이 죽는 게 고종명이다. 도가 높은 선사(禪師)들이 앉은 상태로 죽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은 고종명의 대표적 사례다. 인생을 잘 산 사람은 이렇게 죽는 것이다. 재산을 수조원 가진 성공한 인생이 왜 고종명을 못하고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는가?

80대 후반에 죽은 이어령은 죽기 2~3년 전부터 대비했다. ‘나 병 걸려서 조금 있으면 저승에 간다. 물어볼 것 있으면 미리 다 물어봐라’ 하고 갔다. 이만하면 고종명이다. 이어령은 살아생전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너무 자기 말만 길게 하는 습관이 있어서 상대방은 끼어들기 어렵게 만드는 벽(癖)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 좀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죽을 때는 격조 있게 죽었다. 고종명이 장광설의 벽을 상쇄했다고나 할까.

김정주와 같은 재벌의 팔자는 재다신약(財多身弱)이 되기 쉽다. 수조원을 버는 과정에서 이미 타고난 에너지를 거의 소진하는 경우가 많다. 수십 번 크고 작은 위기를 통과하면서 이미 진을 뺀 상태인 것이다. 돈 많다고 소문나면 많은 사기꾼이 파리 떼처럼 달려든다. 그리고 주변에 친구가 없어진다. 이해관계의 인간들로만 둘러싸인다. 속을 터놓을 친구가 없이 고독한 상태가 되면 폐가 울결해서 폐암에 걸린다. 

 

더구나 한국 사회는 어떤 분야든지 7할 능선을 넘어가면 저격수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7할을 넘는 순간 스나이퍼의 총알들이 날아온다. 파리 떼와 총알에 질려버리면 우울증이 온다. 

 

베풀어 놓은 덕이 있어야 방탄조끼를 입는다. 돈이 없어도 시달리고 수조원을 가져도 죽어야 하는 게 인생이다.

틱 낫한 “나의 유골을 걷기 명상의 길에 뿌려달라.”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2.02.10 >

 


베트남 사람에게 “어떤 나라가 가장 두렵나?”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답이 똑같다. 미국이 아니다. 중국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긴 역사 속에서 중국과 숱한 전쟁을 치렀다. 『삼국지』에서 유비 사후에 제갈 공명이 정벌했다고 나오는 남만(南蠻, 남쪽 오랑캐란 뜻)이 지금의 베트남 땅이다. ‘월남(越南)’이란 명칭도 고대 중국에 있던 월(越)나라의 남쪽이란 뜻이다. ‘베트남’은 ‘월남’의 현지어 발음이다. 기원전 4세기에 월나라가 멸망하자, 남쪽으로 이주한 월나라 부족의 일부가 베트남 사람이 됐다. 기원전 111년에 한(漢)무제에게정복당한 뒤 무려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인데도 문화가 독특하다. 저변에는 북방 유교 문화가 강하게 깔려 있고, 동남아 국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유불선(儒佛仙)이 공존한다. 불교 역시 해양이 아니라 대륙에서 들어온 중국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가 함께 숨을 쉰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선(禪)불교의 전통은 베트남에도 있다. 6세기 후반에 남인도의 바라문 출신인 비니타루치가 처음으로 베트남에 선(禪)을 전했다. 그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먼저 건너갔다. 중국 선불교를 처음 연 초조(初祖) 달마 대사의 법맥을 이은 손자뻘 제자 삼조(三祖) 승찬 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비티나루치는 “그대는 속히 남쪽으로 내려가 제자를 가르치라”는 스승 승찬의 가르침을 따라 광저우를 거쳐 베트남으로 내려갔다.

지난달 21일 입적한 세계적인 명상 수도승 틱 낫한 스님은 베트남 출신이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불교 승려다. 지구촌의 현대인에게 일상 속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웠던 틱 낫한 스님은 유독 명상을 강조했다. 그가 베트남 선불교의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북아시아에 내려오는 선불교의 역사적 전통을 공유하고, 이를 프랑스 플럼 빌리지에서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틱 낫한 스님이 1982년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세운 명상공동체의 이름은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다. 우리말로 하면 ‘자두 마을’이다. 베트남에는 산간 지역에 피는 자두꽃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틱 낫한 스님은 자신의 저서에서 “베트남에는 노란 꽃이 피는 자두나무가 있다. 수명이 무척 길다. 오래되면 나무가 뒤틀린다. 내가 그 나무처럼 느껴진다”며 자두꽃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틱 낫한은 명상을 통해 모든 사람이 마음의 꽃을 활짝 피우길 소망한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플럼 빌리지’는 프랑스 떼제에 있는 그리스도교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떼제 공동체’와 함께 현대인들에게는 ‘영성의 오아시스’로 통한다.

틱 낫한 스님은 자신의 사후(死後)를 미리 당부한 적도 있다. 일종의 유언이다. “언젠가 내가 죽는다면 나를 위해 무덤이나 탑을 짓지 마라. 나를 화장해달라. 내 유골을 전 세계의 플럼 빌리지 수도원으로 가져와서 당신의 걷기 명상 길에 흩뿌려달라. 그렇게 하면 내가 매일 당신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할 수 있다.”


그가 걸었던 수도자의 삶처럼 그의 유언도 맑디맑다. 자신을 화장한 유골을 걷기 명상의 길에 뿌려달라는 요청에서 틱 낫한의 깊은 지향이 읽힌다. 도대체 걷기 명상에 무엇이 숨어 있기에, 자신의 유해를 그 길에 뿌려달라고 말했을까. 틱 낫한이 생각한 걷기란 대체 무엇이고, 명상이란 과연 어떤 걸까.

틱 낫한은 먼저 걷기를 이렇게 이해하라고 했다. “걸음을 걷는 것은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미는 단순한 동작이다. 그런데 그게 귀찮거나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시간을 줄인답시고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를 몰고 간다.” 우리의 마음이 급해서다. 틱 낫한은 오히려 “걷기를 통해 편안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바쁜 까닭에 그걸 놓친다고 했다.

그건 비단 걷기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딛는 걸음걸이도 마찬가지다. 바쁜 마음과 바쁜 걸음 탓에 우리는 삶의 순간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우리에게 틱 낫한은 “우리가 행복할 이유는 수없이 많다”고 말했다. “그것들로 지구별은 꽉 차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심지어 틱 낫한 스님은 우리에게 “왜 무덤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는가?”라고 되물었다. 우리의 마지막 도착지는 무덤인데, 왜 그리로 가는 길을 서두르며 사느냐고 반문한다. 육신의 종착지는 무덤이다. 삶은 때가 되면 소멸하게 마련이다. 그럼 어떡해야 서두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을 틱 낫한은 이렇게 내놓았다. “지금 이 순간에 숨 쉬고 있는 삶을 향해 걸음을 옮겨라.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지금 이 순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대체 무슨 뜻일까. 틱 낫한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한다. 계획과 망상에 사로잡혀 마음이 몸을 떠나 있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으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나의 몸은 지금 이곳에 있는데, 나의 마음은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곳에 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틱 낫한은 몸도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할 곳, ‘지금 여기’를 강조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함께 있으라고 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틱 낫한은 “너는 이미 기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에 우리의 존재를 빗댔다. “은하수는 ‘나는 은하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은하수로 있다. 현실에서는 삶 자체가 경이로운 현실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반영하는 맑은 눈으로 이렇게 현존하는 우리가 바로 놀라운 현실이다.”



틱 낫한 스님은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화장한 나의 유골을 걷기 명상의 길에 뿌려달라”는 그의 요청에는 초대장이 담겨 있다. 과거와 미래를 향해서만 흐르던 우리의 마음이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 흐르게끔, 그걸 통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경이로운 우리 각자의 삶에 눈을 떠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맑은 눈을 가져보라고 보내는 팃 낫한의 초대장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두 마리 토끼 택한 틱 낫한


틱 낫한은 192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고도(古都)인 후에의 뜨 히우 사원에서 출가했다. 젊은 틱 낫한은 사이공의 대학에서 불교학이 아닌 일반 학문을 전공했다. 베트남에서 자전거를 탄 최초 6명의 승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만큼 세상과 소통하고,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절집에서는 두 의견이 충돌했다. 승려의 본분인 참선 수행과 세상을 향한 사회참여, 둘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거셌다. 그때 틱 낫한은 두 가지를 모두 선택했다. 그렇게 개인의 내면적 평화와 세상의 사회적 평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좇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틱 낫한에게는 그게 서로 다른 토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국에서 추방된 틱 낫한은 39년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추천으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아 수상은 불발됐다. 82년 프랑스에 플럼 빌리지를 세워 현대인에게 명상을 전했다. 2005년이 돼서야 베트남으로 돌아간 틱 낫한은 지난달 21일 후에의 불교 사원에서 입적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다음생에 다시 만나”

 

한겨레신문 휴심정 2021-09-03 조현 기자  



‘죽음 강의’ 3부작을 8년에 걸쳐 완간한 한국죽음학회장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준식(65)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카르마 강의>(김영사 펴냄)를 냈다. 2014년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를 펴낸 것을 시작으로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에 이은 세번째 죽음 시리즈다.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를 지낸 최 교수는 원래 한국인과 한국 문화 특성을 연구하는 한국학 권위자다. 그런 그가 죽음과 내세에 꽂혔다. 2005년엔 한국죽음학회를 국내 처음으로 발족시켰다. 그는 인간의식연구센터를 세워 인간의 죽음과 무의식, 초의식, 전생, 최면 같은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간 한국죽음학회는 많은 ‘죽음 세미나’를 열고, ‘웰다잉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죽음학은 삶을 잘 마무리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생의 숙제를 잘 풀고,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게 최 교수의 생각이다. 최 교수는 주요 종교들의 사후관을 열린 자세로 탐구했지만, 그의 ‘강의’의 배경은 종교가 아니다. 그는 철저히 근사체험자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다. 심정지 등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서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간 뒤 사후세계를 본 근사체험자들에 대한 연구야말로 막연했던 내세를 드러내준, 근현대 의과학의 선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 교수를 지난달 25일 서울 경복궁 옆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카르마란 무엇인가.


“카르마 자체는 업으로 번역되는데 원인을 말한다. 전통 인도종교에 의하면, 생전에 몸과 말과 생각으로 행하는 것들이 모두 씨앗의 형태로 저장이 되어 이번 생이나 다음생의 과보로 나올수 있다는 인과응보 이론이다.”


-만약 전생에 죄를 지었다면 그 생에 벌을 받아야지, 딴 몸이 벌을 받는다는게 말이 되나.


“몸은 달라도 밑에 흐르는 의식은 같다. 주의할 것은 모든 것을 전생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게 많다.”


-전생이 있다면, 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자연의 섭리이자 신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전생엔 어머니였던 이가 현생엔 부인인데,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어머니로 대할지 부인으로 대할지 관계가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번 생은 전생의 문제를 가지고 와 풀어야하는 숙제가 있다. 전생의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는 이번생엔 이번 생의 숙제를 하고, 전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전생의 기억대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전생은 어디에 기록되었나.


“아뢰야식(유식불교의 저장식)에 저장되어있다고 한다. 미국 의사 스티븐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두세살까지는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막 꿈에서 깨어났을 때 바로 기억을 되살리지않으면 꿈이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전생기억은 사라진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카르마법칙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가.


“인간과 동물 차이를 의외로 간과하는데. 인간만이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동물은 자기의식이 없다. 따라서 인간만이 죽음을 알고,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안다. 따라서 인간이 동물로 떨어지거나 동물이 인간으로 올수도 없다.”


-인간은 계속 환생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왜 계속 환생을 하는가.


“이룬것도 없이, 인격 완성도 되어본적도 없이 이대로 영원히 끝나 두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않는다면 너무도 허망할 것이다. 칸트는 ‘한생은 인간 도덕성을 완성하기엔 너무 짧다’고 했다. 신이 그랜드 캐년을 만드는데도 수백만년을 들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을 완성하는데, 한생만 쓰기엔 너무 짧다. 칸트는 ‘인간이 윤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사후생이 있어야하고, 심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도 인간의 환생이 요청된다.”

-우리는 언제까지 지상에 환생해야 하나.


“환생을 그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환생을 그치려면 영혼이 가지고 있는 미움과 집착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야한다.”

 

-인간이 환생한다는 증거가 있나.

 

“증거는 없고.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도 없다. 다만 역행 최면을 해서 로마의 누구였다고 하면, 역사기록도 없을 경우 믿기 어렵다. 좀 더 신뢰성을 얻은 것은 미국의 의사 이안 스티븐슨 연구였는데,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사례들을 골라놓은게 2천여건으로 1천쪽 책 두권으로 냈다.”

 

-이번 생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3천년전 인도에서 인간의 몸을 세가지로 구분했다. 육체와, 이를 감싸는 미세체, 원인체, 이 셋이다. 우리는 통상 몸이 있으니 오라(발광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라가 상징하는 미세체가 있으니 몸이 있는 것이다. 이번 생에 풀 과제가 미세체에 프로그램화 되어있다. 부모의 교합에 의해 태어난 인간의 몸체는 미세체가 주조한 것이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외모와 성격이 주조된 셈이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 등 이번 생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다음 생에도 또 만날까.

 

누군가를 강하게 미워한다면 다시 만나게 된다. 상대방과 풀게 없으면 다시 안만나지만, 풀게 남아있으면 다시 만나게 된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은 한 여성이 ‘알콜중독자로서 구타하는 남편을 내생엔 다시는 만나고싶지안은데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묻자 ‘그렇다면 미워하지도 말고, 관심을 끊어라’고 했다. 미움이든 애착이든 생각이 끈끈한 인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카르마이론이 비판받는 것은 이번 생이 전생부터 이미 정해져있는 결정론이나 숙명론이어서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진급시킬 여지를 없애는 것 아니냐는 것 아닌가.

 

“결정론이냐 자유의지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롭다. 팔은 안으로 굽혀지지만 인간은 팔을 거꾸로 제낄 자유도 있다. 꺾이면 아프니까 그런 자유를 사용하지않을 뿐이다. 카르마는 ‘줄에 묶인 개’에 비유할 수 있다. 개는 줄의 길이만큼 자유롭다. 인간도 자유롭긴 하지만, 카르마의 한계 내에서 자유롭다.”

 

-카르마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채로 현생에 태어났다면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도 할 수 있는 것인가.

 

“붓다의 시대 다른 경쟁자들은 영혼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다시 태어날지를 놓친 것에 대해 붓다는 임종하는 순간에 가졌던 생각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 순간의 생각조차도 내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삶을 도전하고 성취해가니 사고력까지 예측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큰 것들은 예측할 수 있다. 프로그로밍은 현생의 숙제를 해마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카르마를 알고 받아들인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삶이어서다.”

-점술사가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것이 가능한가.

 

“점을 치는 무당이나 영매들은 본인들이 영혼의 정보를 직접 보는게 아니고, 자기가 모시는 영적인 존재가 상대방 영혼에 새겨진 정보를 읽어서 알려준다. 무의식에 정보가 내장돼 있으니 그걸 읽는다면 예측이 가능하다. 영매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점을 치는게 간단치가 않다. 영적인 존재가 모든 정보를 다 알려주는게 아니라, 한두개 정도만 알려주는 경우가 많아서 그걸로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신체 장애도 카르마 때문인가.

 

“세상에 카르마가 아닌 건 없다. 그러나 그게 전생의 죄 때문이 아닐 수 있다. 이 생에도 좀 더 압축적으로 영적 성장을 하기위해 일부러 고난의 조건을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마법칙의 또 하나의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너무 업을 개별화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면 개인의 죄가 없어도 난리의 고통을 당하고, ‘코로나’가 창궐하면 개인이 자연을 파괴하지않았어도 고통을 당하는것 아닌가.

 

“코로나나 기후변화에 대한 죄를 짓지않았다고 주장하더라도 책임은 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하는 이들도 반생태적으로 대량 사육하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어서 반환경적 자연에 일조하는 경우도 많다. 카르마엔 개인의 업도 있지만, 공업도 있다.”

 

-통상 노승들이 ‘몸 바꿔 다시 와야겠다’라고 열반을 예고하는데, 몸이 옷처럼 바꿔 입는 것이라면 바뀌지않은 진정한 나는 누구며, 진정한 고향은 어디인가.

 

“‘진정한 나’는 선불교 같은데서 말하는 언어도단의 경지이므로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통상 우리는 지상에 너무 익숙해서 이것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번 생은 잠시 다녀가는 여행일 뿐이다.”

 

-지구학교를 졸업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는가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대부분이 카르마에 따라 생사의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

 

-영혼에 담긴 정보, 즉 전생을 알기 위해, 즉 자신의 카르마를 읽기 위해서 ‘소울 스캐닝’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소울 스캐닝’은 어떻게 하는가.

 

“역행최면을 통해 전생을 탐구하거나 무당이나 영매를 통해 알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좀 더 쉽게 스스로 자신을 탐구해서 알아가는 방법도 있다. 영혼, 즉 무의식에 기록돼 있는 숨어있는 정보를 알기 위해서, 즉 자신의 카르마를 알기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인지 등을 찾아가면 알아갈 수 있다.”

 

-죽음관련 시리즈 첫 책이 <죽음학 강의>였는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는다는 말보다는 ‘몸을 벗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지상에 살려면 육체라는 옷이 필요했고, 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 잠수복을 벗듯이 지상의 옷을 벗을 뿐 영혼 자체가 없어지는게 아니다.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영체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좋은 마음씨로 잘 살면 된다. 수많은 임종환자를 보낸 의사의 말이 임종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수 있다고 했다. 잘 살아온 분들은 임종 순간 얼굴에 마치 보톡스 주사를 맞은 것처럼 오히려 주름이 펴진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누군가 잡으러 왔다며 무섭다고 하기도 하는데, 책에서 저승사자같은 존재는 없다고 했는데.

 

“한국사람들은 얼굴에 분칠한 저승사자가 나타나 마치 강제 구인하는 것같은 두려움으로 죽음을 생각하는데, 실은 저승사자가 아닌 안내자가 온다. 당황하지 않고 다음 생으로 잘 갈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해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인연들이 찾아오거나, 고급영들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 나쁜 일을 많이 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하면 그런 상냥한 안내자가 아닌 나쁜 영들이 올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물질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어서 영혼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터무니없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거나 사후체험은 뇌가 일으킨 반응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어찌 보나.

 

“전도된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원용해 물질과 육신으로만 환원한 사고인데, 실은 영혼이 먼저 있고, 육신이 나중에 생긴 것이다. 우리가 전부라고 믿는 육신은 텔레비전으로 치면 수상기다.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수상기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수상기가 망가지면 버리고, 다른 수상기를 통해 프로그램을 수신해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육신과 영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스위스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퀴블러로스박사도 허무맹랑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도 죽으면 알게 될 것이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사후생을 믿어서 손해 볼게 없다. 없다면 후회할 일도 없다. 그러마 만약 아무런 준비도 안했는데, 사후생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주검은 냉동실에 넣고, 이후 대부분 화장을 해버리는데,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무엇인가.

 

“육체는 물질이고, 영혼은 의식이 들어있는 에너지체다. 영혼은 전생으로부터 수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는 의식체다.”

 

-가족들이 사망하면 그립다. 그런데도 왜 영혼을 만날 수 없는가.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논거중 하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근사체험자들에 따르면 영혼의 세계와 물질(육신)의 세계는 파동이 다르다고 한다. 지상의 느린 파동과 비교할 수 없이 영계의 파동은 빠르다고 한다. 따라서 영계의 존재가 지상의 인간과 교신하려면 자기 파동을 엄청나게 늦춰야하는데, 만볼트를 천볼트의 변압기로 수용해야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고 한다.”

 

-간혹은 영혼들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데요. 어떻게 전하고,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월가의 증권맨에서 사후 연구자로 탈바꿈했던 빌 구겐하임의 책 <사후통신>에선 영혼들이 소식을 전하는 12가지 방법이 나와있다. 많은 경우 꿈이나 냄새, 촉감 등으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또 서울대 의대교수인 지인의 경우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자기가 돌봐주던 환자가 찾아왔다가 대화도 하고 돌아갔는데, 후에 한국에 와서 확인해보니 그 시간에 그 환자가 사망한 시각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부활도 육체의 부활이 아닌, 영체로 볼 수 있나.

 

“부활했다면 영체 부활이지 육신의 부활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에선 육신 부활이라고 했지만,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모여있는 장소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으로 봐서 영체 부활로 볼수 있다.”

 

-근사체험자 가운데 10% 정도만이 빛을 체험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본 빛은 무엇인가.

 

“빛이라기보다는 빛의 존재를 체험한 것이다. 지상이 칙칙한 색깔의 세계라면 영계는 빛나는 세계다. 빛이 물질화하면 색깔이 된다. 근사체험자들 영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천당과 지옥은 있다고 보나.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은 없다.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간다고 하는데, 천당이나 무간지옥 같은 것도 없다. 사후의 세계는 물질이 아닌 파동의 세계여서 같은 파동의 영끼리 유유상종한다고 한다. 내가 수준이 높으면 파동이 빠른 영계에서 고급영들과 함께 지내지만, 내가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라면 사후에도 그런 영들이 사는 세계에서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다. 영계에선 유유상종해서 급이 다른 영들끼리 소통이 쉽지않기에, 영적인 진급은 지상이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는 예수 믿어야 천당가고 믿지않으면 지옥간다는 주장을 펴지않은가.

 

“미국에서 근사체험 연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드디어 사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대중들이 믿을 근거가 생겼다면서 기독교계가 대환영을 했다. 그러나 근사체험자들이 막상 사후에 가보니, 지상에서 교회에 나갔느냐, 예수를 믿었느냐를 아무도 묻지않았다고 증언하자 기독교가 돌아섰다.”

-카르마 법칙에 따라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현생에 벌을 받는다는데,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과보를 받는가.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살인을 하면 살인을 당하는 직접적인 되갚음도 있지만 살인자라도 크게 참회하고, 봉사를 한다면 과보가 달라질 수 있다. 또 전생에 남을 창피를 준 사람은 얼굴에 흉터가 생기고, 전생에 남을 속상하게 하면 현생에 가슴앓이를 하고, 전생에 빈자를 멸시하면 노숙자가 된다고도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을 죄수의 잔치에 비유한 까닭은.

 

삶은 빡세고 고되다. 그런 삶을 축하하는 것은 죄수가 감옥에 들어온지 1년이 됐다며 파티를 하는 것과 같다. 내생을 믿는다면 오히려 고난의 몸을 벗고 자유를 얻은 죽음을 축하하게 될지 모른다.”

 

-임종이 가까운 부모나 가족을 잘 보내는 방법은.

 

첫번째는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한다. 임종 직전 두가지 고통이 있다.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혼자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정신적인 고통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의사가 최대한 해결해줘야한다. 정신적인 고통은 가족들이 계속 옆에서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한다’는 것을 잊지않도록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하고, 돌아가신 다음에도 추모하고 기억할 것임을 주지시켜 외롭지않게 해드릴 필요가 있다. 호스피스들의 말에 따르면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사후세계를 믿지않는 이들보다 사후세계를 믿는 이들이 훨씬 더 편하게 삶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말기 환자에 대해서도 불효가 될까봐 연명 치료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은데.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모르지만, 그런 연명치료가 더욱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또한 한사람이 평생 쓰는 의료비 중 절반을 죽기 전 한달 동안 받는 치료에 쓰고, 특히 죽기 전 3일 동안 의료비 중 25퍼센트를 쓴다는 통계가 있다.”

 

-말기 질환 상태에 들어가면 반드시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야한다. 통장은 물질을 남기지만 유언장은 마음을 남긴다고 한다. 만약 유산의 분배를 분명히 하는 유언장을 남기지않으면 주검이 침상에서 벗어나기 전부터 자식들이 싸울 수 있다.”

 

-말기환자들은 육체적으로 통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몰핀을 최대한 투여해 통증의 고통을 해소해줘야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마약관리대장 기입의 부담 때문에 의사들이 소극적인 경우도 많은데, 먼저 고통스런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통증을 줄여줘야 한다.”

 

-말기환자 방문자들이 주의해야할 것은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않아야 한다. 마지막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방문자들이 ‘내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는데, 당사자는 한두번도 아니고, 짜증이 배가될 수 있다. 따라서 환자의 상태가 좋지않을 때는 ‘저 누구입니다’라고 먼저 소개하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

 

-임종 순간 주의해야할 점은

 

“환자가 허공을 보며 ‘누가 왔다’고 하면, ‘오긴 누가 왔다’고 그러냐며 구박을 하지말고 ‘그러시냐’고 호응해주면 된다. 숨이 끊어진 뒤 흔들거나 통곡하지 말아야 한다. 내생으로 가는 여행을 방해하는 일을 일체 삼가야 한다. ‘저 위에 환한 빛이 보이시지요. 그 빛을 따라가세요’ 정도가 좋고, 근사체험자들은 기도도 좋지않다고 한다. 특히 의사와 간호사를 불러 심폐소생술 등을 하는 것을 삼가할 필요가 있다. 말기환자의 경우 심폐소생술로 경우 20~30분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가슴뼈가 부서지고, 더욱 고통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무엇보다 임종학 강의를 받고 준비할 필요가 있고, 장례는 직접 하기보다는 믿을만한 상조회사에 맡기는 게 가장 현명하다.”

사람답게 늙고,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죽자


박종국

 



 

사람의 연령은 네 가지다. 자연연령, 건강연령, 정신연령, 영적연령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브롬디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늙는다는 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삶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다.

성장하면서 보내든 늙어가면서 보내든, 인생길은 앞을 보면 까마득하고 뒤돌아보면 허망하다.
어느 시인은 '예습도 복습도 없는 단 한 번의 인생의 길'이라고 말했다.
'가고 싶은 길도, 가기 싫은 길도 따로지만, 가서는 안 되는 길,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의 길이다. 

사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늙고, 사람답게 죽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아주 멋지게 해 나가는 사람이 많다.
잘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여 열정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늙고 죽어야 할까?

첫째, 사람답게 늙어야 한다(웰에이징(Wellaging).

행복하게 늙기 위해서는 먼저 노년의 품격을 지녀야 한다.
노년의 품격은 풍부한 경륜을 바탕으로 노숙함과 노련함을 갖추는 일이다.
노년의 삶을 불안해하는 건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가기 때문이지만, 오히려 노년은 지성과 영혼이 최절정의 경지에 이르는 황금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노숙함과 노련함으로 무장하여 노익장을 과시하라!
산행과 명상, 클래식 음악과 독서와 같은 영성생활(靈性生活)의 여유를 온 몸으로 즐겨라.
최고의 노후는 우리가 무엇을 꿈꾸느냐에 달렸다.

노년은 24시간 자유다.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나만의 자발적 시간이다.
여유작작하고, 여유만만한 여생의 시작을 위해 팡파르를 울려야 할 때다.
웰에이징(Wellaging)을 위해 노년 특유의 열정을 가져야한다.

노년의 열정은 경륜과 품격이 따른다.
노련함과 달관이 살아 숨 쉬는 풍요한 열정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이러한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흔히 노년사고(老年 四苦), 즉,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병고(病苦)가 그것이다.
가난과 외로움과 할 일 없음의 괴로움은 노년에 가장 큰 골칫거리이며, 이와 함께 노후의 병고만큼 힘든 일은 없다.
그래서 노년은 점점 의욕과 열정을 잃어가는 시기라고 속단할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하기 나름이다.
노년사고(老年 四苦)는 열정을 상실한 대가임을 알아야한다.
열정을 잃지 않고 사는 노년 노후는 빈고, 고독고, 무위고, 병고가 감히 끼어들 틈조차 없다.
노년기에 열정을 가지면 오히려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70대에, 23%는 70~80세 노인에 의하여,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노인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소포클레스가 <크로노스의 에디푸스>를 80세 썼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게 80이 넘어서였다.
다니엘 드포우는 59세에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57세에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하였으며,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70세에 완성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의 나이를 넘어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였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64%가 노인에 의해 성취됐다.

행복하게 늙기 위해서는 또한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지 않으려면 대인관계를 잘 하여야한다.
즉,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아니라 타인 중심으로 가져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이기주의적 성향이 강해진다.
노욕이 생긴다.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폭군노릇을 하고, 자기도취에 몰입하는 나르시즘(narcissism:자기도취증)에 빠진다. 또,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페이탈리즘(fatalism:운명론)에 빠지기 한다.

이런 사람의 대인관계는 결국 초라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인간관계는 중심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질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 들수록 초라해지고, 일 중심이나 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도 역시
외로움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타인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가장 바람직한 건 타인 중심의 인간관계다.

둘째,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웰빙(wellbeing).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노년을 우리는 웰빙(well-being)이라고 한다.
웰빙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인품이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웰빙은 육체적인 강건함보다 정신적인 풍요와 여유에 더 중점을 두어야한다.

인자함과 포근함이 묻어나는 한, 그리하여 사랑과 용서의 미덕으로 넘쳐나는 한, 노년 노후는 일빙(ill-being: 심신을 혹사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웰빙(well-being)의 시기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일만으로는 웰빙이 될 수 없다.
정신과 인품이 무르익어가는 노년이야말로 인생의 최고봉이자 웰빙의 최적기다.

노년의 녹색지수(綠色指數)는 무한대다.
노년의 삶은 강물이 흐르듯 차분하며, 생각은 달관하듯 관대하다.
소탈한 식사가 천하의 맛이며, 세상을 온몸으로 감싼다.
노년의 삶은 자연과 하나다.
그래서 노년은 청춘보다 꽃보다 푸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노년은 삭막하고 고독한 시기로 생각한다.
절망과 슬픔을 떠올린다.

사실, 젊음을 구가하던 때와 비교하면 노년의 외모는 형편없다.
삼단복부, 이중턱, 구부정해지는 허리 등. 그리고 흰머리, 빛나는 대머리, 또 거칠고 늘어진 피부, 자꾸 자꾸 처지는 눈꺼풀 등. 한데도 말년을 앞에 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나눠주는 건 정신적인 풍요와 경륜으로 쌓아올린 덕을 가졌기 때문이다.
노년의 주름살 속에 아름답게 풍겨나는 인자스러움은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살아가면서 쌓이며 승화되는 화석과 같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려온 노인은 이렇듯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덕이 있는 사람, 지혜가 풍부하고 마음이 인자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상사 애꿎게 실생활에서 만나는 노인은 대부분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고집이 세고, 인색하고, 마음이 좁은 노인을 더 자주 만난다.

왜 그런가? 노년의 그런 추함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과 용서의 삶에 인색했거나, 은혜의 삶을 잠시 망각했기 때문이다.


노년은 용서하는 시기이다.
용서의 근간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인간을 구제하는 희망이다.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는 사람,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웰빙(wellbeing)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웰빙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인품이 건강해야 함도 잊지 말자!

셋째로, 사람답게 죽자(웰다이잉welldying).

노년의 삶은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해도 문제이지만, ‘이만큼 살았으니 당장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경박한 듯한 태도는 더욱 큰 문제다.

소노 아야꼬는 ‘죽음이 오늘이라도 찾아오면 힘을 다해 열심히 죽겠다’고 했다.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에서 경건하게 생각했다.
“병에 걸리면 도를 닦듯 열심히 투병하고, 투병과 동시에 죽을 준비도 다해 놓고 언제고 부름을 받으면 “네 ”하고 떠날 준비를 하자“
즉, 죽되 추하게 죽지 않도록 아름다운 죽음이 되는 완전한 죽음을 강조한다.

‘윌리엄 컬렌 브라이언트’ 죽음을 관조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대 한 밤을 채찍 맞으며, 감방으로 끌려가는 채석장의 노예처럼 가지 말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떳떳하게 위로 받고 무덤 향해 가거라. 침상에 담요 들어 몸에 감으며 달콤한 꿈나라로 가려고 눕는 그런 사람처럼…”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고차원의 인생관이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이 인생관의 존재 여부가 삶의 질을 확연하게 바꾸어 놓는다.

이제까지는 세상이 정해 놓은 길, 주변에서 원하는 길을 따라 걸어왔다면, 이제부터 남은 삶은 어떤 길을 택하고 어떻게 걸어갈 지 오로지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년의 연륜은 미움과 절망까지도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성실하게 살면 이해도, 지식도, 사리 분별력도, 자신의 나이만큼 쌓인다.
그렇게 후덕한 일들이 쌓여 후덕한 인품이 완성된다.

노란 신(神)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가 급속이 자리 잡게 되고, 그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젊은 날의 만용조차 둥글둥글해지고, 인간을 보는 눈은 따스해진다.

이러한 덕목을 갖추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자신에게 견고한 재갈을 물리고,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한다.
시간은 인간에게 성실할 것을 요구한다.
잉여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자신의 몫으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노력 없이는 시간을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노년에게 시간은 두렵고 잔혹한 일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비워야 한다. 미완성에 감사해야 한다.
사람답게 죽기(welldying)위해 진격보다는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자리와 삶에 대한 두터운 욕심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집착이란 보이지 않는 일종의 병이다. 그래서 자신과 관계되는 조직에, 일에 너무 애착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애착은 곧 권력과 재화의 유혹에 빠지게 하고, 그 힘을 주위에 과시하려 하게 되며, 마침내 추한 완고함의 덫에 걸려들게 만든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일보다 잃어버리는 게 더 많다.

따라서 비움과 내려놓기를 준비하라.

그것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잃어버림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주변의 사람도, 재물도, 그리고 의욕도, 어느 틈엔가 자신도 모른 사이에 떠나간다.
이것이 노년의 숙명이다.
인간은 조금씩 비우다 결국 무엇 하나도 남지 않을 때 세상을 뜨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을 의지하기보다는 신(神)에 의지해야 한다.

신과 가까이 하면 정신연령과 영적연령은 더욱 신선해진다.
이것이 웰다잉(welldying)의 깊은 뜻이다.

후반전의 인생은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後半生)이다.
인생의 주기로 보면 내리막길 같지만,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향해 새 인생이 시작되는 때다.

행복한 노년은 무엇인가?

사람답게 늙고(wellbeing), 인생이 결국 사람답게 살다(wellaging)가 사람답게 죽는 것(welldying)으로 마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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