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를 무시하는 고니

 

 

< 중앙일보, 곽정식 수필가,  2023.12.26 >

 


12월 나만의 하루를 찾아 한강변에 있는 서울숲을 산책했다. 원래 뚝섬경마장이 있던 자리를 개발해 만든 시민공원인데 서울에선 월드컵공원과 올림픽공원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 공원 안에 들어서면 여섯 마리 말이 경주하는 모습의 군마상(群馬像)이 보인다. 군마상 좌우에는 같은 수종의 나무들이 좌우 대칭으로 서 있어 프랑스풍을 뽐낸다.

서울숲은 나무와 호수, 풀과 습지가 잘 어우러져 공원 안으로 들어오면 이내 자연 속으로 빠져든다. 또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곤충식물원과 사슴을 사육하는 우리를 만나게 돼 동식물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든다.

사람과 가까이서 살아온 참새
천적을 피하는 독특한 생존법
작다고 참새를 깔보는 정치인
참새의 지혜를 알고나 있는가

공원 근처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주전부리로 사 온 새우깡 봉지를 뜯었다. 주변에서 놀던 참새들이 새우깡 냄새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눈치 보는 참새들에게 몇 조각을 토막 내 던진 후 일부로 시선을 딴 데 두었다. 곁눈으로 보니까 가슴에 검은 털이 진한 수컷 참새 한 마리가 조각을 입에 물고서 이내 자리를 비우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새끼들에게 그 조각을 매번 물어다 주는 게 아닌가.

수컷 참새는 안심해도 좋다는 생각을 했는지 양다리를 모아서 통통 튀는 모습으로 아예 암컷 참새와 새끼들까지 데리고 왔다. 조금씩 던져주는 게 참새들을 애태우는 것 같아 한 움큼을 집어서 뿌려준 후 자리를 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뒤돌아다 보니까 주변 마른 덤불에서 재잘거리던 참새 수십 마리가 삽시간에 땅에 퍼지듯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 3000년 전 생겨나 오늘날에도 인기인 마작(麻雀) 놀이가 불현듯 생각났다. 참새를 의미하는 마작(麻雀)과 놀이 마작(麻雀)의 이름이 같아서다. 놀이에 마작이란 이름을 붙인 건 놀이 테이블에서 패를 뒤섞는 소리가 겨울철 마른 마(麻)밭 덤불에서 참새떼가 재잘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서다.

돌이켜 보면 마른 나무색을 보호색으로 하는 참새는 사시사철 인간 가까이에 있어도 인간을 너무 가까이도, 또 너무 멀리도 하지 않는다. 참새는 인간의 곁을 떠나면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고 인간을 너무 가까이하면 인간의 ‘먹을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우쳐서다.

참새는 큰 기러기나 고니처럼 높게 나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생존을 위한 집단 반응은 어느 새보다 빠르다. 그래서 겨울철 마른 덤불 속에서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튀어나왔다가 덤불 속으로 일시에 빨려 들어가듯 숨는다. 주변의 기미가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흩어지듯 일시에 달아난다. ‘아! 이래서 ‘새가슴’이라고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새가슴 덕에 참새는 천적들로부터 오랜 세월 자신을 지켜냈다.

신체 리듬을 연구하는 옥도훈 박사는 참새의 집단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참새가 한꺼번에 내려앉고 날아올라 가는 건 일종의 ‘동조(同調)’ 현상이라 볼 수 있지요. 한 참새의 날갯짓이 아주 짧은 시간에 전체 참새에게 전달 돼 날갯짓을 하는 겁니다. 참새의 이런 모습을 멀리서 보면 참새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는 참새들의 동조 현상이 서로 신체 리듬과 박자가 맞아야 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플라밍고의 군무나 물고기 떼가 몰려다니는 것 역시 같은 이치로 해석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도 리듬과 박자가 맞아야 잠을 잘 잔다. 어릴 적 할머니의 힘없는 목소리로 불러주시는 자장가에서도 리듬을 느끼고, 또 등을 토닥거릴 때 박자를 느껴서 이내 잠든 추억이 있다.

동조와 비슷한 말로 ‘울림’을 들 수 있다. 내 말이나 생각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려면 상대방 마음과 가슴 속에 반드시 울림이 있어야 한다. 가수들도 청중 마음에 울림을 만들기 위해 온갖 표정과 제스처를 동원하지 않는가.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정치인들 역시 유권자들의 뇌리에 울림과 여운을 남기려 애쓴다. 그들은 마음에 와 닿는 비유와 인용으로 늘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또 그들은 다른 정치인이 쓰지 않은 참신한 사자성어를 찾느라 골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자주 인용하는 사자성어 중에 ‘연작홍곡(燕雀鴻鵠)’이라는 말이 있다. ‘제비(燕)나 참새(雀) 따위가 기러기(鴻)나 고니(鵠)의 높은 뜻을 어찌 알겠느냐’라는 의미다. 그러니 자신은 홍곡이고, 상대방은 연작이라는 말이다.

정치인들은 거대담론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은 고매한 홍곡으로 칭하고, 상대를 시시한 연작으로 비하해 왔다. 이런 식으로 포용이 아닌 구분과 구별을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연작들이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낮은 곳에 사는 우리 연작은 높은 하늘을 나는 홍곡의 뜻을 모른다. 그런데 홍곡 역시 연작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 하지만 홍곡은 연작의 뜻을 알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기도 한다.

慾, 焉得剛(욕, 언득강)

 

* 焉:어찌 언, 得:얻을 득(능히 득=能), 剛:굳셀 강. 욕심이 있으니 어찌 강할 수 있으랴.  

 

< 중앙일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3.11.30 >

한자자전은 ‘强’과 ‘剛’을 다 ‘굳셀 강’이라고 훈독한다. 그러나, 두 글자는 쓰임이 다르다. ‘强’은 ‘弓(활 궁)’이 있으니 ‘활을 당기는 힘’처럼 주로 물리적으로 센 힘을 나타내고, ‘剛’은 ‘그물 망(岡=罔)+칼 도(刂=刀)’로 이루어진 글자로서 ‘칼로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그물의 강인함’ 혹은 ‘얽힌 그물을 칼로 끊어버리는 결단’을 나타낸 글자이다. 주로 정신적 강단(剛斷)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어느 날, 공자가 진정으로 강단이 있는 사람을 못 봤다며 탄식하자, 어떤 사람이 “신정(申棖)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공자는 “신정은 욕심이 있으니 어찌 강(剛)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여기서 ‘욕심이 없어야 강하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무욕즉강(無慾則剛)’이 나왔다.

삿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야 끝까지 의로움을 지키는 강단을 발휘할 수 있다. 강단과 고집은 다르건만 사욕을 챙기는 사람은 자신에게 이롭겠다 싶으면 의로운 사람의 참된 강단을 잽싸게 고집으로 매도하며 자신의 꿍꿍이를 강단인 양 정당화한다. 벌레와 같은 존재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는 확실하고 유일한 길은 ‘무욕의 강(剛)’을 알아보는 국민의 눈이다. 내년 총선에 대비해 이런 눈을 갖추어야 할 때이다.

懷德(회덕)

 

 

< 중앙일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3.09.25  >

 



“군자는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땅(부동산)을 품으며,

 군자는 잘못했으면 형벌을 받을 생각을 하고,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혜택을 받을 궁리를 한다.”

 

『논어』 이인편 제11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덕(德)은 곧 ‘득(得:얻음)’이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뭔가 좋은 일을 얻는다면 그 ‘얻음’이 바로 덕인데, 그 덕은 언젠가는 내게로 돌아와 나의 ‘얻음’이 된다. 군자는 늘 가슴에 이런 덕을 품고 산다. 먼저 남에게 베푸는 이타적 삶을 사는 것이다.

 

懷: 품을 회, 德: 덕 덕. 덕을 품다. 35x74㎝.


이에 반해, 소인은 부의 상징인 땅을 많이 소유할 생각을 품고 산다. 군자는 작은 잘못에도 형벌을 받을 생각을 먼저 하는 반면, 소인은 죄를 짓고서도 누군가의 혜택으로 벌을 면할 궁리를 한다. 2500여 년 전의 말임에도 오늘날의 현실과 딱 들어맞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뜻이리라.

가슴에 덕을 품고 살면 땅이나 돈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지만, 늘 땅이나 돈만 품고 살면 덕은 물론 땅도 돈도 오히려 들어오지 않는다. 설령, 땅이나 돈이 많다고 해도 덕이 없으면 ‘수전노(守錢奴:돈을 지키는 노예)’일 뿐이다. 돈만 지키다가 마치는 삶은 참 가여운 삶이다. 덕으로써 부를 빛나게 해야 아름다운 삶이다.

樂而不淫, 哀而不傷(낙이불음 애이불상)

 

 

< 중앙일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3.08.14  >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재의 하나로 주나라 때 『시(詩)』를 사용했는데 제1장인 ‘관저편’에 대해 “즐거우면서도 넘침이 없고, 슬프지만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노래”라고 평가하고, 그런 시와 노래를 좋은 시라고 가르쳤다.

사람은 아무리 진한 즐거움이라도 몇 번 겪고 나면 시들해져서 더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욕망이 발동한다. 종국에는 단물로 갈증을 풀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러 파멸을 맞게 된다. 마약중독이 바로 그런 사례다. 즐기되 넘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슬픔은 모든 다정했던 인연들과의 이별이 그 원천이다. 만날 때 이미 이별이 잉태되었음을 잘 알면서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별을 슬퍼한다. 억울하고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픔과 분노를 더 하게 한다. 그래도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음악으로 슬픔을 더 아프게 고이도록 하지는 말아야 한다.

 

넘침이 없는 즐거움, 다치지 않는 슬픔. 樂: 즐거울 락, 淫: 넘칠 음, 哀: 슬플 애, 傷: 상할 상. 35x74㎝.


요즈음 우리 노래가 즐거움 면에서도 슬픔 면에서도 너무 ‘찐’하여 넘치고 다침이 많은 것 같다. ‘찐’한 것은 자칫 죽음을 부른다. 낙이불음, 애이불상! “즐거우면서도 넘침이 없고, 슬프지만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 노래를 좋은 노래로 여긴 공자의 말을 음미해야 한다. 

 

갈증을 풀어주는 것은 단물도 짠물도 아닌 맹물이기에.

과거와 미래보다 ‘오늘’이 소중하다

 

 

 

< 경향신문, 엄민용 기자,  2023.07.03 >

 


 
7월이다. 한 해가 시작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제 겨우 절반이 지나갔을 수도 있다. 이렇듯 시간은 이중적이고 상대적이다. 즐거울 때는 화살처럼 몹시 빠르지만 괴로울 때는 굼벵이보다 느리다. 천금을 주고도 단 1초를 살 수 없지만, 무의미하게 흘려버리곤 하는 것도 시간이다.

그러나 상대성과 이중성은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모두에게 하루는 24시간으로 공평하다. 이 시간을 귀히 쓰느냐 허투루 쓰느냐는 저마다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시간을 값지게 보내려 하는 각오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시(詩)가 있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인생찬가’다.

그는 이 시에서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것이 인생이다”라며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묻어 두라! 활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에 활동하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가장 값진 시간은 ‘오늘’이다. 오늘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내일을 충실히 보낼 리 없고, 내일도 어차피 코앞에 있는 오늘이다. 게다가 내가 오늘을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남들도 ‘나의 오늘’을 하찮게 여길 게 분명하다.

한편 오늘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날”이다. 시간으로는 그날의 밤 12시, 즉 자정(子正)에 시작된다. 따라서 ‘오늘 자정’이라고 하면, 이 말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자정은 하루를 끝내는 때가 아니라 여는 때다. 우리는 예부터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를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으로 삼았고, 자정이 자시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오늘 자정에 열릴 예정’처럼 다가올 밤 12시의 개념으로도 널리 쓰인다. 게다가 ‘3일 자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2일에서 3일로 넘어온 자정인지,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자정인지 헷갈린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는 ‘자정’ 대신 ‘3일 밤 12시’나 ‘4일 0시’로 쓰는 게 낫다. 참고로 국립국어원의 견해에 따르면 ‘3일 자정’은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12시다.

만화 주인공 캔디는 ‘찔레꽃’ 소녀다

 

 

< 경향신문,  엄민용 기자, 2023.05.22  >

 

강화 해변 찔레꽃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불린다. 푸진 햇살을 받은 연록의 잎들에 생기가 넘치고, 온갖 꽃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때다. 이런 5월을 대표하는 꽃으로 장미를 빼놓을 수 없다. ‘메이퀸(May Queen)’이란 이름의 장미도 있다. 말 그대로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장미는 5월의 여왕이다. 그런 까닭에 장미는 예부터 사랑, 아름다움, 기쁨, 청춘 등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리스신화에서 아름다움, 사랑, 욕망 등을 관장하는 신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에게 바친 꽃도 장미다.

하지만 화려한 꽃일수록 잎이 졌을 때의 모습은 추하고, 향이 짙은 꽃일수록 썩는 악취가 심한 법이다. 사람들의 사랑도 쉬 변하고, 그렇게 변한 사랑의 대상은 생면부지의 사람만 못하게 되는 게 인생사다. 따라서 장미는 현실의 허무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게다가 장미엔 가시가 있다. 사랑의 배신을 암시하는 꽃이다.

이렇듯 이중성을 띤 ‘장미’를 생각하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만화 주인공이 있다. ‘들장미 소녀’로 불리는 캔디다. 그런데 만화 속에서 캔디는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와 알콩달콩 사랑이나 속삭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형편은 더욱 아니다.

캔디는 평범하지만 남을 즐겁게 하고, 고된 나날을 보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맑은 소녀다. 꽃에 비유하면 어느 집 화단에서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으며 피어난 화려한 장미가 아니라, 거친 들녘에서 된바람을 맞으며 피었지만 지나는 길손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머물게 하는 이름 모를 들꽃 같다. 그래서 캔디를 꾸며주는 말로는 장미보다 들장미가 제격이다.

들장미도 어차피 장미가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다. 들장미를 야생에 핀 장미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들장미는 요즘 도심의 아파트나 꽃집에서 흔히 보는 장미가 아니라,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찔레꽃’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찔레꽃의 영어명이 ‘Wild Rose’이고, 이를 우리말로 옮겨 적으면 ‘들장미’가 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들장미와 찔레가 같은 말로 올라 있다.

‘사사’는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다

 

 

< 경향신문, 엄민용 기자, 2023.05.15  >



 
‘선생(先生)’은 보통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쓰인다.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이 곧 ‘선생’이다. “엄 선생, 이것 좀 도와 줘” 등처럼 남을 높여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선생’은 요즘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지만, 옛날에는 주로 관직에 쓰던 말이다. 조선시대 때 성균관에 둔 교무 직원이 ‘선생’이고,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을 이르던 말도 ‘선생’이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선생’이 쓰였다, “아무리 벼슬이 높은 사람이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대인’이라 불렀다”는 얘기가 <해동잡록>이라는 문헌에 실려 있다.

그렇게 대단한 ‘선생’을 더 높여 이르는 말이 ‘스승’이다. 특히 ‘스승’은 단순히 지식과 학예 따위를 전달해 준 사람보다 ‘가치와 이념 등을 깨닫게 해 삶을 인도해 준 사람’의 의미가 더 강하다. 우리가 매년 5월15일을 ‘스승의날’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승의날’은 충남 강경여자중·고등학교 청소년적십자단 단원들이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찾아가기 시작한 데서 유래됐다. 처음에는 5월26일이 ‘은사의날’이었는데, 1965년 교직단체 등이 기념일을 주관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와 교육에 큰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탄일인 5월15일(음력 1397년 4월10일)로 변경했다.

한편 스승과 관련해 자주 틀리는 말로 ‘사사받다’가 있다. ‘사사(師事)’는 “스승으로 섬김” 또는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을 뜻한다. 즉 ‘사사받다’는 ‘내’가 스승이 됐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또 ‘사사’에는 이미 ‘받다’는 의미도 표함돼 있다. 따라서 ‘사사받다’는 ‘사사하다’로 써야 한다.

아울러 스승이나 윗사람이 남자인 경우 그 부인을 부르는 말은 ‘사모님’이고, 스승이나 윗사람이 여자라면 그 남편을 ‘사부(師夫)님’ ‘○ 선생님’ ‘○ 과장님(직함이 있을 때)’ 등으로 쓰는 것이 우리말의 언어 예절이다.

'잡학 > 우리말과 한자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와 미래보다 ‘오늘’이 소중하다  (0) 2023.07.14
만화 주인공 캔디는 ‘찔레꽃’ 소녀다  (1) 2023.05.22
한량 (閑良)  (0) 2023.04.10
새봄을 보내며  (0) 2023.04.06
열락 (悅樂)  (0) 2023.03.13

1.

한량  [ 閑良 ]

 

<용비어천가>에는 한량의 뜻을 풀이해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속칭한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학교에도 적(籍)을 두지 못해 아무런 속처(屬處)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무예(武藝)를 잘 하여 무과에 응시하는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한편 돈 잘 쓰고 만판 놀기만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량이 직업이 없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계층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존재했는데, 시대에 따라 그 뜻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부유하면서도 직업과 속처가 없는 유한층(遊閑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관직이나 학생이 될 자격이 있는 양인(良人) 이상의 신분으로서 하층 양반이나 상층 평민 중에서 배출되었다.

교적(校籍)도 없고 군적(軍籍)에도 오르지 않아 아무런 소속이 없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평소 유학이나 무예를 배워 관리나 고급 군인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들을 추쇄(推刷)해 기간병종(基幹兵種)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을 폈다.

국가정책상 한량에 대한 논의가 주로 군역과 관련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군역편제 조처는 조선 건국과정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경성에 거주하면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소속해 숙위(宿衛)하는 한량에게 과전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외방에 거주하는 한량에게는 군전(軍田)을 지급하되 본전(本田)의 다소에 따라 5결 혹은 10결을 주고, 그 대가로 지방군에 충역(充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때 과전이나 군전을 받은 자는 관직을 그만둔 전함관(前銜官)이나 공민왕대 이후 잦은 전란 속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대가로 첨설직(添設職)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흔히 한량품관, 혹은 품관(品官)으로도 불렸다. 또, 비록 중앙의 벼슬아치는 아니라 하더라도 재산과 학력과 품계를 갖추고 있어서 잠재적인 지배층으로서 향촌의 유지(有志)로 행세하고 있었다.

한량품관은 군역에 편제되어 조선 초기 국방력 강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량으로 충원되는 병종(兵種)은 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근장(近仗)·방패(防牌)·섭대부(攝隊副)·기선군(騎船軍)·수성군(守城軍)·영진군(營鎭軍)·방사군(放射軍) 등 다양하였다.

세조 때에는 하삼도(下三道) 지방의 한량 2,187인을 추쇄, 호익위(虎翼衛)라는 특별 부대를 조직하였다. 중종 때에는 정로위(定虜衛)라는 부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군역 복무에만 머문 것은 아니고,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향촌에 유향소(留鄕所)를 설립, 향촌 자치를 주도하기도 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켜 나갔다. 한편, 품관으로서의 한량 문제가 일단락된 15세기 말 이후로는 새로운 형태의 한량이 대두,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다.

흔히 한량자제(閑良子弟)로도 불렸던 새로운 한량은 나이 20세가 넘고 재산도 있으며 유학과 무예도 어느 정도 익힌 사족이나 평민의 자제들로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아니고 군역도 지고 있지 않은 부류들이었다.

이들은 호적(戶籍)에도 올라 있지 않아 과거 시험도 치를 수 없는 등 양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조사해 그 재능을 시험, 고급 군인으로 선발하기도 하고 강제로 군역을 지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량의 존재는 계속 늘어가기만 하였다.

조선 후기 1625년(인조 3)에 작성된 호패사목(戶牌事目)에는 사족으로서 속처가 없는 사람, 유생(儒生)으로서 학교에 입적(入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평민으로서 속처가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전기의 한량 개념이 그때까지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조 때 ≪무과방목 武科榜目≫에는 무과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이 무렵부터 한량이 무과 응시자격을 얻게 되면서 무과 응시자 혹은 무반 출신자로서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의 뜻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  한량 [閑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건달과 한량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북한 사전에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이라는 속담이 나온다. 이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 ‘건달’은 거들먹거려도 쓸 돈이 없어 처량한 신세의 사람이라면, ‘한량’은 속없어 보여도 흥청망청 쓸 돈은 있어 스스로는 신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건달’이건 ‘한량’이건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한심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건달’이라는 단어는 16세기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게으른 사람’을 뜻해 지금의 ‘건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건달’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다.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Gandharva〔樂神〕’를 한자의 음을 이용해 표기한 중국어 ‘乾闥婆(건달바)’에서 출발하여 그 어형과 의미가 달라진 말이다.

‘Gandharva’는 수미산(須彌山) 남쪽 금강굴에 살면서 하늘 나라의 음악을 책임진 신(神)이다. 말하자면 ‘음악의 신’인 셈이다. 이 신은 향내만 맡으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며 노래와 연주를 하며 살아간다. ‘Gandharva’가 노래와 연주를 전문으로 하는 신이었기에 인도에서는 이를 근거로 악사(樂士)나 배우까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Gandharva’를 한자의 음으로 표기한 ‘乾闥婆(건달바)’라는 단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에 전해진 초기에는 그 본래의 불교적 의미인 ‘악신(樂神)’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가 불교 사회에서 일반 사회로 넘어와 쓰이게 되면서 어형이 ‘건달’로 축약되고 그 의미도 크게 달라졌다.

아마 일반 사회로 넘어와 처음으로 획득한 의미① ‘하는 일 없이 놀거나 게으름 피우는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이미 16세기에 확인된다. ①의 의미는 ‘건달바’가 본래 노래나 하며 한가롭게 지내는 악신(樂神)이라는 점이 비유적으로 확대되어 파생된 것이다. 이는 ‘백수건달(白手건달)’과 같다.

‘건달’이 두 번째로 얻은 의미는 ②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이다. 이는 게으름을 피운 결과로서 생겨난 의미이다. 이쯤 되면 ‘건달’은 바가지나 깡통만 차지 않았지 ‘거지’나 다름없다.

세 번째로 얻은 의미는 ③ ‘난봉이나 부리고 다니는 불량한 사람’이다. 이것은 ‘건달’이 그저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족속이 아니라 허랑방탕한 짓까지 하고 다니는 족속이라는 데서 생겨난 의미이다. 이러한 족속은 ‘건달’보다는 ‘건달패’가 더 잘 어울리며 ‘난봉꾼’과 똑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건달’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났다.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빈털터리인 ‘건달’이 먹고살기 위해 주먹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의미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어쩌다가 ‘건달’이 ‘깡패’와 같은 족속이 된 것이다.

 


한편, ‘한량’이라는 말은 옛 문헌에 ‘한량’ 또는 ‘할냥’으로 나온다. 본래 ‘한량’은 한자어 ‘閑良’으로 조선시대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武班)’을 가리켰다. 그런데 실제 옛 문헌에 보이는 ‘한량’이나 ‘할냥’은 그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직사(職事)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놀고먹는 무반’에서 의미가 확대되어 그러한 처지에 있는 무반(武班)과 문반(文班)을 모두 가리키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변화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한량’은 ‘놀고먹는 양반’이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돈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변한다. 돈푼깨나 있는 양반들이 하릴없이 돈을 펑펑 써 가며 잘 노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그와 같은 행위를 일삼는 일반인 모두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변화가 일어난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20세기 초에 출간된 문세영 저 『조선어사전』(1938)이나 한글학회에서 펴낸 『큰사전』(1957)에도 ‘한량’에 그 본래의 의미인 ‘벼슬을 못 한 호반(虎班)’이라는 의미만 달려 있지 변화된 의미는 달려 있지 않다. 물론, 최근에 나온 사전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를 포함하여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두 가지 의미 모두를 싣고 있다.

『큰사전』(1957)을 비롯해 그 이후에 나온 사전에는 ‘한량’과 더불어 그것에서 변형된 ‘활량’이라는 단어까지 싣고 있어 주목된다. ‘한량’이 동화 작용에 의해 ‘할량’으로 발음된 다음 다시 ‘활〔弓〕’과의 연상 작용으로 ‘활량’이 된 것이다. ‘할’을 통해 ‘활’을 연상한 것은, ‘한량’이 무인(武人)이고 이들이 ‘활’을 사용한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건달’이나 ‘한량’은 의미가 상당히 변했으며,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할 일 많은 이 세상에 게으르고 무능한 ‘건달’, 그리고 돈 귀한 줄 모르고 흥청대는 ‘한량’은 모두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  건달과 한량 -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2009. 9. 25., 조항범)

 

 

3.

선량과 한량 

 


< 경남신문, 이상권 서울본부장,  2023-02-26  >



국회의원을 흔히 ‘선량(選良)’이라고 한다. 선택현량(選擇賢良)의 줄임말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뽑는다는 의미다. 이면엔 인재에 대한 존경과 역할의 기대가 깔려있다. 유래는 중국 한(漢)나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관리를 선발한 기준에 효렴(孝廉)과 현량방정(賢良方正)이 있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며, 경학에 밝고 품성이 어질며 행동이 방정한 사람을 칭한다.

이에 비해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武班)은 ‘한량(閑良)’이라고 했다. 무과 응시를 준비하기 위해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무예를 연마하는 것이 마치 노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다. 현대에 이르러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돈 잘 쓰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민의를 대변하지만, 국회의원만큼 지탄받는 자리도 드물다. 국회는 고비용·저효율의 대명사이자 ‘한량 집합소’ 정도로 폄하되지만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이율배반의 현실이다. 걸출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헌법기관’으로 최고의 예우와 특권을 누리는 데다 돈까지 몰린다. 지난해 309개 국회의원 후원회가 585억7900만여원을 모금했다. 한데 의정활동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한량으로 시간을 때워도 선량으로 불리니 이만한 자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한번 ‘금배지’의 위용을 맛본 이들은 재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현재 300명인 국회의원 정수를 내년 총선에서 350명으로 늘리자고 국회의장이 제안했다. 사표(死票)를 줄이고 표의 등가성을 확보하자는 취지다. 늘어난 50석은 비례대표다. 한데 비례대표가 직능계를 대표한다는 애초 명분은 희미해졌다. 정쟁을 일삼아 볼썽사나운 이들을 늘리는 데 공감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불체포·면책 등 특권 내려놓기와 세비 감축 등 파격적 자구책이 전제돼야 한다. 국회의원 수가 적어 나라가 이 모양은 아니라는 중견 정치인 출신의 일갈이 더 현실감 있다.

이상권(서울본부장)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