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협주곡 20번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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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20번 라단조(K. 466)는 모차르트가 1785년 작곡한 그의 소위 첫 교향악적 피아노 협주곡이다. 출판순서로는 제20번이지만 작곡순서는 14번째 라 한다. 그의 27개 피아노 협주곡 중 단음계는 이 K.466번 라단조 (Piano 협 20번)와 K.491번 다단조 뿐이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매우 인기높다. 카덴차로는 베토벤의 WoO 58(제1악장 및 3악장. 1809년), 요하네스 브람스의 WoO 14(제1악장뿐. 1855~1856년).

 

○ 악장 구성:

제1악장 알레그로 (Allegro)


제2악장 로만체 (Romanze)


제3악장 알레그로 아사이 (Allegro assai)

 


○ 악장별 요약   


1악장은 어두운 라단조의 조성으로 조용하지만 끊임 없이 강해지는 현악 선율로 시작된다. 이 제시부를 곧 피아노 솔로가 따라잡으며 긴 악장 전체를 통해 발전한다. 전개부에서는 약간 밝은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기쁨에 찬 분위기는 아니다. 팀파니는 카덴차 전의 코다에서의 긴장을 더 증대시킨다. 악장은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2악장은 내림나장조의 우아하고 대담한 선율로 밝게 시작한다. 이에 대비되는 어두운 부분도 존재하지만, 먼저의 주제가 곡의 후반으로 가며 다시 나온다.

제3악장 론도 악장은 피아노 솔로로 시작된다. 어두운 분위기이면서도 이상하게 활동적인 부분에 이르면 두 번째의 선율이 소개된다. 피아노 독주의 활동적인 주제부가 마무리되기 전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라장조의 약간은 즐거운 선율이 나타난다. 밝은 선율과 더불어 솔로 피아노의 화음 가락이 이어지다가 다시 라단조의 피아노 독주부가 들리고, 다시 전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이어지며 위와 같은 형식을 따르다가 카덴차 부분에 이른다. 카덴차 뒤에는 분위기가 매우 기쁘고 밝아진 선율이 호른과 함께 나타난다. 피아노 솔로가 다시 주제부를 연주하며 협주곡은 기쁨에 찬 라장조로 마무리된다.

 

○ 악장별 요약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곡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의 결말 자막부를 장식하는 곡이기도 하다. 베토벤도 젊은 시절 이 곡을 매우 좋아했으며, 현재까지도 연주되는 카덴차 모음을 작곡하기도 했다. 독일의 다른 유명한 작곡가인 요하네스 브람스 역시 카덴차 모음을 작곡했다.

특이 사항으로 이 곡은 연주자나 지휘자에게 카덴차를 많이 주기로 유명한데, 특히 조성진의 연주와 우치다의 연주를 들어보면 차이가 확연히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Cadenza

협주곡에서 반주를 멈춘 동안 화려하고 기교적인 애드리브 혹은 그 풍을 살린 연주를 통해 독주자의 역량을 과시하는 대목. 흔히 독주자가 한 명인 협주곡이나 협주곡풍 작품에서 등장하며, 두 명 이상일 경우에는 작곡가가 직접 작곡해 넣는 경우가 보통이다.

크게 작곡자가 카덴차를 할 공간을 비워놓아 연주자의 재량에 의탁한 경우와 작곡가가 직접 카덴차를 작곡하는 경우 두 가지로 나뉜다. 원래는 연주자의 즉흥연주에 의지하였으나, 낭만파 시대에 들어서자 베토벤 등의 작곡가들이 직접 카덴차를 넣어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에는 이런 식이 대세가 되었다. 다만 브람스의 경우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의식해 1악장 카덴차를 연주자 재량에 맡기는 고전적 방식을 택했다.

또한 저명한 작곡가들이 직접 카덴차를 만들어 붙이는 경우도 있는데, 베토벤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좋아하여 여기에 직접 카덴차를 붙였다. 20번에 여러 작곡가들과 피아니스트들이 카덴차를 붙였고 그중에는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의 카덴차도 있으나 거의 대다수의 20번 연주시에 베토벤 카덴차를 쓴다. 

 

모차르트의 경우 즉흥 연주의 본좌였는데 스스로 작곡한 카덴차를 보면 이게 그 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단순한 경우도 좀 있다. 친구들이 '너 정말 그냥 즉흥연주 하는 대로 악보에 옮기면 안 됨?'이라고 했다고 하니 지금 남아있는 카덴차는 좀 단순화된 버전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독일의 현대음악 작곡가 슈톡하우젠의 경우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을 지휘해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제1번과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을 녹음했을 때 직접 작곡한 카덴차를 붙였다.

 

 

Seong-Jin Cho - Mozart Piano Concerto No. 20 in D minor, K.466 (2011)

https://youtu.be/FqgoechPAns

 

1.

21년차 발레리나 강미선 ‘무용계 오스카’ 품었다
한국 창작 작품 ‘미리내길’로 수상

'무용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계 무용계 최고의 상 '브누아 드 라 당스' 올해 최고 여자 무용수상을 받은 발레리나 강미선

 

 

<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2023.06.22. >

 


21년간 국내 발레단에서만 활동하며 최고 무용수로 발돋움했다. 마흔 살에 마침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가장 한국적인 작품으로 가장 밝게 빛난 별이 되었다.

강미선이 ‘브누아 드 라 당스’ 경연에서 선보인 창작 발레 ‘미리내길’ 공연 모습.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이 안무한 작품으로, 한국 고유의 ‘정한(情恨)’을 한국 무용 색채로 녹여냈다.  

 


“그냥 머릿속이 새하얘졌어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수상할 거란 기대는 정말 하나도 안 했거든요.”

‘무용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계 무용계 최고의 상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20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최고 여성 무용수상 수상자로 발표되던 그 순간에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났느냐고 물었더니, 발레리나 강미선(40)은 수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답했다. “남편도 공연 예쁘게 잘하고 오라고만 했어요. 최고의 무대에서 한국 발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제야 오래 꾸준히, 열심히 해왔다고 선물을 주시는 건가 싶기도 하네요.” 그의 남편은 2013년 결혼한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동료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2021년 태어난 아들 한 명을 둔 ‘워킹 맘’ 발레리나다.

‘브누아 드 라 당스’는 1991년 국제무용협회가 현대 발레에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의 예술가이자 비평가 알렉상드르 브누아(1870~1960)의 이름을 따 제정한 상이다. 강미선은 중국국립발레단의 추윤팅과 함께 올해 수상자로 공동 선정됐다.

무용수 부문의 경우 직전 해 처음 공연한 작품에 출연한 무용수들을 심사한 뒤, 현장 경연을 거쳐 선정한다. 올해 발레리나 경연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에투알’인 도로시 질베르, 볼쇼이 발레단 수석무용수 엘리자베타 코코레바, 마린스키 발레단 제1 솔리스트 메이 나가히사 등 세계 최고 발레단의 최고 무용수 6명이 경쟁했다. 강미선은 유니버설발레단 동료 이동탁과 함께 선보인 작품 ‘미리내길’에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인의 슬픔을 연기했다. 애절한 한(恨)의 정서로 가득한 무척 한국적인 창작 발레다.

강미선은 “외국 심사위원 분들이 우리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는데,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유지연 선생(유니버설발레단 지도위원)이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잘 설명해주신 것 같다”고 전했다. “공연이 끝난 뒤 볼쇼이 극장장님과 현지 관계자들이 ‘안무도 음악도 춤도 정말 아름다웠다’고 칭찬해주셨어요.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올해 심사위원장은 볼쇼이 발레단의 수퍼스타 발레리나 출신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였다.

강미선은 역대 다섯 번째 한국인 수상자다. 그동안 발레리나 강수진(1999년), 김주원(2006년)과 발레리노 김기민(2016년), 발레리나 박세은(2018년)이 이 상을 받았다.

선화예중·고를 나온 강미선은 미국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를 거쳐 2002년 연수 단원으로 입단한 유니버설발레단에서만 줄곧 활동했다. 군무 무용수로 시작해 솔리스트를 거쳐 2012년 수석 무용수로 승급했다. 작년엔 20년 근속상도 받았다. 발레리나로선 무척 드문 일이다.

강미선은 “제가 유니버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미리내길’을 할 수 있었고, 이 한국적 작품에서 춤췄기 때문에 브누아 드 라 당스의 후보가 될 수 있었다”며 “제게 주시는 상이라기보다 저희 발레단 모두에게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은 “강미선씨는 21년간 아마 유니버설에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테크닉뿐 아니라 역할 해석과 예술적, 디자인적, 연기적 측면 모두 감각적으로 소화하고 만들어내요. 어떤 역할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무용수입니다.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 빛나는 자리로, 또 후배를 이끌어 주는 선배로 성장하면서, 이제는 엄마이자 아내로 인생의 성숙함까지 춤에 묻어나게 됐죠.” 강미선은 이번 시상식 갈라 공연에서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춘향’을 선보인다.

그는 “기회가 닿는다면 한국 발레를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이 상을 받은 분들은 해외에서 활동 중이거나 클래식 발레 작품으로 인정받으셨죠. 한국 창작 발레로 수상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발레의 아름다움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을까. 그는 “사우나에 가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지쳤을 때 힘내는 데는 최고거든요. 러시아 사우나도 참 좋은데 여기선 계속 극장에만 있어서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귀국하면 제일 먼저 사우나부터 가려고요, 하하.”

 

 

 

2. 

마흔 살 발레리나 강미선

 

 

<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2023.06.22.  >

 

 


몸을 쓰는 직업에는 전성기가 있다. 스포츠와 공연예술이 그렇다. 극한의 체력에다 가혹한 다이어트까지 요구하는 발레는 그중에서도 제약을 심하게 받는 분야다. 발레 영화 ‘블랙 스완’에 출연했던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발레리나 몸매를 만들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에서 9㎏을 더 덜어냈다. 잠시 맛본 발레리나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영화 개봉 후 “일주일만 더 이렇게 살았으면 미쳐버렸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무용수가 “무대에 서고 싶어도 더는 안 된다”며 발레를 그만두는 나이가 대략 마흔 전후다.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인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이 정년을 42세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 로열발레단과 러시아의 마린스키, 볼쇼이 단원도 40~42세 사이에 무대를 떠난다. 세르비아 국립발레단이 정년을 50세로 연장하자 발레단원들이 힘들어 못 한다며 들고일어난 적도 있다.

▶유니버설 발레단(UBC) 소속 수석 무용수 강미선은 1983년 3월생으로 올해 마흔이다. 그가 발레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 다섯 번째 수상이지만, 마흔을 넘겨 이 상을 받은 이는 강미선이 처음이다. 앞서 수상한 강수진은 32세, 김주원은 28세, 박세은은 29세였고 김기민은 24세였다. 게다가 워킹맘이 수상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마흔의 벽을 넘겨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가 없지는 않다. 올해 환갑인 이탈리아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는 여전히 현역이다. 53세에 내한해 14세 줄리엣 역할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선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1995년 만 70세로 볼쇼이 극장 무대에 서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인 중엔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49세이던 201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서 고별 무대를 가졌다.

▶강미선이 어느 인터뷰에서 마흔 워킹맘으로 무대에 서는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나이 먹으니 골반이 굳고 허리도 전처럼 꺾이지 않았어요. 꺾이지 않으면 별수 없죠. 연습으로 꺾어야죠.” 발레 무용수에게는 ‘클래스’라는 명칭의 워밍업이 필수다. 고난도 동작이 포함돼 있어 임신한 무용수에겐 권하지 않는다. 강미선은 출산 2개월 전까지도 클래스에 참여했고 엄마가 되고 석 달 만에 몸 만들기에 나섰다. 그걸 본 문훈숙 UBC 단장이 여성 주역 무용수의 체력 소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악명 높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맡겼다. 마흔 살 발레리나 강미선이 땀의 소중한 가치를 곱씹게 한다.

김창완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 한겨레,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2023-05-28 >

어렸을 적 ‘산울림’의 음악은 예쁜 물감들로 만들어진 ‘동화의 성'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빨노초파 원색의 음표들로 둘러싸인 그 성안에 들어가면 예쁜 투명 색유리를 통과한 음악 빛깔이 보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때 받은 빛깔은 ‘개구쟁이’처럼 크라잉넛의 음악 어딘가에 묻어있으리라. 초중고 동창 녀석들인 크라잉넛은 산울림이 깔아놓은 주단을 밟고 미친 듯이 떼굴떼굴 구르며 28년 동안 달려왔다. 그렇게 산울림의 음악과 함께 성장해 온 크라잉넛이 실제로 김창완 형님과 술잔을 비워가며 밤을 채워가는 사이가 되었다니 아직도 신기할 뿐이다.


얼마 전 김창완 형님의 개인전 ‘붓으로 보다’ 전시에 다녀왔다. 김창완 형님은 라디오 디제이를 하면서 매일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쓰시고, 음악과 연기뿐 아니라 그림도 그리고, 자전거도 사계절 거의 매일 타시고 그 와중에 풍류도 빼놓지 않는다. 도대체 김창완의 시간은 어떻게 흐른단 말인가? 혹시 ‘시간 축지법' 같은 것을 사용하시는 게 아닐까?


비가 슴슴하게 내리던 평양냉면 같은 날씨였다. 갤러리도 오래된 양옥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편안한 고향집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마주치고 명절날 철딱서니 없이 떡국 얻어먹으러 온 막내처럼 많은 분께서 반겨주셨다.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화려하진 않지만 어렸을 적 예쁜 물감으로 만든 동화의 성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입구 쪽 벽에는 <푸른 눈물> 작품이 지쳤던 내 마음 대신 울어주고 있었다. 행복한 푸른 눈물이었다. 푸른 장미잎이 새벽 호수에 조용히 떨어지듯 평온해졌다. 건너편 벽에는 와인 코르크 뚜껑을 오브제로 만든 <내 술친구>라는 작품이 눈이 풀린 개구쟁이 표정을 지으며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한경록이 아니냐고 많이들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동안 김창완 형님은 꽃만 100여 점 그리셨다는데, 전시에 가지고 온 작품만 30점 정도라고 하셨다. <파란꽃>이란 작품에서는 떨어지고 있는 파란 꽃잎을 통해 그림 안에 시간을 담아내셨다고 한다. 그림 속에 시간을 담으니 꽃잎은 시간(詩間·시 사이)을 낙화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의 신비롭고 오묘한 의미에 관심 없는 철모르는 아이처럼 살고 싶은데, 시계 초침 소리가 복싱장에서 샌드백 텅텅 치듯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확실히 살아있다. 우리도 시간도. 불현듯 불안감이 불청객처럼 매너 없이 찾아올 때, 김창완 형님의 ‘시간'이라는 노래가 위안을 준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중략)/ 후회할 때 시간은 거꾸로 가는 거야/ 잊지 마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해도/ 그렇게 후회해도 사랑했던 순간이/ 영원한 보석이라는 것을”(‘시간’ 김창완)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니 우리 모두는 그 존재만으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그 누가 뭐라 비난해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화려하게 반짝이며 빛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아련한 상처는 시간이라는 파도가 부드럽게 감싸줄 것이다. 지나고 나면 산울림의 ‘청춘’처럼 처연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될지 모른다. 시간이란 두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형님께서 술이라도 한잔 사 주실 때면 술잔 위에 넘실거리는 하얀 막걸리를 화선지 삼아 시를 써주시기도 하고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도 한다. “다시 순수로 돌아가야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순수한 즐거움 때문이었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예술은 구차하면 안 된다”라고도 하셨다. 예술과 관객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감정은 전달된다. 덧칠하고 설명할수록 상상력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놀이는 오래가지만 장난은 금방 사라진다. 항상 진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형님은 비싼 캔버스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꼭 비싼 재료가 아니더라도 진심은 전해진다고 하셨다. 항상 소박하시다. 조용한 골목길에 위치한 집 같은 갤러리의 투명 테이프로 고정된 와이어에 걸린 조금은 삐뚤어진 그림들이었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인생 같고 생명력이 느껴졌다. 날씨가 흐려서 꽃들은 더욱 선명했고 웃음과 향기는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붓으로 보다’ 전시는 따뜻하고 소박하지만 그 향기는 묵직한 기억으로 남는다.


누군가 형님께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냐고 물어봐서, 아무 생각 없이 연기한다고, 자신이 연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상태로 연기한다고 답했다 하셨다. 슬픈 노래도 슬픔에서 빠져나와서 노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김창완 형님의 시간은 때로는 음악, 연기, 그림 그 자체로 몰입되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유로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

 

1.

“평화의 연대 연주했다”... ‘영혼의 국가’ 들려준 우크라 오케스트라
[제14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 조선일보,  이현택 기자 / 최은경 기자,  2023.05.17.  >

 


17일 개막한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서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자국 음악가 미로슬라브 스코릭(1938~2020)의 ‘멜로디’를 연주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세계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의 뜻으로 연주되는 곡이다.

이날 개회식 사회를 맡은 김지아 TV조선 앵커는 이 곡을 “국가 다음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많이 듣는 곡으로 ‘영혼의 국가(spirit anthem)’로도 인식된다”고 소개했다. 장내 청중은 뜨거운 박수로 오케스트라를 환영했다.

체르니우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02년에 창단해 올해로 121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을 찾은 단원은 요시프 소잔스키 지휘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이다. 남성 단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해 전선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잔스키 지휘자는 방한에 앞서 본지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체르니우치 오케스트라 어떤 남성 단원들은 러시아 침공이 시작되자 자발적으로 전선으로 떠났고, 남편이 전장에서 싸우는 여성 단원들도 있다”며 “러시아의 침략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강인한 정신을 오케스트라 연주에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https://youtu.be/I1uriKGQmLc

 

 

 

2. 

미로슬라프 미하일로비치 스코리크 ( Миро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Скорик )

 


미로슬라브 스코릭는 우크라이나인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그의 주 활동 시기가 20세기 후반인 만큼 당대 러시아-소련 근현대음악,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받되 우크라이나 민속음악의 특징들을 반영하는 것이 주 특징이다.

스코릭는 우크라이나 인민예술가 훈장과 우크라이나 영웅훈장을 비롯한 훈장들을 수차례 받았으며 현대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여겨진다.

또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의미로 스코릭의 작품들 - 특히 대표작 "멜로디" - 이 더욱 알려지고 공연되고 있다.

 


스코릭은 1938년 당대 폴란드의 일부였던 르부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두분 모두가 빈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아버지는 역사학자에 어머니는 화학자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두분 모두 직업으로 음악은 하지 않을지라도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그리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치시는 지라 어렸을 적부터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더군더나 친척 중에는 명망있는 소프라노 성악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미로슬라브는 1945년에 르비우 음악학교에 입학하지만 2년 후 가족이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며 1955년이 되어서야 르비우로 돌아온다.

1955년에서 1960년 사이에는 리비우 음악원에서 학사과정을 수학하고 1960년부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다.

1964년 모스크바 음학원 졸업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작곡가 연맹에 최연소 멤버로 가입하고 르비우 음악원의 최연소 작곡 교수로서 교편을 잡는다. 이후 1966년에는 키이우 음악원으로 옮겨가 1980년대까지 교수로 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96년에는 호주로 떠나 호주 시민권을 얻었다. 하지만 2000년대 경부터 우크라이나로 복귀, 키이우 오페라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음악계에서 꾸준한 활동을 보였다. 

제자의 마음속에 사는 스승

[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임재원 서울대 명예교수·대금 연주가,  2023-05-01  >

 

 

 

“나는 죽어도 주환의 마음속에 다시 살으리.”

―유기룡 ‘예농일여의 생애―젓대명인 한주환 선생을 도(悼)함’ 중에서

 



대금 연주가 박종기 명인(1879∼1941)이 임종 때 남긴 말이다. 자신은 죽더라도 제자의 마음속에 다시 살 것이라는 스승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평생 일군 음악을 제자에게 오롯이 전할 수 있어서 그는 아마도 행복했을 것이다. 타고난 예인의 자질에 성실함까지 갖춘 박종기 명인은 평생의 음악 연륜으로 대금산조를 창시하며 험난한 시절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산조를 제자 한주환 명인(1904∼1963)에게 전수했다.

 


예나 지금이나 연주가에게 산조는 특별한 음악이다. 몰입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좌절하게도 만든다. 녹록하지 않은 생활을 견디도록 연주가의 삶을 붙들어 두기도 한다. 이런 산조의 힘은 그 음악 속에 전해오는 선대 연주가의 희로애락이 내 삶에 겹쳐 실리기 때문이다. 느린 진양조에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구성은 사람의 일생과 닮아 있다. 게다가 각 악장에서 풀어내는 조(調)의 변화는 악절마다 새로운 사연을 엮어 간다. 

 

박종기 명인의 대금산조는 한주환 명인에 이르러 틀이 온전해졌고, 그 제자들의 개성이 보태지면서 스승과 제자의 금도(笒道)는 서로 다른 유파를 창출하며 풍성해졌다.

 


올봄, 나는 오랜만에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무대에 올렸다. 한주환의 연주는 힘 있고 강렬하다. 고졸한 선율 속에서 대나무 통이 쫙 갈라질 듯 에너지가 폭발하는 성음은 20대의 나를 매료시켰다. 말년의 한주환 명인보다 더 나이를 먹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명인의 성음을 좇는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제자 역시 자신의 마음을 더해 시간이 겹겹이 쌓이는 음악, 산조! 그래서 연주가는 죽어도 그 음악 속에 계속 살아 숨 쉰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춘광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라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던고


북 : 피륙을 짤 때에 씨의 실꾸리를 넣어 가지고 날의 틈으로 왔다갔다하게하여 씨를 풀어 주며 피륙을 짜는 제구.
구십춘광(九十春光) : 봄 석 달(90일) 동안의 따뜻한 볕. 봄의 풍광.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 푸르른 신록과 꽃다운 풀이 꽃보다 나은 시절. 꽃이 지고 녹음이 우거질 무렵.

안민영(安玟英) 1816~?. 자는 성무(聖武), 호는 주옹(周翁). 박효관 문하에서 노래를 배웠으며, 조선조 3대 가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가곡원류(歌曲源流)'를 박효관과 함께 엮었다. 저서로 '주옹만록(周翁漫錄)'이 전한다. 30수에 가까운 시조 작품을 남기고 있다.


<감 상>
녹음방초 승화시에 느끼는 감상을 사물에 비유하여 교묘하게 잘 읊었다. 실실이 푸르른 수양버들 사이를 노란 꾀꼬리가 오락가락하는 풍경 ---- 이것은 옛부터 한국 특유의 멋진 풍경 ---- 을, 날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피륙을 짜내는 북에 비유하였다. 그리해서 짜내는 피륙이 나의 시름 --- 봄에 느끼는 계절적인 감상 --- 이라는 것이다. 
 
늦봄에서 첫여름 사이의 싱그러운 푸르름에서 느끼는 한국적인 감회가 아련하다.

사람들은 흔히 경치를 말할 때에 봄의 꽃과 가을의 단품을 든다. 그것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거의 개념적 · 유형적(類型的)인 관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침잠(沈潛)의 세계를 볼 줄 아는 이에게는 그것들의 속됨을 떠나서, 오히려 꽃이 거의 다 진 뒤의 녹음과 방초의 계절을 더 값진 것으로 느낀다. 
 
우선 속인들이 법석을 떨지 안아서 좋다. 신록 사이를 누비는 꾀꼬리도 좋거니와 대지를 덮은 방초의 싱그러움이 더욱 좋지 않으냐! 특히 한국의 첫여름은 그야말로 황금의 계절이다. 생기발랄한, 생명력이 샘솟는, 삶의 보람을 가장 왕성하게 느끼는 계절이 바로 이 무렵이다. 
 
그래서 구십춘광이 짜낸 시름에서 '누가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더나?"고 짐짓 반발해 보게도 되는 것이다.
 
 
 
 
https://youtu.be/80rgWEozi2Q

https://youtu.be/TTQiZebOIDM

 

슬픔을 달래는 슬픈 노래들

 

 

< 조선일보,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2023.02.23  >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타히티섬은 높은 자살률로 종종 거론된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슬픔을 느끼는데 이를 표현할 단어가 없다 보니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감, 비애, 비참, 비탄, 애수 등 슬픔을 표현할 다양한 단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서는 달라도 우리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슬픔으로 가는 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언젠가 우리 모두 헤어질 운명이라는 걸 떠올리면 모든 인연은 슬픈 인연이다.

대부분의 대중가요가 사랑과 슬픔의 노래인지라 ‘슬픔의 노래’는 차고 넘친다. ‘사(死)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은 ‘정사(情死)’로 삶을 마감하면서 광복 이전 ‘슬픔의 가수’로 불렸다.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 선우일선도 윤심덕을 잇는 슬픔의 가수로 지목되었다. 이난영을 잇는 ‘엘레지(elegy)의 가수’로 이미자도 언급되는데, 그들의 창법과 음색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정서 때문일 것이다. 밝은 동요마저 슬프게 들리게 하는 백지영도 슬픈 노래에 일가견이 있는 가수다.

슬플 때 우리는 아예 슬픔에 침잠하거나 역으로 기쁜 일로 슬픔을 희석시키곤 한다.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으며 눈물 콧물 빼는 것이 ‘눈물로 눈물 닦기’라면, 오히려 기분 좋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은 ‘웃음으로 눈물 닦기’다. 슬픔을 소재로 한 노래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이현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신해철), ‘슬픈 바다’(조정현),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이상우), ‘슬픈 선물’(김장훈) 등 대중가요 속 슬픔은 대체로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이다.

슬픈 노래의 백미는 역시 나미의 ‘슬픈 인연’(1985년)이 아닐까 싶다. 피아노 반주에 박건호의 아름다운 가사가 나미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애절하게 어우러져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려지곤 한다. 밴드 ‘015B’의 장호일은 대학생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에 매료되어 운전을 멈추고 노래를 끝까지 듣고서 언젠가 그 노래를 다시 부르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1994년에 객원 보컬 김돈규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다짐은 현실이 되었다.

 

https://youtu.be/4h4ZLDvpwOQ


슬픔의 시대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으로 현재까지 4만7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오늘 뉴스는 없습니다”로 시작하는 박세현의 ‘행복’이란 시처럼, 사건 사고 뉴스가 없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이미 닥친 슬픔은 공감과 애도와 연대를 통해 조금이나마 사그라질 수 있으니, 지금 이 순간 슬픈 모든 이에게 위로의 마음을 건넨다.

조용필과 신중현도 ‘뽕짝’이라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트로트인가
트로트는 과연 특정 장르의 4박자 노래일까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23.01.27 >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2019년 이후 난데없는 트로트 열풍이 생겨난 것일까?

‘TV가 뽕짝판이 된 것이냐’ ‘이젠 지겹다’고 지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미스터트롯2′가 시청률 20%를 훌쩍 넘고 있는데다 송혜교 주연 ‘더 글로리’를 누르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에 오른 걸 보면 전 세대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만 좋아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결과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과거로 퇴행하는 사회적 현상은 아닐까?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2′와 ‘미스터트롯2′에서 놀랍게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1979)와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1987)이, 아 세상에, ‘트로트곡’으로 소개되는 걸 보고 솔직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창밖의여자가 트로트였어? 리듬속의그춤을이 트로트였다고?(그러고 보니 신중현 작사 작곡의 이 노래에 어딘가 뽕짝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그 시절 그 노래를 실시간으로 들었을 당시엔 트로트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노래들입니다.
https://youtu.be/4ExsxJg5uGY

https://youtu.be/R1DUUK8ccaM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성치 영화 ‘쿵푸 허슬’(2004)을 보다가 한 장면에서 놀랐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쿵푸 고수들이 모여 살던 아파트촌에 돌연 무더운 날 오후 3시쯤에 어울리는 중국 노래가 느긋하게 흘러나옵니다. 분명 중국어 가사인데 그 멜로디를 듣는 순간 한국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국어 가사를 발화(發話)하며 그 노래를 따라부르게 됩니다.

“사랑해~ 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 는~ 죄~ 이라서~”

아, 그것은 저희 할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현인의 ‘꿈속의 사랑’(1956)이었습니다. 전후(戰後) 서민들의 곤고한 생활을 위로해 줬을 그 꿈꾸는 듯한 곡조가, 그런데 거기서 왜 나와! 오래 전 영화 ‘영웅본색’(1986) 중 주윤발이 술집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용담을 늘어놓는 장면에서 갑자기 구창모의 ‘희나리’(1985)를 중국어로 부른 노래가 깔려 한국 관객을 의아하게 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꿈속의 사랑’도 중국으로 건너가 번안곡이 됐나?

알고보니 실제는 그 반대였습니다. 1940년대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노래 ‘몽중인(夢中人)’(1942)을 작곡가 손석우가 가져와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가 ‘꿈속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비슷한 번안곡의 사례는 또 있습니다. 조영남의 ‘최진사댁 셋째딸’(1969)은 미국 가수 알 윌슨의 소울 충만한 노래 ‘스네이크’를 번안한 노래였습니다. 원곡을 들어보고 충격을 받은 분들도 꽤 있습니다.

https://youtu.be/bgnviO7y_Bk

https://youtu.be/ULx9k2QkL94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꿈속의 사랑’을 당연히 트로트곡으로 여기고, ‘최진사댁 셋째딸’은 트로트 중에서도 토속적인 맛이 강한 노래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트로트라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장르가 아니었나? 그런데 중국 노래와 미국 노래를 가져와 번안한 노래도 트로트라면, 과연 트로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불러 많은 시청자를 감동시켰던 3년 전, 저는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이자 원곡자인 김목경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원래 곡의 제목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였습니다. 막 환갑을 지난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노래 주인공이 60대라는 건 말도 안된다. 80대라면 모를까…”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제 한국 블루스 음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는 김목경씨는 “새삼 저한테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좀 당혹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그건 트로트가 아니라 포크인데!”

하지만 그게 뭐 크게 문제가 된다는 얘기 같진 않았습니다. 이내 활짝 웃으며 “근데 임영웅이란 그 친구, 참 깨끗한 톤으로 매력 있게 소화하더라고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https://youtu.be/cKp4W5Iu95Q

 

그러니까 조용필이든 신중현이든 김완선이든 중국곡이든 미국곡이든 블루스든 포크든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모두 다…

‘트로트’가 된 것입니다.

이제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한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서, 20세기 초 서양에서 유행한 사교댄스의 연주 리듬인 폭스-트로트에 바탕을 두고,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에 강약의 박자를 넣고 독특한 꺾기 창법을 구사하는 독자적인 가요 형식으로 완성된 것’이라는 트로트의 사전적 정의는 수정돼야 할 것 같습니다(심지어 최근 나온 송가인의 ‘월하가약’은 3박자입니다). 어떻게 고쳐져야 할까요.

그것은 거칠게 말해 ‘흘러간 노래는 다 트로트’라는 것입니다.

......?

아니, 사실 이 정의도 충분치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사가 반야월(1917~2012·가수 진방남)이 남긴 이 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트로트는 흘러간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흘러온 노래다.”

이 말이 지금에 와서 보석처럼 빛나는 이유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어언 한 세기에 걸쳐 각각 당대에 유행해 사람들의 마음에 화인(火印)처럼 박힌 노래들을, 시대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애환(哀歡)을 함께 했던 노래들을, 그래서 이미 우리의 역사 속에 녹아들었으며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노래들을, 어느새 우리는 ‘트로트’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가요의 그런 역사성을 통 몰랐을 때는, 가요는 단지 두 가지만 존재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는 대학가요제나 조용필이나 전영록 음반에 담긴 ‘요즘 노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요수첩’ LP 시리즈에 계통도 순서도 없이 담긴 ‘옛날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시대마다 세대마다 시기마다 시절마다, 저마다 이유와 사연과 곡절과 정서를 갖추고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오래도록 남은 노래들이 존재했습니다. 1920년대의 ‘희망가’(1921)가 식민지 청년의 암울하고 허무한 인생관을 노래했다면, 1930년대의 ‘목포의 눈물’(1936)은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를 삽입해 서러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항일 정신을 심었습니다. 1940년대의 ‘가거라 삼팔선’(1948)은 분단의 아픔을 노래했고, 1950년대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는 전쟁의 상처를 끝내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1960년대의 ‘마포종점’(1968)은 전차의 철거를 앞두고 순탄치 않게 펼쳐질 새로운 도시 생활을 예고하는 노래였으며, 1970년대의 ‘님과 함께’(1972)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는 경제 성장의 시대에서 개인의 행복을 찾는 정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의 ‘아파트’(1982)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에서 영위하는 삶이 개막했음을 시사하는 노래였습니다.

트로트의 부흥은, 특정 가요 장르에 대한 회귀나 퇴행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정서를 대표하고 오래도록 살아남은 가요들이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 트로트의 새로운 정의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역사성을 갖췄으며 그 보편성이 지금까지도 대중의 마음 속에 살아남은 대표적인 한국 가요. 한마디로 역사가 된 노래.’

그렇다면 이제 반야월이 ‘흘러온 노래’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세기말 X세대의 불안과 회귀를 읊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 백 홈’(1995)나 21세기 젊은 여성의 자의식을 노래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 같은 노래도 트로트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트로트가 무엇인지 짧게 규정하는 최근의 몇 가지 말들은 이런 정의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트로트는 우리의 마음이고 눈물이다.”(영화 ‘복면달호’)

“트로트 가수는요, 어떠한 인생을 살아도 버려지는 인생이 없어요. 그게 다 노래 속에 스며들기 때문입니다.”(김용임)

“힘들어? 힘들면 힘들다 해. 아프냐? 아프면 아프다 해라. 트로트는 제게 이렇게 말해주는 음악입니다.”(영지)

저는 언젠가 수첩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헤어질 때 눈물을 삼키고 돌아서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면 발라드다. 

왜 헤어져야 하느냐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 록이다. 

헤어지면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 말한다면 랩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넋이 나간 듯 팔다리를 흔드는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뮤지컬이다. 

그리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다리를 붙잡고 가슴을 치면서 하소연하고 통곡했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가슴 한 귀퉁이에 그때의 그 슬픔이 여전히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것은 트로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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